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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 Jul 31. 2023

서울촌놈의 국내여행 뿌수기 [대구 편]

단절되지 않은 세월을 여행하다


















매해 여름만 되면 밈처럼 언급되는 '대프리카' 대구. 그래서 여름여행으로는 언제나 피하게 되는 곳이지만 날만 좋으면 실패 없는 여행지가 대구다. 라고 말하면 물음표를 던질 사람들도 많을 지 모르겠다. 갓 20살이 됐을 때 친구와 목적지를 따로 정하지 않고 전국을 누볐을 때 대구를 지나친 적이 있는데 하루동안 있었음에도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은 기억이 있다. 아무것도 모를 땐 '대구'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어서 무엇이 유명한지 무엇을 해야할지 무엇을 먹어야할지 몰라서 동성로에서 관람차를 타고 술 먹은 기억이 전부다. 나중에 가서야 대구에 대해 알면 알수록 대구는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도시였다. 조사하면 할수록 가보고 먹고 싶은 게 많아 무려 2박 3일 일정을 계획했다. 이제는 누가 대구 여행일정을 묻는다면 오히려 대답하기가 곤란하다. 보통은 대구여행을 가봤자 1박 2일로 짜지 2박 3일까지는 계획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구의 이모저모를 알고 있는 나로선 최소 일정이 2박 3일이고 그 미만으로 계획을 짜달라 하면 어느걸 포기해야할지 몰라 헤맬 것 같다.


'대구'는'큰 언덕'이라는 뜻이 한자 뜻 자체는 의미가 없다. 대구의 순우리말 지명은 '다벌' '달벌' '달구벌' 등으로 통일신라 때 순우리말 지명을 한역화하는 과정에서 '대구'라는 지명이 붙었다. 신라의 수도 경주와 가까운 거리에 있던 대구는 신라에게 있어서 중요한 국방의 요충지였다. 통일신라 시대 중앙집권화를 완성시켰다고 평가받는 31대왕 신문왕은 (비록 성공하지는 못하지만) 대구로 천도를 계획하기도 했으며, 대구에서 몇 번이고 중대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통일신라 하대의 달벌대전이 있다. 9세기 완도의 청해진에서 군벌에 준하는 세력을 갖추고 있던 장보고가 신라의 왕위계승쟁탈전에 개입하는데, 신라 왕족 김우징이 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청해진 병력으로 수도 경주로 쳐들어갔다. 마침내 김우징은 경주를 장악하고는 45대왕 신무왕으로 국왕으로 즉위한다. 경주 점령에 앞서 경주 장악에 기점이 되었던 전투가 839년 달벌대전이고 달벌이란 '대구'의 순우리말 지명이었다. 신라 때 이미 큰 도시로 확장된 대구는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큰 규모의 도시였고 도심이 일찌감치 형성되어 있었다. 대구를 포함해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큰 도시로 이어지는 경우가 그렇게 흔하진 않다. 이처럼 오래된 도시인데 품은 이야기가 적을리가! 대구는 어떤 모습을 거쳐 지금의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




대구인들의 가장 먼 조상이 묻힌 불로동고분군

대구의 여행은 항상 불로동고분군에서 시작한다. 불로동고분군이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211기의 고분이 확인되었으며 그 무덤의 주체는 다소 의외다. 대구의 지리를 고려해보면 이 무덤의 주인들은 신라의 지배층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신라 지배층의 무덤은 경주에 있지 대구까지 퍼져 있지 않다. 아직 신라가 ‘사로국’이라는 작은 나라였던 시절 대구의 원명칭인 달구벌에는 ‘다벌국’이란 작은 부족국가가 있었다. 원삼국시대 경상권 분포하던 12개의 작은 부족국가 연맹을 진한이라고 불렀다. 신라의 사로국도 진한 12개국 중 하나로 시작했으며 대구의 ‘다벌국’도 진한 12개국 중 하나였다. 지금 불로동고분군에 있는 무덤들은 다벌국 지배층들의 무덤이며 따라서 현 대구인들의 가장 먼 조상님들의 무덤이라고 볼 수 있다. 다벌국은 2세기경 신라로 편입되었다. 현 불로동고분군은 5~6세기 시점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여기서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다벌국이 신라로 편입된 건 2세기 때의 일인데 어떻게 5~6세기경에 다벌국 지배층들의 무덤들이 떼로 나올 수 있을까? 고대전쟁에서 국가와 국가가 싸울 때, 그것도 큰 국가가 작은 부족국가와 싸울 때는 ‘멸망'이란 개념이 옅었다. 국가 전체를 없애버리는 것보단 국가의 실체와 지배층들을 그대로 두고 간접지배하는 형식이었다. 다벌국도 2세기경 신라에 편입됐으나 국가 자체는 계속 지속되고 있었다. 어느 한 국가를 멸망시킨다는 개념이 전쟁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게 5~6세기경이며 다벌국도 이 시점에 자연스레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불로동고분군의 주인들은 다벌국의 마지막 지배층들이 잠들고 있는 곳이다.




팔공산 케이블카를 타고

대구를 굽어보는 장소로 팔공산만한 곳이 없다. 대구를 갈 때마다 팔공산 케이블카를 타고 전망을 구경하지만 정작 대구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팔공산에 케이블카가 있었느냐고 오히려 내게 되묻더라. 대구 시민들에게 팔공산은 너무나도 익숙해서 특별하다고 잘 인식되지 않는단다. 팔공산을 유난히 좋아하는 외지인으로서 팔공산의 매력을 알아주지 못하는 거 같아 서러울 뿐이다. 그래도 팔공산의 매력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은 역시 대구인들이겠지. 팔공산 케이블카를 타고 전망대에 올라가서 대구를 내려다보는 것도 좋지만 내 앞에서 아늑하게 깔려 있는 푸르른 녹음의 장막에 시선을 더 뺏긴다. 다소 무덥지만 햇빛 쨍한 날이면 파란 하늘과 페어링된 빼곡한 초록색의 나뭇잎이 찰랑거린다. 팔공산은 돌산임에도 거친 살결이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고 험준하지도 않으며 나름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서 마치 어린아이들이 줄지어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형상이다. 거창한 산세에 감동을 받기보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산이다.



