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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 Sep 03. 2023

서울촌놈의 국내여행 뿌수기 [삼척 편]

신화 세상을 여행하다



















가끔 지도를 보다 보면 "내가 아직도 여길 안 갔었나?"라고 생각이 드는 지역들이 있다. 나에겐 삼척이 그런 곳이었다. 그간 삼척에 대해선 숱하게 들어왔다. 여행 좋아하는 지인들에게 국내여행지를 추천해달라 하면 삼척이 몰표를 받는다. 추천을 받을 때마다 개인적으로 따로 더 찾아보면 기대감을 일으키는 여행지들이 잔뜩이었다. 호기심과 기대감을 갖은지도 워낙 오래되고 막상 삼척을 여행해본 적이 없다 보니 어느덧 나에게 삼척은 베일에 감추어진 신화 속 세상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삼척 여행계획을 세우는 일이 다른 여행계획보다 더 설레더라. 


고대 시대 삼척엔 실직국이라는 부족국가가 있었고, 실직국이 신라 영토로 편입되면서 '실직주'라는 행정명칭을 갖게 되었다. 6세기 초 지증왕 때 신라 장수 이사부가 울릉도를 정벌하러 떠날 때 출발했던 곳이 삼척이었으며 이때 이사부의 직책이 실직주의 군주였다. (이 때문에 오늘날 삼척에는 '이사부' 관련한 명칭들이 많이 남아 있다.) 신라시절 삼척은 '실직' '실지' '사직' 등으로 불리다가 통일신라 경덕왕 때 전국의 순우리말 지명을 한역화하는 과정에서 실직주의 '실직'은 '삼척'으로 변경되었다. 삼척의 한자 뜻은 '세 번 오르다'는 뜻이고 삼척에는 전통적으로 큰 마을 3개가 있었다며 유래했다는 설이 있지만 삼척은 이 지역을 부르던 고대순우리말을 최대한 비슷한 발음의 한자로 한역화했기에 한자 뜻은 별 의미가 없다. 마치 '달구벌'을 '대구'로 한역화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삼척에는 삼척역이 있지만 현재 개통되지 않아 운영하지 않고 있다. 삼척을 가는 방법은 버스가 유일하다. 기차역이 없는 곳이야 많지만 왜인지 기차역이 없어 버스로밖에 가지 못하는 삼척이 기존의 이미지 때문에 더 신화적 장소로 다가온다. 삼척에 내리는 순간 신화가 내 눈앞에 실현될 것만 같은 기대감이 부푼 채 삼척의 신화투어를 시작해본다.



강산풍광의 화룡점정, 죽서루

조선시대 우리의 선조들은 관동지역, 즉 강원도를 여행하면서 최고의 명승지 8곳을 선정해 관동팔경으로 꼽았다. 8군데 중 두 군데는 북한에 있어 발길을 향할 수 없고 남한 영토에 나머지 6군데가 있다. 그나마 가지 못하는 건 2군데뿐이니 참으로 다행이라 해야겠다. 6군데 가운데 앞서 양양 편에서 낙산사를, 강원도 고성 편에서 청간정을 다룬 바 있고 세 번째로 소개하는 관동팔경은 삼척의 죽서루이다. 내가 죽서루를 처음 인지한 건 책을 통해서였다. 존경하고 감탄해마지않은 고 최순우 선생님의 글을 보던 중 죽서루를 소개하며 한국의 미를 설명하는 글에 완전히 매료되어버렸다. 죽서루보다 죽서루에 대한 글에 빠져버렸지만 이 아름답고 순수한 문체에 홀린 나에게 죽서루를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삼척에 도착하자마자 참지 못하고 죽서루부터 달려갔다. 죽서루에 관한 설명 전에 고 최순의 선생님의 글을 먼저 소개하자면 이렇다.



