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의 공원을 여행하다
찌는 듯한 더위에 습한 바깥 공기로 인해 어디든 나가긴 싫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 쐴 수 있는 실내만 찾게 되는 여름철. 여행을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여름철 여행을 망설여지기 마련이다. 조금만 움직여도 금세 지쳐버리기 때문이다.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과 생각만으로 벌써 무더위에 지칠 걱정 사이 언제나 딜레마에 놓이는 계절이다. 그럴 때마다의 결론은 어디론가 거창한 곳으로 떠나진 않되 공원을 산보한다는 마음으로 나가는 것이다. 부담은 덜 되지만 그럼에도 여행의 기분은 채울 수 있는 곳. 서울 근교 경기도에는 추천할만한 곳들이 꽤 있다.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대자연이라기보단 단아하고 소소한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곳. 웅장한 자연의 감동을 받기보단 나의 공원 산책 한 켠을 장식해주는 곳. 바로 구리와 하남이다. 구리와 하남은 한강의 혜택을 받은 도심의 공원들이다. 구리에서는 싯푸른 나무들의 향연을, 하남에서는 잔잔한 강의 정취를 맡아볼 수 있다.
분단된 현실에서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중심을 두었던 고구려 역사의 흔적을 남한 땅에서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나마 남아 있는 고구려인들의 유산이 더없이 소중할 뿐인데, 경기도 구리에는 고구려대장간을 테마로 한 고구려대장간마을이 있어 여러 드라마의 촬영지로, 또 관광객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고증이 얼마나 되었을진 모르겠지만 나름 고구려의 고분벽화를 참고하여 마을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대장간뿐 아니라 고구려 시대의 주거, 주막, 경당, 망루 등의 다양한 시설도 만들어져 있다. 고구려'대장간'마을이라 한 건 호전적인 전투민족으로서 고구려인들의 철기 문화를 상징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었나 싶다. 조선을 비롯해 남방의 문화에 익숙한 우리에게 고구려 건축양식은 이색적이다. 서양의 판타지 드라마에 나와도 어색하지 않을 거 같다. 우리에게 자랑스러우면서도 또 신비스러운 역사가 고구려이기에 그만큼 오늘날 우리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자극한다.
고구려인들은 어떤 무기를 사용했을까? 고구려의 전통적인 주무기이자 고구려인들의 자랑은 활이었다. 유목민족의 전통을 물씬 흡수했던 고구려는 짧고 많이 휘어있는 각궁을 사용했다. 고구려의 활을 국제적으론 ‘예맥족이 사용한 활’이란 뜻에서 맥궁이라고 불렀고 당시 맥궁의 우수성은 주변 국가들 모두가 인정하는 수준이었다. 활시위는 소나 말의 힘줄을 사용했고 활이 짧고 많이 휘어있으니 탄력성이 압도적이었다. 화살촉은 용도에 따라 크기와 넓이가 상이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듯 고구려 병사들은 말 위에서 활을 쏘는 배사법, 이른바 파르티안 샷을 구사했고 이 파르티안 샷은 고도로 숙련된 기마술이 없으면 구사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석궁인 쇠뇌도 많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검은 1m 이상의 외날형 직도 ‘고리자루큰칼’이었으며 이러한 형태의 검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보편적으로 쓰이던 검이었다. 고분벽화를 보면 고구려는 ‘부월수’라는 도끼전문부대를 편성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창은 기병이 쓰는 창과 보병이 쓰는 창이 따로 있다. 방패는 나무, 가죽, 철판 등을 섞어 만들었으며 크게 두 종류 6각형 방패와 타원형 방패가 있었다. 갑옷은 가죽갑옷과 철갑옷이 있었는데 기병들이 보병보다 더 중무장을 했다. 고분벽화에도 보이듯이 고구려의 철갑옷은 하나의 통으로 만든 판갑이 아니라 얇고 넓은 철판들을 가죽끈으로 엮어 이어붙인 찰갑의 형태였다. 찰갑은 탄력성이 좋아 방어에 유리하고 몸을 유연하게 움직이기에도 편리했다. 무엇보다 고구려의 철제련술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백제에는 석공기술, 신라에는 세금기술이 발달해 있었다면 고구려에겐 철제기술이 있었다. 고구려 기병대 중 최정예 기병대는 말도 철제무장화했는데 이 무장화한 말을 ‘개마’라고 했으며 개마를 탄 기병부대를 ‘개마무사’라고 불렀다. 그리고 개마무사들로 구성된 개마부대는 고구려 최정예기병대로 고구려판 특전사 내지 해병대 같은 개념이었다. 지휘관들은 직급이나 신분에 따라 투구에 뿔 장식 등을 넣기도 했다.