팔공산 관련한 재미있는 역사적 사건이 있다. 팔공산은 왜 팔공산일까? 팔공산의 원래 이름은 공산이었다. 통일신라가 신라, 고려, 후백제 세 나라로 찢어진 후삼국시대에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 경주로 침투해서 신라의 왕을 죽이고 새로운 왕으로 교체한 적이 있었다. 신라의 동맹국이었던 고려가 구원하러 왔는데 너무 느리게 오는 바람에 견훤이 신라의 수도를 이미 점령해버린 이후였다. 견훤도 바로 후백제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근처 대구에 고려 왕건의 부대가 있다고 듣고 공산에 매복해있다가 왕건의 부대를 기습했다. 927년 공산 전투라고 왕건의 주력부대가 전부 궤멸되는 왕건 최악의 패전이었다. 왕건은 신숭겸 장군을 포함한 8명의 부하장수들이 왕건인 척 연기하여 유인을 해준 덕분에 겨우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살 수 있었다. 반면 미끼가 된 8명은 모두 전사하는데 후대에 이 8명을 기리고자 대구의 ‘공산’을 ‘팔공산’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팔공산 케이블카에서 내려와 다시 대구 시내로 돌아가기 전에 대구의 부인사라는 절을 찾았다. 팔공산은 유명할지언정 대구 내에선 부인사의 인지도가 떨어져서 대구 시민들조차도 부인사의 존재를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부인사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남다른 사찰이다. 고려 초 10~11세기 북방의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가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한 적이 있었다. 대규모 전쟁으로 민생이 피폐해지자 고려의 8대왕 현종은 민심을 위무하고자 불교를 적극적으로 진흥시켰다. 고려는 불교국가였고 피지배층 상당수가 불교에 의지하고 있었다. 고려 현종은 불도의 마음으로 외적을 몰아내달라는 염원을 담아『대반야경』, 『화엄경』, 『금광명경』, 『묘법연화경』 등 불경 무려 6000여 권을 한데 모아 정리하는 ‘대장경’ 간행 사업을 단행했다. 고려 최초의 목판 대장경이라 하여 ‘초조대장경’이라고 한다. 13대왕 선종 때나 가서야 완성된 초조대장경을 보관했던 장소가 대구의 부인사였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번엔 몽골족이 고려 전국토를 유린했을 때 침입해왔을 때 대구까지 내려온 몽골족이 부인사를 불태우면서 초조대장경도 소실되었다. 고려 정부에서 이번엔 몽골족을 막아내고자 하는 염원을 담은 대장경을 다시 만드는데 일전의 초조대장경과 구분하기 위해 '다시 만들었다'는 뜻에서 재조대장경이라 부르며, 재조대장경이 우리에게 익숙한 팔만대장경이다. 지금 부인사는 복원된 절이고 초조대장경은 없어졌지만 팔만대장경의 전신을 보관했다는 사적 가치가 뛰어나며, 사적 가치를 떠나서도 절 자체도 옥색빛깔로 덮여 있어 화려하니 구경삼아 다녀오기 적극 추천하는 곳이다.




대구 국밥의 상징, 국일따로국밥

점심 먹을 시간이 훌쩍 지나 동성로 근처의 대구 시내로 들어왔다. 여행을 하다 보면 지역별 국밥들을 찾아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제 겨우 불로동고분군과 팔공산케이블카 두 군데만 다녀왔다지만 벌써부터 허기지다. 점심에 먹어도 저녁에 먹어도 몸에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국밥은 언제나 여행 최고의 음식이다. 대구는 따로국밥이 유명하다. 대구의 따로국밥은 국과 밥을 따로 음식으로 내놓는 독특한 상차림으로 이름을 알렸다. 국과 밥을 따 내놓는 대구식 국밥이 유명하다길래 예전에는 의아했다. 보통 국밥집을 가면 국과 밥을 따로 주는 게 일반적이지 않나...? 하지만 국과 밥을 따로 내놓는 밥상은 비교적 최근에 생긴 문화이고, 조선후기부터 일제강점기 때까지 전통적인 국밥 식문화는 토렴을 해서 국에 밥을 말아서 나오는 게 일반적이었다. 저 옛날에는 국과 밥을 따로 내놓는다는 게 대구에만 있는 생소한 상차림이었다. ‘따로국밥’이란 명칭은 상차림 방식에서 명명된 이름이고, 메뉴 자체는 쇠고기 베이스의 선지해장국이다. 그렇다면 맛에 있어서 따로국밥의 차별점이 무엇이냐, 국밥에는 파에서 우러나오는 맛도 중요한데 보통은 대파를 쓰는 반면 이곳에서는 어쩌면 생소할 수 있는 다끼파를 사용한다. 대구에는 다양한 따로국밥집들이 있지만 항상 내가 찾는 곳은 국일따로국밥이다. 1946년 문을 연 국일따로국밥은 대구 따로국밥의 명성을 안겨다 준 집이다.



대구 역사의 중심지, 경상감영공원

밥을 든든하게 채웠으니 소화도 시킬 겸 커피 한 잔 사서 산책에 나서본다. 국일따로국밥 지근거리에 경상감영공원이 있다. 감영이란 지금의 도청이다. 도청은 당연히 그 도에서 행정적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에 둔다. 지금의 대구는 광역시라 시청이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대구가 경상도를 대표하여 경상도의 도청인 경상감영이 위치하고 있었다. 본디 경상감영은 경주와 상주에 있었다가 조선의 14대왕인 선조 때에 대구에 자리했다. 오늘날 동성로 일대가 대구의 메인스트리트인 것도 조선시대부터 경상감영이 있음으로 이 동네가 대구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대구 같은 내력이 깊은 도시들은 조선시대 때 형성된 도심이 그대로 이어져 확장되는 경우가 많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해방되고나서도 경상감영 건물 상당수가 헐어진 채 경상북도청 기능을 했으나 경북도청이 이전되면 경상감영도 그 흔적이 모두 사라졌다. 경상감영의 도지사가 근무하던 선화당만을 복원해두었으며 일대를 공원으로 조성해두어 시민들이나 관광객들이 쉬었다 가는 장소로 활용 중이다.



대구근대로 시간여행

대구의 중심지는 조선시대 이래 오늘날 동성로 일대에서 개발 확장되었다. 근대적 상권으로 대구의 시작은 일제강점기 이 일대에 미시비야 백화점이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일제강점기 때 대구 동성로 일대 사진과 현 대구 시내 사진을 비교해보면 가게만 달라졌을 뿐 상권 거리는 거의 그대로다. 그저 미시비야 백화점 대신 동성로 번화가가 들어섰을 뿐이다. 


