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두번째 고도를 여행하다
옛 고도(古都)였던 도시를 여행하는 일은 언제나 옛것에 대한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한다. 한국의 고도라면 경상도의 경주와 김해, 고령, 전라도의 전주와 익산, 강원도의 철원, 수도권의 서울 그리고 충청도의 공주와 부여가 있다. 이중 충청도의 공주와 부여는 모두 백제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수도였다. 백제는 700년간 총 2차례의 천도를 단행하며 세 곳의 수도가 있었다. 세 수도에 따라 백제의 시대를 구분하며 각각 한성 시기(서울), 웅진 시기(공주), 사비 시기(부여)라고 부른다. 웅진의 현 명칭인 공주와 사비의 현 명칭인 부여, 그리고 완수하진 못했지만 천도 계획을 수립했던 익산까지 지난 2015년 ‘백제역사지구’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도시 전체가 지정되었다.
보통 수도를 옮기는 천도라 함은 정치적 목적 하에 국왕 내지 정부의 철저한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는 법이다. 그러나 백제의 웅진 천도는 국가비상사태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조처였다. 때는 5세기.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시달리고 있었고, 결정적으로 고구려의 장수왕은 475년 백제의 개로왕을 죽이고 한강 전체를 차지했다. 한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개로왕은 아들 문주를 한성에서 탈출시켰다. 빠져나간 문주는 신속하게 동맹국이었던 신라로 가서 지원병을 데려왔지만 이미 아버지 개로왕은 죽임을 당한 이후였다. 문주는 신라군의 도움으로 한성을 탈환해내지만 한달 정도 버티다 바로 앞의 고구려를 두고 계속 한성에 머무를 수 없다고 판단하여 천도를 결심했다. 문주왕이 자리잡은 곳이 충청도의 공주, 옛 명칭 웅진이었다. 웅진시기의 백제는 정치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암흑기였으나 그와 동시에 새로운 터전에서 새로운 문화를 창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웅진시기 백제의 문화는 고분미술에 특화되어 있었다. 백제의 세 수도였던 한성, 웅진, 사비에는 각각 고분군들이 존재하는데 가장 미술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곳은 웅진의 송산리 고분군이다. 송산리 고분군에는 총 7개의 고분이 있는데 안타깝게도 1호분~6호분까지는 일제강점기 때 전부 도굴되었다. 다만 무령왕릉만이 도굴되지 않고 남아 있어서 웅진시기 백제 문화의 역량을 여실히 알 수 있다. 무령왕릉은 일제 고고학자들이 무덤으로 인지를 못한 바람에 도굴이 되지 않았다고 하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무령왕릉을 무덤으로 인지하지 못한 건 해방 후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였다. 한국고고학의 빛나는 성과인 무령왕릉은 예상외로 우연한 발견이었다. 1971년에 6호분 배수로 공사를 진행하던 중 인부의 삽이 무령왕릉 내부를 건드렸다고 한다. 삽과 부딪히는 무언가 딱딱한 촉감과 소리가 들리니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더 파보니 무령왕릉의 실루엣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바로 다음날 문화공보부 장관과 김원용 국립박물관장이 내려와 발굴단을 조직한 뒤 무령왕릉을 발굴해냈다. 그러나 무령왕릉 발굴은 한국 고고학의 빛나는 성과인 동시에 그림자이기도 했다. 무령왕릉 발굴 현장에 참여한 고고학자분들 중엔 후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우선 발굴 당일에 폭우가 쏟아졌다. 악천후면 발굴을 미룰 법도 한데 언론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전반적으로 흥분된 분위기 속에서 발굴을 강행했다. 비가 오는 와중에 봉분을 공개하니 수 천 년 간 빛을 못 받고 있던 암실에 빛과 습기가 갑자기 들어오면서 결로현상이 발생했다. 결로현상은 어찌할 수 없는 자연현상이었다고 해도 더 큰 문제가 있었으니 언론사 기자들이 통제가 안 될 정도로 모여들어 많은 인파가 북적거리는 통에 문화재 몇 점이 훼손되기도 했다. 무령왕릉 발굴 프로젝트는 아직 발굴실력이 우수하지 못한 상태에서 발굴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실수를 통해 배운 경험이었다. 비슷한 예로 중국의 진시황릉이 있다. 항간에는 중국이 정치적 의도로 진시황릉을 부분만 공개하고 나머지는 발굴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실질적인 이유는 진시황릉급의 무덤을 발굴할 기술이 아직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 탓에 문화재 보호의 이유로 무령왕릉 내부에는 들어갈 수 없다. 단 옆 전시관에 똑같은 실사 모형을 재현해두었다. 무령왕릉은 벽돌무덤 양식으로 유명하다. 벽돌무덤 양식은 중국 남조의 양나라에서 유행하던 무덤양식으로 한국에서는 그 사례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리고 무령왕릉 시신이 누워있던 관은 그 재료가 금송이란 나무인데 일본에서 주로 많이 나는 나무라고 한다. 무령왕릉 안에서만 한중일의 문화가 모두 녹아들어있는 것이다. 6세기 백제의 활발한 대외교류를 가늠해볼 수 있다.
