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진술인 04화

라커룸(4/6)

by 유재영

4


“괜찮으신가요, 손님? 얼굴에 상처가 보여서요.”

“별거 아닙니다. 정면으로 날아오는 공을 못 봤네요.”

“작정하고 던진 위협구라면 피하기 힘들죠.” 바텐더는 얼음주머니와 함께 메뉴판을 건네주더군요. “이걸 사용하시죠.”

“진짜 라커룸이군요.”

“후반전이 시작하기 전까지, 얼마든지 계셔도 좋습니다. 주문만 하시면요.”

한 손으로 얼음주머니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메뉴판을 살폈습니다. 메뉴에는 오로지 칵테일뿐이었습니다. 압생트 줄렙, 엘더플라워 벨리니, 로즈 테킬라 슬리퍼처럼 익숙한 이름을 지나 ‘스페셜 오더’ 목록이 나타났습니다. 스톤 오브 바벨, 그라운드 온 더 볼, 옐로 넥스트 레드처럼 처음 듣는 이름도 많았죠. 이름 옆에는 보드카와 럼, 테킬라 등 주종과 다른 음식물의 함유량이 병기되어 있었습니다.

“칵테일만 있군요.”

“여기는 칵테일 바니까요.”

“다른 일도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제가 파는 건 칵테일입니다. 이것저것 섞어서 손님이 원하는 걸 만들죠. 그런데…… 그걸 먹으면 무언가 일이 일어날 뿐입니다.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인간에게는 등가의 감각이 존재하니까요.”

“진짜…… 가능합니까?”

“신뢰가 필요합니다. 손님의 이야기도 필요하고요.”

미스터리 같은 그의 말에 대해 다시 묻진 않았습니다. 여기가 라커룸이라면 이제 전반전이 끝났을 뿐이라고. 바텐더의 말대로 이곳에서 좀 쉬면서 후반전을 도모하면 되리라,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라운드 온 더 볼을 주문했죠. 바텐더는 천천히 칵테일을 제조했고 마침내 잔을 내밀었죠. 바텐더가 전해준 잔을 절반 정도 비워내자 술기운이 돌았습니다. 기분도 적당히 오르기 시작했죠.

“이곳은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며칠 전 고향에 들렀다오는 길에 명함을 한 장 받았어요.”

“홍천휴게소였죠.”

“그걸 어떻게?”

“예약하셨잖아요.”

“누가요? 제가요?”

“고향은 자주 가시나요?”

“가끔 갑니다. 친구 만나러. 병원에 누워있거든요. 아주 오랫동안.”

저는 잔을 비운 다음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오래도록 깨어나지 않는 친구의 이름은 아까 말한 것처럼 김형석이었습니다. 전직 축구선수였죠. 축구부 소속이었으니 그래도 전직이란 말을 붙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형석이를 만나러 갈 때면 번갈아 병상을 지키는 친구의 부모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들 부부는 잊지 않고 찾아주는 제게 감사를 전하지만 정작 고마워할 사람은 저였죠. 의식을 찾지 못하는 형석에게 고마웠습니다. 한 번씩 병원을 찾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깨어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 말입니다. 마침내 그가 의식을 회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게 얼마 전이었습니다. 맨 처음 발가락이 움직였고 한 달 뒤 손가락을 움직였죠. 석 달 뒤에는 눈을 깜빡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병원을 찾아간 겁니다. 더 무엇을 하게 될지 불안했으니까요. 맞습니다. 이웅현을 만난 날이었죠. 여기까지 말하자 바텐더는 왜 불안하냐고 묻더군요. 저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 없는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비로소 고해소에 들어선 기분이었죠.

학창 시절 줄곧 모범생으로 불린 제게도 또래 남자아이들이 그렇듯 몇 가지 버릇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거리에서 오줌을 눈다거나 같은 반 친구들의 물건을 훔쳤죠. 별 건 아니었습니다. 지우개나 연필 같은 거요. 또 하나, 남몰래 방을 만들었습니다. 그 방을 ‘조성진의 징벌방’이라고 불렀죠. 아크릴로 작은 상자를 만들어 곤충과 벌레를 잡아 가두고 죽어가는 모양을 지켜보았습니다. 다른 버릇은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모두 사라졌지만 징벌방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더 은밀해졌고 규모가 커졌죠. 마을과 떨어져 있는 폐가에 고양이를 가두고 관찰하곤 했습니다. 개도 해봤지만 사납게 짓는 통에 실패했습니다. 어쨌든 그 나쁜 버릇은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저 혼자 즐겼습니다. 취미를 같이 나눌 만한 친구를 찾지 못했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클라이맥스를 앞두고 형석을 발견한 겁니다. 그 친구라면 제 취미를 이해하고 함께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죠. 무척 기대가 컸습니다.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를 말해주진 않을까, 엄지를 치켜세우며 손뼉을 쳐주겠지, 하고요.

현실은 기대와 달랐습니다. 그 광경을 본 형석은 저를 심하게 나무랐습니다. 녀석은 전반전에 세 골을 허용하고 당했던 체벌을 말하더군요. 감독은 그의 종아리를 걷어차고 멱살을 잡고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후반전 45분 동안 교실에 남아 있을 것을 명령했던 겁니다. 후반전이 시작되자마자 선수를 교체했고 그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그런데 이건 그것보다 더하다고. 저보고 사람 새끼냐고 소리치더군요. 저는 그런 형석의 태도에 당황스러웠습니다. 수치심을 느꼈고 겁에 질렸죠. 무엇보다 짜증이 났습니다. 이게 그렇게 잘못한 건가. 그러면 나는 용서받지 못하는 건가. 그래서 그를 두고 도망쳐 나왔습니다. 징벌방의 문을 걸어 잠근 채였죠. 다음 날 아침 그곳을 다시 찾을 때까지 그 문은 굳게 잠겨 있었습니다. 문을 열자 어쩐 일인지 연기가 퍼져 나오더군요. 안으로 들어가 겨우 형석을 끌어내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웅크리고 있던 형석은 고양이를 안고 있었죠. 곧이어 저는 의식을 잃었고 얼마 뒤 마을 주민들에게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그 사고로 형석은 식물인간이 되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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