경상감영공원 바로 옆 대구근대역사관을 기점으로 대구근대화거리가 시작한다. 대구근대역사관은 대구 근현대사 관련 박물관으로 조선시대의 대구라는 도시가 어떻게 근대화 과정을 거쳤는지를 전시하고 있다. 대구근대역사관 건물은 1932년 건립된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1층 전시실에는 조선식산은행 시절의 유물들과 경상감영이 온전했을 때의 모습이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현대사 속 대구의 굵직한 사건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환란의 시대였던 해방 후 한국의 현대사에서 대구 역시 빠질 수 없는 격동의 도시였다. 그 중 두 사건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먼저 대구 10.1사건이다. 해방 직후 사회가 어수선하고 좌우이념 갈등이 극단화되어 있을 때 남쪽에서 좌익들이 가장 많던 지역이 바로 대구였다. 한때 대구의 별명이 '한국의 모스크바'였다. 살아남은 친일파들의 횡포, 인플레이션과 전염병이 겹치면서 해방 후 한국은 전국적으로 식량난에 헐떡였다. 불만이 가득차 있던 분위기에서 결국 대구에 있던 남로당 당원 중심으로 1946년 10월 1일 대규모 시위를 일으켰다. 시위는 유혈사태로 번졌고 이미 전국적으로 심각한 경제난에 굶주리던 한국인들은 10월 1일 대구에서 시위가 터졌다는 소식에 민심이 폭발했다. 시위의 물결은 전국으로 퍼져 12월까지 전국 73개 시군으로 확산, 전국 230만 명이 참가했고, 대구와 경북 지역 인구의 4분의 1이 참가했다. 미군정은 장갑차를 내세워 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두 번째 이승만 독재정부에 항거하여 일어난 대구의 대표적인 민주화운동 2.28운동이다. 1960년 2월 28일에 일어난 대구의 2.2.8운동은 2개월 후 일어난 4.19혁명을 예고했던 민주화운동이었다. 아직 3.15 부정선거를 치르기 이전이었지만 이미 이승만은 한국전쟁 이후로 자유당을 내세워 독재권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3.15 선거를 앞두고 후보들이 유세를 펼치고 있었는데 2월 28일은 야당 민주당의 장면 후보가 연설을 갖는 날이었다. 얼마 전 야당 후보였던 조병옥이 의문사를 당하면서 세간에서는 이승만의 소행이라고 확신했다. 자유당에서는 사람들이 장면 연설에 모이지 못하도록 대구 시내 일요일 등교명령을 내렸고, 이에 반발한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이 등교를 거부하며 자유당을 규탄했다. 경북고등학교를 중심으로 타 고등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장면 연설에 맞추어 시위를 일으킨 사건이 2.28 민주화운동이고, 이 당시 1200여명의 대구 학생들이 참여했다. 경찰들의 체포로 시위는 해산했지만 당대 이승만과 자유당에 대한 민심이 얼마나 부정적이었는지를 시사해주는 사건이었고, 민심을 수습하긴커녕 3.15선거 때 부정행위를 저지른 이승만과 자유당은 4.19혁명을 맞이하여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만다.


대구근대역사관의 대구 현대사 해설을 읽으면서 새로이 알게 된 내용이 있었다. 바로 삼성의 고향이 대구라는 것이다!  오늘날 삼성은 이병철이 대구의 서문시장에서 문을 연 작은 식품업 회사 '삼성상회'에서 시작했다. 이병철은 이제 막 일제강점기가 시작했던 1910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났으며 집안 대대로 대지주 집안이라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10대 때 서울로 유학했고 대학은 와세다대학교 전문부에서 정경과에 입학했다. 대학 중퇴 후에는 하릴없이 무의미하게 친구들이랑 도박이나 하면서 살았던 이병철은 정신을 차리고 사업에 뛰어들기로 하고는집안의 재산으로 마산에서 정미소 일과 운수업 회사를 창업했다. 하필 중일전쟁과 맞물리면서총독부의 자원 및 식량 수탈로 이병철의 첫 사업은 대폭 망해버렸다. 그나마 정리한 자금을 갖고 1938년 새로 시작한 회사가 바로 대구 서문시장에서 삼성상회였다. 삼성상회에서는 제분업과 더불어 국내 청과류와 건어물을 가공, 판매했으며 중국이나 만주와 일본에도 수출을 하며 나름 성과를 올렸다.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영남권 내에서만 유통하던 삼성상회는 해방 후 전국 유통으로 사업을 확장했고 1948년 서울로 회사를 이전, 사명도 삼성물산공사로 바꾸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이병철은 사업을 제대로 정리하지도 못한 채 부산으로 피난을 갔으며 차라리 전쟁을 이용해보겠다며 부산에서 다시 시작한 회사가 1951년 삼성물산주식회사이다.  삼성물산주식회사는 건설업까지 겸하고  전쟁통이라 구하기 쉬웠던 철강, 섬유 등까지도 다루었다. 전후 이병철은 다시 서울로 올라와 삼성물산을 키우며 오늘날의 삼성으로까지 발전했다.


대구근대역사관에서 나와 계속 대구근대거리를 걷다보면 조선시대 약재상들이 모여 약재를 팔던 약령시장이 나온다. 약령시장 초입에는 대구근대골목단팥빵집이 있는데 비주얼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오감을 만족시키기 위한 근현대사 여행을 위해 추억의 단팥빵을 먹으면서 코를 찌르는 한약재 냄새의 시장을 가로지르다보면 고즈넉하고 예스러운 골목 끝에 이상화 고택이 있다. 이상화는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민족시인으로 대구가 자랑스러워 하는 문학인이다. 누구나 고등학교 학창시절에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를 보면 해방이 된 시점에서 나도 모르게 해방을 강하게 염원하는 마음을 불태워본 적이 있을 것이다. 흔히들 김소월을 민족시인으로 평가하지만 김소월은 감정적이고 형싱적인 측면에서 민족정신을 반영했고, 내용 면에서는 이상화의 작품들이 민족정신들이 강하게 투영되어있다. 이상화는 한국의 민간신앙에 대단히 관심이 많았다. 이상화는 한국의 토착신앙에서 종교적 절대자를 가리키는 개념 '검'에 주목하였다. '검'이란 개념이 그의 작품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토착신앙의 믿음에 기반하여 우리 강산과 국토에 대한 애정 시선으로 '검'의 개념을 담아내었다. 이상화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도 '검'이란 개념이 드러나진 않지만 '검'의 관점에서 자연과 인간의 합일, 강산과 국토에 새겨진 얼을 읽어내려보면 시가 단순히 저항적이기만 한 작품이 아니라 얼마나 우리 민족과 산하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작품인지 영험하게 다가올 것이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재촉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전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하늘은 우주 생명을 창조하는 원리를, 땅은 그 하늘의 생명 원리를 받들고 구현해야 할 민족 공동체의 터전을, 사람은 하늘과 땅의 매개자를 각각 표현한다. 이는 우주 전체를 하늘의 조화와 땅의 교화와 개체적 생명의 치화로 바라본 대종교의 미학과 상통한다. 제국주의 권력이 지배하는 체제는 한국 민족 고유의 문화를 말살하는 체제였으며, 끊임없는 전쟁과 수탈을 통하여 유지되는 폭력과 지배의 체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상화의 시는 민족 고유의 문화적 기억을 소환하는 동시에 생명과 조화의 원리를 통하여 폭력과 지배의 원리에 대항한다. 이상화의 시가 여전히 저항시로 읽히고 감상되는 까닭은 이 시에서 불러내는 문화적 기억과 그 속에 담긴 생명의 원리가 제국주의 권력 체제에의 저항으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 홍승진 <이상화 시의 대종교 미학>