“우리는 외래문화에 대해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 민족적으로 옳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무령왕 때의 이러한 대담한 문화적 개방이란 바꾸어 말하면 그렇게 개방할 수 있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발달된 외래문화의 충격을 무작정 거부하다 스스로 몰락하고 만 예가 세계사에는 무수히 많다. 무령왕은 양나라 문화를 단지 모방한 것이 아니었다. 발달된 그 문화의 자극을 받아 백제문화를 국제적 수준으로 발전시킬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 성과는 그의 아들 성왕이 찬란한 백제문화를 부여에 가서 꽃피울 수 있던 밑거름이 되었다. 무령왕릉에서 보이는 대외 문화교류를 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 유홍준
무령왕릉에서만 108종 2906점의 유물이 나왔다. 웅진시기 백제 문화의 역량은 무령왕릉이 상징하지만 무덤 내부에는 진입이 불가하고 무령왕릉의 출토품들은 모두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보관 및 전시 중이다. 따라서 무령왕릉을 구경한 후 국립공주박물관까지 관람을 해야 비로소 웅진시기 백제 문화를 감상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국립공주박물관의 1층은 무령왕릉 출토품을, 2층은 백제를 포함한 충남지역의 전체적인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1층 전시관으로 들어서면 어두운 암실에 마치 무령왕릉 내부로 혹은 사후세계로 혹은 과거의 세계로 들어가는 듯하다. 1층 전시관의 무령왕릉 출토품 전시는 한 발자국 움직이는 것도 어려울 정도로 걸작들이 모여 있어 마지막에 가면 지겨울 정도로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가장 먼저 관람객을 반기는 건 국보 162호 무령왕릉 석수다. 상상 속의 동물을 형상화한 돌짐승 조각상으로 웅진이 곰을 토템으로 하던 지역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곰에서 파생된 환수동물로 추정되며 무덤을 사수하는 역할을 한다. 무령왕릉이 처음 세상의 빛을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모습을 보인 것이 이 석수 동물이었다. 무덤을 사수하는 동물이기에 고고학자들과 언론인들을 반기기보다는 으르렁거리며 경계했을 것이다. 석수 뒷편으로는 국보 163호인 무령왕릉 왕과 왕비의 매지권 지석이 있다. 매지권 지석에 무덤의 주인인 무령왕과 왕비의 이름이 적혀 있어 무덤의 주인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매지권이란 땅을 매매한 계약서를 말하는데 왕과 왕비라면 어느 땅이든 모두 그들의 소유인데 대체 누구로부터 땅을 산다는 걸까? 바로 토지신이다. 실제 발견 당시 매지권 위에는 중국 철전이었던 오수전이 올려져 있었다. 왕과 왕비의 무덤이면 그냥 토지를 쓰면 되지 굳이 토지신에게 토지를 산다는 발상이 한국스럽다.