여러 해 전 삼척에 갔을 때 죽서루를 보고 나서 새삼 유열에 잠긴 일이 있다. 마치 병풍처럼 둘러선 푸르른 단애 위에 날아갈 듯 자리 잡고서 굽이굽이 맑은 강심에 그림자를 띄운 그 순박한 정자의 모습도 모습이려니와 이 누대기둥들을 떠받치고 있는 '덤벙주초'의 희한한 조화미에 내 마음이 흥겨웠던 것이다. 생긴 그대로의 절벽, 바위 둔덕 위에 울멍진 높고 낮은 자연암석들을 적당히 의지해서 주초로 삼고 불가피한 곳에만 자연석을 옮겨 놓아 주초의 수를 채웠으므로 기둥 길이를 여기에 맞춰 길고 짧게 마름질한 것이 덤벙주초였다. 따라서 이 죽서루의 대청 밑은 생긴 대로의 지형 위에 길고 짧은 기둥들과 크고 작은 자연암반들로 이루어진 초석들의 양감이 마치 태초의 것인양 자연스러운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요사이 젊은 한국 사람들의 안목으로 보면 이것은 분명히 의미 없는 부정제성의 흠절로 인한 낙제감에 불과한 짓거리의 하나일 것이다. 말하자면 집터를 뒤로 약간만 물러 세워도 평평한 곳이 있고, 울멍진 바위둔덕을 펑퍼짐하게 깎아서 편안히 터를 마련하고 잘 다듬은 초석과 가지런한 주열을 나타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건축에 나타난 이러한 덤벙주초의 예는 이 죽서루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덤벙주초는 과거 한국인들의 자연애와 자연에 대한 깊은 외경 그리고 자연과 인위의 조화미에 대한 희한한 안목에서 우러난 멋진 진 조형 예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 죽서루가 지니는 조형과 '점지'의 정신에는 적어도 두 가지의 큰 관점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 하나는 강산만리의 호활한 자연풍광 속 어디에 어떻게 이 죽서루 한 채를 멋지게 들어앉혀서 강산풍광에 화룡점정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는가에 있었다. 죽서루가 평평한 터를 찾아 조금만 뒤로 물러앉았어도 또는 분수 없이 얼마만치라도 옆으로 비켜 세워졌더라도 오늘날의 죽서루가 보여주는 쾌적한 시각에는 차질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후략)


- 최순우 <건축미에 나타난 자연관>


긴 글 중에 일부분만 발췌했을 뿐인데도 한 줄 한 줄이 영롱한 보석의 빛깔 같다. 한 손에 책을 꼭 쥐고 죽서루에 도착해 죽서루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면서 책을 펴 평론글을 음미하고 다시 죽서루의 멋을 느껴보기를 반복해보니 오늘 처음 보는 죽서루이지만 이토록 친근할 수가 없었다. 자연 그대로의 암석 위에 무심하게 정자를 올려놓은 건축 같지만 멀리서 보나 가까이서 보나 덤벙주초와 커다란 암반을 깔고 앉아 있는 죽서루는 순박하고 투박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죽서루는 다른 관동팔경과 달리 바다를 끼고 있지 않다. 수량도 그다지 많지 않고 가는 강줄기가 졸졸 흐르는 경관이 전부다. 더 아래를 내려다보면 수직으로 깎여내리지만 딱히 위압적이지 않은 절벽이 나를 떠받치고 있는 느낌이다. 수려한 풍광을 기대했다면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죽서루 자체도, 죽서루에서 보이는 풍광도 '의미 없는 부정제성의 흠절리 온한 낙제감' 정도로 흘려버릴 수도 있겠지만, 이 넓은 삼척에 죽서루가 입지하고 있는 이 자리와 이 지점. 그 적확성의 미를 곱씹다보면 죽서루만의 그 희한하다는 조화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맑은 바다, 장호항

삼척이 바닷가 도시인데도 삼척에 도착하자마자 죽서루로 달려간 탓에 바다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점심도 먹어야하니 삼척해수욕장에서 바다뷰의 맛집들을 서치해보았다. 바닷가에서 먹는 음식은 회에 소주가 유일한 정답이긴 하다만 점심으로는 의외로 수제버거나 파스타 같은 양식 요리가 제법 어울리기도 한다. 삼척해수욕장엔 수제버거집이 마침 한 곳밖에 없어서 맘편히 '오션테이블'이란 식당을 찾았다. 눈으로는 바다를 담고, 입 안에는 치즈 가득한 수제버거를 담고 에너지를 채운 뒤 다음 여행을 떠난다. 


