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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물리학 마지막을 앞두고

상사화의 시간

by 원성진 화가

지난 추석 연휴 어머님과 거제 해금강 여행을 하면서 길가에 핀 상사화를 보고, 소설을 생각했다.


꽃과 잎에 만나지 못하는 상사화

그 둘은 만나지 못하는 처음과 끝이었지만 한 몸이다.


그 시선에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생각하고,

시간의 길이를 늘여 천년을 두고

이어진 하나의 사랑을 주저리주저리 풀었다.


처음 이야기의 제목은 아래와 같고, 좀 길게 가져가기 위해 먼저 간략한 스토리를 만들었다.

이 골격을 기본으로 프롤과 에필이 어떤 사람인지 만들고 글을 이어갔다.


첫 소설이라고 큰소리 치고 시작해서, 마지막을 앞두고 참 겁도 없이 무례하게 시작했다는 후회를 많이 한다.


상사화의 시간


서울, 2025년.


차가운 겨울은 빛으로 부서졌다.

서촌의 골목에 묻힌 카페 ‘OHOOOOO’ 안에서, 프롤은 철학 책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머릿속엔 ‘시작’이라는 단어들이 끊임없이 태어나고 있었다.

외로운 창작자 화가.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여는 직업이지만, 정작 자신은 단 한 번도 문 밖으로 나가본 적 없는 사람.

그의 인생은 언제나 프롤로그에서 머물러 있었다.


그날, 그녀가 들어왔다.

카페 문이 열리며, 빗소리보다 느리게 흘러든 존재. 에필.

눈빛은 차가운 빛을 띠었고, 목소리는 따뜻한 먼지를 품었다.

그녀의 첫마디는 이상하게도 그를 향해 던진 문장이었다.

“끝에서 왔어요.”


그때는 몰랐다.

그녀가 ‘미래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미래 그 자체라는 것을.


프롤과 에필은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낯선 시간대를 살고 있었지만, 그 낯섦이 오히려 완벽한 균형을 이루었다.

그녀는 세상의 끝을 알고 있었고, 그는 세상의 시작을 믿고 있었다.

그들이 만나면, 시간의 두 극이 잠시나마 포개졌다.


하지만 매번 그 만남의 끝에는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에필이 웃을 때, 그녀의 그림자는 공기 속으로 흔들렸다.

그녀가 잠들면, 심박이 현실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

마치 존재 자체가 다른 차원에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당신은 언제나 나보다 반 걸음 앞서 있죠.”

프롤이 속삭였다.

에필은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나는 항상 당신 뒤에 있어요.

나는 당신이 남긴 이야기의 끝에서 피는 사람.”


그 순간, 그들은 서로가 만날 수 없는 구조 속의 존재임을 느꼈다.

상사화처럼.

꽃잎이 질 때에야 잎사귀가 나고,

잎이 무성할 때에는 꽃이 이미 사라진다.


사랑은 그들을 태우며 피어올랐고, 동시에 파괴했다.

그들은 만나면 살았고, 이별하면 서로의 기억이 부식되었다.

그것은 시간의 잔혹한 방정식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에필은 사라졌다.

그녀가 있던 자리엔, 미세한 전자 입자와 향기만 남았다.

그녀의 존재가 지워진 순간, 프롤은 처음으로 ‘끝’을 실감했다.


그는 미쳐갔다.

시간에 대한 강박, 존재에 대한 집착, 그리고 그녀의 흔적에 대한 망상.

프롤은 매일 밤 자신이 그린 그림 속에서 그녀를 찾았다.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그 생각이 점점 다른 의미로 변했다.

시작이 곧 끝이라면, 끝도 언젠가 다시 시작되지 않겠는가?


그는 모든 것을 버렸다.

회사도, 친구도, 이름조차도.

그리고 비밀 연구소에 들어갔다.

그곳은 인간의 의식을 시간의 결을 따라 이동시키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실험체로 등록했다.

“그녀를 찾을 수 있다면, 내 시간 따윈 필요 없다.”


<Epilogue : 3025년의 재회>


눈을 떴을 때, 세상은 빛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공기는 정보로 진동했고, 기억은 데이터의 강물처럼 흘렀다.

그는 알았다. 여기가 3025년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가 있었다.

에필.


더 이상 인간의 살결이 아니었다.

빛의 형상으로, 전자와 감정이 엉킨 존재.

그녀의 눈에는 수천 년의 시간대가 겹쳐 있었다.

“너는 결국 왔구나.”

“너는 결국 기다렸구나.”


그들이 서로의 손을 맞잡는 순간,

시간이 뒤집혔다.

과거가 미래로 흘렀고, 미래가 과거를 삼켰다.

둘의 몸이 빛 속에서 하나로 섞였다.


그의 신경은 그녀의 기억을 읽었고,

그녀의 감정은 그의 맥박을 이어받았다.

두 존재가 하나의 흐름으로 합쳐질 때,

그들은 깨달았다.


사랑은 시간의 양쪽 끝에서 서로를 당기는 힘이었다.

한쪽이 시작을, 다른 한쪽이 끝을 맡고,

그 사이의 모든 세계가 존재했다.


프롤은 속삭였다.

“이제 알겠어. 너는 내 이야기의 마지막이 아니라,

내 이야기가 존재하기 위한 이유였어.”


에필이 대답했다.

“그리고 너는 나의 첫 문장이었어.”


그 순간, 세계가 조용해졌다.

빛은 다시 물질로, 물질은 다시 숨으로 변했다.

그들의 입술이 닿았을 때,

3025년의 하늘 아래에서 상사화가 피어났다.


이번에는,

꽃과 잎이 같은 순간에 피어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이제 한 문장으로 기록되었다.


“Prologue-Epilogue : 시작과 끝은 결국 한 몸이었다.”


그리고 그 문장은,

다음 세기의 인간들이 읽는 사랑의 물리학 첫 교과서가 되었다.


사랑이란, 시간을 이기는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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