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진술인 06화

라커룸(6/6)

by 유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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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쇄골 복합 골절로 큰 수술을 받았습니다. 오른팔을 어깨 위로 올리기까지는 1년 이상 재활이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복직을 앞두고 판서 대신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알아보곤 했지요. 죽으라는 법은 없잖아. 뭐든 방법이 있을 거야. 포기하지 않고 우리가 힘을 합하면. 아내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전에 없이 활력에 차 있었고 모든 고통을 딸과 아내가 짊어졌다고 느낄 때면… 솔직히 홀가분했습니다. 신조어를 스터디하는 모임에서 배웠던 단어가 생각나는군요. 에너지 뱀파이어? 그게 나였죠.

캐스터로서의 입지가 높아지자 외부 행사를 나가는 일도 종종 생겼습니다. 임원진의 부탁으로 아나운서 아카데미에서 한 학기 강의도 진행했습니다. 수강생의 반응은 차치하고 학기 말에 불미스러운 일을 겪으면서 다음 학기로 이어지진 않았습니다. 그즈음 한 신문사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인터넷 기사가 곧장 포털사이트에 올라서 댓글 몇 개를 확인했는데 그중 하나가 문제였습니다. 그 악플이 무척 신경 쓰이더군요. 공개된 아이디 앞 이니셜 네 개가 한 학생을 연상케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카데미에서 한 학생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녹음실에서, 그리고 강연이 끝난 뒤 술자리에서 그를 만졌죠. 다음날 사과한 뒤에 똑같은 짓을 반복했습니다. 잘못이라는 걸 알았죠. 맞습니다. 아직 그 나쁜 버릇을 고치지 못한 겁니다. 징벌방과 마찬가지로 밀실에서 이뤄지는 작은 장난이라고 여겼던 것이죠. 손을 쓸수록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더군요. 그가 아나운서의 꿈을 포기하면서 관계는 끊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댓글을 발견한 겁니다. 악다구니에 찬 문장들을요. 그를 찾아가 설득이든, 사정이든, 애원이든, 사과든 그런 걸 해야겠다…… 생각만 했습니다. 어차피 제 전화는 받지 않았으니까요. 솔직히 말하면 그냥 해프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건 그냥 잊어버리면 좋을 텐데, 그 친구는 왜 그게 안 될까요.

계절이 바뀌고 스포츠국 식구들과 함께 부부 동반 모임을 한 적이 있습니다. 호텔 로비에서 만난 아내를 보고 저는 잠시 얼어붙었습니다. 그날 아내가 입고 온 옷. 그 옷은 지난 계절에 제가 그 학생에게 사준 원피스였습니다. 사과의 징표라기엔 좀 과한 브랜드였죠. 아내는 그 옷이 제가 보내온 선물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안 하던 짓을 다 한다면서, 얼마냐고 묻더군요. 저는 대충 둘러대고는 걸음을 뗐습니다. 잠잠해지는가 싶었던 불안과 망상이 성큼 찾아온 것도 그 무렵이지 않나 싶습니다. 그 학생이 친구들을 데려와 멱살을 쥐고 흔들 것만 같았거든요. 차라리 드러내놓고 고발이라도 한다면 나을까. 아니지, 그건 아니지. 이렇게 중얼거리기를 며칠. 미투가 터져 나올 때마다 심장이 쪼그라들고 목구멍이 바짝 말라갔습니다. 내 일이 되니까 그게 참 어려웠죠. 그냥 가만히 있는 거. 그래서 변호사도 만나고 그랬습니다. 무고죄로 점잖게 위협하는 법이 있다며 신나서 절차를 알려주더군요. 상담을 받는 내내 입이 썼습니다. 너무…… 비쌌으니까요.

이미 지름길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학생만 사라진다면 모든 게 제자리를 찾을 것 같았죠. 무슨 일이 있어도 낙관하고 관망하는 태도, 그리고 실행력. 그게 필요했습니다. 제게는 그런 위협을 슬기롭게 이겨낸 경험이 있었으니 더는 주저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명함은 지갑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사이트에 접속하고 새로운 낱말을 입력하여 계정을 활성화한 뒤에 ‘고양이의 지혜’로 향했습니다. 인테리어는 그대로였고, 바텐더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죠. 그는 한 번도 퇴근한 적 없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요즘은 어때요?”

“보시다시피.” 바텐더는 가게 안을 쓰윽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옐로 넥스트 레드로 하죠.”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면 아내가 더 그럴듯하게 강의하겠지만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 정도라면 저도 제 나름의 설명을 붙일 수는 있습니다. 무언가 좋아지면 또 다른 무언가는 나빠지기 마련이라는 것이죠. 오른쪽으로 세 칸 밀려난다면 왼쪽에 세 칸의 공간이 더 생깁니다. 동점을 만들기 위해 선수들을 위로 올린다면 역습에 무너질 확률도 높아지죠. 감독은 그 위기를 관리하고 결정을 내립니다.

그의 흔적이 말끔히 사라진 뒤엔 다가올 불행을 기다렸습니다. 그것은 누구에게 올까. 아내일까, 딸일까. 아니면 이번엔 나일까. 일상적인 불안에 시달렸지만 견딜만했습니다. 아무 일 없이 3주가 지났고 라커룸에서 안내문이 왔습니다. 완료를 알리는 우편이었죠. 명함 수령 방식은 인편으로 바뀌었다고 하더군요. 새로운 라커룸은 서울이 아닌 경기도 외곽의 한 빌라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운전을 싫어합니다. 하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면 어디든 가야죠. 새로운 명함이 필요했습니다. 살다 보면 또 어떤 난관에 봉착할지 모르니까요. 또 어디서 이상한 신입이 나타날지 모르고 저를 부끄럽게 만드는 인간이 야생 동물처럼 튀어나올 수도 있겠죠. 작은 허물을 두고 저를 몰아세우는 인간은 또 어떻게 한답니까.

새로운 라커룸도 지하에 있었습니다. 그곳은 좀 더 깊은 지하였고 보다 허름한 상가 건물이었습니다. 어두운 밤이었죠. 굳이 밤에 갈 필요는 없었는데… 본능이었겠죠. 은밀한 것은 비로소 어둠 속에서 윤곽을 드러내지 않습니까. 차를 상가 옆 공터에 주차한 뒤에 건물 안으로 잠입하듯 들어섰습니다. 그곳 내부는 골조 공사를 막 마친 것처럼 빈 공간이었죠. 문 앞에서 휴대전화의 손전등 기능을 켜고 주변을 둘러보며 한 발 또 한 발,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막다른 공간에 다다랐을 때 저 멀리서 희뿌연 빛에 둘러싸인 문이 닫히더군요. 성문이 닫히듯 견고한 소음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벽을 더듬거리며 들어온 곳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 불빛을 비추었습니다. 바닥에 무수히 많은 라커룸 명함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이곳으로 들어왔고, 끝내 갇히고 말았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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