이상화의 친구로 역시 대구 출신의 유명한 문학가가 한 명 더 있다. 소설가 현진건이다. <운수 좋은 날>이란 걸작을 남긴 현진건은 1920년대 사실주의 작가다. 사실주의란 현실의 부조리함과 비참함을 여과하거나 거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풍자하는 사조를 말한다. <운수 좋은 날>을 비롯하여 현진건의 작품들은 일제강점기 식민조선인들의 비극적인 삶을 비추는 내용이 상당수다. 동아일보 기자로서도 일제에 저항하는 기사들을 많이 냈지만 일제의 가혹한 압제 속에서 사실주의 문학을 고수할 수가 없었고 현진건은 <흑치상지>, <무영탑> 등 작품의 방향을 역사소설로 전환했다. 누구보다 독립을 염원했던 이상화 시인은 끝내 나라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1943년 4월 25일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리고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독립운동가였던 현진건 또한 1943년 4월 25일 같은 날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나라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같은 날 떠난 두 명의 친구들의 우연 같지 않은 운명의 결말이었다.


이상화 고택을 나오면 지근거리에 높은 하늘에 언뜻 첨탑을 자랑하는 매력적인 성당이 호기심을 끌게 된다. 첨탑을 따라 가다보니 성당의 정체는 대구에서 가장 늠름한 계산대성당이다. 천주교 대구교구 계산성당의 시작은 프랑스 출신 주임신부 김보록이 1899년 한옥식 성당을 지으면서였다. 1900년 성당에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했고 포기할 수 없던 김보록 신부는 이내 다시 힘을 되찾고 1901년 성당을 착공하였다. 그리고 1902년 완공된 모습이 현재의 계산대성당이다. 계산대성당은 서양건축사의 두 가지 건축양식인 고딕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공존하고 있는 성당이다. 높고 첨예한 첨탑은 고딕양식이며 반면 두꺼운 외벽은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계산대성당으로 대구근대골목 투어는 끝이 났지만 계산대성당에서 올려다보이는 교회 하나가 또 시선을 끈다. 성당과 교회가 한 시야에 잡히는 광경이 공교롭다. 또 저 언덕을 안 올라가볼 수 없지 않은가! 교회 이름은 제일교회로 대구 청라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계산대성당에서 큰 길 하나만 건너면 청라언덕으로 올라가는 좁은 길목이 나타나는데, 청라언덕의 좁은 입구가 3.1운동길이란다. 1919년 3.1운동 당시 대구에서는 조선인 백성들이 청라언덕 앞에서 대규모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3.1운동길을 올라가다보면 측면에 개항기~일제강점기 때에 이르는 대구의 흑백사진들이 걸려 있다. 이제 조금 숨이 찰 때 딱 도착한다. 푸른 담쟁이넝쿨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 청라언덕은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서양선교사들이 대구에서 활동하던 근거지였다. 청라언덕을 올라가면 왼쪽에 과거 서양인 선교사들이 지었던 병원, 보육시설, 그들의 집들이 박물관으로 남아 있으며 그 앞으로는 선교사 무덤이 있다. 유럽은 크리스트교 기반이라 망자를 비석에 새겨 기억하는데, 공동묘지가 마치 공원 같고 서정적이다. 실제로 많은 예술가들이 유럽 여행 갔을 때 공동묘지를 꼭 들른다고 한다. 왔던 길에서 오른쪽으로 더 올라가면 우뚝 솟은 제일교회가 보인다. 제일교회에서 뒤로 넘어보이는 곳이 삼성의 고향 서문시장이며, 제일교회 앞에 보이는 일대는 방금까지 투어를 하고 왔던 대구근대골목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일제강점기 대구의 중심부였다. 제일교회에는 일제강점기 대구의 사진이 설명과 함께 소개되고 있는데, 제일교회 앞 대구의 중심부는 전부 일본인 거주지였다고 한다. 조선인들은 길 건너 다소 도심에서 떨어진 청라언덕 부근에 모여 살았다고 하는데, 그래서 청라언덕 입구에 3.1운동의 시위자들이 모일 수밖에 없었나보다.



대구의 막창

서울토박이인 나지만 유난히 대구 친구들이 많다. 1일차 저녁은 누구 한 명 불러서 친구를 보러 왔다는 거짓말로 꾀어내여 저녁식사를 강제로 대접받기로 했다. 무엇을 먹고 싶냐는 친구의 말에 당당하게 대구막창을 외쳤다. 언제나 혼밥을 즐기는 나지만 막창은 혼자 먹기 힘든 메뉴라 너를 이용하는 거란다 친구야 .. 미안해..



왜인지 모르게 대구의 음식은 맛이 없다는 이상한 이미지가 있지만 대구의 향토음식은 맛있고 다양한 요리들이 아주 많다. 그 중 하나가 막창이다. 막창이란 요리 자체가 대구의 달서구 성당못에서 시작해 큰 인기를 얻으며 전국으로 퍼졌다. 돼지막창과 소막창의 '막창'은 서로 다른 부위를 가리킨다. 소막창은 소의 네 번째 위를, 돼지막창은 창자의 끝자락 비장을 가리킨다. 원래 막창은 먹지 않은 요리였으나 대구에서 소문이 나며 오늘날에는 누구나 사랑하는 요리로 자리매김했다. 돈은 없지만 술부심은 누구보다 갑부였던 대학생 때 소막창을 먹을 순 없으니 돼지막창으로 안주를 대신했던 내 애틋한 기억 때문인지 나는 지금도 소막창보다는 돼지막창을 더 좋아한다. 돼지막창이 대구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대구의 달서구 성당못에서 시작했다는 유래를 아는 사람은 많이 없을 듯하다. 달서구 성당못에는 돼지 도살장이 있었는데, 돼지를 도살하고 남은 부산물 가운데 먹지 않는 막창을 싼 가격에 내는 식당들에서 막창이 유래했다. 이제는 대구 전역에 막창 맛집들이 군데군데 포진해 있으니 대구막창 명성의 진원지를 따지는 일은 무의미해졌다. 대구의 막창 맛집들은 너무나도 많다. 대구 막창의 시작을 알린 황금막창, 막창의 타이틀을 뺏어간 반야월의 막창 맛집들, 막창과 곱창의 명성을 함께 쥐고 있는 안지랑의 곱창막창골목, 체인화한 성주곱창 등등 어디를 가야 잘 먹었다고 소문을 낼지 헷갈릴 것이다. 모두가 다 맛집이고 취향의 차이이지만 굳이 팁을 주자면 막창 맛집을 서칭할 때 '막창 노포'라는 검색어로 검색하면 적어도 실패하지는 않을 것이다.


영남의 제일 관을 통과하며!