해안가를 따라 삼척 밑으로 내려가보기로 한다. 예전 직장을 다닐 때 회사사람들과 다같이 주문한 음식으로 야근하며 TV를 보는데 TV에 지중해의 반짝반짝하고 맑은 바닷가가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다들 지중해 바다에 가고 싶다며 연신 감탄하는데 촬영 때문에 전국을 누빈 어느 한 피디님이 우리나라 삼척에 가면 저런 바다가 있다고 삼척여행을 극찬한 분이 계셨다. 이미 죽서루 때문에 삼척에 꼭 가보고 싶다는 마음만 품고 있던 나는 '대체 삼척은 어떤 곳일까'하며 환상을 키운 적이 있다. 그 피디님이 말씀하신 맑디 맑은 삼척의 바다는 장호항을 말한다. 알아보니 삼척의 장호항은 한국에서 가장 맑은 바다로 이미 유명하더라. 차를 타고 곧바로 장호항으로 갈 수 있지만 그 바로 앞 용화방파제 쪽에서 장호항까지 연결된 삼척해상케이블카가 있다. 케이블카를 또 그냥 지나칠 순 없지.



삼척해상케이블카를 타고 장호해수욕장을 가로 질러 장호항까지 이동한다. 케이블카 위에서 내려다 보이고 수평선까지 펼쳐진 삼척의 장호항 바다는 한국에서 내가 본 바다 중 가장 파랗고 맑고 투명했다. 이런 색상의 바다는 만화나 CG처리된 영화에서나 봤던 거 같은데 실물로 내 눈에 담기니 놀라울 따름이다. 이 정도 푸른 바다를 굳이 찾자면 제주도에나 있을 법한데 제주도의 바다나 해외의 유명 바다들은 소문을 듣고 온 관광객들로 북적거려 정신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삼척의 장호항은 현지인들의 손만 탄 것 같은 작은 어촌 마을이다. 소담하고 아늑함까지 갖춘 이 영롱한 바다는 아주 귀중한 우리의 바다다. 그래서인지 그나마 사람들이 몰리는 성수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장호항에서 다양한 해양레저를 즐긴다. 비수기에 찾은 나와 일행은 마치 바닷가를 전세낸 것처럼 한적하고 여유로운 카누를 하며 삼척의 바다에 동화되고 취해본다. 




<헌화가>와 <해가>의 배경, 수로부인헌화공원

삼척은 '헌화가'와 '해가'의 배경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통일신라 시대 33대 국왕이었던 성덕왕 시절 진골 귀족이었던 김순정이 강릉태수로 임명되어 강릉으로 가던 중 삼척에 이르렀을 때, 김순정의 아내 수로부인이 절벽 위에 핀 철쭉꽃을 보고 아름다워 사람들을 시켜 철쭉꽃을 가져와달라고 했지만 절벽이 너무 가파라 아무도 가지 못했다고 한다. 한 노인이 암소를 끌고가며 지나가다 절벽 위의 철쭉꽃을 꺾어다가 수로부인에게 전해주었다. 꽃을 주면서 노래까지 불러주었는데 이 노래가 '헌화가'이다.


자줏빛 바위 가에

잡고 있는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 헌화가


헌화가는 우리나라 향찰로 쓰여진 노래 향가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의 향가는 <삼국유사>와 <균여전>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데 헌화가는 <삼국유사>에 수록되어 있는 4구체 향가다. 


