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이미지를 여행하다
대부분의 대한민국 남성들이 안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곳이 충남 '논산'일지도 모른다. 아마 논산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남성의 경우 입대, 혹은 가족의 입대 때문일 것이다. 비록 내 훈련소는 다른 곳을 나왔지만 친형의 입대가 논산훈련소였던지라 친형을 배웅하러 논산을 방문했던 것이 나의 첫 논산의 기억이다. 하지만 논산을 그저 대한민국 남성들의 PTSD를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로 남기엔 논산의 관광잠재성이 너무 아쉽다. 논산도 다른 도시들처럼 특색넘치는 재미가 있다. 논산의 정체성에 영향을 주는 여러 요소 가운데 더 부각되길 원하는 컨셉은 백제의 유산이다. 논산과 백제의 연관성이 생소할 수도 있다. 논산은 백제의 두 번째 수도 웅진(충남 공주)과 세 번째 수도 사비(충남 부여) 가운데 있기에 말하자면 논산은 백제 시대 수도의 위성도시였다. 백제뿐 아니라 논산에는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서원도 있고, 전국을 뒤져봐도 쉽게 찾을 수 없는 이형 불상 작품이 있다. 논산의 잠재성을 소개하는 일이 몹시 신날 정도다.
논산 옆으로 금산이 있어서 둘째날은 금산을 둘러볼 예정이다. 금산은 인삼의 고장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삼재배지는 영주의 풍기라고 하지만 금산도 인삼 시장에 뛰어들고 무려 1500년간 우리나라 인삼산업의 얼굴 역할을 해왔다. 조선시대까지는 개성이 국내 최대 규모의 인삼도시였으나 해방 후 분단되고부터는 대한민국에선 금산이 그 역할을 해주었다. 2018년 7월 금산인삼은 UNFAO(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가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하였다. 금산은 인삼과 관련하여 어떠한 사연을 가지고 '인삼'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는지까지 소개해드리겠다.
백제의 계백 장군이 신라의 김유신과 백제 멸망전의 결전을 치룬 황산벌 전투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고작 5천의 결사대로 패배하리라 뻔히 알고 있는 전투로 출정을 해 신라군 5만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 계백의 황산벌 전투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한번도 패한 적 없는 신라의 김유신이 유일하게 고전한 전투가 황산벌 전투였다는 극적 요소도 있다. 어떻게 보든 드라마적 요소들로 가득해서 각종 2차 창작물로 각색되기도 많이 각색되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황산벌>을 비롯해 황산벌 전투를 다룬 2차 창작물은 언제나 사랑받기에 창작물로서의 '황산벌 전투' 이미지가 각인되어 정확한 내막이 오인되기도 한다. 더불어 그렇게도 유명한 황산벌이지만 황산벌이 어디에 위치해있는지도 아는 이가 적다. 한국전쟁사에서 드림매치 중 하나로 손꼽히는 황산벌의 전적지는 논산이었다. 차를 타고 황산벌전적지로 가는데 나 역시 황산벌 전투에 대한 창작적 이미지에 사로잡혔는지 가는 길부터가 의아했다. 차를 타고 산을 올라가야 한다. '황산벌은 평야에서 싸운 전투가 아니었나?' 라고 알고 있었기에 나는 혹시 네비게이션이 잘못 됐나 가는 내내 의구심이 들었다. 네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산 중턱에 도착해보니 큰 주차장에 황산벌전적지라는 설명문과 표지들이 있었다. 맞기는 맞게 왔다. 설명문을 자세히 읽어보고 주차장에서 밑에를 굽어보니 이제야 황산벌 전투에 대해 가졌던 의문들이 풀어졌다. 아무리 죽음을 결사안고 싸운다지만 5천의 병력으로 5만을 상대하며 시간을 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고지대를 선점하면 달라진다. 전투에서 고지대 선점이 무조건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에 적은 병력으로도 많은 병력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 김유신이라는 유능한 지휘관이 10배나 되는 병력으로도 백제의 계백에게 막힌 건 계백이 먼저 고지대를 선점해서 올라오는 신라군을 막아냈던 덕분인 것이다. 역시 역사는 답사를 통해 내 눈으로 직접 봐야 한다.
황산벌 전투에 대해선 일반적으로 백제의 마지막 왕이었던 폭군 의자왕이 백제를 말아먹고 있다가 나당연합군의 기습을 받아 우왕좌왕하는 사이 계백이 고작 5천의 병사들로 신라군을 막으러 간 전투로 알려져 있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기습을 받은 건 맞지만 그 외에는 잘못 알려진 부분들이 많다. 백제의 의자왕은 재위 초기엔 신라의 성 40여개를 함락시킬 정도의 유능한 군주였으나 어느샌가 향락과 사치에 빠진 군주로 알려져 있지만 아무리 왕 한 명이 타락해도 그 군사력 강했던 백제가 왜 갑자기 병사가 5000명만 남아버린 걸까? 백제 의자왕의 능력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폭군이었단 사실은 명백한 오류다. 의자왕에 대해선 부여 편에서 더 자세히 이야기할 예정이지만 짧게 요약하자면 의자왕은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귀족들과 사이가 틀어졌다. 외교적으로도 귀족과 의자왕은 엇갈렸는데, 귀족은 친당나라 노선을 고려하여 신라를 그만 압박하기를 원했으나 의자왕은 어차피 고구려가 있는 한 당나라도 백제로 함부로 군대를 보내지 못한다고 자만하여 신라를 계속 압박했다.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은 '나당연합' 자체도 극비리에 이루어졌기에 심지어 신라와 당나라에서조차 정권의 극소수만 알고 있었을 뿐 나당동맹의 여부를 몰랐다. 이러니 외국이었던 백제에서도 나당동맹을 알 수가 없었다. 나당동맹을 알게 된 건 신라와 당나라가 백제멸망전을 위해 만났을 시점이었고, 당나라가 고구려가 아닌 백제를 공격한다는 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660년 신라의 김유신과 당나라의 소정방이 만난 지점도 경기도 이천이었다. 신라와 당나라가 접선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백제는 당연히 두 나라가 고구려를 친다고 생각했다. 경기도 이천은 누가 봐도 고구려로 가기 위한 길목이기 때문이다. 실제 고구려 역시 본인들을 공격한다고 생각해 남방의 경계를 크게 강화했다. 그러나 나당연합군은 백제의 수도가 있던 충청도로 남하했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기습에 제대로 당하고 말았다. 나당연합군은 당나라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수군 13만과 신라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 육군 5만이 각각 해로와 바다로 진군하여 백제의 수도 사비성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당나라 수군 13만과 신라 육군 5만. 백제 입장에서는 당나라 수군 13만이 훨씬 급했고 백제의 전 주력부대는 5만보다는 13만을 막는데 투입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신라 육군을 그냥 냅둘 수 없으니 의자왕은 계백에게 최소한의 병력만 지원해줄 없었다. 백제의 군사 수가 빈약해서 5천 결사대가 조직된 것이 아니라, 백제군 상당수는 당나라 수군을 막아야 했기에 그 정도 소수 병력만이 모인 것이었다. 백제의 마지막 충신이라 평가받는 성충은 만약 신라가 육로로 쳐들어온다면 탄현(오늘날 천안)에서 신라군을 막으라 했으나 병력 소집에 시간이 지연되고 나당연합군의 급습으로 인해 이미 신라군이 탄현을 지나친 시점이었다. 계백은 전략을 고민하던 중 방어에 유리한 지점을 고민하다 오늘날 논산의 황산벌을 택했다. 시간이 더 허용됐으면 의자왕도 더 많은 병력을 소집시켜줄 수 있었겠지만 시간이 매우 촉박했다. 별수 없이 계백은 질 수밖에 없는 전투를 치러야만 했고 계백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었다. 5천 결사대의 목표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닌 그저 버텨야 한다는 것을. 계백은 처와 자식을 제 손으로 죽이고 출정했다. 그렇게 계백은 김유신보다 앞서 황산벌의 고지대를 선점했고 유리한 지형을 빠르게 위치한 덕분에 신라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계백의 관직은 달솔이었다. 계백의 5천 결사대는 계백이 총지휘관으로 있으면서 좌평이었던 충상, 상영이 그 아래에서 지휘하였다. 계백의 관직 달솔은 충상, 상영의 관직인 좌평보다 한 단계 아래다. 밑의 관직에 있던 계백이 충상, 상영보다 상관으로 지휘한 건 의자왕의 왕권강화책의 일환이다. 각종 야사에서는 계백의 성씨가 백제의 왕실 '부여씨'였다고 한다. 계백이 왕실사람이었고 충상과 상영은 귀족이었으니 의자왕 입장에서는 관직은 아래라도 계백에게 지휘권을 주었다.