둘째날 하늘이 창창하다. 어제 막창도 많이 먹고 오늘의 저녁은 다소 일찍 먹을 예정이기에 식사는 아점으로 간단히 해결하고자 미성당납작만두에서 납작만두를 먹으러 갔다. 납작만두 역시 이제는 전국 어떤 분식집에서 쉽게 찾을 수 있지만 한때 납작만두는 대구꿀떡과 더불어 대구를 대표하는 분식이었다. 대구 친구들은 대체 왜 납작만두가 맛있다고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기도 하더라. 납작만두를 불호하는 취향도 십분 이해가 가지만 납작만두에 쫄면을 싸먹으면 먹는 도중에도 군침이 돈다.


대구 여행은 보통 동성로 일대 대구 시내에서 이루어지지만 여행 고수들은 대구 외진 곳까지 탐험하는 법이다. 첫째날엔 대구 시내 기준 북쪽의 불로동고분군과 팔공산을 다녀왔으니 둘째날엔 살짝 남서쪽으로 떨어진 곳으로 가본다. 목표지점은 국립대구박물관이다. 시내에서 곧장 내려가면 멀지 않은 곳에 국립대구박물관이 있지만 그전에 어느 관문 하나를 꼭 통과해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바로 영남제일관이다. 조선시대 주요 행정도시는 성벽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행정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성을 읍성이라고 하는데, 한양으로 따지자면 한양도성과도 같은 거다. 대구에는 대구읍성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그 흔적들이 모조리 훼손되었다. 영남제일관은 대구읍성의 남문이었다. 동양권에서는 읍성이든 산성이든 궁궐이든 동서남북에 문을 두고 보통은 남문을 정문으로 둔다. 따라서 영남제일관은 대구읍성의 정문이었다. 영남제일관은 대구읍성이 철거될 때 함께 철거되었으나 해방이 되고 한참 후였던 1980년 정문이라 상징적인 영남제일관만을 복원하였다. 단 원래 영남제일관의 위치는 대구의 남성로였으나 이미 형성된 도심에 복원할 수가 없어서 오늘날 수성구 일대로 이전하였다. 비록 원래 위치는 아니지만 그 상징성이 남다르니 꼭 한 번 들러보고 싶었다. 대구의 정문이라니 이 정문을 통과해봐야 대구에 들어왔다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 않은가! 대구의 정문인데도 이름이 영남제일관인 게 의아하다. 이 관문이 영남에서 제일 가는 관문이라는 뜻일까, 아니면 이 관문을 통과하여 들어오는 대구가 영남의 제일 도시라는 뜻일까. 어느 쪽이건 간에 대구읍성 정문의 이름만으로도 조선시대 대구의 입지가 어느 정도였는지, 얼마나 큰 도시였는지, 대구인들은 스스로 자부심을 느낄 만하다.


대구의 가장 예술적인 의류점, 국립대구박물관


경상권에는 3개의 국립역사박물관이 있고, 국립대구박물관은 그 중 하나다. 경북에는 국립대구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이 있는데 둘 모두 대구와 경주는 물론 경북지역의 문화역사를 보존하고 전시한다. 모든 국립역사박물관들이 그렇듯 그 지역을 대표하는 박물관들이기에 규모도 크며 전시품도 다양하여 무엇을 감상해야하는지 뜬구름을 잡는 관광객들이 많다. 어느 지역의 국립박물관을 찾는 주변지인들이 있으면 그 박물관에서 꼭 봐야 하는 전시품 몇 점을 소개해주곤 하는데, 국립대구박물관에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전시품들을 추천해보겠다. 선정기준은 지극히 개인적이며 추천하지 않은 전시품들도 그 가치가 다분하다는 것만 염두에 두자.


국립대구박물관에서 제일 먼저 추천하는 전시품은 의성 탑리 출토 금동관이다. 어디서든 삼국시대의 금동관을 접했더라면 백제나 신라의 금동관 형태에 익숙할 것이다. 그러나 의성 탑리 출토 금동관은 그 이형성에 놀라게 된다. 길게 쭉쭉 뻗은 3개의 세움장식에, 마치 새나 짐승의 갈퀴 혹은 털을 연상하게 하는 장식들을 부조해두었다. 혹은 나무를 형상화했다는 해석도 있다. 세움장식의 끝머리는 동그랗게 말고 2개의 구멍을 뚫어놓았는데 고대 동아시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했던 환두대도의 손잡이처럼 보이기도 하여 강인한 인상이 남는다. 5세기경의 금동관이라고 하는데 신라의 금동관과 조형적 차이점이 있으니 경북 의성군에 존재했던 고대국가 조문국 지배층들의 금동관이 아닐까한다. 


다음은 국보로 지정된 불상 몇 점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경북 구미의 선산에서 출토된 금동관음보살입상은 백제의 불상이다. 경상권에서 백제의 불상이 어떻게 나올 수 있는가 의아하긴 하지만 곡선이 돋보이는 몸매에 얇고 유려하고 우아한 자태, 섬세함을 살린 신체묘사 등은 전형적인 백제 양식의 불상이다. 백제 불상의 인장인 X자 영락장식을 하고 있으며, 머리의 보관은 소탈하게 적당히 화려한 대칭구조를 띄고 있다. 표정과 인체의 비례까지 고도로 발달된 미학적 기술로 보아 불상 제작능력의 노하우가 축적되어 있던 백제 후기의 유물로 추정한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백제의 기술이 전래되어 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국보 183호다.


똑같이 구미의 선사에서 출토된 금동여래입상이 있다. 선산 출토 금동여래입상은 통일신라 초기 8세기의 불상이며, 이때 통일신라의 불상은 풍만한 가슴에 딱 달라붙는 의상을 입히는 양식이 유행했다. 미술계에서는 이를 '물에 젖은 옷주름' 기법이라고 한단다. 그러나 머리가 다소 과한 면이 있어 미적으로는 아직 완숙한 단계는 아니다. 국보 182호다.


국보 184호 역시 경북 구미의 선산에서 출토되었다. 선산 출토 금동보살입상이다. 국보 183호인 선산 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과 이름은 비슷한데 생김새는 매우 다르니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이 불상은 선산 출토 금동여래입상과 시기적으로 큰 차이가 나지는 않지만 상대적으로 더 뒤의 작품으로 보인다. 당대 신라에 유행하던 풍만한 불상 양식과 '물에 젖은 옷주름' 기법이 아닌,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불상의 복식 또한 중국 당나라 혹은 서역의 문화에 더 가깝다. 신라의 38대왕 원성왕의 무덤을 가보면 원성왕릉의 무인석이 소구드인으로 되어 있는 걸 확인할 수가 있다. 통일신라는 서역에서부터 아랍 문화까지 받아들였던 개방적인 나라였으니 이색문화의 혼융이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


선산 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국보 183호)-선산 출토 금동여래입상(국보 182호)-선산 출토 금동보살입상(국보184호)


국립대구박물관의 메인 이벤트는 마지막 전시인 '복식문화실'이다. 한국의 밀라노, 패션의 도시라는 대구의 정체성을 살려 국립대구박물관이 야심차게 힘을 주고 있는 전시다. 의류사를 조명한 유일한 박물관의 전시이며, 우리 조상님들이 입었던 의상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가 있다. 조선시대 지배층들의 복식이 메인이기는 하지만 의류에 관한 전반적인 지식을 공부할 수도 있다. 이 전시가 유독 마음에 드는 건 그저 과거의 유물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어서다. 전시의 마지막 공간에는 현대에서도 입을 수 있는 개량한복까지 소개해주고 있다. 마치 박물관이 아니라 갤러리에 온 듯하다. 여러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작품을 박물관에 기증한 것인데, 전통문화는 이렇게 현대에서도 꾸준히 사용이 되어야 맥을 이어나갈 수 있는 법이다. 현대 개량한복 전시로 과거에만 머물던 전통문화가 생명력을 얻을 수 있는 화룡점정의 기획이 아닐 수 없다.