헌화가 설화의 다음 이야기가 '해가'의 설화다. 역시 강릉태수로 부임한 김순정이 경주에서 강릉으로 가던 중 삼척에서 쉬고 있는데 해룡이 바다에서 나타나 김순정의 아내인 수로부인을 바다 밑 용궁으로 데려갔다고 한다. 김순정이 목놓아 울고 있을 때 역시 지나가던 노인이 인근의 사람들을 불러모아 노래를 부르고 다같이 막대로 언덕을 치며 수로부인을 돌아올 것이라고 전해주자 과연 노랫소리에 해룡이 나타나 수로부인을 돌려다주었다고 한다. 이때 사람들이 다 같이 불렀던 노래가 '해가'이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

다른 사람의 아내를 탐하는 죄 얼마나 크리

네가 만약 거역하여 바치지 않는다면

그물로 잡아 구워삶아 먹으리

- 해가



해가는 헌화가처럼 같은 4구체이긴 하지만 향찰 형태가 아니며 주술적 특성을 띄고 있어 향가가 아닌 고대가요로 분류된다.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에는 풍랑을 만나 표류하거나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바닷가 마을에는 해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노래들이 간혹 전해지는데 삼척의 '해가'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설화 속 노인은 무당(샤먼)으로 해석하고 있다. 해가를 보면 가야건국 설화에 나오는 '구지가'와 거의 동일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심지어 가야의 구지가에서 얻은 가야의 시조 수로왕과 해가의 수로부인은 이름까지 동일하다. 가야의 구지가와 삼척의 해가, 그리고 수로왕과 수로부인이 어떤 연관을 지니는지 불분명하지만 그 오랜 시차를 두고도 주술적 고대가요가 꾸준히 전해져내려오고 있었다고 짐작해볼 수 있다. 수로부인이 정식 사서에 등장하는 여인은 아니다보니 실존인물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수로부인을 영험한 기운을 갖춘 영적 존재로 보는 해석이 있고 헌화가의 철쭉도 상징성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헌화가나 해가나 그 설화의 내용이 뚜렷하지 않아서 하나의 사랑이야기로 생각한다면 상상의 여지가 풍부한 이야기다. 수로부인, 노인, 김순공, 해룡 등 인물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갈래의 사랑이야기로 확장될 수가 있다. 우리나라의 설화들을 모티프로 다채로운 콘텐츠들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삼척시에서는 임원항 부근에 바닷가를 굽어볼 수 있는 산책로 중턱에 설화의 배경이 되는 수로부인헌화공원을 조성해두었다. 공원까지 가는 길이 시간이 다소 소요되지만 언덕을 오르기보단 가벼운 산보이기에 부담없이 들를 수 있다. 마치 설화 속으로 들어가는 여정이라 생각하면 내가 마치 앨리스가 된 양 발걸음이 신나졌다가 공원에 마치 도달하면 수로부인상이 그렇게 반갑지 않을 수 없다.




남근숭배의 민속마을, 해신당공원

수로부인헌화공원과 장호항 사이 신남마을에는 재미있는 공원이 하나 있다. 바로 해신당공원이라고 남근상 조각들을 전시해놓은 야외전시장이다. 신남마을은 동해안에서 유일하게 남근숭배사상이 전해지던 마을이다. 전설에 의하면 '애랑'이라는 신남마을의 한 처녀가 바닷가에서 해초를 캐던 중 풍랑을 맞고는 절벽에 떨어져 죽었다는데,  애랑이 죽은 뒤로 마을의 어획량이 급격히 낮아졌단다. 마을사람들이 처녀의 원혼을 위로하고자 남근상을 조각해 그녀를 위한 제사를 지내자 다시 어획량이 늘어나서 신남마을에선 대대로 남근을 조각해오고 매년 애랑을 위한 제사를 지낸다. 애랑이 떨어진 절벽을 애바위라고 부르고, 이 전설을 애바위전설이라고 한다. 아직까지도 해신당공원에는 애랑을 위한 사당이 있고, 사당에선 그녀를 위해 만든 남근목을 모시고 있다. 남근은 주로 다산을 상징한다. 따라서 농사 짓는 마을에서 남근숭배는 풍년을, 바닷가마을의 남근숭배는 풍어를 기리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해신당공원처럼 대놓고 남근의 조형물을 만들기도 하지만 마을에 따라서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 직접적인 남근의 모양이 아닌 선돌의 형태로 거대한 남근을 상징하도록 하기도 한다. 물론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골짜기, 샘, 패인 바위 등을 통한 여성성기숭배 사상을 지닌 마을들도 있다. 이와 같은 성기숭배는 비단 한국에만 국한되지 않은 인류사 어디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인류학적 문화이다. 