신라군이 고전을 면치 못하자 신라의 김유신은 반굴, 관창 등 어린 화랑들을 내보냈다. 어린 화랑들이 죽음을 결사안고 싸우다가 전사하자 신라군의 사기가 올라갔고 마침내 백제군을 토벌했다. 계백을 포함한 5천 결사대 전원이 전사했고, 귀족이었던 충상과 상영은 김유신에게 항복했다. 황산벌 전투의 더 큰 반전은 이 모든 치열했던 전투가 단 하루동안 일어난 싸움이었다는 것이다.
황산벌전적지에서 차로 내려가면 근처에 계백장군의 묘와 그 옆으로 백제군사박물관을 조성해두었다. 계백 장군이 황산벌에서 패전한 이후 인근 주민들이 계백 장군의 시신을 수습해 묘를 만들어주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논산 사람들 사이에서 오래도록 이 무덤이 계백의 무덤이라고 믿어왔다. 한국전쟁 당시 무덤이 도굴되는 바람에 계백의 무덤 실재 여부를 알 수 없게 되었으나 더 중요한 계백을 기리고자 하는 논산 사람들과 후대인들의 믿음일 것이다.
백제군사박물관에서는 백제의 전쟁사를 배울 수 있는 곳으로 구성은 알차고 큰 규모는 아니라 부담없이 즐길 수 있다. 백제를 포함해서 고구려, 신라, 그리고 중국과 일본의 동아시아에서는 보편적으로 '고리자루큰칼'이란 도검을 사용했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환두대도라고 한역화하지만 한국에서는 순우리말로 풀어서 부른다. 고리자루큰칼은 칼 손잡이 끝에 고리(환)를 장식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리자루큰칼의 길이는 25~90cm까지 다양했으나 70cm가 평균이었다고 한다. 창은 찌르는 용도의 투겁창, 적을 베거나 말위의 적군을 끌어내리는 과, 낫 같은 형태의 대형 날을 장착한 백제 철겸창 등이 있었다. 철겸창은 고구려나 신라에도 있었지만 백제의 철겸창 모양새가 다소 독특하고 백제의 철겸창은 가야나 일본에서도 자주 출토된다. 중국 측 기록에는 백제인들이 활쏘기를 즐겨 했다고 나와 있으니 궁병들도 정예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를 포함해 삼국시대에는 철갑옷과 가죽갑옷을 혼용했는데 백제의 가죽갑옷은 독특하게 옻칠을 했다고 한다. 삼국 중 백제가 가장 먼저 멸망해서인지 백제가 약소국이란 이미지가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굳이 따지자면 삼국 중 최약소국은 신라였으며 백제의 군사력은 실로 막강했다. 훗날 정약용은 백제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삼한 가운데 백제가 가장 강하고 문화가 가장 발달하였다."
한창 겨울철엔 귤이 땡기고,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아직은 쌀쌀한 날씨엔 딸기가 땡긴다. 논산에서는 매년 2월 딸기 축제를 개최한다. 논산은 1967년부터 50년이 넘는 기간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딸기 농사에 성공해 맛 좋은 딸기로 이름을 알렸고 2001년부터 논산의 딸기를 맛볼 수 있는 축제를 개최해왔다. 논산은 충남 딸기 재배 면적의 무려 45%에, 전국 단위로 하면 13%에 달하며 매해 딸기생산량이 3만 톤에 이른다고 하니 과연 딸기의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한 도시다. 수도권에 유통되는 딸기의 65%가 논산 딸기다. 어느 카페를 가도 딸기 관련 음료는 언제나 사랑을 받는 걸 보면 딸기 호불호가 많이 갈리진 않는 듯하다. 논산 딸기는 양촌면과 부적면이 유명한데 부적면에서는 딸기향농촌테마공원도 조성되어 있다. 아기자기한 딸기 조형물들이 장식되어 있고 비닐하우스 내부로 들어가 구경도 할 수 있다. 아직 추운 2월인데도 벌들이 날라다니는 걸 보면 아주 품질 좋은 딸기가 맞나 보다. 논산 딸기와 딸기를 가공한 제품들을 판매하는 판매장도 있어서 가족과 주변친구들에게 선물해줄 기념품도 사고 논산 딸기만을 취급하는 근처 카페에서 달달한 딸기라떼로 비타민 충전을 한다. 여행을 갔다온 다음 일이지만 여기서 구매해서 선물한 딸기잼은 모두가 좋아했다. 작고 탱탱한 딸기는 겨울 막바지에서 봄철을 예고해주는 붉고 사랑스러운 과일이다.
지난 2019년 전국에 퍼져 있는 서원들 가운데 9개의 서원이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그중 첫번째 지난번 '영주 편'에서 한국 최초의 서원 소수서원을 소개한 바 있다. '영주 편'에서의 서원에 관한 설명글을 빌려오자면 이렇다.
서원이라 함은 성리학의 사학을 담당했던 지방의 사립교육기관으로 특정 향촌사회의 사대부들 내지 선비들이 관리하며 성리학을 풍성하게 발전시키고, 유능한 학자들과 정치인들을 배출해내며, 성현에 대한 제사도 지내며 전통문화를 계승해가는 등 해당 지역의 여론을 모아 공론화도 시키며 사회적 역할도 수행해나갔던 다기능의 공공시설이었다. -<서울촌놈의 국내여행 뿌수기> '영주 편'
9개의 서원 중 두 번째로 소개하는 서원은 논산의 돈암서원이다. 돈암서원은 1634년(인조 12년) 예학자 김장생을 기리고자 건립되었으며 1660년(현종 1년) 조선의 18대왕 현종이 직접 '돈암'이라는 이름의 서원 이름을 사액해주었다. '돈암'은 인근 산기슭에 있는 바위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당시에도 철폐되지 않았으며 1880년~1881년(고종 17년~18년) 홍수를 피해 지금의 자리로 이동했다. 본디 돈암서원은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가 강학활동을 하던 곳으로 학당의 이름이 정회당이었다. 김계휘 사후 김장생은 아버지의 강학활동을 이어받기로 하였고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02년(선조 35년) 아버지가 강학하셨던 정회당 옆에 양성당을 새로 건립하였다. 김장생 사후 김장생을 존경했던 제자들과 유림들의 건의로 김장생이 생전 강학했던 양성당을 서원으로 지정해주었던 것이다. 양성당은 돈암서원의 강학공간이 되었고 그 앞으로 기숙사 두 채를 두었다.
돈암사를 들어가기 위해선 산앙루라는 듬직한 누각을 지나쳐야 한다. 서원의 학생들이 이곳에서 휴식을 즐겼다는데 마치 시원시원하게 가슴을 펴고 있는 듯한 산앙루에서는 호쾌하고 낙천적인 기운이 있다. 산앙루에 걸린 편액들도 하나 같이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어 공부를 하다가 막히거나 답답할 때마다 산앙루에 오르면 한결 후련해질 것만 같다.
산앙루를 지나 돈암서원의 정문인 입덕문까지 들어오면 저 앞 정면에 앞서 소개한 양성당과 기숙사 두 채가 놓여 있다. 우선은 가장 먼저 시선을 뺏는 곳이니 양성당 쪽으로 가보아 이곳에서 공부했을 학생들의 학구열을 상상해본다. 양성당 앞에 있는 비석은 '연산현돈암서원비기'라고 해서 서원의 건립 배경과 경과를 기록해두었다. 입덕문을 지나 양성당으로 곧장 향하긴 했지만 양옆에 있던 두 채의 전각을 그냥 지나쳤다. 양성당을 등지고 왼쪽의 건물은 김장생의 부친 김계휘가 최초로 강학공간을 열었던 정회당이고, 오른쪽 건물은 이곳이 서원으로 지정될 즈음에 새롭게 지은 또다른 강당인 응도당이다. 원래 응도당이 돈암서원의 가장 메인 강당이었으고 양성당은 그저 김장생이 후진을 양성했던 곳 정도의 의미를 지닌 곳이었으나 1880년 홍수침수를 피해 이곳으로 이전할 때 응도당만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1971년 응도당을 나머지 부속건물이 있는 돈암서원에 함께 두기 위해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 오늘날 돈암서원의 배치상 양성당이 주된 강당으로 보이겠지만 (김장생 생전에는 실제로 그러했고) 김장생 사후 돈암서원의 제1 강당은 응도당이었고 '돈암서원' 그 자체의 의미에서 보면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다.
