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꿈을 여행하다
낚시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즐겨보는 유튜브 수산물 채널이나 낚시가 취미인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낚시꾼들의 성지로 손꼽히는 해역 중 하나가 고흥의 나로도이다. 나 같은 비낚시꾼들에게는 나로도가 생소한 이름일 수 있지만 동시에 어딘가 익숙한 이름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센터가 나로우주센터이며, 우리나라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우주발사체의 이름이 바로 나로호다. '나로'의 이름이 나로도에서 유래했다. 복잡한 해안의 우리나라 남해안에 주렁주렁 장식되어 있는 반도들 가운데 화산활동으로 인해 함몰된 칼데라 지형인 고흥반도. 고흥반도는 수산업의 메카이자 대한민국 우주항공의 중심지로 거듭나며 고흥만의 개성어린 해안문화를 보유하고 있는 곳이다.
고흥에서 나로호 관련한 여행지로는 나로호를 발사한 곳인 나로우주센터가 있고, 우주센터를 전망할 수 있는 고흥우주발사전망대가 있다. 육지에서 내려오면 위치적으로는 고흥 내륙에 있는 고흥우주발사전망대를 먼저 들를 수 있다.
나로호의 영어명칭은 KSLV-1. '한국형발사체'라는 뜻이다. 1989년 대한민국은 과학의 도시 대전의 대덕연구단지에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일명 KARI(카리)를 설립하며 본격적으로 우주항공분야에 뛰어들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은 우주발사 연구에 착수했고 1993년~2002년까지 한국형과학관측로켓(KSR) 1~3호기를 발사했다. 목적 자체는 우주까지 나아가지 않고 항공 관련한 자료를 관측하고 수집하는 것이었지만 하늘로 비행물체를 성공적으로 발사했다는 경험이 우주발사체 연구에 좋은 선험적 연구가 되었다. 1999년에는 인공위성 아리랑 1호를 성공적으로 띄우기도 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은 본격적으로 우주발사체 개발을 본격화했다. 이른바 나로호 개발 프로젝트였다. 2004년 러시아와 우주기술협력협정을 체결하고 러시아로부터 기술적 협조를 지원받았다. 원래 계획은 2007년에 발사할 예정이었으나 여러 가지 공정에서 차질을 빚어 2009년 마침내 나로호 1호기를 발사했다. 8월 19일 발사 예정이었지만 발사 몇 분을 안 남겨 놓고 장비적 결함으로 25일로 지연되는 불안한 징조가 있더니 아니나 다를까 페어링이 분리되지 않으며 폭파되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은 2호기를 개발해 3년 후 2010년 2차 발사를 시도했지만 이번에도 기기 오작동으로 예정되었던 발사를 다음날로 미뤘다. 그러나 나로호 2호기도 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폭발하였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은 절치부심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2013년 마침내 나로호 3호기를 성공적으로 발사시켰다. 현재 나로호 3호기는 103분마다 지구 한 바퀴를 돌며 우주 관련 자료를 수집 측 관측 중이다. 나로호 3호 발사의 성공을 계기로 대한민국은 상대적으로 더 러시아로부터 독립하여 대한민국 자체의 기술을 집중시켜 나로호 중량 19배, 나로호 프로젝트 예산의 4배에 달하는 누리호 발사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발사지는 여전히 고흥의 나로도이며 지난 2021년 1차 발사에서는 실패, 2022년 2차 발사에는 성공했다. 2023년 5월 누리호 발사가 예정되어 있으며 누리호 3차 발사를 기점으로 향후 대한민국의 우주발사체 연구는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서 민간의 한화에로스페이스로 넘어간다고 한다.
고흥의 대표적인 얼굴이 있다면 전통적으로 영남용바위였다. 오래 전부터 고흥에는 용 한 마리가 살고 있다는 전설이 내려왔단다. 조선 후기 조선 전국의 읍에서 올린 읍지를 모아 엮은 <여지도서>에는 "팔영산 동쪽 바닷가에 용이 서려 있었던 듯한 자취가 남아 있고, 성난 바람과 파도가 치솟아 오르면 교룡이 사는 굴의 모양과 아주 비슷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흥에서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고흥의 류시인이 꿈속에서 여의주를 뺏고자 서로 다투는 두 용 중 한 마리를 활로 쏘라는 노인의 말을 듣고 바다로 나아가보니 과연 두 마리 용이 하늘로 올라가며 여의주를 두고 다투고 있었다. 류시인은 한 마리를 활로 쐈고 다른 한 마리의 용은 바위를 받침삼아 승천하였다고 하는데, 승천하던 용이 발로 받쳤던 바위에 그 흔적이 남아 있어서 이 바위에 '영남용바위'라는 이름이 붙었다. 용의 기운을 받고자 많은 인파들이 영남용바위에 오르고는 했다는데, 고흥에서는 영남용바위에 승천하는 용 동상을 세워두었다.