입구를 거쳐 더 깊숙이 들어가면 큰 공간에 무령왕릉의 첫 발굴 당시 유물의 구성과 위치를 그대로 재현해두었고 출토품들이 고급스러운 자태를 뽐내며 전시되어 있다. 이중 가장 압도적인 건 단언 금관모장식이다. 중국 측 기록에도 “백제의 왕은 검은 천으로 된 관에 금꽃을 장식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왕의 금관모장식은 타오르는 불꽃을 연상시키며 달개장식을 화려하게 매달아놓았다. 곡선 쓰는 백제인들의 미학적 기술이 감탄스럽기만하다. 귀걸이도 금으로 장식되어 있다. 왕과 왕비의 것이 다른데, 왕의 금귀걸이는 이중 하트 장식이, 왕비의 금귀걸이에는 치자열매와 총알 장식이 달려있다. 왕비의 관에서만 발견된 제비 모양의 머리뒤꽂이는 곡선 처리하는 방식이 날렵하고 자세히 보시면 디자인들도 정교하기 그지없다.
2층은 백제전시실로 백제 전반에 관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여러 전시품들이 있지만 그중 꼭 소개하고 싶은 유물은 첫째 국보 247호 금동관음보살입상이다. 친근한 미소에 양갈래 머리가 인상적이다. 금동관음보살입상은 백제 불상의 전형을 보이기도 하는데 푸근한 이미지에 백제의 불상들은 옷에 X자로 된 영락장식들을 두르고 있다. 두번째는 은제관모장식이다. 금제관모장식은 왕과 왕비를 위한 장식품이었다면 은제관모장식은 고위직 귀족들의 장식품이었다. 중국 측 기록에는 “백제의 나솔 이상은 은꽃으로 관을 장식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대칭 구조의 단순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공주에는 개인적으로 전국에서 가장 좋아하는 찻집이 있다. '루치아의 뜰'은 공주의 구도심 어느 골목길 한켠에 한아하게 자리잡은 한옥 찻집이다. 공주의 볼거리 놀거리는 모두 구도심에 몰려 있고 '루치아의 뜰'을 비롯해 아기자기한 카페와 맛집들이 즐비하다. 루치아의 뜰은 부부 사장님들이 운영하시는 곳으로 아내 루치아 님께서 찻집을, 남편 요한님께선 쇼콜라띠에로 수제초콜렛을 판매한다. 한옥 가정집을 개조한 작은 가게이며, 아담한 정원에 한낮의 볕이 들 때 가장 아름답다. 꽃이 필 무렵이면 더없이 동화적인 공간이다. 공주를 여행하면 반드시 들리기를 적극 권장하는 곳이다.
점심은 차를 타고 조금 들어가야하는 '동해원'이라는 중국집의 짬뽕을 먹는다. 동해원은 유명블로거가 선정한 전국 5대 짬뽕 중 하나이다. 특정 개인이 선정하였지만 '전국 N대'라는 매력적인 마케팅이 되어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다. 전국 5대 짬뽕으로는 공주의 동해원을 비롯해 강릉의 교동반점, 평택의 영빈루, 대구의 진흥반점, 군산의 복성루를 가리킨다. 각 도 별로 하나씩 선정되어 지역안배도 균형있게 맞춰준 덕에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듯하다. 전국 5대 짬뽕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맛있는 5군데라기보단 가장 오래도록 지역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노포 중국집 정도로 인식하는 게 좋다. 공주의 동해원은 내륙지방답게 해산물보다는 야채로 육수를 내어 깊은 맛을 우려낸다.