꼭 역사적 가치를 떠나서 아마 모든 관광객들의 시선은 응도당으로 꽂힐 것이다. 응도당은 한국에서 가장 잘생긴 서원 건축물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 크기의 응도당은 우리나라 서원의 강당 중 가장 큰 크기다. 그렇지만 응도당이 이토록 건축적으로 뛰어난 미감을 자아내는 건 비단 크기 때문만은 아니다. 응도당의 지붕양식은 단순하고 조촐한 느낌을 내고 싶을 때 사용하는 맞배지붕 양식이지만 다부지고 넓은 지붕을 펼치고 있어 단정하면서도 이다지로 늠름할 수가 없다. 지붕의 테두리를 장식해주는 수막새들의 조합은 어린아이들이 다정하게 손을 잡고 있는 장면처럼 보여 가슴이 흐뭇해진다. 나무기둥과 대들보의 색감까지 기와의 색감과 어쩌면 저렇게 잘 어울리는 지 모르겠다. 말하자면 압도적인 크기로 위화감을 주기보다는 듬직한 다정함이 느껴지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기대고 싶은 곳이다. 강당 안에는 힘찬 글씨의 해서체로 '돈암서원'이라고 적힌 편액마저 완전한 금상첨화를 이룬다.
그러나 역시 돈암서원은 김장생이다. 사계 김장생은 율곡 이이의 제자로 조선후기 예학의 계보를 탄생시킨 예학자이다. 예학이란 성리학의 원칙에 의거하여 예의 본질과 의의, 그 쓰임을 연구하는 학문분과이다. 임진왜란이 터지기 전까지는 이황의 이기논쟁에서 알 수 있듯 주로 조선 지성계에서는 성리학의 형이상학적인 혹은 관념적인 논쟁이 주된 화제거리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거치며 조선 사회가 쑥대밭이 되고 기존의 질서가 동요하자 이를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인지한 사대부들은 현실 개선의 방안으로 예를 탐구하는 어젠다로 관심사가 옮겨갔다. 성리학자들 나름에선 성리학을 현실에 적용해보려는 노력이었다. 아직 예학의 정통이 바로서지 않았던 17세기 초기 예학의 신호탄을 올린 학자가 사계 김장생이었다. 조선 초 성리학의 계보로는 성리학의 본산이라 자부하는 영남지역의 영남학파와 현실적인 성리학 적용을 탐구하던 경기-충청권의 기호학파로 나뉘어 있었다. 돈암서원이 논산에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듯 김장생은 기호학파였다. 하지만 기호학파로서도 김장생은 영남학파의 문인들 정구, 정경세, 장현광 등과 만나 예학의 교리에 대해 함께 의견을 나누었고 영남학파가 대스승으로 모시는 이황의 저서들도 모두 참고하였다고 한다. 김장생의 학문적 업적은 <상례비요>, <가례집람>, <의례문해>로 완성되었다. <상례비요>는 조선의 상례 방식을, <가례집람>은 가정 속에서 지켜야하는 예를, <의례문해>는 상을 치르는 상례와 제사를 지내는 제례를 행함에 있어서 애매한 것들을 문답 형식으로 정리하였다.
김장생의 예학 계보는 그의 아들 김집, 송준길, 송시열 등에게 이어졌다. 특히 송시열은 김장생의 뒤를 잇는 예학의 대가로 평가받았다. 인조 사후 인조의 첫째아들 소현세자가 불의의 사고로 죽는 바람에 둘째아들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하였는데 효종대에 장남계승원칙이 무너지는 바람에 다음 왕이었던 18대 현종 대에 이르러 예학이 더욱 주목을 받았고 그만큼 송시열의 정치사회적 입지도 두터워졌다. 역사적, 지성적 의미로서 김장생의 가치를 떠나 김장생 개인적으로 보아도 그는 예학이란 학문에 딱 맞는 학자의 심성을 지니고 있었다. 김장생은 부친 김계휘에게도 지극한 효성으류 유명했고 김장생의 아들 김집과도 사이가 두터웠다. 돈암서원에는 김장생의 제자 송시열이 김장생과 김집 부자에 관해 적은 묘정비가 있다.
"신독재 문경공 선생(김집)은 시(詩)와 예(禮)에 대한 성문(聲聞)이 어릴 때부터였다. 그러므로 문원공(김장생)은 문경공(김집)과 ‘상장지익’(相長之益)이 있다고 여겼으니, 이른바 ‘부자 간의 지기(知己)‘라 함이 있었다"
예학을 두고 현실을 외면한 채 답답하게 원론만을 따진다며 전형적인 탁상공론의 폐단으로 지적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실제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까지 예학은 분명 그러한 징후가 있었고 가부장적 질서 강화에 동조하였다. 하지만 그 어떤 학문과 사상이라도 극단화되었을 때 문제이지 시작의 취지 자체도 부정해서는 학문의 발전이 있을 수가 없다. 예학이 현실과 유리된 이상적이고 무의미한 탐구라고 해석될 수 있지만 임진왜란 이후 예학의 시작은 오늘날 각종 사건사고 그리고 범죄행각들을 보며 '어쩌다 대한민국이 이렇게 됐을까' '대한민국 곧 망할 것만 같다'고 신세한탄을 하는 가운데 제대로 된 도덕적 가치가 정립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그저 예학은 정치에 악용되면서 변질됐을 뿐이다. 예학의 의의에 대해 내 짧은 소견으로는 풀기 부족한 거 같아 다른 지성인의 글을 인용해보고자 한다.
"예학자들은 사람이 사람일 수 있음은 고유한 본성을 잃지 않음에 있다고 보았으며, 예는 본성을 행하는 것이다. 본성을 행한다는 것이 예를 실천할 근거이다. 무례 패악한 사람은 사람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 내재해 있다. 그러므로 예학자들은 가례(家禮)와 각종 기거동작의 예행(禮行)을 통해 가정과 일상생활의 예행(禮行)으로 부자자효와 형제자매의 돈목(敦睦)을 도모할뿐 아니라, 수기(修己)의 측면을 강화하여 학문(學問)과 예행(禮行)을 통한 신독(愼獨) 수양을 강화했다. 이러한 김장생의 예학과 가정생활은 한국 선비들의 가정상에 하나의 모범이 되었다." - 김문준 교수 <김장생의 예학정신과 한국가정의 문화전통>
나에게 논산을 대표하는 딱 하나의 이미지만 고르라면 고민 끝에 관촉사를 고를 것이다. 고려 전기 논산 반야산에서 고사리를 캐던 한 여인이 아이 우는 소리에 소리가 나는 곳을 가보니 아이는 없고 땅에서 큰 바위 하나가 솟아올랐다고 한다. 고려 정부는 이 바위를 영험하게 생각하여 혜명스님에게 바위를 불상으로 깎고 절을 창건하게끔 지시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관촉사다. 혜명스님은 968년 불상 제작을 시작하여 무려 38년이나 흐른 1006년에 완성하였다. 석상이 세워지자 하늘에서는 비가 내려 석상을 씻겨주는 등 21일간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했고 불상의 미간(옥호)에서 발하는 빛이 사방을 비추었다. 이 빛이 중국까지 이르자 상서롭다고 여긴 중국의 승려 지안이 빛을 따라 이 절에 이르렀고 불상의 빛이 광명을 내비추는 촛불 같다며 절의 이름을 관촉사라 지었다. 따라서 관촉사의 시작은 이 돌로 만든 불상이며, 내가 논산의 대표 이미지로 관촉사를 꼽은 건 절 그 자체보다는 바로 이 불상 때문이다. 이 불상의 이름하야 국보 323호 관촉사 은진미륵이다.
높진 않지만 꽤 가파른 계단을 올라 관촉사 경내로 들어가면 그리 크지 않은 터에 거대한 은진미륵이 호기롭게 서 있다. 어떤 의미로든 은진미륵을 처음 접하면 그 인상이 절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비단 높이 18m의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불상이라는 크기를 고사하더라도 관촉사의 은진미륵은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미학의 괴작이다. 괴작이기에 더없이 소중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영주 부석사의 소조금동여래좌상이나 경주 석굴암 본존불처럼 절대자의 근엄함을 표현한 고전적인 아름다움과도 거리가 멀고, 양양 낙산사의 해수관음상처럼 우아한 품위와도 거리가 멀고, 서산의 마애삼존불처럼 정겨운 화사함과도 거리가 멀다. 넙대대한 얼굴에 삼등신 구조의 이 석상을 어떤 미학을 품고 있는지 표현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감상자에 따라서 지나친 개성 탓에 호불호가 명확히 갈릴 수도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관촉사 은진미륵이 갖는 미학적, 역사적 가치는 오래 전부터 매우 높게 인정받아왔다.