경기도 구리에 고구려를 테마로 한 마을이 조성된 것은 근처의 아차산성 때문일 것이다. 삼국시대 고구려-백제-신라는 한강을 두고 가장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기 때문에 오늘날 경기도 일대에는 삼국시대의 산성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삼국 중 한강을 차지한 누구라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요충지마다 산성을 쌓았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에서 쌓은 성이더라도 다른 나라가 한강을 차지하면 기존의 산성들을 더 강화하고 보수하면서 경기도와 한강은 격전의 중심부가 되었다. 이중 아차산성은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끈 국왕 장수왕이 백제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때 백제의 개로왕이 마지막까지 항전하다가 붙잡힌 곳으로 이후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방어하기 위해 중요하게 방어하였던 성들 중 하나였다. 1997년과 1998년, 그리고 2007년경 발굴 조사 결과 아차산성 아차4보루에서 고구려 시대 토기류와 철기류들이 출토되어 남한 땅에선 보기 드문 고구려 유물의 리스트를 더 보강할 수 있게 되었다. 아차산성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하는 전시관을 두었고 그 인근에 조성한 마을이 구리의 고구려대장간마을이다.
경기도 구리에는 최대규모의 조선왕릉군인 동구릉이 있다. 경복궁 기준 동쪽에 9개의 릉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동구릉에는 태조 이성계, 5대왕 문종과 그의 부인 현덕왕후 권씨, 선조의 두 명의 부인 의인왕후 박씨와 인목왕후 김씨, 인조의 두 번째 왕비 장렬왕후 조씨, 18대왕 현종과 그의 부인 명성왕후 김씨, 경종의 부인 단의왕후 심씨, 21대왕 영조와 그의 부인 정순왕후 김씨, 효명세자와 조 대비, 24대왕 헌종과 그의 두 명의 부인 효현왕후 김씨와 효정왕후 홍씨 등이 쉬고 있다. 총 5명의 왕, 9명의 왕비, 1명의 세자와 1명의 세자빈 다 합해 16명이 계신다. 가장 많은 왕릉이 모여 있는 만큼 한 바퀴 다 둘러보는데도 상당한 시간과 체력이 소요된다.
조선왕릉은 2009년 그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조선왕릉은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의 3번째 등재기준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4번째 등재기준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6번째 등재기준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을 충족시켰다. 역사적, 사상적, 문화적 가치가 남다르다는 뜻이다.
동구릉에 묻힌 왕과 왕비에 대해 일일이 장황하게 서술하는 것보다 왕들에 대해선 그들이 남겼던 시와 잘 알려지지 않은 왕비에 대해선 간략한 소개를 해볼까 한다. 국왕에게 문예적 능력은 기본소양과도 같아서 각 왕들의 시를 찾아서 비교해보는 일도 재미나다. 시대순서대로보단 동구릉의 동선 순서대로 소개해보겠다. 동구릉에 입장에서 왼쪽부터 관람한다면 연꽃 연못을 지나 조선의 18대왕 현종과 그의 왕비 명성왕후 김씨의 쌍릉인 숭릉을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다. 쌍릉이란 왕과 왕비의 부부 봉분이 별개로 나란히 있는 무덤 형태를 말한다. 명성왕후 김씨는 현종의 유일한 왕비로 조선의 여러 여걸 왕비 중 하나로 손꼽힌다. 성격이 매우 과격하고 다혈질의 성격이었다고 하며 이 때문인지 몰라도 현종은 후궁 한 명 두지를 않았고 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숙종은 성격이 괴팍하기 그지 없었다고 한다. 명성왕후 김씨는 세자빈에서 바로 왕비로 승격한 케이스라 왕비로서의 체면과 권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붕당정치에도 깊이 개입하였다. 명성왕후 김씨는 훗날 아들 숙종이 왕이 되고 대비가 되었을 때 숙종이 미모가 아리따운 어느 한 궁녀와 가까이 지내자 이를 안 좋게 본 명성왕후 김씨가 궁녀를 내쫓은 적이 있었다. 훗날 명성왕후 김씨 사후 궁녀가 다시 입궁하는데 이 여인이 장 희빈이었다. 명성왕후 김씨의 남편인 18대왕 현종은 역대 조선국왕들 중 가장 성격이 온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음은 현종의 매형 심익현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떠날 때 현종이 지어준 시이다.
오늘 어머니와 헤어진 후에
중국 수도 변방에서 먼지바람 무릅쓸 때
온갖 이별의 슬픔 꿈에 더해지는데
천 리나 되는 여정에서 저무는 봄을 볼 게야
대동강 안개 속 꽃은 지는 달이 비추겠고
천리장성 성가퀴는 석양에 새롭겠지
산하를 한번 둘러보면 웅장함이 다르리니
오직 한족이 수건에 눈물 적심을 보겠네
숭릉을 나와 두 번째 왕릉은 경종의 첫 아내였던 단의왕후 심씨의 무덤인 혜릉이다. 엄밀히 말해서 단의왕후 심씨는 왕비가 되지 못한 왕비였다. 11살의 나이 때 아직은 세자였던 경종과 혼인하였으나 세자빈의 몸상태가 매우 나빴다고 한다. 그래도 20년 넘게 세자 경종과 결혼생활을 했지만 끝내 경종의 왕 등극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따라서 그녀는 세자빈 신분으로 사망하여 왕릉에 묻힐 수 없었지만 경종이 재위 이후 그녀를 단의왕후에 추존하여 왕릉급 규모의 무덤에 묻힐 수 있었다.