점심 이후 답사지는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인 우금치전적지다. 우금치전투는 동학농민운동의 몰락을 가져왔던 전투로 비록의 패전한 전투였지만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가장 치열하고 처절했다. 1894년 반봉건을 외치며 일어났던 조선사 최대 민중봉기였던 동학농민운동. 탐관오리의 학정에 폭발한 민심으로 전라북도 정읍에서 거병한 동학농민군은 무서운 기세로 북상하여 전라도에서 가장 고을이었던 전주를 점령했다. 조선 정부는 동학농민군과 협상을 해서 해산시키려던 한편 명성황후는 청나라에게 동학농민군을 진압해달라 구원을 요청했다. 10년 전 청나라와 일본이 맺은 톈진조약에 따라 청나라는 조선에 군대를 파병할 때 일본에 사전통보를 하자 일본도 군대를 파견해버렸다. 청나라군은 동학농민군과 싸우기 위해 충청도 아산만에 정박한 반면 일본군은 인천에 상륙했다. 동학농민군의 전봉준은 두 외국에 빌미를 줄 수 없다는 이유로 바로 해산하였고 고종과 조선 정부는 두 국가에게 철수를 권고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인천에서 곧장 한양으로 향해 경복궁을 점령하더니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이에 해산했던 동학농민군이 재궐기하니 2차 동학농민운동이었다. 이들의 외침은 ‘척왜양창의.’ 일본과 양이 세력을 척결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킨다는 뜻이었다. 당시 동학은 남접과 북접으로 나뉘어 있었다. 북접은 동학의 2대 교주였던 최시형의 직계 제자들로 주로 충청도에 터전을 두고 있었고 이들은 동학을 인간사에 대한 원리와 이해를 증진시키는 종교와 학문 정도로 받아들였다. 반면 남접은 전라도를 근거지로 하여 동학을 세상을 뒤바꿀 수 있는 사상으로 받아들인 강경파들이었다. 세상의 변혁을 외치며 일어난 1차 동학농민운동은 전봉준 등 남접 인사들의 궐기였으며 최시형은 남접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2차 동학농민운동은 반외세를 부르짖은 운동이었던 만큼 최시형의 제자 손병희가 북접의 합류를 설득시켰고 직접 북접 동학군을 이끌며 전봉준에게 합류하였다. 그 규모는 자그마치 4만이었다.
2차 동학농민운동의 배후에는 흥선대원군도 있었다. 일본군은 경복궁 점령 후 고종과 명성황후의 정치적 권한을 마비시키기 위해 흥선대원군을 정계에 복귀시켰다. 스스로 어디까지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걸 인지하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뒤로 다른 마음을 품었다. 오히려 동학농민운동군을 이용하여 일본군을 몰아내고 고종과 명성황후까지 모조리 쫓아낼 셈이었다. 그리곤 고종의 조카였던 이준용을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하려고 했다. 흥선대원군은 전봉준과 연락하며 경기도 남부까지만 올라와준다면 관군을 파견할 테니 함께 합류하여 한양으로 진격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전봉준과 손병희의 남북접 연합 동학농민군은 충청도만 지나 경기도 남부에 도착하면 이길 수 있는 싸움이었다.
동학농민군은 충청도에서 가장 행정적으로 중요한 도시 공주를 목표로 삼았다. 수적으로 많은 동학군은 전봉준의 지휘하에 3개 부대로 나누어 세 방면에서 공주를 옥죄고 우금치 고개에 모여 단숨에 공주 도심으로 진격해 공주를 장악하고자 했다. 반면 일본군은 우세한 고지점을 장악하고 있었고, 좁은 협곡으로 동학군을 유인하는 작전을 펼쳤다. 무엇보다 일본군이 가지고 있던 개틀링건이나 서양식 화기들이 압도적이었다. 화력의 차가 넘을 수 없는 벽 수준이었다. 11월 약 일주일간 40~50차례에 걸친 공격을 퍼부었으나 사실상 학살에 가까운 무자비한 섬멸전이 자행됐고 4만의 동학군 중 3천 명만 살아서 도주했다. 우금치 고개를 넘지 못했다. 일본군은 흩어진 동학군을 끝까지 추격했고, 전봉준은 겨우 살아남아 논산에서 고작 5백 남짓한 병력으로 항전을 이어갔다. 1894년 11월 남은 동학군마저 일본군에게 연이어 패배했고 전봉준과 손병희는 헤어졌다. 북접과 남접이 같이 토벌되어버리면 동학의 맥이 끊기니 전봉준과 손병희 둘 중 한 명은 살아남아야 한다며 남접과 북접이 서로 다른 길을 가기를 택했던 것이다. 우금치 전투가 마지막 전투는 아니지만 사실상 동학농민운동을 종결지은 전투였으며 공주의 우금치전적지가 바로 그곳이다. 현재 우금치전적지에는 위령탑이 놓여 있고 양옆으로 돌탑이 놓여 있다. 위령탑 뒤로는 알 수 없는 가마를 연상하게 하는 의문의 시설물들이 있다. 아무리 거대한 역사의 현장이라지만 탑 하나를 두고 실감하긴 어렵다. 최대한 그때의 사건을 상상해보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는데 전적지 옆으로 놓인 도로와 터널이 매우 경사져 있다. 차를 몰고 올 땐 느끼질 못했건만 멀리서 보니 경사도가 꽤 가파른 편이다. 그제서야 우금치 전투를 상상할 수 있었다. 새로운 세상을 개벽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동학농민군은 이 경사를 올라가려다 실패했던거구나. 지금의 나는 너무나도 쉽게 올라와 있는 이 고개의 위에 올라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던가.