관촉사 은진미륵의 매력을 이해하기 위해선 은진미륵이 제작되었던 '고려 전기'라는 시대적 특수성을 알아야 한다. 이리저리 지리멸렬된 통일신라 후기 한반도를 재통일한 고려의 건국 주체는 누가 뭐래도 각 지방의 호족들이었다. 중앙정부가 제기능을 하지 못한 통일신라 말기에 이르면 각 지방에서 저마다의 유력가들이 궐기하여 신라 중앙정부의 행정력을 거부한 채 독자적 세력을 일구었고, 이러한 호족들은 세력의 크기 차이는 있었지만 전국적으로 포진해있었다. 궁예의 후고구려, 왕건의 고려, 견훤의 후백제도 이러한 배경 속에 탄생했다. 후삼국 전쟁은 비단 이들만의 전쟁이 아니라 누가 가장 많은 호족들을 포섭하는가의 싸움이었고, 호족 포섭 및 회유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고려의 태조 왕건이 승자가 될 수 있었다. 고려의 건국주체 호족들의 기득권은 고려 전기까지 이어졌다. 각 지방에 호족들이 저마다의 세력을 이루었기에 통일신라 때나 고려 전기 때는 일원화된 고전주의 양식은 해체되고 지방별로 호족들의 지원을 받은 개성넘치고 특색있는 문화가 다양하게 꽃피웠다. 따라서 후삼국 시대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혼란했던 시절일 수 있겠으나 미술사적으로는 다양한 양식을 태동시켜 문화의 폭을 풍성하게 만들어준 시대였다. 예술에서 '파격'은 언제나 환영받는다. 혹은 혼란스러웠던 통일신라 말~고려 초 민중들과 더 가까이 다가기 위해 호족들이 의도적으로 노렸던 토속신앙과의 결합이라는 해석도 있다. 은진미륵을 자세히 감상하면 손가락과 발가락의 처리방식 등 인상적인 디테일에도 눈이 가기 마련이다. 또 생각해보면 오래도록 백제 수도의 근교도시였던 관촉사와 은진미륵을 제작한 논산의 호족과 논산 사람들은 백제 문화에 강한 영향을 받은 백제인들의 후손이 아닌가. 논산의 지방적 특색이 직접적으로 투영된 은진미륵은 그렇다면 백제미학의 유산이라고 해도 과한 해석은 아니지 싶다.
"우리는 전성기 문화에서만 미적 가치를 찾을 뿐, 변혁기에는 변혁기 나름의 문화가 있고 지방은 또 지방 나름의 문화가 있음을 간과한다. 변혁기와 지방 문화의 가치는 항시 서툴고 모자라는 것으로만 보게 되는데 그것은 제도권, 아카데미즘, 관학파들이 문화유산과 예술을 보는 편견일 따름이다." - 유홍준
은진미륵을 구경하고 다시 내려가려고 하니 내려가는 길이 올라온 길과 다른 출구 두 곳이 있었다. 올라온 길에는 그다지 특이한 것을 보지 못했으나 다른 길에는 마치 여기를 통과해달라는 잘생긴 석문이 하나 놓여 있었다. 사실 사람 한 명이 지나치기엔 문구멍이 협소해보이긴 하지만 각지고 반듯한 이 석문은 관촉사의 또 하나의 명작으로 소문이 나 있다. 우리나라 여행지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심심치 않게 이러한 석문들을 만난다. 대표적으로 창덕궁의 불로문이 있다. 이러한 석문들이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되어 있는 것 없이 오로지 돌의 조형성만으로 예술성을 표현해내는 점에서 더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관촉사 석문을 지나쳐 내려가다 뒤돌아보니 석문 옆에 '해탈문'이라고 그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올라올 때도 이 길로 올라왔으면 좋았겠다 아쉬워도 해보았지만 관촉사의 감상 시퀀스를 고려했을 때 은진미륵에 감탄한 뒤 석문으로 관촉사 감상을 마무리짓는 플로우도 제법 나쁘진 않았다.
일정은 바로 견훤왕릉을 찾을 예정이었지만 시간이 남아 강경근대거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논산보다는 강경이 훨씬 더 컸다. 금강을 끼고 있는 강경은 충남과 전라도를 잇는 교통로 역할을 한 덕분에 상권이 다른 지역보다 조성되기 유리했고 강경시장은 대구의 서문시장, 평양시장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시장이었다. 강경포구를 중심으로 상업이 크게 발달하다보니 조선 정부에서 직접 관리에 나섰고 '포자'라고 부르는 상설가게들을 정부 차원에서 지원해주었다. 개화기 때 강경의 번화는 정점을 찍었다. 충남에서 최초로 전기가 들어온 지역이었으며 '강경에서는 돈 자랑 하지 마라'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이로 인해 일제강점기 때도 근대신 신식 건물들이 들어섰으며 오늘날 강경근대거리 형성의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군산항과 목포항이 개발되면서 강경포구의 입지가 줄어들었고 광복 후 행정의 중심이 강경에서 논산으로 옮겨갔다. 강경시장은 점점 위축되었고 어느새 그 영광을 역사 속에 묻어야 했다. 하지만 강경시장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으며 매월 4일과 9일에 장이 열린다. 강경시장은 젓갈이 유명한데 현재 대한민국에서 유통되는 젓갈의 50%가 강경의 젓갈이라고 한다. 현재 강경근대거리 활성화에 한창 박차를 가하는 중이라고 들었다. 내가 들었을 땐 현재 강경역사문화연구원으로 쓰이고 있는 일제 시대 조선식산은행 강경지점 건물, 여러 채의 일본식 적산가옥들이 군데군데 자리하고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강경근대거리를 처음 찾는 이들을 위한 안내서들이 더 많이 배치되어 있었으면 어떨까 했다. 그럼에도 혼자 걷던 중 눈길을 확 사로잡는 마치 공주님 같은 동화적 기품 가득한 성당을 하나 발견했다. 안으로 들어가 안내문을 읽어보니 1961년 건립된 강경성당이란다. 역시 예상치 못한 발견이 여행에 있어서 가장 희열 넘치는 순간이다.
논산 여행은 견훤왕릉으로 마무리한다. 견훤왕릉을 찾으러 가면서도 드는 의문이 든다. 견훤은 광주에서 세력을 키운 호족 출신으로 후백제를 건국하고는 수도를 전주로 삼았다. 그런데 대체 왜 견훤왕릉은 논산에 있는걸까? 후삼국시대의 궁예나 견훤은 그 존재감이 역사에서 남다르면서도 그 흔적들을 오늘날에 찾기란 어렵다는 것이 언제나 퍽 아쉽다. 궁예 관련해서는 철원으로 가서 DMZ안보투어를 신청을 한 뒤 철원평화전망대에서 왕궁 터를 망원경으로 찾아보는 게 전부다. 그마저도 울창한 숲에 가려져 있다. 견훤 관련해서도 후백제의 수도 전주에서는 아직까지 왕궁터를 찾고있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견훤에게는 견훤왕릉이라도 전해지고 있다.
견훤은 지금의 경북 문경 출신으로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난 평범한 사람이었다. 날 때부터 호족은 아니었거니와 백제나 전라도와 아주 무관했다. 가난한 농부 아들이었지만 야망은 남달랐던 견훤은 자원입대를 한 후 지금의 서해안 일대로 부임지를 발령받았다. 통일신라 때는 서해안 일대에 해적들이 드글거렸다. 장보고가 생전에는 해적들의 기세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장보고 사후 다시 창궐했다. 해적들이 왕성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의 후원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해안가를 터전으로 하고 있는 호족들, 해상무역에 뛰어든 상단, 그리고 해적들이 카르텔을 일구어 아마 해적인 동시에 해상무역을 겸하는 기업형 조폭 느낌 물씬 나는, 해적과 호족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세력들이었을 것이다. 견훤이 서해안 해적들을 소탕하면서 이름을 점점 떨치기 시작하죠. 비단 소탕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해적들과 그들과 결탁한 호족들을 회유하고 포섭하여 자기 편으로 흡수하였다. 이러면서 견훤은 전라도 서해안 일대의 호족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아직은 중소호족에 불과했던 견훤은 나름 큰 도시였던 무진주, 즉 지금의 광주광역시를 점령하면서 대호족으로 군림했다.