동구릉의 세 번째 왕릉은 24대왕 헌종과 그의 첫 번째 부인, 두 번째 부인인 효현왕후 김씨와 효정황후 홍씨의 무덤인 경릉이다. 경릉은 세 명의 봉분이 나란히 놓여있는 삼연릉이다. 훗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등극하면서 헌종과 그 직계가족들을 황족의 지위로 추존하여서 현재 공식명칭은 헌종성황제, 효현성황후 김씨, 효정성황후 홍씨이다. 헌종은 8살이라는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등극한 왕이다. 헌종이 이제 겨우 10대를 넘어선 재위 3년째에 결혼한 첫 왕비가 효현왕후였다. 그러나 몸이 허약했는지 6년만에 16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새로운 왕비를 들여야 해서 내명부에서는 왕비 간택령을 내렸다. 최종후보까지 올라온 여인들 가운데 헌종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었으나 헌종의 어머니와 할머님이 원하는 배필이 따로 있던 바람에 둘의 바람대로 혼인한 여인이 두 번째 왕후였던 효정왕후 홍씨였다. 그러나 헌종은 마음에 두었던 다른 여인을 잊지 못했고 그녀를 후궁으로 들이니 경빈 김씨였다. 헌종은 경빈 김씨를 무척이나 사랑하여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살고 싶다며 그녀를 위해 창덕궁에 낙선재와 석복헌을 지어주기도 했다. 헌종과 경빈 김씨의 러브스토리를 모티프로 만들어진 드라마가 <해를 품은 달>이었다. 헌종은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지만 두 번째 왕후였던 효정왕후 홍씨는 장수하여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것까지 목격하고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사망하였다. 헌종은 매우 젊은 나이에 사망하여 안타까움을 사는 왕인데 대단한 수집가였다고 한다. 시첩, 화첩, 서예, 문집 등 헌종의 수집품만으로도 창덕궁에 도서관과 창고를 만들 정도였다.
한가한 정원에 바람 이니 연꽃 향기 가득해
남쪽 두둑 어둠 짙음은 낮에도 비가 심해서네
아름다운 기운 가득하니 정말 즐길 만하나
서울에 해가 저무니 온양행궁에서 돌아오네
네 번째 무덤은 21대왕 영조와 그의 둘째왕후인 정순왕후 김씨의 원릉이다. 원릉은 숭릉처럼 두 봉분이 나란히 있는 쌍릉이다. 정순왕후 김씨는 영조가 66세의 나이 때 15살의 나이로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래도 영조가 양심은 있어서인지 정순왕후 김씨 사이에는 후사가 없었다. 조선후기 존재감이 묵직한 두 명의 무덤이라고 하니 원릉의 분위기가 무거워진 느낌이다. 조선이 세도정치기로 무너지기 직전 어떻게 보면 조선정치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사람들이다. 두 사람에 대해서만 다뤄도 책 하나가 뚝딱 나올 정도로 조선후기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토록 대단했던 이들이었으나 결국은 흙 속에 있는 현실을 보면 인간의 존재가 참으로 유한하고 또 그 때문에 더 의미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다음은 영조의 시는 아니지만 영조가 쓴 글 중 일부이다. 그의 호기로운 정치의식을 엿볼 수 있다.
아! 오늘은 바로 처음 정사를 보는 날이니 날마다 신칙하고 면려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탕평이다. 대저 인의는 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다. 그러므로 맹자가 말하기를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천하를 통일할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죄 없는 한 사람을 죽여 천하를 얻는다 해도 하지 않는 것이다"라 하였으니 이는 전국시대에도 그러한데 하물며 평화로운 시대에서랴! 그러므로 탕평이 이룩된 후에야 화기(和氣)를 부를 수 있고 화기를 부른 연후에야 조정이 안정될 수 있으며 조정이 안정된 뒤에야 백성이 평안함을 얻을 수 있고 백성이 편안한 뒤에야 나라가 나라다울 수 있다.