오늘날에도 농업과 어업이 이어지고 있지만 당연하게도 풍년 혹은 풍어를 비는 민속은 많이 사라져있다. 민속의 소멸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다양하고 세련된 형식으로 마을의 문화 혹은 축제로 자리매김하여 민속의 콘텐츠만은 살아남기를 고대한다. 역시 콘텐츠의 소스들은 무한한 법이다. 비록 평창동계올림픽 때는 외신이 삼척의 해신당공원을 가르켜 '세계에서 출산율이 가장 낮은 나라 중 하나인 한국에 남근숭배사상이 있다'고 기사를 낸 건 웃프지만 말이다.



바닷가를 여행할 때 저녁은 웬만하면 수산시장을 찾는 편이다. 깔끔한 횟집을 가는 것보다 같은 가격으로 더 푸짐하고 다양한 횟감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수산시장만의 넉넉한 인심은 덤이다. 다들 수산시장하면 덤탱이를 걱정하던데 최근에는 어플을 비롯해 수산시장에 대한 자세한 정보들이 모두 공개되어 있어서 미리 조사만 해간다면 수산시장만큼 가성비 좋은 곳이 없다. 삼척에는 여러 항구와 수산시장들이 있는데 삼척항이 비교적 늦게까지 운영을 하고 규모도 크며 유명하다는 가게가 있어서 찾았다. 사장님의 해박한 회의 지식과 푸근한 흥정이 오가며 떼깔 고운 회들을 포장해서 숙소로 들어가 만찬을 즐겼다. 참돔을 비롯해서 여러 잡어들을 섞어주셨는데 이때 먹은 회는 내 여행 중 전설로 남을 것만 같다.




곰치국을 만나고 나릿골마을로

삼척을 여행간다고 주변에 이야기했을 때 하나 같이 곰치국을 먹으라는 말은 전혀 빠뜨리지 않더라. 이미 조사한 나도 다 안다고요! 알긴 아는데 도대체 얼마나 유명하길래 다들 곰치국 놓치면 안된다고 신신당부를 했던걸까. 곰치국은 물론 '바다횟집'이라는 특정 식당을 콕 집어주었다. 둘째날 아침 해장용을 위해 '바다횟집'의 곰치국을 아껴두고 있었다. 어제 저녁 횟감을 구매했던 삼척항 인근에 있는 '바다횟집'은 외관은 별다른 생선요리 식당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곰치국을 처음으로 내다 판 가게라고 한다. 사실여부를 찾아보진 않았지만 다들 그렇게 이야기하더라.


나 같은 서울 내륙사람들은 '곰치'가 생소하겠지만 동해안을 한두번 여행해본다면 동해안에선 아주 흔한 생선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 못생긴 생선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곰치는 공격적인 성향도 다분하고 아주 캄캄한 바다에서 서식한다. 곰치는 동해안에서만 잡히는 건 아니다. 다만 동해안과 다른 해안에서 잡히는 곰치의 종이 다소 다른데 동해안에서 잡히는 곰치는 물곰, 서해안과 동해안에서 잡히는 곰치는 물메기이다. 본디 곰치가 워낙 못생겼다보니 기피하는 생선이었지만 삼척에서 곰치로 김치를 넣어 김치국처럼 해먹은 뒤로 그 특유의 칼칼함과 시원함 때문에 곰치국은 삼척을 넘어 동해안을 대표하는 요리 중 하나로 입지를 다졌다. 곰치를 요리하면 물컹물컹한 식감 때문에 호불호가 갈린다고 하지만 단언컨대 그건 식당의 역량에 따라 달려 있다. 바다횟집 같은 실력 있는 식당에서 곰치의 식감은 물컹물컹이 아니라 부드러움이고, 부드러운 식감과 다르게 국물맛은 아주 공격적이니 이만한 해장이 또 없다.