영남용바위는 고흥우주발사전망대 인근, 나로우주센터로 가는 길목 바닷가에 붙어 있다. 고흥에 서린 승천하는 용의 비상이 고흥 땅에 기운을 주어 고흥이 우주연구의 중심지가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괜한 재미난 상상을 해본다.
서울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 지역의 로컬리티가 강해지는 법이다. 로컬리티는 역시 음식에서 가장 강하게 드러난다. 고흥이라고 하니 점심메뉴 서칭에 심혈을 기울였다. 방송에 최대한 나왔던 식당들 중에서 현지인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 어딜까. 고흥의 시내 한복판에 고흥의 해산물을 파는 '도라지식당'이라고 찾아냈다. 방송출연도 없었고 인터넷에서도 보편화된 식당이 아니기에 걱정이 안 될 수는 없었지만 식당을 다녀오고 스스로에게 뿌듯해졌다. 도라지식당에서 가장 기대가 컸던 음식은 황가오리회였다. 해산물하면 눈이 뒤집히는 나도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어종이다. 황가오리의 표준명은 노랑가오리로, 말그대로 노란 빛을 띄는 가오리다. 때로는 붉은빛을 내기도 해서 영어명은 red stingray 라고 한다. 모래나 진흙으로 된 얕은 수심에서 서식하며 서해안과 남해안 사이에 분포한다. 회 색깔이 선명한 선홍빛이라 혹시 지나치게 비리진 않을까 했지만 전혀 우악스러운 맛 없이 깔끔하고 쫄깃하고 구수한 맛이 일품이었다. 젊은 사람들끼리 황가오리회를 먹는 광경이 신기했는지 혹은 기특했는지 옆 테이블에 있던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오늘 호래기가 맛있다며 꼭 호랭이를 먹어보라고 우리 의사도 없이 우리 테이블에 호래기를 주문해주셨다. 호래기가 뭔가 싶었는데 꼴뚜기의 전라도 방언이었다. 양념된 꼴뚜기만 먹어봤지 생꼴뚜기는 처음이었는데 살짝 비리지만 오히려 감칠맛이 더하고 고춧가루에 버무려서 부담없이 독특한 식감을 즐겼다. 황가오리회와 호래기만으로는 배가 차지 않아 생선구이를 시켰다. 생선구이도 그날 어획에 따라 어종이 달라지는데 오늘 생선구이는 군평선이란다. 군평선이? 군평선이는 정말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어종이라 몇번이고 사장님께 되물었다. 사장님은 금풍생이라고 하셔서 인터넷에 계속 잘못 검색하면서 찾은 끝에 금풍생이도 전라도 방언이고 표준명은 '군평선이'이다. 군평선이는 전라도 남해안에서 주로 먹는 생선구이로 이순신 장군도 군평선이 생선을 유독 좋아했단다. 생선구이의 맛은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거늘 군평선이의 구이 맛은 적어도 지금까지 먹어본 생선구이 중에선 가장 맛이 좋았다. 이렇게 맛집 서칭 능력을 키워가나보다.
그러나 역시 고흥의 토산물이라 함은 유자다. 11월 이제 막 추워지는 계절에 제철이라고 하는 유자는 그 자체로는 셔서 못 먹지만 청으로 내어 먹으면 이렇게 달콤한 과일이 또 없다. 유자하면 원산지가 저 먼 해외이고 비교적 최근에 한국에서 재배했다는 편견이 있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아주 오래 전부터 한반도에서 특히 따뜻한 남해안과 제주도에서 유자를 재배했으며 조선시대에는 유자를 공납으로 진상했다는 기록도 있다. 공식적으로는 통일신라 때 장보고가 해외에서 종자를 수입해와 남해안 일대에서 재배했다는 기록이 유자의 첫 시작이다. 다만 생산량은 다른 과일에 비해 많지 않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해방 후까지 일시적으로 유자 생산이 줄어들었다가 산업화를 거치면서 남해 유자 재배의 열기가 부흥했다. 오늘날에는 고흥의 유자와 남해의 유자가 한국 유자 재배의 양대산맥이다.