광주에 둥지를 튼 견훤은 광주를 중심으로 주변으로 퍼져나가는데 완산주, 즉 지금의 전주에 갔을 때 전주 백성들이 견훤에게 크게 호응을 했더란다. 민심이 본인에게 있음을 깨달은 견훤은 근거지를 전주로 옮기고 전주에 도읍을 정한 채 아예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 신라로부터 독립해버렸다. 서기 900년 이렇게 왕이 된 견훤은 ‘후백제’를 건국하게 됩니다. 견훤이 뚱딴지 같이 백제계승의식을 밝힌 건 전라도 일대에 있는 호족들을 포섭하기 위한 정치적인 프로파간다로 보인다. 전라도는 옛 백제의 영토였고, 전라도에서 가문 대대로 오래도록 지역유지로 있었다는 건 그 조상들이 백제 지배층 출신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견훤이 백제 계승 의식을 통해 전라도의 호족들을 포섭하기 위해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견훤 자체는 출신이 경북 문경이라는 것이다. 마치 국회의원이나 정치인들이 출신지를 중요시 여기는 것과 같다. 견훤은 수도를 자기 원래 근거지였던 광주가 아니라 전주로 정한 이유가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백제의 역사에서 전남 지역은 백제 영토로 편입됐던 시기가 짧았기에 전북의 전주가 전남의 광주보다 훨씬 더 백제계승의식이 강했다. 하지만 그만큼 견훤에게 등을 돌리려는 전남의 호족들도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여 견훤이 궁예의 태봉과 전쟁을 벌일 때 태봉의 장수 왕건은 배를 타고 서해안을 크게 돌아 전남 지역에 상륙한 뒤 몇 번이고 나주 진출을 노렸다. 그 과정에서 나주를 비롯한 전남의 일부 호족들을 포섭해냈고 후백제 곁에 붙은 해적들을 토벌하기도 했다.
그러나 태봉에서 궁예가 내쫓기고 왕건이 태조 왕건으로 즉위하여 고려를 선포하는 등 내부적으로 어수선한 틈을 타 견훤의 후백제는 북쪽으로 더 진출하여 충청도와 경상북도를 장악한 뒤 결정적으로 신라의 수도 경주로 곧장 향했다. 신라의 경애왕은 왕건에게 구원요청을 하지만 왕건의 목적은 신라 구출보다는 내려간 김에 경북 지역의 호족들 포섭이 우선이었던지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그 사이 견훤은 5000 정예병을 뽑아 신라의 수도 경주로 잠입해서 신라의 왕 경애왕을 죽이고는 다른 왕족이었던 경순왕을 왕으로 옹립했다. 견훤도 겨우 5000 병력으로 오래 경주에 있을 순 없었고 신라에 공포감을 확 준 걸로 만족한 채 경주를 나왔다. 본국으로 돌아가려던 중 왕건의 고려 군대가 경주와 가까운 대구를 지나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대구의 공산에 매복해 있다가 방심하고 있던 왕건의 고려군을 기습했다. 왕건의 주력부대는 궤멸되어버렸고 왕건은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돌아갔다. 고려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견훤의 공산 전투였다. 927년 공산 전투로부터 3년 후 안동의 고창에서 고려 장수 유금필의 맹활약하였고 930년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군 무려 8천 명이 전사하면서 전세를 곧바로 뒤집혔다. 연이은 대패배로 환멸을 느낀 늙은 견훤은 넷째아들에게 양위를 선언했다.그러나 왕위계승에 불만을 품은 견훤의 첫째아들 견신검이 쿠데타를 일으켜 동생을 죽이고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라는 절에 유폐시켰다. 이대로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견훤은 늙은 몸을 이끌고도 금산사를 탈출해 고려의 왕건에게 망명해버렸다. 고려의 왕건은 견훤을 크게 환영하며 왕족의 예로 대우해주었다. 936년 경북 구미의 일리천에서 견신검의 후백제군과 왕건의 고려군이 마지막으로 붙었다. 견훤도 고려 장수로 일리천 전투에 참전하였고 후백제 내 아직 견훤과 내통하던 호족들이 후백제에서 이탈하면서 견신검의 후백제군은 와해되어버렸다. 936년 일리천 전투를 끝으로 고려가 한반도를 재통일하였다.
태조 왕건이 한반도를 재통일하면서 이제 더 이상 견훤의 가치가 없어지자 그간 견훤을 환대했던 왕건의 태도가 바뀐다. 견훤에게 떨어지는 건 별로 없었다. 오히려 태조 왕건이 아들 견신검을 살려둔 것을 보고 왕건과 다투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무슨 일에선지 견훤은 옛 수도였던 전주를 방문하지도 않았다. 야사에서는 언제나 견훤이 전주를 그리워했다고 전해지는데 어쩌면 태조 왕건이 견훤의 전주 방문을 막았을지도 모른다. 전라도의 호족들이 다시 견훤을 중심으로 규합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태조 왕건이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한 것과 비교해보면 상당히 상반된 태도다. 그리하여 견훤은 그나마 전주와 가까운 충청남도의 논산에서 말년을 보냈다. 견훤은 유언으로 전주를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곳에 묻어달라고 했고 현재 논산에는 견훤왕릉이 전해지고 있다. 전해진다고 표현한 이유는 오래도록 이 무덤을 견훤왕릉이라 믿어왔지만 정확하진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생전 태조 왕건에게 우대를 받았던 그래도 한 왕을 지낸 사람의 무덤이라고 하기엔 초라하기 그지 없다. 이마저도 사후 시호도 받고 능도 정부 차원에서 조성해준 경순왕릉과 큰 차이를 보인다. 그렇게 태조 왕건과 고려 정부는 견훤 사후 그의 존재를 고독 속으로 방치해버렸다.
둘째날 백제의 유산이 남긴 논산을 뒤로 하고 인삼의 자취를 찾아 금산으로 넘어간다. 금산에서 먼저 찾은 곳은 칠백의총이다. 칠백의총은 700명의 유해를 안치한 무덤인데 이 700명은 누구일까? 임진왜란 당시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의사 700명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공한 일본군의 전술은 육군이 최단기간으로 북상하면 해군이 남해안과 전라도를 약탈한 후 보급을 조달하는 것이었다. 보급 업무를 맡은 일본 수군을 남해안에서 막은 영웅이 이순신 장군이었다. 보급에 차질이 생기자 일본군 육군의 진군도 올스탑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일본군은 왜 육로를 통해 이순신 장군의 배후를 공격하지 않았을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남해안에서 일본군이 이순신 장군에게 연전연패를 하자 충청도에 주둔하던 일본군 육군을 동원해 전라도로 침공한 뒤 이순신의 배후를 치게 하였다. 그러나 조선군 관군과 의병들의 활약으로 일본군의 전라도 시도를 좌절시켰고 그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바로 금산전투였다.
충청도에는 일본 육군 제6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제6군을 이끄는 왜장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전라도의 전주성 장악을 목표로 충청도에서 군대를 둘로 나누어 전주성으로 진격했다. 둘로 나뉜 제6군 중 한 부대는 전북 완주의 웅치에서 김제군수 정담이 이끄는 조선군과 싸우는데 싸움은 매우 격렬했고 김제군수 정담을 비롯한 다수의 사령관들이 전사했으며 조선군의 시체가 가득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다행히 관군과 의병들이 계속 일본군을 공격해준 결과 웅치고개를 넘고 나서 전주로 향하던 중 지친 일본군은 후퇴하였다. 일본군 제6군의 다른 부대도 완주와 금산이 접하는 대둔산의 이치 고개에 막히는데, 이치를 지키고 있던 장수는 권율 장군이었다. 권율도 이치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잘 버텨냈고 있었다. 이치에서 권율의 조선군과 제6군의 고바야카와가 대치하고 있던 중 갑자기 고바야카와는 군대를 물렸다. 전라도의 의병장 고경명이 일본군 제6군의 본거지였던 금산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본거지가 함락되어버리면 고바야카와는 후일 후퇴도 하지 못하고 전주성을 빼앗아도 후방에서 공격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성급히 군대를 돌려서 금산으로 돌아갔다. 고경명은 오늘날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나 일찍이 문장력으로 이름을 날렸다. 고경명은 서인 소속으로 과거 급제 후에는 중앙정부와 외관직을 두루 겸하다가 서인 정철의 세자 책봉 스캔들에 연루되고 말아 파직되었다. 몇년 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고경명은 호남지역을 돌며 의병을 모았고 한양으로 진격할 예정이었으나 고바야카와의 제6군이 전주성으로 향한다는 소식에 1592년 7월 9일 800여 명의 병력으로 금산을 공격했던 것이었다.
일본군의 맹공에 고경명의 부대는 점점 와해되고 있었지만 고경명은 죽음을 불사안는 정신으로 싸움에 임했고 7월 10일 결국 고경명을 포함 그의 아들 고인후 등이 전사하였다. 고경명이 싸운 곳이 금산의 눈벌이란 곳이며 금산칠백의총기념관 강 건너편이다.
고경명과 비록 금산성을 탈환하지 못하고 전라도의 의병장 고경명은 전사했지만, 고경명이 고바야카와의 배후를 공격해준 덕에 고바야카와는 전라도 진입을 포기하였다. 한편 충청도 의병장이었던 조헌과 영규는 고경명의 원한을 갚고 금산을 탈환하겠다며 금산으로 진격하였다. 조헌은 충북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으로 임진왜란 직전부터 왜군의 침략에 대비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평소 과격한 성격의 조헌은 도끼를 들고 상소를 하는 이른바 '지부상소'의 관례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고경명이 제1차 금산 전투를 진행하는 동안 조헌은 청주성을 탈환했고, 청주성 전투 이후 조헌도 금산에 눈을 돌렸다. 금산을 탈환해야 일본군의 전라도 침입로를 확실하게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충남 공주의 사찰 갑사에서 승려 영규대사가 승병을 이끌고 합류였고 약 700명의 병력으로 금산을 쳤다.