삼척에는 최근 사진작가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는 신흥출사지가 있다. 삼척항 뒷편의 나릿골마을이다. 경사진 언덕과 좁은 골목골목 사이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언덕의 정상에는 넓직한 공터와 공원들이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다. 대단한 풍경을 자랑하는 곳은 아니지만 평화롭고 한적한 마을과 잔잔한 바다가 한눈에 보이니 '우와!'의 감탄사가 나오기보단 마음이 차분해지는 운문적인 미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거주민의 30%가 어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옛날에는 그 비율이 훨씬 많은 항구마을이라 배가 정착하는 나룻터가 있었다는 뜻에서 '나릿골'이란 이름이 붙어졌다고 한다. 맛집 가득한 삼척항과 붙어 있으니 식사 후 부담없는 선에서 나릿골마을을 구경해보기를 추천한다.



그로테스크 이미지의 향연, 환선굴

충청북도, 경상북도와 접해 있는 강원도 남부의 산악지형은 고생대 때 형성된 '지향사'라는 지형인지라 석회동굴이 집중되어 있고, 남한의 지향사 일대를 옥천지향사라고 한다. 삼척은 동해안 지역이라 바닷가 도시로 제일 먼저 인식되지만 삼척도 옥천지향사권에 들어가며 태백산맥의 여러 산들과 삼림들이 우거진 삼척 안쪽 지역에는 남한에서 가장 규모가 큰 '환선굴'이라는 석회동굴이 있다. 먼 옛날 한 수도승이 이 동굴로 들어왔고 나오는 것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세상 사람들은 이 노인이 신선이 됐다며 '환선'이라 불렀던 것에서 이 동굴을 '환선굴'이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름의 유래만큼이나 환선굴에 들어가는 길도 환상스럽다. 

주차장에서 내려 매표를 하고 한참을 걸어들어가야 한다. 가는 길에 관음굴과 대음굴이라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석회동굴을 지나쳐 이제 환선굴이라는 간판이 보이며 여기서부터는 모노레일을 타고 들어가야 한다. 걸어올라갈 수도 있으나 상당히 가파른 길이니 대부분 모노레일을 탑승한다. 이렇게 어렵게 어렵게 들어가면 이제 겨우 환선굴의 입구다. 오고 가고 시간까지 합치면 환선굴 관광은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인간이 아닌 자연이 빚은 조각품인 석회동굴의 아름다움은 초월적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인간이 조각품을 빚어내는 시간과 석회동굴이 품고 있는 그 영겁의 시간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우리는 어느 예술가가 평생을 바쳐 공력을 퍼부은 예술작품에 찬사를 보내는데 인간의 시간은 길어봐야 100년이 안 되는 반면 자연의 시간은 헤아릴 수가 없고, 그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동굴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나니 찬사를 넘어선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밖에. 곳곳에 적혀진 생소한 석회광물질에 대한 설명들과 가끔은 기괴하기도 한 질감의 것들을 보면 이과적 논리보단 문과적 감성이 작용해 내가 모르는 자연의 섭리와 세계에 대해 경외감과 함께 압도된다. 그리고 아직까지 인류에게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모습들이 드러낸 것들보다 많으리란 상상을 해보면 동굴투어가 한층 더 신비롭게 느껴진다.



환선굴의 압권은 옥좌대다. 옥좌대 설명을 읽어보니, 세상에 석순이란다! 석순은 석회동굴에서 땅에서 위로 솟아오른 지형물인데 당연하게도 석순은 솟아올랐기 때문에 기둥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데 옥좌대는 마치 기상예보의 태풍구름의 모양처럼 동그랗다.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지형물로 천국보단 지옥에 있을 법하다. 역시 동굴투어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의 향연이다. 유치하긴 하지만 동굴 밖을 나올 때 안전하게 차안(此岸)의 세계로 돌아온 듯한 안도감이 든다. 그만큼 몰입도가 대단한 동굴이다.


옥좌대





삼척은 나에게 신화 속 장소처럼 다가왔고, 그래서 삼척 여행을 수사학적으로 신화 여행이라 표현했지만 여행 이후 삼척은 더더욱 나에게 신화처럼 각인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청아한 빛깔의 바다를 두르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석회동굴을 품고 있으며, 우리 전통적 아름다움의 맛과 멋을 뽐내주는 죽서루가 자리하고 있고, 또 실제 수로부인 설화의 배경이기도 하지 않은가. 대체 몇 가지 레이어의 신화 같은 장소들을 다녀왔는지 그 풍성함에 여러 세계를 오간 듯한 느낌이 든다.