고흥에가면 '유쟈'라는 유자 전문 카페가 있다. 유자를 활용한 다양한 음료는 물론이고 유자 베이스의 크로플, 그리고 각종 유자 기념품도 팔고 있다. 카페가 온 노란 세상이라 어떻게 사진을 찍어도 동화적으로 잘 나온다. 녹동항 쪽으로 가면 녹동양조장이 있는데, 녹동양조장에서는 고흥유자주를 양조 및 판매하고 있다. 고흥유자주의 명성이 워낙 자자하다보니 여러 도시에서 쉽게 구매해 먹어볼 수 있지만 직접 고흥의 양조장에서 구매하면 술집에서 구매하는 것보다 저렴하고 훨씬 뿌듯한 경험이 아니겠는가.
녹동양조장이 있는 녹동항에서 소록대교 하나만 건너면 비극의 섬 소록도가 있다. '작은 사슴'이라는 어여쁜 이름을 가지고 있는 섬이지만 소록도는 혐오와 차별로 인해 사회로부터 강제로 격리되었던 자들이 모여 살았던 수용소였다. 일반인이라면 절대 소록도의 땅을 밟아서는 안 되는 금기의 구역이었다. 비극의 현장인 만큼 고흥여행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이지만 아뿔싸! 녹동대교를 건너 소록도로 들어가려니 코로나 이후 방역으로 인해 관계자가 아니면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 방역단계가 해제되어 이제는 아무나 소록도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안일하게 생각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언젠가 다시 소록도를 찾게다는 마음만 품은 채 차 방향을 돌려야 했다. 이마저도 나에게 소록도스러운 경험이었다. 비록 소록도에 직접 가보지 못했지만 소록도에 관한 비극을 이곳에 글로나마 남겨보고자 한다.
소록도는 한센병이라 불리는 피부병질환자들을 격리시키겠다는 명분하에 가둬두었던 감옥 같은 곳이었다. 한센병은 나병, 문둥병이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한국은 물론 전세계에서 혐오하던 질병이었다. 서양에서는 나병환자들이 씻지 못할 죄를 지어 하느님께 벌을 받는다고 인식하여 죄인 취급을 받고 돌팔매질을 당했다. 한센병은 균의 최초발견자인 노르웨이 의학자 '게르하르트 엔리크 한센'의 이름에서 따온 병명으로 온몸에 염증성 발진이 나타나 각종 간지러움증과 부패를 겪는 심각한 피부병이다. 전염성이지만 전염의 강도는 매우 약한 편이다. 유전도 전혀 되지 않으며 현재는 치료가 거의 100% 가능하며 현 인류 95%가 면역 DNA를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다만 아직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에는 한센병 환자들을 사람 자체로 여기지 않았으며 남성환자를 강제로 정관수술시키고 임신한 한센병 여성환자의 태아를 강제로 죽이는 일들까지 빈번하게 일어났다. 한센병 자체도 고통스럽지만 환자들은 2차적으로 사회적 멸시와 혐오와 차별이란 고통까지 겪어야만 했다. 한센병 환자에 대한 비인간적인 처우가 소록도를 금기의 섬으로 만들어버렸다. 한센병을 드러낼 수가 없어서 독수공방하다가 숨진 경우도 부지기수다.
소록도 병원의 시작은 1909년 정부 차원에서 소록도에 세워진 자혜의원에서부터다. 일제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한센병에 대한 공포가 극심할 때라 한센병환자들의 격리수용시설이 필요하다며 데라우치 초대 총독은 소록도의 자혜의원을 한센병수용소로 정했다. 소록도 자혜의원이 2대 원장이었던 하나이 젠키치는 의료인으로서 봉사하고 일본인이지만 조선인들의 정체성을 모두 수용하는 등 환자들과 서스럼없이 지냈으나 4대 원장이었던 스오 마사스에는 의사임에도 환자들을 괴롭히고 차별하고 욕보이고 마음대로 부려대는 악질 원장으로 환자들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주었다. 환자들의 비극은 일제강점기에 국한되지 않았다. 해방 후 병원의 운영권을 두고 직원들과 환자들 사이에 싸움이 있었는데 1945년 직원들은 환자 90명 중 84명을 학살했던 사건도 있었다. 1950년 6.25전쟁 도중 군인들이 걸식하던 소록도의 한센병환자 28명을 이유없이 살해했고, 또 한번은 그저 한센병환자라는 이유로 군인들이 굴 속에 환자들을 몰아넣고 폭탄을 던지기도 했다. 전쟁이라는 어수선한 상황이라서가 아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그저 주민들에게 살해당하는 한센병환자도 셀 수 없었다. 1960년 국립소록도병원이 공식적으로 출범하였으나 차마 꺼내기도 힘든 각종 끔찍한 사건들이 환자들에게 자행되고 있었다. 1961년엔 정부가 오마도 간척사업에 노역하면 간척한 오마도 땅을 한센병환자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약속해주었고 이때 부임한 조창원 원장은 한센병환자들과 힘들게 힘들게 간척사업에 동원됐다. 1964년 거의 끝나갈 때쯤 오마도 원주민들이 한센병환자들과 같이 살 수 없다며 시위하는 바람에 환자들의 노력은 또 물거품이 되었다.