1592년 8월 18일 금산의 연곤평에서 고바야카와의 제6군 15000명과 분전하던 중 충청도 의병 병력은 전멸하였다. 단 고바야카와는 두 차례에 걸친 금산 전투로일본군 제6군도 군사 태반이 박살이 났고 지칠 대로 지쳐 더 이상의 싸움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제2차 금산 전투 후 조헌의 제자들이 연곤평에 와서 그나마 찾은 유해들을 모아 무덤을 만들었으니 이 무덤이 칠백의총이다. (칠백의총은 700은 조헌의 병력만 가리킬 뿐 영규의 승병은 추산하지 않은 숫자다.)
현재 칠백의총 앞에는 기념관이 조성되었다. 칠백의총 부근이 제2차 금산전투의 분전지였던 연곤평이니 칠백의총과 기념관 일대에서 제1차 금산전투가 벌어진 눈벌과 제2차 금산전투가 벌어진 연곤평의 의기를 느낄 수 있는 현장이다. "오늘은 한 번 죽음이 있을 뿐이니 하나의 의(義)자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해라" 임진왜란을 포함해 한국의 환난의 역사에서 영웅은 한 두 명이 아니었다. 1799년(정조 23년) 정부에서 <호남절의록>을 간행해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당시의 호남 의병들과 그 행적들을 수록해두어 전해지고 있다.
생소한 도시를 여행하는 경우 웬만하면 시립역사 박물관을 찾는 편이다. 그 도시의 과거를 배우면서 더 친근해질 수도 있고, 내가 아는 이벤트들이 알고 보니 해당 도시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만한 깨달음의 즐거움이 또 없다. 금산에도 금산역사문화박물관이 있어서 금산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박물관을 찾았다. 금산역사문화박물관은 1층의 금산역사관, 2층의 금산생활민속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1층의 금산역사관에서는 역사 속 금산의 이야기와 금산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2층의 금산생활민속관에서는 금산에 사시던 조상님들의 생활상 및 전해내려오는 풍습을 소개하고 있다. 여러 가지 전시 중에 인상적인 것 하나는 태조 이성계의 태항아리와 태지석이다. 금산의 추부면에는 태조 이성계의 태실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왕가 사람들이 태어나면 탯줄을 잘라다 태항아리에 보관하였고 태항아리를 봉안하던 곳을 태실이라 불렀다. 왕가 중에서도 국왕으로 즉위하면 태실을 더 크게 조성하였다. 태조 이성계의 태항아리는 본래 무학대사의 추천으로 함경도 용연 땅에 있었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며 1대 국왕이 되자 태실을 본관인 전주 부근으로 옮겼다.(당시 금산은 전라도 완산부 소속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태조대왕의 태실을 서울의 창경원으로 옮겼고 원래의 자리에는 비석과 석조물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땅 소유주가 비석과 석조물을 훼손해버렸고 해방 후 1993년 태조대왕의 태실을 복원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태실은 복원되어 있으며 태지석과 태항아리는 금산역사문화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특정 도시의 시립박물관을 가면 언제나 출신인들을 확인한다. 금산 출신인들로 소개하고 싶은 세 사람이 있다. 시대순으로 먼저 야은 길재다.
고려 말 신진사대부는 조선 개국을 두고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뉘었다. 정몽주 필두의 온건 신진사대부는 고려의 왕실을 지키고자 했고 정도전 중심의 급진 신진사대부는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는 이른바 역성혁명을 꾀했다. 결국 정몽주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의 손에 살해당아며 온건 신진사대부는 무너졌다. 야은 길재는 정몽주의 직계 제자로 고려의 마지막 온건 신진사대부이며, 태조 이성계의 끝없는 러브콜을 모두 거절한 채 고려를 무너뜨리는 조선에 봉사할 수 없다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 길재는 경북 구미 출신이기는 하지만 어린 시절 금산의 부리면 불이리에서 부모의 삼년상을 치르기 위해 시묘살이를 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 숙종 3년에 금산의 선비들이 길재의 충절과 효행을 기리고자 길재의 사당을 짓고 서원을 세웠으나 영조 17년에 서원정리령에 따라 폐원하였다. 하지만 길재를 기리고자 하는 마음은 금산 사람들에게 이어지고 있어 영조 37년 금산군수 민백홍이 '백세청풍' 네 글자를 새긴 비석만을 세웠고 순조 4년 다시 서원과 사당을 만들었는데, '백세청풍'에서 이름을 따와 각각 청풍서원과 청풍사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또다시 폐원하였고 1928년 일제강점기 때 중수하여 오늘날까지 매년 9월 15일 청풍서원에서 길재를 배향하고 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 야은 길재
두 번째는 순국열사 홍범식이다. 홍범식은 충북 괴산 출신이긴 하지만 1909년 금산군수로 임명되어 당시 금산 사람들에게 신망이 두터웠던 지방관이었다고 한다. 금산 사람들이 홍범식을 칭송하며 세운 송덕비만 38개였다고 한다. 하지만 1년 후 대한제국의 주권을 일제에게 빼앗기며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나라를 빼앗긴 울분에 찬 홍범식은 강제병합이 체결된 당일 저녁에 소나무에 목을 매 자결하였다. 홍범식은 가족들에게 유성 10여 통을 남겨두었다. 유서가 전부 전해지지는 않으나 그의 장남에게 남긴 유서에는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하던지 조선사람으로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빼앗긴 나라를 기어이 되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 라며 조국의 결의를 다지도록 하였다. 아버지의 이 유서를 받은 홍범식의 장남이 바로 일제강점기 조선의 3대 천재 중 한 명인 벽초 홍명희고, 벽초 홍명희는 이광수, 최남선과 달리 조선의 3대 천재 중 유일하게 친일을 하지 않았다.
마지막은 한국현대사의 정치인 유진산이다. 현 민주당의 직계 전신을 창당한 유진산은 민주당계열 진보 정당의 역사를 논할 때 빠질 수가 없는 정치거물이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소장은 1963년까지 군정기를 선포하면서 모든 정당들을 강제해산하였다. 63년 군정이 끝이 나고 박정희도 공화당을 조직해 정식적인 정당 소속으로 대통령이 되자 정당 창당의 자유를 열어 야당 정당들이 우후죽순 나타났다. 복잡할 정도로 많았는데 1965년 민중당으로 전부 통합되었다. 민중당은 여러 정당들이 이합집산을 하다가 통합된 민중당이었기에 박정희와 공화당의 정책을 두고 민중당 내부적으로도 찬반이 많이 갈렸다. 윤보선 중심의 세력들은 1966년 민중당을 탈당해 새로운 정당을 만들지만 후보 단일화의 문제로 인해 1967년 다시 야당 합당이 이루어지니 이렇게 새롭게 탄생한 정당이 신민당이었다. 신민당은 박정희의 60년대 제3공화국과 70년대 유신시절 여당과 맞서 싸우는 제1야당이었습니다. 이 신민당의 당수 겸 총재가 유진산이었다. 유진산은 충남 금산 출신으로 10대 시절 3.1운동에도 참여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락원으로도 활동했다. 광복 후 신익희, 조병옥, 장면, 윤보선 등이 있던 민주당에 들어가 이승만 자유당의 야당 당원이었다. 4.19혁명으로 여당이 되지만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로 정당이 해산되었다가 군정 이후 정당 창당이 보장되었을 때 유진산은 원로당원들을 모아 신민당 창당에 가장 큰 기둥 역할을 해주었다. 하지만 당시 신민당의 야당 성격은 오늘날의 민주당 정치성향과 완전히 동일하진 않았다. 유진산을 비롯해서 유진산이 모은 신민당 내 원로당원들은 박정희의 독재에 항거할 뿐 정치성향 자체는 보수였다. 더불어 유진산과 원로당원들은 박정희의 독재에도 태도가 미온했다. 이는 신민당 내 젊은 세대층의 반발을 살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와 공화당 그리고 중앙정보부에서는 이러한 유진산을 계속 야당 신민당의 당대표로 두고 대권주자로 지지하였다. 신민당 내부에서 유진산에게 특히 반발했던 젊은 정치인이 이른바 '40대 기수론'이란 붐을 일으키던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 등이었다. 세 사람은 혈기왕성한 젊은 감각으로 큰 인기를 모으고 있었고 세 사람의 강력한 반발로 유진산은 경선후보직을 포기했다. 1970년 이듬해 대선을 위해 신민당에서 대선 후보를 결정해야 했다. 유진산이 사퇴한 입장에서 박정희와 정치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사람으로 김대중과 김영삼이 거론되었다. 김대중과 김영삼을 두고 대선 후보 경선을 치렀는데, 사퇴한 유진산이 김영삼을 지지하며 김영삼의 경선 출마가 거의 확실시 되는 순간 김대중의 참모 엄창록의 활약으로 또다른 40대 기수 중 한 명이었던 이철승이 김대중으로 지지하며 김대중이 대권에 출마했다. 1971년 대선이 끝이 나고 다음은 총선이 있었는데 유진산이 공화당으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로비를 받고 일부러 선거구를 양보해주었다는 스캔들이 불거지자 신민당에서 큰 시위가 일어났다. 유진산의 저택을 습격하고 당사에서 패싸움을 벌일 정도였다. 이 사건이 진산 파동(1981)이고 이후 신민당은 진산계와 반진산계로 나뉘었다. 70년대에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하고 김대중을 일본으로 반강제적으로 보내버리면서 신민당은 완전히 진산계가 장악했으며 유진산은 1974년 암으로 사망하였다.