다섯번째 무덤은 인조의 두 번째 왕비 장렬왕후 조씨가 묻혀 있는 휘릉이다. 휘릉은 동구릉 가장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1638년 14살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당시 인조의 나이 43살이었다. 인조의 아들들이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보다도 어렸다. 그러나 인조는 소용 조씨라는 후궁을 총애하고 있던터라 장렬왕후에 대한 인조의 관심은 거의 없다시피했다. 궁궐에 들어오고 11년 뒤 인조가 사망하자 장렬왕후 조씨는 대비가 되었다.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아들 봉림대군이 뒤를 이어 효종이 되었고 효종 사후에는 현종이 즉위하면서 왕의 할머니, 즉 대왕대비가 되었다. 장렬왕후 조씨는 예학 논쟁이 정치싸움으로 번졌던 '예송논쟁'의 당사자로 유명하다. 효종 사후 그의 아들 현종이 즉위할 때 효종의 상 기간 효종의 어머니뻘인 장렬왕후가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느냐를 두고 붕당 간의 논쟁이 발생한 것이다. 붕당간 신경전이 치열했던 시절 상복기간을 둔 예학에 대한 입장 차이는 정치싸움으로 번졌다. 현종이 어느 정도 타협을 도모했지만 효종의 아내 즉 장렬왕후 조씨의 며느리가 죽고 나서 다시금 장렬왕후 조씨가 며느리 상 기간 얼마나 상복을 입어야하는지를 두고 2차 예송논쟁이 발발했던 것이다. 장렬왕후 조씨는 손자뻘인 현종의 죽음과 증손자뻘인 숙종의 즉위까지 본 뒤 무려 궁중에 있는 동안 4명의 왕들의 치세를 겪고 1688년 6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여섯 번째 무덤은 동구릉에서 가장 유명한 건원릉이다. 바로 조선의 건국자, 태조 이성계의 무덤이다. 태조 이성계의 말년을 본다면 이성계는 왕에 대한 집착과 미련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집착과 미련이 없다기보다 오히려 혐오스러운 심정을 품었다. 강골한 무인의 생애를 살아왔던 이성계였지만 심성만큼은 여렸기에 아들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참상을 목격해야 했으니 왕의 권력에 대해 환멸을 느꼈을만하다. 태조 이성계는 사망 전 고향인 함흥 땅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을 남겼으나, 차마 선대왕의 무덤을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함흥에 만들 수가 없어서 태종 이방원은 현재 동구릉 땅에 능을 조성하되 함흥의 억새풀을 가져다와 무덤에 심었다고 한다. 따라서 태조 이성계의 무덤인 건원릉에만 유일하게 억새풀이 자라고 있다. 다음 시는 태조 이성계가 평생의 오른팔이었던 정도전에게 선물했던 시라고 한다.
손으로 덩굴을 잡고 푸른 봉우리에 올라
흰 구름 속 암자 한곳에 높이 누웠네
만일 시야 닿는 곳이 내 나라 된다면
초월과 강남을 어찌 수용하지 못하랴
일곱 번째 무덤은 목릉으로 14대왕인 선조와 그의 두 아내 의인왕후 박씨와 인목왕후 김씨 총 세 사람이 있는 목릉이다. 세 명의 봉분이 나열되어 있는 삼연릉 구조의 경릉과는 달리 목릉은 세 명의 봉분이 멀찍이 서로 떨어져 있다. 선조는 임진왜란이라는 국가 최악의 환난 때 국가원수로서 적절하지 못한 능력과 옹졸한 태도를 보이며 조선의 역대왕들 중 인조와 더불어 가장 비호감인 왕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의 첫번째 아내였던 의인왕후 박씨는 선조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지 못해 언제나 선조로부터 모진 대우를 받아야만 했다. 미모도 부족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후사를 낳지 못해 왕실과 조정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그런 그녀는 광해군을 친자식처럼 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의인왕후 박씨는 임진왜란 도중 강도높은 피난길의 피로가 누적되어 임진왜란이 끝난지 얼마 안 된 1600년 사망했다. 의인왕후 박씨 사후 선조가 51세의 나이로 새로운 왕비를 간택하니 바로 16살의 어린 신부 인목왕후였다. 늦은 나이에 젊은 왕비를 책봉했던 영조나 인조의 경우 그래도 아이를 낳지 않았으나 선조의 어린 신부 인목왕후는 덜커덕 아들을 낳아버렸다. 평소라면 경사스러운 일이건만 당시 조선의 세자는 광해군이었고, 비록 광해군이 나이도 많고 임진왜란 때 능력을 선보이기도 했지만 후궁 출신인지라 적통은 인목왕후의 아들 영창대군에 있었다. 선조도 광해군을 폐위하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교체하기 위해 영창대군이 클 때까지만 기다리다가 사망했고 광해군은 겨우 15대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광해군에게 영창대군의 존재는 실로 위협적이었던지라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죽이고 대비가 된 인목왕후를 유폐시켰다. 이를 광해군의 폐모살제라고 한다. 광해군의 폐모살제는 광해군을 폐위한 인조반정의 빌미가 되었다. 인목대비는 인조반정 당시 광해군의 살점을 직접 씹어먹겠다고 할 정도로 아들을 죽인 광해군에게 강한 분노를 품고 있었다. 여러모로 선조, 의인왕후 박씨, 인목왕후 김씨 세 사람의 묘한 역사를 상징이라도 하는 듯 세 사람의 봉분은 '목릉'이라고 하나로 엮이지만 서로 다른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다.