신화란 허상일까? 머릿속에서만 아른거리는 관념에 불과할까? 그것은 현실을 즐기는 태도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현실과 신화는 상반된 개념이 아니다. 현실을 살면서 신화를 꿈꾸어보면 그 일이 얼마나 값진 일인지 단번에 알 수 있다. 신화란 결국 순수한 기대감에서 비롯한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을 가져보는 것이 현실을 신화로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의 시작이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책 추천 

- 황병주, 정무용, 이정은, 홍정완 <삼척간첩단 조작사건>

신화 같은 삼척이지만 삼척은 남북 갈등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이 상처낸 흔적들도 적지 않은 곳입니다. 삼척을 비롯해 강원도 동해안은 북한의 함경도에서 바닷길로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곳이기에 한국전쟁 때는 국군-인민군의 세력경쟁이 유독 심했고, 전후에는 간첩들이 기승을 부리는 곳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1968년 120명의 무장공비들이 침투했던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동해안을 끼고 있는 강원도 동부 지역은 군부독재 당시 당국의 주된 감시지역이었는데, 이로 인해 벌어진 참극들도 있었습니다. 1979년 일어난 삼척가족간첩단 사건입니다.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일어났던 해 별개의 루트로 한국전쟁 당시 월북했던 삼척 출신의 진현식이 간첩으로 남파되었습니다. 북한은 남한에 가족들이 있는 남한 출신의 간첩들을 종종 남파시키곤 했는데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인해 남한의 경계가 강해지면서 진현식은 북으로 돌아가지 못했죠. 오래도록 은신하던 진현식은 결국 북으로 돌아갔지만 그 일가족들이 간첩을 두둔 및 교화되어 똑같은 간첩이 되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는데, 수사과정에서 불법구금 및 폭행과 고문이 이어졌고 고문으로 인한 강제자백으로 진현식의 동생 진항식과 사촌형제 김상회가 사형을 당했고, 약 10여 명의 가족들은 징역형을 살았는데 그 중 2명은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습니다. 살아남은 가족들은 주변인들로부터 간첩으로 손가락질을 받으며 사회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었습니다. 이 재판은 훗날 2013년 무죄판정을 받았습니다. 재단법인 들꽃에서 발행한 <삼척간첩단 조작사건>은 당시 군부독재 당국이 어떻게 간첩들을 조작해내어 자신의 정권 유지에 이용했는지, 아울러 이 사건이 10.26사태와 박정희 정권의 종말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까지 미거시적으로 망라하고 있습니다. 우리 현대사 속 흑역사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는 책입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이탈리아 영화감독 루카 구아다니노의 국제적 명성을 떨쳐주고, 티모시 살라메를 톱스타 반열에 올리게 해준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입니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정사씬을 가장 관능적이고 감각적으로 연출하는 감독 중 한 명입니다. 화사한 빛을 받는 사람의 육체를 예술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그의 전매특허죠. 멜로영화라 함은 감정전달이 핵심이죠. 영화의 감정전달은 배우의 연기는 물론 감독의 연출도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는데 루카 구아다니노의 영화들은 아주 미세한 감정까지 전달되는 연출이 돋보이며, 그중에서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성숙하지 못한 사춘기 소년이 겪는 감정의 격랑을 섬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의 조각상들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제시됩니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는 동성애가 자유롭던 시절이었으며 인간의 육체를 가장 아름답게 소비하고 묘사하던 시대였죠. 정치적이거나 윤리적 메세지를 건네기보단 인간의 사랑, 성애, 육체 그 자체에 집중하는 루카 구아다니노의 스타일 그리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겹치는 느낌입니다. 한 사춘기 소년의 꿈만 같았던 혹은 신화 같았던 여름날의 경험이 육체의 언어로 풀어지며 감정의 아름다움이 보는 관객의 가슴 깊숙이까지 침투해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알고 봐도 볼 때마다 감정이 미어지는 최고의 명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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