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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억하는 대화는 거기까지였고 이후로 선배와 어떤 말을 나눴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빛과 어둠>전의 오프닝이 있던 날 선배가 사라졌다.
첫날은 수석 큐레이터가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고 다음 날과 그다음 날에는 내가 전화를 걸었다. 메시지도 여러 개 남겼지만 응답은 없었다. 관에서는 선배의 행방을 찾거나 결근 사유를 추궁하는 일보다 시급한 과제가 있었다. 책임 큐레이터의 공석을 지우는 일이었다. 팀장은 선배의 무단결근 사실을 인사팀에 알렸고 내게 선배가 맡았던 업무, 그러니까 책임 큐레이터 자리를 인계했다. 챙길 것은 많지 않았다. 선배가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끝내둔 상태였기 때문이다. 나는 선배를 찾는 대신 선배의 자리를 채웠다.
선배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빛과 어둠>전은 꽤 성공적이었다. 동료들 사이에서 선배의 이름이 흘러나올 때면 수석 큐레이터는 중압감을 언급했고 옆자리 선배는 최소한의 예의를 강조했다. 나는 이번 주가 지나면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거나 집까지 찾아가야겠다고 다짐했지만, 그저 생각뿐이었다. 많은 이들에게 선배는 기획 전시 때 두어 달간 걸려 있다가 본국으로 돌아간 이름 모를 그림 한 점으로 남은 듯싶었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전시와 관련된 모든 일정이 끝났을 때 선배는 완전히 뜯겨 나갔다. 책상 위 비품은 이미 수거한 지 오래였고 인사팀은 일찌감치 채용공고를 게시했다. 며칠 남지 않았었다고 인사 담당자가 선배 자리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내게 말했을 때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즈음 나의 퇴사도 결정되었던 걸까.
전시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다. 당연히 연장되리라 믿었던 일 년의 계약 기간이 불쑥 종료되었던 것이다. 계약을 연장하면 이번에야말로 학자금 대출을 갚고, 혹시나 운이 좋아 정규직 전환이 되면 미술관 근처에 3,000에 30 정도 하는 원룸을 알아봐야겠다는 계획은 인사 담당자의 메일 한 통에 의해 단숨에 사그라졌다. 맹렬히 구직 활동을 시작했으나 마지막 출근 일까지 새 근무처는 결정되지 않았다. 사무실 동료들은 금방 좋은 곳을 찾을 거라고 했다. 그러고는 저마다 약속된 자리로 흩어졌고 제시간에 퇴근했다. 화가 났고 서운했지만 애매한 감정을 붙들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내게는 새로운 직장과 관계가 필요했다. 퇴직 후 석 달이 지났을 무렵, 진땀 흘리며 면접을 치른 곳에 합격했다. 지역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공공미술센터였는데 내가 맡은 일은 큐레이팅을 포함한 예술 행정 업무였다. 이번엔 2년 계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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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가 말했던 그 작품, 「갤러리를 찾아서」를 다시 만난 건 재단에서 「사라지는 공간들」전을 준비할 때였다.
개개인의 역사를 사진과 글로 아카이빙하고 물리적으로 구조화하여 일반 시민들이 시각과 청각을 이용해 직접 체험하게 하자는 여섯 페이지짜리 전시 기획서를 들여다본 상임 이사와 임원들은 저마다 의견을 보탰다. 그 의견이 제각각인 데다가 상충하는 요소가 많아서 결국 주제와 몇 가지 아이템만 남기고 새로 시작하는 데 합의했다. 팀원의 추천을 받아 각기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는 네 명의 작가를 섭외해 간담회를 열었다.
“이렇게 하죠. 정치, 사회 이슈나 미술 이론에서 시작하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냥 각자의 이야기에서 출발하면 어떨까요. 최근에 흥미롭게 보고 느낀 것부터요. 관람객이 공감하려면 친근한 요소를 마련하는 게 중요할 거 같아요.”
“시민이 손쉽게 참여해야 한다는 거죠?” 회화 작가가 되물었다.
“네. 그게 첫 번째.”
“이건 어때요?” 미디어아트 작가가 양손 검지로 작은따옴표 두 개를 만들며 말했다. “유명 회화 작품을 100호 정도 되는 사이즈로 인쇄해서 그 안에 인물 실루엣만 남기고……”
“관람객이 그 안으로 들어간다?”
“어? 어떻게 알았어요?”
“그거 어지간한 놀이공원에는 다 있는 거잖아요. 입간판처럼 세워두고, 구멍 뚫어서요.” 회화 작가가 고개를 위로 내밀며 말했다.
“다르죠. 고흐나 레핀 그림으로 하는 거예요. 효과도 막 극대화하고.”
“그건 착시 미술관이고요.” 설치미술 작가가 회화 작가를 바라봤다.
“차이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요? 빔프로젝터 사용해서요.” 내가 아이디어를 살려보고자 했으나 미디어아트 작가는 이미 풀이 꺾인 눈치였다. “증강현실과 접목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고.”
“사실, 이게 제 아이디어는 아니고 며칠 전에 소설을 하나 읽었거든요.”
“어떤 소설인데요?”
“작가는 모르겠고, 제목은 「갤러리를 찾아서」예요.”
“르네 마그리트?”
일러스트레이터가 불쑥 껴들었다.
“아니요. 소설이요, 소설.”
“마그리트 작품명이잖아요. 어떤 내용인데요?”
“큐레이터가 사라지는 내용이에요. 도슨트였나. 하여튼, 직접 읽어보세요. 금방 읽어요. 짧거든요.”
그가 스마트폰으로 웹 주소를 찾는 틈을 비집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등장했다.
“구도심에 있는 걸 채집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한 적이 있어요. 개인적으로요.” 설치미술 작가가 자신의 맥북에서 ‘옥수동’ 사진 폴더를 누르며 말했다. “제가 여기에서 오래 살았거든요. 대학 때 등하교하면서 거리며 건물을 계절별로 찍었는데 없어진 건물도 많고 거리의 색깔도 좀 달라졌더라고요. 낡은 건물을 허물고 주상복합건물이나 오피스텔을 짓는 일은 흔하니까요. 업종을 변경한 상가는 말할 것도 없고요. 사진에는 남아 있지만 실제론 없어진 것들.”
“다른 그림 찾기 하면 재밌겠는데요?”
“아니면, 월리를 찾아라?”
“월리가 아니라 윌리 아니에요? 그런데, 요즘도 그거 나오나?”
작가의 이야기는 다른 작가의 호응을 끌어냈다. 서기를 자처했던 나는 작가들의 아이디어를 옮겨 적기 바빴다. 늦은 시각까지 대화가 이어지면서 문서의 길이가 버거울 만큼 방대해졌고, 그 바람에 다음날 정오가 되어서야 회의록을 완성했다. 공유를 위해 단체 대화방에 들어갔을 때 전날 미디어아트 작가가 올려놓은 웹 주소를 확인했다. 링크를 따라가자 익숙한 가수의 사진과 낯선 노래 제목이 나타났다. 일종의 문화 웹진 같은 사이트였다. 몇 차례 화면을 넘기고 스크롤을 움직인 끝에 ‘한남동 이야기’ 카테고리에서 그 글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