목릉까지 지나쳤으면 이제 동구릉 후반이다. 여덟번째 무덤은 5대왕 문종과 그의 아내 현덕왕후 권씨의 무덤인 현릉이다. 5대왕 문종은 문약한 이미지가 지배적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문종은 풍채가 남다르고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특히 군사 방면으로 문종을 따라갈 이가 없었으며, 그의 잘생긴 수염이 문종의 트레이드 마크였다고 한다. 더군다나 문종의 사망 시점의 나이도 조선 국왕들의 평균수명보다 더 많았다. 그렇다면 문종은 왜 이런 문약하다는 이미지가 생겼을까? 우선 재위기간이 길지 않다는 점이다. 사망나이가 어리지 않음에도 재위기간이 짧은 건 세종대왕의 재위기간이 길어 너무 늦은 나이에 등극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 문종이 너무 늦은 나이에 아들을 본 바람에 6대왕이 되는 단종과 나이차가 상당했다. 문종의 아버지인 세종은 문종이 세자였던 시절 세자빈 간택에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그러나 문종의 연애운이 박약했던 탓인지 세자 시절 문종은 두 번의 결혼에 실패했다. 이유도 황당했는데 첫 번째 세자빈은 요술에 빠졌고 두 번째 세자빈은 레즈비언이었다. 마침 세자 문종의 후궁이 임신을 하자 세종은 그 후궁을 세자빈으로 승격해주었으니 그녀가 현덕왕후 권씨다. 세 번째 결혼은 성공적이었다. 여자에 관심도 두지 않던 세자시절의 문종이었지만 현덕왕후와는 금슬이 좋았다. 그녀가 처음으로 출산한 아이는 경혜공주로 단종의 누나였다. 그리고 몇년 후 세자빈이었던 현덕왕후는 아들을 출산했다. 왕실의 경사였으나 현덕왕후는 출산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현덕왕후가 낳은 아들은 문종의 세 번째 결혼만에 얻은 아들이라 나이차가 많이 났으며 문종 사후 그의 아들이 즉위할 때 단종의 나이가 그토록 어릴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어머니가 없었기에 단종을 정치적으로 보호해줄 외척도 없었고 삼촌 수양대군이 쉽게 정변을 일으킬 수 있는 조건이 되었던 것이다. 현덕왕후는 세자빈 시절에 세상을 떴기 때문에 왕후가 되지 못했지만 문종이 등극 후 그녀를 왕후로 추존해주어 왕릉에 묻혔다. 문종과 현덕왕후의 무덤도 서로 떨어져 있다. 두 능 사이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이유 없이 저절로 말라 죽어 두 능 사이를 가리지 않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는데, 이제는 두 사람의 영원한 사랑을 기도하며 사진으로나마 두 분의 무덤을 한 장에 담아본다.
동구릉의 마지막 무덤은 수릉이다. 어느덧 기나긴 산책을 끝마치고 입구 가장 가까이까지 돌아왔다. 수릉은 실제로 왕과 왕비가 되지 못한 두 부부의 합장릉이다. 하나의 봉분 안에 두 명을 한꺼번에 모신 무덤 형태다. 무덤의 주인은 효명세자와 신정왕후 조씨이다. 효명세자는 정조의 손자이자 순조의 아들이다. 정조와는 달리 그의 아들 순조는 강단이 부족하고 소극적이었던 군주다. 순조 때 안동 김씨에 의한 세도정치가 태동하였는데 순조는 모든 정사를 안동 김씨에 의존할 뿐 본인만의 정치적 비전을 꿈꾸었던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순조의 장남 효명세자는 달랐다. 정조를 다시 보는 것 같다는 원로대신들의 말이 있을 정도로 효명세자는 밝고 건강하고 똑부러지고 명민했다. 순조는 아들 효명세자에게 19살~22살까지 대리청정을 시켜 군주의 자리를 경험하게 해주었는데 모두가 효명세자의 정치에 감탄했으며 심지어는 안동 김씨조차 효명세자의 장래를 칭찬하며 그를 따랐다. 효명세자는 특히 문예적 능력이 뛰어났으며 문화 방면의 정책을 활성화시켰다. 효명세자는 순조의 생일에 직접 설계한 고급한옥저택을 선물했고, 어머니의 생일에는 직접 작사작곡한 노래에 직접 짠 안무를 선보이기도 했다. 한국무용사에서는 효명세자 전후로 한국무용이 갈린다고 할 정도다.