이젠 금산의 인삼투어를 해보고자 한다. 금산의 인삼 이야기는 금산세계인삼엑스포금산인삼관을 찾으면 자세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인삼은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에서 재배해왔다. 중국에선 한반도의 인삼은 고려삼, 백제삼, 신라삼(나삼)으로 구분하여 수입하였으며 고려시대부터는 고려인삼의 명성이 아시아 국제적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자연재배가 아닌 인위적인 재배의 첫 시작은 조선중기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을 세운 주세붕이 풍기군수로 있던 시절 종자를 심어 재배했던 것이며 영주의 풍기인삼을 우리나라 최초로 인삼 재배 지역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전에도 자연재배로 큰 인기를 끌었으며 오죽하면 조선시대에도 조선의 인삼을 고려인삼이라고 불렀다. 옛 고려의 수도 개성에서도 인삼 재배의 전통이 계속 내려와 조선 후기에는 '송상'이라는 인삼무역으로 큰 돈을 번 거상이 출현하기도 하였다. 개성의 송상은 아니었지만 의주의 거상이었던 임상옥이 청나라와 인삼, 그중에서도 홍삼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창출했으며 홍삼 장사로 조선 3년치 세입을 벌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조선 인삼과 홍삼에 열광했고, 대마도에서 에도 막부로 조선 홍삼을 조공하지 않으면 대마도의 태수 자리를 유지하기 어려웠다는 말도 있었다. 조선 후기 인삼무역을 ‘인삼의 길’이라고 불렀으며 1882년 조선과 미국이 최초로 맺은 근대적 조약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선 미국인들이 무단으로 조선에서 인삼을 국외로 가지고 나가면 안 된다는 조항이 따로 만들 정도로 우리의 인삼과 홍삼은 당대 아시아에서 최고 인기품목 중 하나였다.
충남 금산군에서는 인삼의 자연재배는 금산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무려 1500년 전 백제의 강 처사가 금산의 관음굴에서 병든 어머니의 쾌유를 빌던 중 산신령이 전해준 인삼을 달여 어머니를 먹이니 어머니의 병이 씻은 듯 나았고 강 처사는 삼의 모양이 마치 사람과 같다고 하여 '인삼'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삼'에 대한 공식적인 첫 기록은 백제 무령왕이 중국 양나라 무제에게 백제삼을 공물로 바쳤다는 기록이다. 중국 측 기록 <본초몽전>에서는 "백제삼은 희고 단단하며 모양은 둥글다"고 묘사하고 있다. 백제삼이 우리나라의 첫 인삼의 문헌적 등장이고, 금산은 옛 백제 땅이었기에 금산에서는 백제삼의 정통을 금산이 이어가고 있다고 자부한다. 근대적 산업 형태의 금산인삼의 시작은 일제강점기부터였다. 1923년 금산삼업조합이 만들어져 금산인삼이라는 상표를 내었다. 1936년 조선총독부는 금산인삼이 전국 인삼경작 면적이 1위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해방 후 한반도가 분단되면서 개성을 북한에 빼앗기니 금산이 단언 국내 독보적인 인삼생산도시가 되었다. 1981년부터는 금산인삼제를 시작하였고 2006년에는 금산세계인삼엑스포가 개최되어 2011년과 2017년에도 성황리에 세계인삼엑스포를 주최했다.
조선시대에는 아무래도 개성의 인삼이 금산의 인삼보다 시장성이 크긴 했지만 두 지역 간 약간의 차이는 있다. 개성인삼은 인삼을 쪄서 붉게 만든 홍삼이 중심이었고, 금산인삼은 가공하지 않은 인삼의 생뿌리인 수삼과 인삼을 건조시킨 백삼이 주류였다. 오늘날에도 금산인삼은 수삼과 백삼이 메인이며 금산은 국내 최대 인삼 생산지이다.
금산인삼관 앞에는 인삼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근처에만 가도 인삼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냄새만으로 건강해지는 착각마저 든다. 인삼시장에는 인삼과 인삼으로 만든 다양한 제품들과 더불어 인삼먹거리들도 판다. 허기도 지니 아무 곳에 들어가 인삼튀김을 하나 주문했다. 인삼튀김을 시키니 물 대신 인삼차를 내어주였다. 그리고 인삼튀김을 찍어먹을 조청을 주셨는데 찍어 먹어보니 조청마저 인삼으로 만든 조청이었다. 인삼이 아닌 게 없다! 다소 떫고 쓸 줄 알았는데 조청은 달고 튀김은 바삭하고 차는 입가심으로 해주니 의외로 조화롭다. 간식거리로 떼울 예정이었는데 다 먹고 나니 배가 이미 차버렸다. 밥을 먹으러 가야 하는데..
금산인삼시장에는 없지만 오래도록 금산은 인삼이 유명했다보니 금산에서는 금산인삼주라는 전통주를 만들어왔다. 금산인삼주는 5년근 이상의 인삼으로만 술을 내며 무려 1399년부터 김문기 가문에서 금산인삼주 전통을 시작해 오늘날에는 김문기의 16대손이 김창수 씨가 식품명인 2호로 지정되어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본초강목> <임원십육지> 등에서도 금산인삼주에 대한 기록도 있다. 김창수 명인 외에도 여러 금산인삼주가 많이 개발되어왔는데 대부분 인삼의 생뿌리인 수삼을 이용한다. 최근에는 금가루를 뿌린 금설이 유행하고 있다. 금산인삼주 수삼은 인삼의 강렬한 맛 때문에 호불호가 나뉘는데 인삼 특유의 향과 맛이 맞지 않는다면 목넘김이 깔끔한 금설을 추천한다.
내가 충남의 향토음식으로 최고로 꼽는 것은 우럭젓국과 어죽이다. 우럭젓국은 서산과 당이 유명하고 어죽은 금산에서 이름을 알렸다. 대학시절 선배들과 답사를 떠났을 때 추운 겨울아침 먹었던 어죽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허기지고 추위에 떨며 다 같이 허겁지겁 어죽을 먹었고, 아무리 선배들이어도 다들 어렸기에 모두가 처음인 어죽의 맛에 연신 감탄하면서 배를 채웠다. 그후로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죽을 먹어보지 못했다. 서울에서 굳이 찾는다면 찾을 순 있겠지만 그 수가 매우 적고 맛도 충남에서 먹었던 그때의 어죽 맛을 따라오지 못할까봐 일부러 안 찾았던 거 같기도 하다. 이번에 금산을 돌아다니며 금산이야말로 어죽으로 유명하다고 하니 적어도 그때의 어죽 맛보다 못하진 않을거라는 확신에 매우 반가운 마음으로 어죽집을 찾았다. 금산에서는 30년 전통의 '원골식당'이 가장 유명하다. 확실히 도착을 하자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고 웨이팅도 길었다. 이런 곳에 나 혼자 들어가 어죽 2인분을 시키기 곤란하여 포장주문을 했다. 금산의 어죽은 늘 따라오는 또 하나의 향토음식이 도리뱅뱅이다. 도리뱅뱅이는 손가락만한 작은 민물고기를 고추장에 양념하여 원형으로 플레이팅하는 음식으로 주로 피라미나 빙어를 쓴다고 한다. 도리뱅뱅이야말로 정말 서울에선 맛볼 수가 없는 음식이다. 포장을 하고 다른 곳에서 먹는데 어죽의 맛이야 내 기대를 충분히 충족시켜주었고, 도리뱅뱅이는 예상 외로 감칠맛이 훌륭해서 며칠이 지나도록 그 맛에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포장주문을 기다리는 동안 하릴없이 무료해서 밖에 나와 기다리는데 이토록 많은 인파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원골식당이 맛있고 유명해도 관광버스 몇 대가 대기하고 있을 정도라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는데 충청도 특유의 목가적이고 호기로운 자연경관이 펼쳐지는 게 아닌가! 크진 않지만 이토록 잘생기고 마음 편안하게 해주는 자연의 선물이 감동적이고 고마웠다. 찾아보니 이곳은 기러기 공원이라고 금산군 제원면에 있으며 자연암반에 인공폭포를 조성했다고 한다. 최근에는 차박 등 캠핑족들도 몰려들고 있다고 하고 주변에는 맛집과 카페들이 즐비해 있으니 언젠간 꼭 계획하고 이곳을 다시 찾고 싶다.
