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제가 말을 마치자 묵묵히 듣고 있던 바텐더는 그 나이 아이들은 못 말리는 법이라며, 제게 아이가 있느냐고 묻더군요. 알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게는 올해 열여섯이 된 딸이 있습니다. 형석의 시간이 멈춰버렸던 그 나이와 같죠. 딸을 보면서, 딸의 의뭉스러운 행동과 신경질적인 말투를 들으면서 저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곤 했습니다. 방문을 잠그고 아예 나오지를 않는다니까. 어떤 날은 학교 갈 때 문을 잠그고 나가. 종종 아내는 그런 아이의 행동을 걱정했습니다. 딸이 물리적으로 성장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죠.
아내는 고등학교에서 물리를 가르칩니다. 제가 스포츠 영상을 보며 중계 연습을 하고 있을 때면(특히, 복싱과 종합 격투기) 물리 법칙을 설명하곤 하죠. 주로 상대성 이론을 언급하면서 물리학을 공부하면 중계가 더 풍성해질 거라고 했습니다. 과학은 지식이 아니라 태도라면서 말이죠. 그놈의 태도. 지긋지긋한 이야기죠. 세상이 무슨 윤리 수업입니까. 전쟁터에서 도덕 챙길 일 있냐고요. 정작 제가 아내에게 배운 건 세상에 공짜란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질량 보존의 법칙은 그라운드 위에서도 존재했으니까요.
“변화를 원한다면 대가를 치러야 하고,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법이죠. 칵테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화학의 세계는 더 정직하죠.” 바텐더가 새로운 칵테일 잔 위에 라이터로 불을 붙이자 불꽃이 타올랐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제 나쁜 버릇을 되돌리고 싶습니다.” 저는 바텐더를 향해 말했습니다. 대기심에게 다가가 선수 교체를 요청하는 심정이었죠.
“친구분 말이죠?” 바텐더가 한 손으로 푸른 불꽃을 잠재우며 말했습니다.
“네.”
“이미 잔을 비우셨군요.”
“네?”
“그럼, 됐습니다. 모두 말씀하셨으니까요.”
“그런가요?”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 다시 잔을 비웠습니다. 갈증이 나더군요. “한 잔 더 마시죠.”
“괜찮으시겠습니까?”
“한 명 더 있습니다.”
그때 김선우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바텐더는 또요? 하는 표정이었지만, 어쩐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
자정이 훌쩍 지난 시각에 귀가한 저는 이른 아침 거실에서 깨어났습니다. 바텐더와 나누었던 밀담은 모두 기억이 나더군요. 마지막에 화장실을 갔던 순간부터 택시 기사가 집 앞에서 저를 깨울 때까지를 제외하면 말입니다. 물을 한 잔 마시고 딸과 아내가 일어나길 기다리며 거실 소파에 앉아 카드 내역을 확인했습니다. 고해성사하고 받은 보속이라고 하기엔 너무 비싸더군요. 320만 원, 칵테일 두 잔 값이었습니다. 악마에게 고해성사를 해도 이것보단 싸지 않을까. 이 자식도 이웅현과 비슷한 사기꾼이라고 생각했죠. 그날은 끔찍한 숙취 때문에 병가를 내고 하루를 더 쉬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사무실의 공기가 달라졌음을 느꼈습니다. 정시에 출근한 동료가 김선우가 어제 오후 늦게 휴직계를 냈다고 하더군요. 그때까지만 해도 표정 관리가 됐습니다. 심각한 건 아니지? 하고 묻자 동료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암일지도 모른다나, 라고요. 그 순간 저는 거의 울 뻔했습니다. 남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겠죠. 그렇게 웃음을 참기 위해 노력한 적은 태어나서 처음이었을 겁니다. 고통스럽더군요.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이 날아든 것도 그날 오후였습니다. 퇴근 직후 곧장 장례식장으로 갔습니다. 형석이 죽기 직전에 손끝으로 무언가를 적었다는 이야기를 그의 어머니에게서 들었죠. 형석이 쓴 글자는 제 이름, 세 글자였습니다.
“다 알고 있었던 거야. 네가 잊지 않고 병원에 온다는 걸.”
“더는 말이 없던가요?”
“그래. 사랑한다는 말도 없이, 그렇게 가더라.”
형석의 어머니는 조용히 눈물을 훔쳤습니다.
이제 제가 할 일은 하나였습니다. 모든 걸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이었죠. 목 상태는 그 어느 때보다 좋았고 방광염은 씻은 듯이 나은 뒤였습니다. 저는 다시 중계석에 앉았고 한 달여 만에 정상을 회복했습니다. 걸림돌이 사라지고 자신감으로 충만하다 보니 중계도 술술 풀리더군요. 그 무렵 딸이 학교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왼쪽 발목이 뒤틀리는 사고를 당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완벽했습니다. 억울해. 왜 나야. 목발을 짚은 채 제 차에 올라탄 아이는 한숨을 뱉으며 말했습니다. 그만하길 다행이라고 위로했지만, 실은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할 시기이니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로부터 삼 주가 지났을 무렵 아나운서실로 등기우편이 왔습니다. 라커룸에서 보내온 우편물이었죠. 갱지 한 장에 서비스가 완료되었다는 짤막한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명함이 들어있었습니다. 이웅현에게 받은 것과 동일한 명함이었죠. 뒷면에 적힌 세 가지 낱말만이 달랐습니다. 같은 날 오후, 아내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놀라지 않은 건 그 우편물 덕분이었습니다. 등가교환의 법칙,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 머릿속에는 몇 가지 물리법칙이 떠올랐지만 우리 같은 프로가 이론에 연연해서는 안 되죠. 성공은 준비된 자의 몫,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