가을 기운 서늘한 이때의 풍경인데
연꽃 잔 난정의 술잔인 듯 의심되네
난간 기대 즐기며 이처럼 다투지만
하늘엔 구름 없고 물속엔 달빛일 뿐
그러나 효명세자는 과로로 2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이 때문에 세자빈이었던 조씨도 왕비가 되지 못했고 대신 아들 헌종이 즉위하며 곧바로 대비가 되었다. 효명세자의 아내 조씨는 훗날 신정왕후의 호칭을 받게 된다. 아들 헌종조차 이른 나이에 요절하고 철종이 즉위하자 신정왕후는 조선의 마지막 대왕대비, 즉 왕실 최고 어른이 되었다. 본디 효명세자는 안동 김씨의 독주를 막고자 아내의 집안 풍양 조씨를 육성하려 했으나 효명세자 사후에는 안동 김씨가 폭주하며 신정왕후 조씨는 외로이 궁궐에서 안동 김씨의 등살과 압박에 눌려 살아야했다. 그러던 그녀가 신의 한 수를 택하니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흥선대원군의 둘째아들 이명복을 자신과 죽은 효명세자의 양자로 입적한 뒤 26대왕 고종으로 옹립했다. 그녀가 바로 조 대비이며 흥선대원군의 섭정기에 안동 김씨는 거의 모든 권력을 잃어야만 했다. 효명세자는 왕의 양아버지가 되어 익종으로 훗날 문조로 추존되었다. 경복궁의 자비전이 조 대비가 생전 살았던 곳으로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일부러 조 대비를 위해 만들어준 곳이라고 한다. 경복궁 중건은 생전 효명세자의 숙원이기도 했다. 훗날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효명세자는 문조익황제, 조 대비는 신정익황후 조씨로 승격되었다.
조선왕릉을 흔히들 '신들의 정원'이라고 부른다. 지체높은 고귀한 왕실 분들이 묻혀 있어 신비스러운 이미지에 무덤이긴 하지만 소나무를 비롯해 영험해보이는 다양한 종의 나무들이 왕릉에 수놓여 있고 푸르른 잔디가 장판을 장식해주어 흡사 정원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기가 서려있는 정원이라고나 할까. 왕릉의 구조는 동일한 양식으로 배치되어 있다. 우선 홍살문이 왕릉 구역의 대문 역할을 하며 이제부터 신성의 권역임을 알려주고, 홍살문 옆으로는 왕들이 선조의 무덤을 찾아 제례를 지낼 때 마음가짐을 정제하며 준비하는 판위가 있다. 홍살문을 지나면 참도가 놓여있다. 참도는 다른 궁중권역에서 볼 수 있는 3중길이 아닌 2중길이다. 한쪽 길은 망자의 영혼이 걷는, 다른 한쪽은 참배를 하는 지상인들이 걷는 길이다. 우리 전통미학을 느낄 수 있는 박석의 돌길이 왕릉의 품위를 한층 더 고결하게 해준다. 참도 양옆으로는 제례를 위한 재료를 준비하는 수라간과 수복방이 있고, 참도의 끝에는 제사를 지내는 작은 공간이 있는데 보통 정(丁)자 모양을 하고 있어 정자각이라고 부른다. 정자각 뒤로 높은 언덕 위에 봉분이 위치하고 있는데 언덕 주변으로 난간이 둘러쳐져 있어 일반인은 봉분까지 올라가지 못한다. 정자각 옆으로는 한 켠에는 비석을 두고 고인의 생애를 간략하게 적어두었다. 조선왕릉은 세계의 그 어떤 왕릉 중에 가장 마음이 편해지는 곳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국 황제들의 무덤 등 압도적인 인상을 강하게 새기기보다는 유순한 마음을 갖게 하고 고인에 대한 예가 저절로 드는, 하지만 결코 체면을 잃지 않고 고상함을 유지한다. 망자와 지상인들 사이의 편안한 소통을 돕는다. 조선왕릉의 이러한 정조는 왕릉을 감싸안고 있는 자연에 빚지고 있다. 역시 대자연의 품이야말로 신계에 가장 근접한 곳이다.
둘째날은 하남 여행이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구리 아래로 접하고 있는 하남은 이름 뜻 그대로 '한강 아래에' 있는 도시다. 하남은 역사적으로 경기도 광주의 하위행정구역이었으나 1989년 하남시로 독립하였다. 조선후기 병자호란이 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경기도 광주의 행정 중심지가 오늘날 하남의 영역이었으며 광주향교 역시 현재 하남시에 있다. 한강으로 들어가는 입구이기에 지리적인 의미가 남달랐던 것이다. 하남은 그린벨트로 묶여있었기에 개발이 더뎠으나 점점 그린벨트 규제가 완화되면서 2기 신도시로 위례신도시가, 3기 신도시로 교산신도시가 개발되었다. 신도시의 성과와 한계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오가고 있지만 하남이 오래도록 그린벨트로 묶여 있었던 건 그만큼 하남이 갖는 자연적 미관과 가치가 뛰어나다는 뜻이다. 서울과 붙어있는 위성도시들 가운데 가장 자연친화적인 도시가 아직까지는 하남임에는 분명하다.