최근에는 인권에 대한 수준이 높아지면서 한센병환자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퍼지고 있지만 여전히 소록도의 한센병환자들은 세상에 나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한센병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천 년이나 이어졌으니 말이다. 한센병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은 엄연히 나치즘의 우생학적 발상이다. 단순히 전염병에 대해 경계하는 수준을 넘어서 사람 취급 자체를 하지 않았다. 소록도는 섬 전체가 병원이 되어버렸다. 앞으로 한센병환자들의 수는 줄어들 것이고 소록도의 비극은 역사로 남겠지만, 소록도의 의미는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사회적 혐오를 우리가 어떤 식으로 해결하고 풀어나가는지는 우리에게 남은 숙제이다.
하늘로 승천한다는 용바위 전설이 정말로 고흥의 땅에 자리를 잡고 운명에 영향을 준 것일까? 고흥의 '고'가 '높은 고(高)'이다. 그덕인지 고흥은 한국 우주항공사업의 고향이 되었다. 그렇다면 고흥의 '흥'은 무슨 글자일까? '흥이 넘친다' 할 때의 '흥할 흥(興)'자다. 용바위전설이 내려다준 고흥의 미래는 그저 하늘 높이 올라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정서인 '흥'을 지향하는 것이다. 하늘 너머 우주 너머 흥이 있다. 하지만 소록도는 너무 가슴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흥을 위해서라면 사회적 혐오와 차별어린 시선부터 사라져야 한다. 사람은 사람인지라 혐오와 차별이 일소된다는 건 어쩌면 힘든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우주 산업을 보자. 인류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우주탐사를 하고 있으며, 식민지와 한국전쟁을 겪은 대한민국에서도 성공적으로 발사체를 우주로 발사했다. 시간이 걸릴 순 있어도 불가능하지 않다. 아직 완전한 흥까지 달성하지 못했다만, 사회적 노력으로 더 좋은 공동체사회를 위해 가슴 아픈 비극의 과거를 직시하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면 언젠간 이루는 날이 오는 법이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책 추천
- 심채경의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2019년 <네이처>지가 차세대 천문학자로 선정한 한국의 심채경 천문학자가 쓴 에세이입니다. 2년이 넘게 집필한 에세이집으로, 거창하게 작가를 소개했지만 에세이에서는 한국의 비주류 학문인 천문학자로서의 고뇌가 가득 담겨 있으면서도 문체가 낭만적이고 따뜻해서 기분 좋게 읽을 수 있습니다. 제목부터가 호기심을 자극하는데요,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고? 이 에세이를 읽어보면 별을 보지 않는다기보단 별뿐 아니라 여성으로서, 아이의 어머니로서, 그리고 그저 평범한 한 사람으로서 더 다양한 것들을 바라보며 살아간다는 뜻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한 편 한 편이 마치 밤하늘을 가득 채우는 별들처럼 작고 소중하게 반짝거립니다. 이 책이 많은 사랑을 받은 이유는 천문학자 개인의 이야기이지만 작가의 경험담들이 독자들의 공감을 살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마치 천문학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별을 보고 감동을 받는 것처럼 말이죠.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윤세영 감독의 <마리안느와 마가렛>
40년간 소록도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간호했던 두 수녀 간호인 마리안느와 마가렛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20대라는 꽃다운 나이에 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위험천만한 한국 땅을 밟고, 그중에서도 가장 사람들이 경계하던 한센병 환자들을 항상 웃으면서 간호했던 영웅들이죠. 40년이나 지나니 두 분 모두 건강이 안 좋아지셨고 또 한센병도 충분히 치료할 수 있는 의학기술까지 갖춘 시대가 오자 이제 두 사람은 스스로 더 이상 소록도에 필요없다고 판단하여 지난 2005년 고향 오스트리아로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마리안느와 마가렛과 함께 했던 한센병 환자분들의 인터뷰는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데요, 오스트리아에서 마리안느와 마가렛도 큰 마음을 먹고 영화에 출연에 응하셨다고 합니다. 원래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영화에 출연하기를 거부하고 또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말도 하지 않는데요, 그 이유는 본인들을 영웅화하고 박수를 쳐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그저 그들의 소임을 했을 뿐이라며 영웅대접을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죠. 두 분이야말로 조용한 영웅이며 위대하되 평범한 인류애를 물씬 느끼고, 소록도에 대해서도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다큐멘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