브런치북 진술인 09화

당신의 갤러리(1/6)

by 유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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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나는 두 달 일정으로 모스크바 트레차코프 미술관에 머물렀다. 오전에는 도슨트의 안내에 따라 소장품을 감상했고 오후에는 레퍼런스 룸에서 현지 큐레이터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주제는 ‘큐레이터의 일’이었다. 후원자와 투자자, 관람객별 커뮤니케이션 전략과 공간에 따른 디스플레이 방식을 배웠고 기획자에서 미래학자의 역할까지 수행해야 하는 큐레이터의 자질을 두고 토론했다. 미술관에 가지 않는 날에는 혼자 시내를 걸어 다니다가 미술관 앞 카페로 돌아와 어학원에서 받은 러시아어 교재를 들추거나 구직 사이트를 들여다봤다. 모스크바와 서울의 경계가 흐릿해질 때 저만치 선 동상의 형체가 흐트러지는 걸 느끼며 선배와 나눴던 대화 속에서 이상한 대목을 되짚곤 했다. 선배가 많은 걸 속였다는 생각이 들 때면 어딘가 가려웠고 무언가 떼어내 버리고 싶었다.

「사라지는 공간들」전에 참여했던 설치미술 작가의 메일은 레닌의 묘에 입장하기 위한 행렬 끝에서 확인했다. 그는 내 안부를 물었고 올봄 열리는 개인 전시회 소식을 전했다. 선배의 행방을 찾았느냐고도 물었다. 나는 답할 말을 고르며 검문소를 통과해 레닌에게 갔다. 일 미터 간격으로 붙어선 근위대원이 관람객의 발걸음 소리를 잠재우려는 듯 입술에 검지를 붙이고 쉿, 하고 짧게 소리 냈다. 레닌은 누워 있었다. 왼쪽 손은 펴져 있었고 오른쪽 손은 손가락을 말아 쥔 채였다. 다른 행성으로 가기 위해 동면에 빠진 사람 같았다. 또 다른 근위대원이 계속 걸으라고 손짓했다. 묘소를 빠져나온 뒤 부활의 문을 지나 카잔 성당에 들어갔고 성물을 파는 가판 옆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메일을 썼다. 연수 과정은 일주일 남았으며 선배의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으나 그 그림은 보았다고 했다. 신관의 전시보다 일리야 레핀의 모든 그림과 이반 크람스코이의 「미지의 여인」, 알렉산드로 이바노프의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등 본관에 전시된 그림들이 압도적으로 좋았다고 적은 답장을 보낸 다음 성당을 나와 미술관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


선배와 나는 H미술관에서 일했다. 함께 일한 열 달간 대화를 나눌 기회는 많지 않았다. 간혹 준비 중인 전시 프로그램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선배나 나나 촉탁 계약직이었지만 계약 기간이니 정규직 전환이니 하는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선배는 전시 말고 다른 일엔 관심이 없는 사람 같다고 생각하다가 어떤 장면을 목격한 뒤로는 꼭 그렇지도 않다는 걸 알았다. 늦은 밤, 문 닫은 전시실에서 춤을 추는 선배를 우연히 보았던 것이다. 선배는 전시장 중앙에서 맨발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스마트폰을 쥔 손은 어깨 언저리에, 다른 한 손은 살짝 앞으로 뻗어 나왔고 귀에는 이어폰이 꽂혀 있었다. 이따금 균형을 잃었지만 넘어지진 않았다. 넘어질 만큼 큰 동작도 아니었다. 잘 추려고 노력하는 것 같진 않았다. 못 본 척 지나치려했는데 선배가 나를 발견했다. 사 미터쯤 떨어진 거리였고 게다가 조명등이 켜진 통로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으니 못 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선배는 이어폰을 빼고 내 쪽을 바라보며 오른손을 살짝 흔들었다. 들켰네, 가 아니라 이게 보여? 하고 묻는 것 같은 표정으로 내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퇴근 안 하셨어요?”

“잠깐 있었어요. 은영 씨는 왜 아직.”

“기획서 마무리할 게 있어서요.” 가까이에서 보니 선배의 볼이 발그레했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좀 무섭기도 했다. “춤 배우세요?”

“그냥 혼자 추는 거예요.”

“무슨 춤이에요?”

“왈츠.”

나는 선배의 손목 아래로 늘어져 있던 이어폰 한쪽을 귀에 꽂았다.

“쇼팽이네요? 아니 슈트라우스인가?”

“쇼팽일걸요. 예전에 ‘댄싱 뮤지엄’이란 전시를 본 적 있어요.”

“어디에서요?” 이어폰을 전하며 내가 물었다.

“테이트모던이요. 전시실마다 무용수가 있었어요. 관람객은 무용수의 동작과 함께 작품을 관람하기도 하고, 같이 춤을 추기도 하고.”

“그거 디벨롭 하시려고요?”

“아니요. 그냥 혼자 하는 거예요. 그때는 춤출 기회가 없었거든요.” 선배는 스마트폰 액정을 눌러 음악을 멈췄다. “근데, 소리가 들렸어요?”

“아니요. 그냥 누가 부르는 거 같아서.”

“밤이니까. 그림 속 인물들도 할 말이 있겠죠.”

“뭐라고 하는지 엿듣고 싶네요.”

선배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건 어떤 부호 같았다.

“그럼, 먼저 가볼게요.”

돌아보지 말자고 다짐하며 전시실을 빠져나왔다. 이후로는 전시실에서 선배와 마주친 적 없었다. 내가 선배를 보지 못했다기보다 선배가 나를 피했을지도 모르겠다. 춤추는 선배를 보고 싶은 마음 한편에는 마주치면 어쩌지, 하는 심정이 나란히 자리했다. 더는 선배와 마주치지 않으리라는 걸 예감한 뒤 내게도 비밀이 생겼다. 혼자 야근하는 날이면 퇴근길에 전시실을 들러 잠시 머물렀던 것이다. 어둠이 짙게 깔린 전시실과 그림 앞에 감도는 빛을 따라 조용히 걸음을 옮기다 보면 묘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같은 작품도 어둠 속에서는 다른 색을 내고 낯선 빛을 뿜는 것 같았다. 의자를 갖다 두고 전시실 가운데 혹은 가장자리에 앉아서 작품을 보거나 다른 생각에 골몰했다. 그럴 때면 선배의 은밀한 취미를 망쳐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모종의 자책도 감쪽같이 사라졌고 그림과 나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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