하남에서 핵심이 되는 곳은 미사리다. 하남은 한강이 내린 선물과도 같은 곳이라 한강을 접하고 있는 미사리는 살기 좋고 놀기 좋은 곳이다. 미사리에는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여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원삼국시대에도 사람들이 모여 거주지를 형성했다. 발굴조사 결과 현재까지 466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다고 할 정도로 미사리에 사람들이 살았던 역사는 깊다. 잠실이 백제의 수도였던 시절에도 하남은 백제의 주요한 위성도시 역할을 기능했다. 오늘날에는 한강의 덕으로 여러 공원들이 조성되어 있고 한때는 미사리 라이브카페거리가 큰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지금도 몇몇 라이브카페는 여전히 골수팬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으며 쎄시봉의 가수 송창식 선생님도 미사리에서 라이브 카페를 운영 중이다.
미사리를 방문할 때마다 초계국수를 찾곤 한다. '미사리밀빛초계국수'라고 이제는 여러 곳에 체인점을 낼 정도로 유명해졌지만 그래도 어릴 적 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줄서서 기다리다 시원하게 한 그릇 비우던 그때의 생각 때문에 굳이 굳이 하남 미사리에 있는 본점을 찾는다. 초계국수는 닭 육수를 베이스로 한 국수로 이북요리인 초계탕에서 유래했다. 차가운 닭 육수 국물에 겨자와 식초를 넣어 '초계'라고 부르는데 오늘날엔 여름철 사람들이 꼭 찾는 메뉴로 자리매김했다. 살얼음 가득 초계국수의 국물과 면치기는 더위를 날려주다 못해 몸에 한기를 불어넣는 청량함과 시원함은 여름을 극복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다.
배부르게 초계국수에 만두까지 해치우고 배가 가득 든든해졌으면 소화 겸 눈호강 겸 안식을 취할 차례다. 미사리밀빛초계국수와 미사리 라이브카페 거리 넘어에는 미사경정공원이 있어 사람들에게 산책과 휴식의 공간을 제공해주고 있다. 미사경정공원은 우리나라의 몇 안 되는 조정경기장 중에서 최초로 지어진 곳이다. 조정은 미국과 유럽의 명문대 대학생들의 취미스포츠로 시작하였고 1960년대에 한국에 유입되어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인하대 등 역시 대학생들이 주로 하던 스포츠였다. 조정이 경비가 많이 들어가는 스포츠인지라 미국과 유럽에서는 명문대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듯하다. 조정은 국가별 인지도가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해상 스포츠로 아무래도 동양권에서는 약세였지만 지속적인 관심과 투자로 한국을 비롯해 동양의 몇몇 나라들에서 전문 스포츠선수들을 배출하고 실적을 내고 있다. 하남의 조정경기장 경정공원은 88올림픽을 위해 조성되었고 2013년부터는 충주시에서 세계조정선수권 대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매년 한여름 이곳 미사 경정공원에서 대학생들의 조정대회가 열린다. 대학생 때 인하대에 다니던 친구의 조정 경기를 본 적이 있는데, 관객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무더위의 작열 속에서 평온하지만 꼿꼿하게 강을 가르는 배와 선수들의 단합된 몸동작은 강렬하기 그지 없다. 미사경정공원을 따라 우거진 수림에 카페, 베이커리, 맛집 등이 즐비하다. 어느 곳에 가든 푸르른 나무들과 언뜻언뜻 비추는 밝은 빛의 강의 모습을 보면서 커피를 마시거나 책을 읽으면 이만한 여름철 휴식이 없다.
다과나 베이커리를 즐길 곳이야 많지만 이곳 하남에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꽈배기집의 본점이 있다고 해서 '본점을 반드시 가야만 하는 병'을 앓고 있어서 5호선 미사역 부근으로 이동했다. 바로 '미미고찹쌀꽈배기'인데 어릴 적 꽈배기가 가장 좋아하는 빵이었으나 꽈배기라는 것이 자주 먹으면 또 질리는 경향이 있어서 언제고부터 꽈배기를 먹지 않았다. 시장의 유명한 꽈배기집이라 해서 방문해보면 그저 내가 예상하는 맛이었다. 그런 나에게 꽈배기도 다를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가게가 '미미고찹쌀꽈배기'였다. 아주 딱 맞는 크기와 당도와 가격과 바스락거림. 편안하면서 아주 기분 좋은 상태로 집으로 귀가할 수 있다. 이런 작은 행복이야말로 여행의 행복이다.