대구 최고의 별미, 뭉티기

각양각색의 대구 향토음식 중 최고의 별미는 단언 뭉티기이다. 뭉티기는 소의 우둔살을 활용한 생고기로, 뭉텅뭉텅 잘라내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만 뭉티기가 많이 나는 부위가 아니라 먹기가 마냥 쉽지만은 않다. 대구의 뭉티기로는 왕거미식당과 장원식당이 쌍두마차의 명성을 누리고 있다. 이중 왕거미식당이 대중적으로 더 잘 알려진 터라 웨이팅이 입이 벌어지는 수준이다. 식당웨이팅을 가장 싫어하지만 유일하게 기다림을 감내하는 식당이 왕거미식당이다. 그래도 웨이팅 시간을 줄이기 위해선 오픈 시간보다 30분은 일찍 가서 기다려야 한다. 왕거미식당 도착시간 오후 3시. 저녁을 먹기에 알맞은 시간이 아니지만 오늘의 왕거미식당을 위해 일부러 아점으로 간단한 납작만두를 먹었다. 딱 알맞게 허기지다. 대구를 포함해 경북지역은 소요리가 발달해 있다. 예부터 소백산맥에서 소 목축이 활성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구-경북지역을 놀러가면 소 요리를 꼭 먹고 와야 제대로 여행을 즐겼다고 할 수 있다!



왕거미식당의 생고기. 붉은색이 선명하고 힘줄이 그대로 보인다. 남들처럼 그릇을 거꾸로 뒤집어보면서 쫀득함과 놀란다. 생고기는 당연하게도 신선도가 생명이고, 신선도가 좋다는 건 쫀득함과 식감이 무조건적으로 보장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뭉티기의 질도 질이지만 이 식당의 소스도 고소한 참기름과 달달한 고춧가루의 훌륭한 조합으로 뭉티기의 풍미를 담당해준다. 뭉티기를 파는 곳엔 뭉티기의 짝꿍 오드레기도 필수다. 오드레기는 소 한 마리당 200~600g 정도만 나오는 귀한 부위로 소의 힘줄이다. 씹을 때 오독오독 소리가 난다고 해서 오드레기라고 한단다. 오드레기는 별 소스없이 소금에만 찍어먹는 게 제일이다. 오드레기는 연탄에 굽는데 웨이팅할 때 눈애 매운 주범이 이 녀석이었다. 뭉티기와 오드레기는 기대 이상의 맛이다. 뭉티기와 오드레기를 가장 기대하긴 했지만 왕거미식당의 또 한 명의 대단한 조연이 있다. 바로 콩나물찜인데, 뭉티기와 오드레기가 자극적이지 않은 맛인데 그 심심한 빈틈을 콩나물찜이 보충해준다. 술안주로는 콩나물찜만한 게 없다. 정신 차려 보니 어느새 내 앞엔 비어있는 소주병들... 과한 지출이 나가긴 했으나 후회없는 지출이다. 뭉티기는 평일에만 판매하며 주말에는 소 도축을 하지 않아 판매하지 않는다.



전설에 젖는, 김광석다시그리길

약간의 취기. 그렇지만 일찍 저녁을 먹은 탓에 아직은 환한 하늘. 이대로 숙소로 들어가 쉬기 뭔가 아쉬워 감성에 젖은 취기를 핑계 삼아 더 깊은 감상주의에 젖어보고자 김광석다시그리길을 찾았다. 한국대중음악사에서 전설로 남겨진 고(故) 김광석은 대구에서 태어나 어릴 적 서울로 넘어왔다고 한다. 1984년 가수 김민기와 함께 작업하며 음악계로 뛰어든 김광석은 1988년 7인조 그룹 '동물원'으로 데뷔했다. '동물원'의 데뷔에 밴드 산울림이 크게 도와주었다. 하지만 '동물원'으로 수익을 내진 못하자 1989년 김광석은 솔로로 데뷔, 그때부터 김광석은 전설의 역사를 써내려갔다. 김광석은 생전 4개의 정규앨범과 2개의 리메이크앨범을 발표했고 거의 전 수록곡들이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김광석도 천재의 요절병이라는 징크스를 피해가지 못했다. 1996년 30대 초반의 나이로 김광석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김광석의 자살은 당시 워낙 충격적이라 오늘날에도 김광석의 죽음에 물음표를 던지며 각종 설을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김광석의 죽음에 석연치 않은 구석들도 많지만, 세대는 달라도 그의 노래의 팬으로서, 김광석을 의문사한 미스테리의 연예인이 아닌 섬세한 가사로 많은 대중들의 가슴을 녹이고 위로해주었던 아티스트로도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카페에 앉아 커피로 술을 잠재우며 듣는 김광석의 노래는 여행 끝의 최고의 보상이다.


"문명이 발달해 갈수록 오히려 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있어요. 그 상처는 누군가 반드시 보듬어 안아야만 해요. 제 노래가 힘겨운 삶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비상구가 되었으면 해요." - 김광석




나라의 빚을 갚아라! 국채보상운동기념관

대구는 역사적 내력이 깊은 곳이다보니 일찍이 대도시였고 그만큼 대구에서 발생했던 여러 가지 다양한 사건사고들이 많았다. 그중 자랑스러운 대구의 역사적 사건들은 종종 기념관 혹은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기념하고 있다. 멀어봤자 대부분 대구 시내에 집중되어 있어서 각종 기념관 혹은 기념공원들을 하루에 날을 잡고 돌아다녀도 좋지만 하루하루 메인 이벤트를 위해 대구 시내에서 벗어나려고 하다보니 대구 시내에서 놀 곳들도 2박 3일 일정에서 찢을 수밖에 없었다. 체력을 고려해서라도 하루만에 대구 시내 모든 곳을 돌아보는 게 힘들 수도 있다. 그래서 숙소를 대구 시내로 잡으면 동선이 훨씬 편리해진다. 셋째날의 투어는 대구 시내의 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서 시작해 시내에서 다시 벗어날 계획이다.