공주여행의 마무리는 역시 공산성 탐방이다. 공산성은 백제의 웅진시기 궁궐이 있던 산성이다. 공주의 심장과 도 같은 곳이다. 보통 궁성은 산선보다는 평야에 짓지만 강을 끼고 산에 궁성을 둘 정도로 백제는 국방에 신경을 쏟았다. 고구려로부터 한성이 함락당했으니 예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높고 험준한 산은 아니고 야트막한 뒷산 정도다. 공산성은 본디 웅진성으로 불리다가 고려시대 이후 공산성이란 이름으로 알려졌다. 공산성 탐방은 서문 '금서루' 앞에서 매표를 하고 금서루에서 시작한다. 매표소에서 금서루까지 올라가는 길 한 켠에 송덕비들이 줄지어있다. 조선시대 공주로 부임왔던 사또들의 송덕비들인데, 송덕비들 모아둔 곳이야 여러 곳을 봤지만 공산성의 송덕비들이 상당히 많은 축에 속한다. 여기 공주에는 유난히 훌륭하신 사또들이 많이 부임했었나 보다. 공주의 운일런지 지세 덕일런지. 금서루를 들어서면 왼쪽으로 가는 길이 있고, 오른쪽으로 가는 길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왼쪽으로 가면 북문이, 오른쪽으로 가면 남문이 나오는 길이다. 어디로 가든 결국 한 바퀴를 다 돌기 때문에 순서상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나는 웬만하면 남문 쪽으로 가는 오른쪽 길을 택한다. 그 이유는 가장 마지막에 가서 설명해보겠다.
금서루에서 성벽을 타고 올라가고 내려가기를 반복하다 보면 추정왕궁지를 지나친다. 왕이 거처하던 궁궐이지만 그 터만 남아있을 뿐 터를 채우는 건 관람객의 상상력 몫이다. 추정왕궁지 바로 앞이 공산성의 남문인 진남루다. 진남루에서 더 직진을 하면 공산성 전체를 다 도는 코스로 만약 산 전체를 트랙킹하는 것이 부담된다면 진남루에서 만하루가 있는 아래쪽으로 내려오면 된다. 만하루는 공산성의 백미다. 만하루는 공산성의 인공연못으로 경복궁의 경회루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물론 경복궁의 경회루만큼 압도적인 웅장함이 아니다. 그보다는 낮은 앉음새에서 유유히 흐르는 잔잔한 금강을 적요하게 감상할 수 있는 경치에 적확한 크기의 정자다. 만하루에서 즐기는 경치도 경치지만 만하루 뒤의 인공연못(연지)이 걸작이다. 이 인공연못은 계단식으로 석축을 쌓아 누구나 그 독특한 조형미에 감탄하게 된다. 아무리 여행을 많이 다녀봐도 이러한 형태의 인공연못은 보도 듣도 못했다. 인공연못에 대던 물은 배수로를 통해 금강의 물을 끌어왔다고 한다. 안으로 깊어질수록 점점 좁아지는 석축 단식은 연못의 가장자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과학적 슬기가 담겨 있으니 이 연못과 만하루야말로 공산성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만하루에서 적당히 휴식을 취해주고 마지막 북문을 향해 발걸음을 재개해본다. 공산성의 마지막 코스는 북문 공북루이다. 만하루와 연지가 공산성의 꽃이자 공산성 탐방의 백미라면 공북루는 하이라이트다. 금강의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여기서 더 욕심을 내본다면 가파른 계단 저 위에 공산루까지 올라갈 수 있다. 