여름철 추천하는 여행지라고 했지만 걷는 양이 많아 더위와 습기에 지쳐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푸근하고 소박한 자연이 쉼터와 수려한 경치를 제공해주는 곳엔 카페가 즐비하기 때문에 중간중간 쉴 수 있는 공간들도 많다. 이것이 여름의 여행이라면 여름의 여행이다. 풀빌라의 화려한 숙소, 석양이 아름답게 지는 태평양의 바닷가가 부담이 된다면 강과 산 사이를 걷고 지칠 때 즈음 카페에 들어가 커피도 마시고 책도 읽고 동행자가 있다면 수다도 떠는 여유를 즐기는 것 또한 여름철 여행의 한 방법이다.
체력이 남아있거나 날씨가 선선할 때 한 번 더 구리를 방문해보고 싶다면 아차산 등산을 추천한다. 산은 산이지만 그렇게 높지 않은 산이라 누구나 부담없이 오를 수 있다. 아차산에선 조금만 등반해도 한강이 선사해주는 풍광을 적당한 높이에서 구경도 가능하다. 백제를 건국한 소서노와 온조가 처음 서울에 도읍을 정할 때 올라간 산이 아차산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아차산에서 소서노와 온조는 한강과 한강 옆에 있는 잠실을 보고 나라의 수도로 삼기로 결정했다. 한 나라의 수도로 삼을 만큼 한강을 높이서 본다면 한강과 한강과 손잡고 있는 땅에 매료될 수밖에 없다. 아차산에선 잠실일대와 더불어 하남까지도 시야에 들어온다. 과연 고구려가 아차산을 국방상의 주요한 보루로 삼을 만하다. 하남에는 특별한 랜드마크가 있진 않아서 하남의 구석구석을 볼 수는 없지만 한강과 인연을 맺어온 저 낮은 땅이 저다지도 정겨울 수가 없다. 더 너머에는 수묵화처럼 산들의 실루엣이 중첩되고 있는데 산, 강, 땅 삼박자가 완벽하다. 이곳에 세워진 우리 삶의 터전과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 또한 정겨울 수밖에 없다.
경기도 양평 두물머리에서 북한강과 남한강이 한강으로 모여들기 시작해 서울로 진입하기까지를 한강의 상류, 서울의 한강을 중류, 김포-인천에서부터 바다로 나아가기까지를 하류라고 했을 때 세 구역이 모두 다 다른 매력을 품고 있다. 그 차이를 발견해내는 것도 여행의 묘미이다. 구리-하남-남양주 일대의 한강의 상류 지역은 신록으로 가득찬 여름을 추천한다. 과거 그린벨트에 묶여 있다가 최근들어 제한이 완화되는 지역은 적당한 도심과 적당한 사람과 적당한 자연이 한데 어우러져 맘 편안한 여행을 즐길 수가 있으니 여행지를 찾을 때 그린벨트 지역을 유심히 찾아보는 것이 내가 추천하는 방법이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책 추천
- 조민기의 <조선 임금 잔혹사>
역사초보자가 조선시대 역사 관련한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저는 이 책을 먼저 추천합니다. 역사 입문용으로 적당히 교육적이고 적당히 드라마틱하여 몰입감 높게 읽을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역사에 빠삭하신 분이시라면 다 아는 내용이라 흥미를 못 붙일 수도 있지만 조선 왕실의 역사를 드라마로 풀어내기에 부담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죠. 조선의 역대 왕들과 왕이 되지 못한 세자들까리 시간순이 아닌 국왕의 성향에 따라 '왕으로 선택된 남자' '왕이 되고 싶었던 남자' '왕으로 태어난 남자' '왕이 되지 못한 남자' 그룹화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27명의 왕들 전부를 다루진 않고 9명의 왕들과 3명의 세자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 조민기 작가님은 광고회사 카피라이터의 이력을 가지고 있어서 확실히 필력이 극적입니다. 한국형 리더십 개발원의 추천도서입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로런 해더웨이 감독의 <더 노비스>
오로지 최고와 1등만을 고집하는 여대생 '알렉스'가 대학교 조정 동아리에 가입하여 최고로 거듭나기 위한 분투를 다룬 영화입니다. 알렉스가 동아리 신입생 내 최고가 되려는 목적은 따로 없어보입니다. 그저 '최고' 자체가 목적일 뿐입니다. 동아리 내 최고가 되기 위해 경쟁자를 이기기 위해 자신의 몸상태를 극한으로 몰아붙이는데 영화는 핸드헬드를 자주 사용하는 등 알렉스의 불안함을 조명하는 쪽으로 연출됩니다. 관객도 알렉스를 응원하기보다는 안쓰러운 감정이 먼저 들게 되도록 유도하죠. 마치 조정판 <위플래쉬> 같습니다. 경쟁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후련하다기보단 찝찝한 무언가를 남기는 듯합니다. 영화의 제목 '노비스'는 '서투른, 미숙한, 신참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영화를 다 보고 제목의 뜻에 대해서도 고민해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