국채보상운동은 일제강점기로 넘어가기 직전의 구한말 1907년에 있었던 일종의 IMF 금모으기운동의 선배격인 사건이었다. 1907년이면 일제강점기 3년 전으로 이미 여러 국권들이 일제에게 예속되어 있었다. 대한제국의 재정권도 장악하고 있던 일제는 근대화를 명목으로 강제적으로 여러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여 대한제국엔 1년 세입치 두 배 가량의 빚이 쌓여 있었다. 막대한 양의 차관을 조선의 백성들이 갚겠다면서 자발적으로 나선 운동이 국채보상운동이었고 그 시발점이 바로 대구였다. 대구에서 시작한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던 배경에는 신문사 대한매일신보의 도움이 컸다. 대한매일신보에서 홍보를 맡아주고 모금을 신문사로 모았는데 그렇게 모인 금액은 80만 금. 차관 1300만 금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었지만 열기만큼은 매우 뜨거웠다. 조선인들의 열기를 경계했던 통감부(훗날의 총독부)는 대한매일신보 양기탁 사장을 공금횡령죄로 체포해버리면서 국채보상운동은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통감부의 방해로 끝이 났지만 국채보상운동은 조선인들이 합심하면 어떤 거국적 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지를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국채보상운동 관련한 기록물들은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고, 자세한 내용은 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국채보상기성회취지서
국채보상발기회 연설
국채보상 영수증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비대칭의 대칭, 도동서원

오후에는 저 멀리 달성군까지 내려갈까 한다. 대구 달성군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9개의 서원 중 도동서원이 있다. <서울 촌놈의 국내여행 뿌수기> '영주' 편의 소수서원, '논산' 편의 돈암서원에 이어 3번째로 소개하는 유네스코 지정 '한국의 서원'이다. 소수서원은 한국 최초의 성리학자인 안향을, 돈암서원은 조선후기 예학자 김장생을 모시는 공간이라면 '대구 달성'의 도동서원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 김굉필을 모시는 서원이다. 김굉필은 자신의 이름보다 제자의 이름이 더 유명하다. 김굉필의 제자 중 하나가 조선 중기 4대 사화 중 기묘사화의 주인공 조광조이다. 연산군을 내쫓고 중종반정으로 왕이 된 조선의 11대왕 중종은 미약해진 국왕의 권위를 확대하고 공신들의 비대해진 영향력을 축소시키고자 조광조 등 젊은 사대부들을 등용했다. 중종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조광조는 조선의 낡은 폐습들을 정통 성리학에 입각해 개혁하고자 했지만, 오히려 조광조로 인해 자신의 입지가 좁아든다고 여긴 중종은 마지막 순간에 조광조를 내쳤다. 조선 중기 조선의 정치계에 바람과 태풍을 몰고 왔던 조광조. 조광조의 사상 대부분은 김굉필로부터 기인했다. 김굉필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김굉필의 가문은 대구의 달성군(도동)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었고, 김굉필은 그곳에서 '한훤당'이라는 작은 서재를 짓고 학문을 닦아서 세상 사람들은 김굉필을 '한훤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김굉필은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로 이어지는 사림 계보의 정통에 있는 성리학자로 그의 사상이 조광조로 이어졌다. 조광조는 집권 당시 <소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이것은 김굉필로부터 배운 바이다. 김굉필은 30세까지도 <소학>을 읽었다고 한다. 유교경전 중 하나인 <소학>은 어린아이들을 위한 아동용 유교경전으로 김굉필은 모든 어른들이 어린아이들이 배우는 학문의 내용처럼 그대로 체득하고 실현한다면 세상일을 어지럽히지 않을 것이라 주장했다. 그렇기에 오히려 어린아이들이 배우는 <소학>이 그 어떤 유교경전보다 깊은 가르침을 준다며 <소학>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어른들의 사회는 우리가 어린 시절 배운 교과서의 내용과 달라도 너무나도 다르다. 이상적이고 순수한 사회를 바라는 건 비현실적일 수 있으나 적어도 어린 아이들 앞에 당당한 사회를 만들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도동서원은 건축학적으로도 뛰어난 서원이다. 도동서원은 그렇게 큰 규모의 서원은 아니지만 도동서원에 간다면 학생들이 공부를 하던 강당인 '중정당'을 봐야 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중정당을 떠받치고 있는 석축에 주목해야 한다. 한국의 전통건축은 돌을 잘 쓰는 기술이 예술이다. 전문가들이나 외국인들은 전통건축을 구경하러 갈 때 가장 먼저 보거나 가장 먼저 놀라는 게 건축물을 떠받치고 있는 석축계단이다. 규칙적이면서 비규칙적인 돌들의 조화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갔다오면 기억에 남는 것이 석축계단일 정도로 그 조형성에 매료된다. 유홍준 교수난 도동서원의 석축을 ‘비대칭의 대칭’이라고 평했다.




대구여행의 마무리 - 동인동 찜갈비

다시 시내로 돌아왔다. 저녁 기차를 타려면 어차피 시내 부근에 있어야 하니 남은 시간 시내에서 보내고자 한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는데 마지막 만찬은 동인동의 찜갈비다. 동인동 찜갈비 역시 대구의 향토음식이다. 동인동 찜갈비까지 먹어줘야 대구의 간판 향토음식들을 원없이 먹고 갔다고 할 수 있다! 대구의 동인동 찜갈비는 소갈비를 매콤하게 다지고 찐 요리인데, 1960년대 공사장의 인부들의 요청으로 남은 소갈비를 넣은 찌개를 졸일 때까지 끓여서 내던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얼얼한 맛이 특징이라는데 못 먹을 정도까지는 아니고 달짝찌근해서 식욕을 돋운다. 비주얼은 악마의 음식 같지만 이 매력에 빠지면 쉽게 헤어나오지 못한다. 동인동찜갈비골목에 들어서면 코끗을 자극하는 냄새들로 가득한 식당들이 즐비한데, 지인 추천에 따라 낙영찜갈비를 찾았다. 가장 유명한 식당이란다. 나중에 찾아보니 낙영찜갈비가 가장 유명하긴 하지만 벙글벙글찜갈비, 여원찜갈비 등 어디든 평균 이상의 맛을 내는 곳인 듯 싶다.