공산루는 전망대 역할을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데 공산루에 올라서면 더 탁트이고 넓은 시야로 조망해볼 수 있다. 거대하지 않은 듯 조용하고 한아한 미의 금강인 줄 알았지만 보이지 않는 소실점에서부터 묵묵히 흐르고 있는 금강은 과묵하지만 든든한 존재감을 뽐낸다. 구도심 쪽으로 넘어오는 오래된 철교와 금강 너머 피크닉 온 사람들을 구경하면 공주라는 지세에 그리고 백제에 반하게 된다. 공산루에서 공산성 내부를 내려다보면 공북루 뒷편의 넓직한 공터도 매력적이다. 아마 민가나 관청들이 몰려 있었을 공간으로 추정된다. 새삼 백제의 무망함도 느껴진다. 이곳 공산성이 마지막 백제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는 사비성이었지만 최후 백제멸망전에서 당나라 13만군이 쳐들어오자 의자왕은 사비성을 나와 공산성에서 최후의 항전을 펼쳤다. 항전을 하던 중 공산성을 담당하던 성주 예식진의 배신으로 공산성이 함락되며 백제가 멸망하였다. 최후의 백제에 서 있다고 상상해보면 마침 지는 석양과 어우러져 망국의 무망함이 북받친다.
공산루 올라오는 계단이 워낙 가파라서 헥헥거려 공북루로 만족할 걸 하고 후회할 수 있지만 정작 올라가보면 그런 생각은 싹 사라진다. 공산루에서 다시 처음 공산성으로 들어왔던 입구 겸 출구 금서루로 내려가면 공산성 탐방은 끝이다. 공산루에서 내려오는 길은 올라올 때와 달리 굉장히 완만하다. 만약 처음 금서루에서 왼쪽으로 가는 길을 택했더라면 공산루 올라오는 길이 아무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가파른 계단은 내려가기만 하니 헥헥거릴 일도 없었을 것이고. 하지만 난 일부러 금서루의 오른쪽 길을 택해 공산성을 탐방했다. 이곳 공북루와 공산루가 공산성 탐방의 하이라이트인 만큼 가장 마지막에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조금 더 힘들더라도 코스의 시퀀스에 진심인 편이다.
고단한 몸을 녹이는데 막걸리만한 게 또 있을까! 공주하면 알밤이고, 알밤하면 공주이니 공주에 와서 알밤막걸리 한 병 그냥 건너뛸 수는 없다. 이 순간을 위해서 더 힘들게 여행한 거 같기도 하다. 공주대학교 부근 대학가의 괜찮은 전집을 찾아 들어가고는 모듬전에 알밤막걸리 하나 시킨다. 메인요리가 나오기 전에 입가심으로 한 잔 먼저 적셔주고 메인요리가 나오면 벌컥벌컥 들이마시다 보면 나도 모르게 어느샌가 2~3병의 비어있는 막걸리 병들이 널부러져 있다. 공주는 왜 알밤이 유명할까? 정확히는 공주시 정안면이 알밤으로 유명하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때 전국 몇 군데에 밤 재배를 위한 밤농장을 조성했는데 그중 공주의 정안면 일대에서 나는 알밤이 맛있다고 소문이 나서 공주의 특산물로 자리매김하였다.
공주 터미널 근처에는 공산성의 야경을 멀리서 구경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도로 한복판 육교 위에 있는 전망대가 접근성도 좋다. 술도 깰 겸 걸으면서 공산성의 야경을 보니 공산성는 천혜의 요새가 아닐 수 없다. 적당한 높이의 산성에 산세의 곡선을 따라 이어진 성벽. 이 하나의 이미지가 웅진시기의 백제이리라.