계획했던 금산여행도 원골식당이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아직 날이 밝고, 아까 금산역사문화박물관에서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이 있었다. 한국최초의 천주교 박해사건이었던 진산사건이 바로 이곳 금산이었다는 것이다. 바로 차를 끌고 진산사건이 일어났던 터에 세워진 진산성당을 찾으러 갔다.
1791년(정조 15년)에 일어난 최초의 천주교 박해사건 일명 '진산사건'의 공식명칭은 신해박해이다. 천주교는 서학이라는 학문으로 몰락 붕당이었던 남인 계열 지식인들과 청나라와 조선을 자주 왕래하던 역관들을 통해 조선에 유입되었다. 서학이라는 학문은 점차 종교로서의 천주교로 발전했다. 1777년 조선 천주교 신자 1세대로 정약용 3형제, 권철신 형제, 이승훈, 역관 김범우 등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천주교 신자를 자칭했을 뿐 누구 하나 교황청 소속의 사제들에게 세례를 받지 않았기에 정식적인 천주교 신자라고 할 수 없었다. 1784년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한국 최초로 프랑스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고, 이승훈의 세례를 기점으로 천주교는 국내에서 더 많이 퍼져갔다. 1785년에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신자들이 집회를 하던 중 도박을 단속하던 포졸들이 도박을 한다고 착각하여 집에 들어오면서 집회가 적발이 되고 말았다. 아직까지 조선 정부가 천주교를 무작정 박해할 때는 아니였고 또 대부분이 사대부 양반이라는 이유로 훈방 조치로 끝내주었다. 체포된 신자들도 거짓으로 배교하겠다고 하며 풀려났다. 반면 중인 출신의 김범우는 배교를 끝까지 거부하다가 순교하였다.
한편 적당히 훈방을 받고 풀려난 남인 신자들은 신앙활동을 이어갔는데 1790년 교황청에서 동양의 제사를 금지한다는 선언을 발표했다. 제사가 유교의 근간이라 생각했던 양반들은 천주교를 배교하기도 하였는데 그 중 한국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승훈도 있었다. 반면 교황청의 지시에 따라 제사를 하지 않은 신자들도 있었다. 이것이 화근이 되었다. 조선 정부 입장에서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사이비 종교가 퍼지는 건 일반적인 현상이라 초반에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지만 유교 국가 조선에서 제사를 하지 않는 건 일종의 사상범이었고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건드리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교황청에서 제사금지령이 떨어지고 이듬해 1791년 충남 금산 진산군에서 천주교 신자였던 윤지충과 권상연이 윤지충의 모친상에서 제사를 지낼 수 없다며 천주교식으로 신주를 불태워버렸다. 이 진산 사건은 너무나 충격적인 화제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사람들은 지배층이든 피지배층이든 제사를 지내는 건 당연한 일이고 그것이 자식의 도리라 생각했거늘 제사를 안 지내는 것도 모잘라 신주를 불태워버리다니. 진산 사건은 조정에도 논의의 대상으로 보고가 되었다. 남인 계열의 채제공마저도 서학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고 엄벌을 주장했다. 정조는 윤지충과 권상연 두 사람을 처형했고, 조선 최초로 세례를 받았던 이승훈 베드로 포함 관련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어 처형까지는 아니지만 삭탈관직 혹은 유배령을 받았다. 조선 최초로 정부가 개입하여 천주교 신자들에게 벌을 내린 박해사건을 신해박해라고 한다.
정조의 신해박해는 이후 등장할 박해들에 비해선 상당히 작은 박해였다. 조정의 신하들은 더 철저한 색출작업과 엄한 처벌을 요구했으나 정조는 신하들을 달래며 이 정도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정조가 천주교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걸까? 결코 아니다. 정조도 천주교를 배격했다. 다만 남인 계열 중엔 정약용처럼 정조의 측근들이 있었고 또 사상적으로도 정조는 천주교가 횡횡하는 것은 기존의 성리학이 잘못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며 성리학만 바로 서면 천주교가 자연스레 사라지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저 정조는 천주교 사건이 정치적 숙청 사건으로 번지길 원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정조 사후 두 번째 박해사건인 신유박해가 터졌고, 이는 <서울촌놈의 국내여행 뿌수기> '제천 편'에 자세히 기술해두었다.
1887년 개화기에 포교의 자유가 인정되고는 진산사건 터에 교회와 학교시설 등이 들어섰고 1927년 오늘날의 진산성지성당이 건립되었다. 시골 깊숙이 있는 진산성지성당은 사람의 왕래가 적어 스산한 느낌이 들지만 숭고한 신앙심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해보니 스산함은 금세 경건함으로 바뀌었다.
도시도 사람처럼 이미지라는 것이 있다. 한 번 박힌 이미지는 쉽게 벗어나기 힘들다. 논산을 갔다왔다고 하면 다들 "논산에 훈련소말고 볼 게 또 있어?"라는 말을 제일 많이 들었다. 혹은 금산을 갔다왔다고 하면 "아, 인삼 유명한 곳?" "거기 어죽이 맛있잖아!" 라는 말이 가장 많이 나오고 말이다. 고정된 이미지라는 게 정체성을 확실하게 나타내고 사람들의 인식 속에 쉽게 자리할 수 있기 때문에 마냥 나쁘다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지를 떠올릴 땐 고정된 이미지와 함께 그 외의 이미지가 더 있지는 않을까라는 호기심까지 나아가는 것이 미학의 안목이다. 이번 여행의 묘미는 계획하지 않은 일정들, 현장에서 결정한 장소들을 즉흥으로 둘러보는 것이었다. 인식의 폭을 넓히고 깊이 있는 안목으로 이미지를 입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은 이처럼 계획하지 않은 우발성으로 더 탄력을 받을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책 추천
- 옥순종 <은밀하고 위대한 인삼 이야기>
역사와 광고를 전공하시고 인삼에 대한 문화를 연구하시는 옥순종 작가님의 저서로 한국 고려인삼의 저력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한국의 인삼이야 국제적으로 유명하다는 건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과연 인삼의 효능과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그 역사가 얼마나 깊은지 학술적이면서도 쉽게 설명합니다. 수삼이나 백삼보다는 홍삼으로서 특히 개성 중심의 인상이 주된 내용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나라 '인삼' 자체의 위력에 지적인 자부심을 느끼게 해준답니다. 다양한 사료들을 인용하며 수준높은 인삼을 재배하기 위한 역사 속 우리 조상들의 노력에 감탄이 절로 나오죠. 과거의 우리와 현재의 우리 그리고 나아가 미래의 우리는 인삼가 떼래야 뗄 수 없을 정도로 인삼은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랍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이준익 감독의 <황산벌>
개봉 당시,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도 한국인들을 그렇게도 많이 웃게 해준 코미디 영화죠. 하지만 비단 웃고 넘기는 걸 넘어 심오한 주제의식이 명확한 영화이기도 한데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창시절에 전쟁에 나서기 전 처자식을 죽인 계백의 의지를 영웅화하도록 배웠을 겁니다. 영화 <황산벌>에서는 오히려 이를 문제시삼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계백의 말에 계백의 처는 '호랑이는 가죽 때문에 죽고, 사람은 이름 때문에 죽는다'며 반박합니다. 그리고 황산벌 전투 후 유일하게 살아남은 병사의 이름이 '거시기' 즉 이름이 없는 존재죠. 박장대소하며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이면서도 전쟁의 피로함과 몰인간성을 지적하는 반전영화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대한민국의 지역갈등을 웃음으로 승화한 작품으로도 호평을 받았는데, 영화의 흥행과 더불어 백제의 중심이 전라도였다는 이미지가 박혀버렸습니다. 백제 계백과 신라 김유신이 맞붙은 황산벌은 오늘날의 논산에 해당하며 백제의 중심지는 충청도였습니다. 오히려 전라도가 백제의 영토 중 가장 영향력이 적은 지역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