아직 기차시간까지 여유가 있어서 영화 한 편을 보려고 한다. 지방여행을 갔을 때 시간이 나면 그 지역의 독립영화관을 찾아 영화 한 편 정도 관람하고 오곤 한다. 서울이야 독립영화관들이 많지만 지방은 독립영화관들이 한 군데밖에 없어서 그 가치가 더 소중하다. 대구에는 오오극장이라는, 영화덕후들이 자주 찾는 독립영화관이 있다. 좌석이 55석이라 오오극장이다. 큰 규모의 좌석이 아님에도 이처럼 귀여운 발상에서 나온 이름만큼 정이 가는 극장이다. 대구의 유일한 독립영화관인 만큼 다양한 행사들도 이루어지고 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오니 딱 기차역을 가면 기차를 탈 수 있는 시간이다. 오오극장을 나오면 바로 옆에 한국의 3대 빵집이라고 하는 대구 삼송빵집이 있다. 삼송빵집의 명물이라는 마약옥수수빵을 기념품으로 사고 가방 든든하게 서울로 향한다. 한국의 3대 빵집 삼송빵집의 마약옥수수빵이 이제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빵이 아니냐고 캐묻지 마라! 여행러들은 언제나 정통을 따진다!















대구는 우리의 현대사에 있어서도 큰 역할과 기여를 했던 도시다. 한국전쟁 후 아무 기반도 없던 한국이 본격적인 산업화의 길을 걸으려고 할 때 처음 시작했던 분야는 경공업일 수밖에 없었다. 60년대의 성공적인 경공업 운영으로 70년대 비로소 중공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80년대부터는 첨단산업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오늘날 발달한 우리 산업의 그 시초는 경공업이었고 대구는 경공업 중에서 섬유산업으로 크게 이바지했다. 생각해보면 현대산업화 시기 대구의 경공업은 아주 뚱딴지 같은 산업은 아니었다. 조선시대의 3대 시장 중 하나였던 서문시장은 예부터 포목상들의 포목장사로 유명했다고 한다. 근대적 개념의 섬유산업은 일제강점기 때 명주산업이 육성되면서 섬유공장과 가게들이 대구에 집결하고 있었다. 60년대 비로소 섬유산업이 크게 확장되면서 70년대는 해외 수출에도 성과를 냈다. 1981년 세계 최대 규모의 대구염색산업단지가 들어섰고 80년대 대구의 섬유 강연사 직물도 세계 최대 생산지였다고 한다. 1987년 11월 11일부터 대구시가 주축이 되어 섬유의 날을 제정하는 등 승승장구를 하는 듯싶었으나 80년대 후반~90년대 다양해진 산업화로 인해 대구의 섬유산업은 다소 위축되었다. 특히 IMF로 수출이 막히면서 대구의 섬유산업은 큰 타격을 받았다.


대구의 유서 깊은 섬유산업을 살리려는 일환으로 김대중 정권부터 대구의 섬유산업을 패션산업으로 확대하기로 결정하고, 대구를 한국의 밀라노로 만들겠다는 이른바 밀라노 프로젝트가 시행되었다. 비록 밀라노 프로젝트의 성과에 대해서는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해석이 지배적이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대구는 '패션의 도시'라는 이미지를 밀고 나가고 있다. 2015년 대구광역시는 밀라노와 자매결연을 맺었고 대구는 섬유, 염색, 패션의 중심지를 구축해가고 있는 중이다. 


대한민국의 오랜 대도시들은 거의 대부분이 잠시라도 한때 한 국가의 수도였던 곳이었다. 단 한번도 수도였던 적이 없음에도 삼국시대부터 꾸준히 대도시로서 유지한 도시는 대구가 유일하다시피 하다. 지명조차 흔하디 흔한 '~주' '~천' '~산' '~양'이 아닌 순우리말 유래를 가지고 있는 것도 대구만의 개성이다. 오래된 대도시이기에 산업적인 비중이 큰지라 관광도시로서 손꼽히진 않지만 아는 만큼 보이고, 관심을 주는 만큼 즐길 수 있다고 오래된 도시라면, 그것도 꾸준히 대도시였다면 그만큼 많은 사연과 이야기를 품고 있기에 대구만한 관광도시가 또 없는 법이다. 대구에는 단절되지 않은 세월을 보냈고 또 그런 세월이 흘러가고 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음악 추천 

- 김광석 20주기 추모 앨범 <김광석, 다시>

대구여행 편에서만 특별히 여행지와 어울리는 책이 아니라 음악을 추천드리겠습니다. 정확히는 앨범 추천인데요, 김광석의 노래들은 한국인이라면 한 곡쯤은 오며 가며 들었을 겁니다. "이 노래가 김광석 노래였어?!" 라고 느낄 때도 많죠. 김광석의 전곡들을 다 알진 못하지만 지금까지 들어본 노래들 중에 빠지지 않은 김광석의 노래가 없었습니다. 김광석 노래의 입문자용으로 <김광석, 다시>라는 앨범을 추천드립니다. 지난 2016년 지니뮤직과 CJ ENM 계열사인 스톤뮤지엔터테인먼트에서 김광석의 대표곡 10곡을 모아 리메이크한 김광석 20주기 추모 앨범입니다. 이 앨범은 단순한 리메이크가 아닙니다. 노래당 후배가수들이 참여해 후배가수들의 목소리와 김광석의 목소리를 복원하여 마치 듀엣곡으로 재해석했답니다. 참여한 후배가수들은 로이킴,  정인, 강이채, 하림, 커먼그라운드, 한상원, 신날새, 이주한, 고상지, Bob James 이며 수록곡들은 <너에게>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사랑이라는 이유로> <바람이 불어오는 곳> <일어나> <그날들> <외사랑> <나무> <거리에서> <서른 즈음에> 입니다. 김광석의 또다른 대표곡들인 <사랑했지만> <이등병의 편지>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등이 빠지긴 했지만 입문용으로 듣기 좋은 노래들이며, 이 앨범을 통해 더 많은 김광석의 노래들에 관심을 가져보는 게 어떨까요?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데이비드 프랭클 감독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대구의 아이덴티티답게 패션과 관련한 영화 한 편 소개해드립니다. 미국의 작가 로렌 와이스버거가 보그지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소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극중 비서인 앤디 삭스가 작가 자신인 로렌 와이스버거, 극중 편집장 미란다는 실제 보그지의 편집장인 안나 윈투어를 모티프로 만들어진 인물들입니다. 소설은 패션산업에 대한 다양한 지식과 이모저모가 함께 묘사되고 있으나 영화는 두 여성 앤디와 미란다의 삶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제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평범한 뉴욕의 사회초년생 비서 앤디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올 거 같지 않은 패션계의 거물 미란다의 비서로 일하면서 점점 미란다와 동화되어갑니다. 미란다의 까탈스러움에 시달리던 앤디는 인간적으로 미란다를 존경하기 시작하지만 종국에는 미란다와 다른 선택을 합니다. 같은 길에 서지만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걷는 엔딩씬은 이 영화의 주제를 압축해주는데요, 앤 해서웨이의 통통 튀는 매력의 연기와 메릴 스트립의 중후하고 기품 넘치는 연기도 재미있는 앙상블을 만들어줍니다. 아마 많은 사회초년생들이 격하게 공감하고 큰 위로와 힘을 얻어갈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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