웅진시대는 백제사에 있어서 흑역사였다. 웅진 천도가 국가의 계획된 천도가 아니라 국가비상사태에 따른 임시방편이었다보니 국왕의 권위가 실추되고 귀족들의 힘이 비대해졌다. 귀족들 사이에서도 한성 출신의 귀족들과 충청도 기반의 귀족들끼리 경쟁하는데 처음엔 진씨, 해씨 등 한성 출신 귀족들이 힘이 우세했다가 연비씨, 백씨, 사택씨 등 충청도 기반 귀족들이 뒤를 이었다. 그 과정에서 귀족들 간의 암투와 국왕들이 희생되기도 하였다. 웅진시대 때 백제의 왕들이 5명이 있었는데 그중 2명이 귀족들한테 암살당해으며 암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왕까지 3명이다.
그 와중에도 백제는 웅진시기만의 독자적인 문화의 꽃을 피웠다. 어지러웠던 정치상황에도 문화의 꽃을 피운 건 백제의 저력이다. <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은 백제의 미학에 대해 ‘검이불루 화이불치’ 즉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라고 평했다. 백제가 백제만의 저력을 키울 수 있었던 힘은 '검이불루 화이불치'의 미학에 대한 존중과 정성이 있기 때문이다. 관념적인 수사표현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면 공주에서 백제의 흔적을 밟아보라. 미학에 대한 눈이 트인다고 장담한다. 굳이 미학에 대한 눈이 트이지 않더라도 순간의 감동 그뿐이면 충분하랴.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책 추천
- 김태식의 <직설 무령왕릉-권력은 왜 고고학 발굴에 열광했나>
17년간 문화재 전문 기자로 일해왔던 김태식 언론인이 분석해낸 무령왕릉 발굴 보고서입니다. 가히 무령왕릉 발굴의 모든 것을 기록해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무령왕릉 발굴은 한국현대 고고학에서 가장 눈부신 성과이자 가장 망작인 발굴작업이었다. 물론 아직 고고학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한국고고학계였으나 그럼에도 전문가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툰 고고학 실력을 보인 졸속작업이었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발굴작업이 이어졌더라면 무령왕릉 성과는 지금보다 훨씬 눈부셨을 겁니다. 이 책은 무령왕릉을 우연히 발견한 그날에서부터 발굴이 완료되기까지 마치 스릴러 장르를 읽는 듯한 서술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왜 항상 정부의 공권력이 고고학의 성과에 집착하는지 권력과 문화 면의 역학관계까지 시사하는, 역사책이 아닌 르포물이랍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의 <그리즐리 맨>
공주의 옛 지명은 웅진. 웅진의 순우리말은 곰나루였습니다. 아마 곰을 토템으로 하던 부족에서 발전한 행정구역명으로 추정하죠. 무령왕릉을 지키던 석수 역시 곰을 모델로 한 환상동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곰과 관련한 영화를 한 편 추천드리고자 하는데요, 독일의 거장감독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영화 <그리즐리 맨>입니다. 베르너 헤어조크가 워낙 독일의 유명감독이다보니 대표작이라 하면 극영화만 꼽히고 다큐멘터리 영화는 잘 거론이 되지 않지만, 그 와중에도 거론된 다큐멘터리영화가 <그리즐리 맨>입니다. 베르너 헤어조크는 항상 특정 분야에 광기 어린 집착을 보이는 소재에 큰 애정을 느끼고 카메라에 담습니다. 영화 <그리즐리 맨>도 마찬가지입니다. 티모시 트레드웰이라는 알래스카의 회색곰에 유난히 집착하는 동물보호운동가를 담은 다큐멘터리입니다. 자연과 동물에 대한 다큐멘터리이지만 영화가 전반적으로 충격적입니다. 자연과 인간 그 경계에 대해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는 이 다큐멘터리를 꼭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