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진술인 07화

갤러리를 찾아서(1/2)

by 유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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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내가 복무하는 이 세계가 한 점 그림이라면 어떨까, 생각할 때가 있다. 주로 갤러리를 걸으면서 콧노래 대신 흥얼거리는 상상이다. 북런던 햄스테드 히스 인근의 한 갤러리에서 근무할 당시 수석 큐레이터(내가 존경하는 유일한 업계 선배였다)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100호에 달하는 르네 마그리트의 <갤러리를 찾아서searching for gallery>를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화랑이 담긴 유화 작품을 전시할 때 특별히 조심해야 할 게 있네. 자정이 되면 그림 속 인물이 화폭에서 빠져나와 다른 그림을 살펴보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 그중에는 다소곳한 관람객도 있지만 고집 센 비평가도 섞여 있지. 오래전 일이야. 자정이 막 지날 무렵, 기획전시실에 불이 켜져 있다는 관장의 전화를 받았어. 커튼 뒤로 검은 실루엣이 보인다는 말도 덧붙이더군. 관장은 갤러리의 창문을 여닫는 일조차 직접 하는 법이 없었으니 전화 자체는 새로울 게 없었지. 그런데, 그날은 예감이 좋지 않았어. 왜 그런 날 있지 않나. 종일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하지 않았나. 문은 잠그고 나왔던가. 내 손으로 스위치를 올린 뒤에 내리지 않은 전등불 하나가 어딘가에 켜져 있지 않나……. 아마도 그날 관장의 목소리에 유별난 구석이 있었던 모양이야.


사무동에서 이곳 전시실까지 헐레벌떡 뛰어갔어. 몇 달간 준비했던 <빛과 어둠light and dark> 런던전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을 무렵이니 내 심정이 어땠겠나. 비슷한 시기 근처 갤러리에서 렘브란트의 초기 초상화 두 점을 도둑맞았다는 소식도 들었으니 노심초사했지. 보험금을 노린 관장 노인네의 자작극이란 이야기와 함께 말이야. 어쨌든 기획전시실에는 정말 사람이 있었어. 검정 턱시도를 빼입고 중산모를 쓴 남자가 팔짱을 끼고 느릿느릿 그림을 살펴보고 있더군. 내 쪽에선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어. 내가 저만치서 소리치며 다가가자 남자는 내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반대편으로 줄행랑쳤지. 처음엔 착각인가 했어. 전시실 끝에 다다를수록 남자의 모습이 희미해지더군. 그러다가 막다른 코너에서 멈춰 섰네. 그 앞에 이 그림이 있었지. 남자는 이 앞까지 와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거야.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관장이 묻더군. 도둑맞거나 상한 그림이 없느냐고 말이야. 그렇다고 하니까 관장이 슬며시 웃더군. 이 그림에 얽힌 사연을 모르느냐면서 말이지. <갤러리를 찾아서> 속 중산모를 쓴 남자는 세계 곳곳의 갤러리라면 안 다녀본 곳이 없는 만큼 그림에도 조예가 깊다는 거야. 형편없는 그림에는 기필코 얄궂은 장난을 부리는데 그 섬세한 손길을 피해갔으니 이번 전시는 성공할 모양이라고.”


그런 그림 속 인물이라면 제법 아름답지 않으냐고 내가 묻자, 선배는 얼굴을 붉히며 이 이야기의 교훈은 그딴 게 아니라고 중얼거렸다. “내가 본 게 정말 저 그림 속 남자였을까? 그 일이 있고 난 뒤 관장은 관리 소홀의 책임을 물어 날 해고했지. 유감이지만, 한동안 내 삶은 전혀 아름답지 않았네.” 그는 몇 년간 지방법원을 들락거린 뒤에야 큐레이터로 복직할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 기이한 밤의 추격전이 그에게는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은 듯싶었다.


불현듯 10년도 더 지난 이야기가 떠오른 건 <빛과 어둠> 서울전을 앞두고 철야 근무가 계속되던 날 밤이었다. 한남동 이태원로에 있는 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긴 지 4년을 꽉 채워갈 무렵이었다. 큐레이터로서 썩 괜찮은 커리어를 쌓고 있었으나 기업체 산하 갤러리에서 정규직 타이틀을 따기 위해서는 모기업 직원들만큼이나 통과해야 할 관문이 많았다. 정규직 전환의 기회를 주는 것도 4년 차가 막바지라는 말을 종종 들어왔던 터라 나는 격무를 자처했다. 당시 내가 넘어야 할 관문 중 하나가 <빛과 어둠> 전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것이었다. 난관은 외부에도 존재했다. 모기업의 비자금 사건과 연루되어 고가의 미술품 구입을 문제 삼으면서, 갤러리 외관이 뉴스에 연일 보도되었다. 더군다나 미술관의 다른 소장품까지 언급되었고 이 때문에 어수선한 분위기가 지속되었다. 전시 외 일로 언론 매체에 우리 관이 언급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공지에 더하여 ‘현대미술의 의의는 현재가 아니라 후대에 있으니 연연하지 말고 각자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라’는 관장의 메시지가 조사를 바꿔가며 주기적으로 게시되던 시기였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자정까지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동료들은 막차 시간을 핑계로 순번이라도 정해놓은 듯 하나둘 퇴근했고 나는 혼자 남아 서류 작업에 여념 없었다. 새벽 1시에 이뤄지는 전시장 순찰까지 자처한 터였다. 10분 전 서류 작업이 끝나, 퇴근 준비를 마친 뒤 손전등을 챙겨 들고 1층 전시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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