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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 Nov 08. 2023

서울촌놈의 국내여행 뿌수기 [화성 편]

인연의 관계를 여행하다



















최근 밈 중에 '홍철이 없는 홍철팀'이라는 말이 있다. <무한도전>에서 유래한 이 밈은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이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붙이는 네이밍이다. 우리나라 지역 중에 이 밈이 꼭 들어맞는 곳이 있다. 바로 경기도 화성시다. 경기도 화성은 정조가 만든 수원 화성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오늘날 경기도 화성에서는 수원 화성이 없다. 원래 수원이었던 지명은 정조가 화성을 지으면서 화성으로 바뀌었으나, 후에 수원이 부활하였고 1995년 수원과 화성이 분리되면서 수원화성은 수원시에 속하였고, 화성은 '화성 없는 화성'이 되었다.


화성이 주목을 받은 건 동탄 때문일 것이다. 아직까지도 동탄이 화성시 소속임을 모르고 동탄과 화성이 별개의 행정구역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다. 마치 고양시와 일산의 관계처럼 말이다. 2003년 시행된 제2기 신도시 계획에 동탄이 들어가면서 동탄은 신도시의 상징이 되었고, 동탄의 입지가 화성의 입지를 추월하여 '동탄'하면 모두가 자연스레 신도시를 연상하는 반면 '화성'했을 때는 연상되는 것이 별로 없어 벙어리가 되는 경우도 있다. 동탄이 화성시에 속하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화성'했을 때 역시 동탄의 신도시를 언급하곤 한다.


화성시의 동쪽 끝이 동탄이라 화성시의 동쪽은 확실히 신도시의 도회적 비주얼로 가득하다. 그렇지만 화성의 서부와 중부가 갖는 내공을 결코 등한시해서는 화성의 역사가 많이 서운해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지위가 높았던 수원에서 기원한 만큼 화성의 구도심도 인문적, 자연적 매력이 가득하다. 삼국시대 때는 신라가 당나라로 넘어가는 항구가 있던 당항성이 위치하고 있었고, 일제강점기 때는 3.1운동이 가장 크게 일어났던 지방 중 하나였다. 화성은 내륙으로서도, 그리고 항구 도시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왔다. 




3.1운동의 비극, 제암리 학살 사건

서울에서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화성시까지 곧장 내려가면 화성시 한 가운데 제암리라는 마을을 지나친다. 3.1운동에 대해 접할 때마다 항상 뒤이어 설명되는 비극의 사건, 제암리 학살 사건이 벌어졌던 그 제암리다. 당시 제암리의 행정은 수원에 속했다가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오늘날에는 화성시에 속해 있다. 수원이 아우르는 영역이 오늘날보다 훨씬 거대했던 일제강점기였던 만큼 수원은 대도시였고 그만큼 인구도 많아 3.1운동이 격동적으로 벌어진 곳 중 한 곳이었다. 처음 겪어보는 식민지 조선인들의 거국적 운동인 3.1운동이었기에 조선총독부는 당황하게 무작정 그들을 강경하고 무자비하게 진압하기만 하였다. 얼마나 강경한 무자비한 진압이었는가에 대한 예시로 항상 거론되는 사건이 제암리 학살 사건이다.


1919년 3월 30일 약 천 여명이 제암리에서 3.1 만세시위에 나섰는데 헌병경찰들이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가뜩이나 군중심리로 들끓던 우리 시위대들의 시위규모는 겉잡을 수 없이 커졌고 그 과정에서 일본민간인들이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분노가 분노를 낳는다고, 만세시위의 규모가 커질 수록 일제 헌병경찰들의 진압수위는 점점 더 가혹해졌다. 진압과정에서 유혈사태로 번지는 수준이 아니라, 작정한 헌병경찰대가 주동자와 참여자들을 색출하겠다면서 인근 마을들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이거나 잡아갔다. 그럼에도 조선인들의 만세시위가 잠잠해지지 않자 제암리로 파견되었던 육군 헌병대 소속 아리타 도시오 중위는 끔찍한 학살을 계획하였다. 4월 15일 아리타 도시오 중위는 이제 그만 싸움을 멈추자며 공식적인 사과를 할테니 15세 이상의 남성들은 모두 마을의 교회로 모여달라고 거짓말을 했다. 미리 명단을 가지고 있던 아리타 도시오 중위는 수상함을 감지하고 교회로 오지 않은 인원들까지 억지로 연행해왔다. 22명의 남성들이 교회에 들어왔는데 느닷 일본군은 문을 걸어잠그고 교회를 불태워버렸다. 22명 중 한 명만이 무사히 도주했고 나머지 21명은 현장에서 사망했다. 헌병경찰대는 제암리의 민가에도 불을 지펴 민가 28채가 불에 타버렸다. 남편을 구하기 위해 뛰쳐온 부인 2명까지 현장에서 총을 맞아 죽어 총 23명이 사망했다. 다음날 4월 16일 일본 헌병경찰대는 고주리라는 마을로 찾아가 해당지역 내 만세시위를 주도하던 천도교 지도자 김홍렬과 그의 가족 6인을 무참히 살해했다.


당시 사진


인터넷도 없던 시기였기에 제암리 학살 사건은 큼지막하게 보도되지 않았다. 다만 화성 일대에 만세시위가 결렬한 만큼 일본 헌병경찰대의 진압도 강경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문은 이미 퍼지고 있었고, 서양인 선교사들이 진상을 조사하고자 여러 곳으로, 특히 경기도 남부 일대에 퍼져 있었다. 이중 수촌리로 향하던 윌리엄 스코필드 선교사는 제암리에서 큰 사건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학살 사건 3일 후 제암리에 도착했다. 비록 3일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지만 사건 현장은 여전히 아수라장이었다. 스코필드는 현장을 사진으로 남기고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국제적으로 보도했다. 국제적 지탄을 받게 되어 당황한 일제는 우발적 사건이었다고 주장하면서 명령지시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결과라고 시치미를 뗐다. 결국 일제는 비공개 재판을 통해 아리타 중위에게 근신 처분만 내린 후 최종적으로 무죄판결을 내리며 사건을 대충 마무리지어 은폐하였다.


그렇게 제암리 학살사건은 잊혀지다시피했는데 해방 후 1965년 화성을 방문한 일본인 목사가 우연히 생존자였던 전동례 할머니로부터 당시의 사건을 듣게 되었다. 이 일본인 목사는 속죄를 하겠다며 위원회를 조직해 헌금을 모집했고, 그렇게 모집한 헌금을 속죄의 의미로 제암교회에 전달해 1969년 속죄와 사죄의 교회당이 완공되었다. 1982년 84세 전동례 할머니의 증언에 따라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그곳에서 20여 구의 유해가 엉킨 채 발견되었다. 즉 계획된 집단학살의 증거가 나온 것이다. 제암리 학살 사건의 진상이 점점 밝혀짐에 따라 희생자를 기리는 순국단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사죄의 교회당은 철거되었고, 2001년에 공원과 묘지와 기념관이 설립되었다.


"해방이 됐다고 그러니께..

기쁨의 눈물도 나구 설움의 눈물도 나구.. 인제 남편네가 살아온 것처럼 생각하구.

울어야 할 것을 우는 것도 있구 그래.

그냥 눈물 피하느라구 이리저리 가다가 할 수 없어서 사랑방으로 들어가 혼자 그냥 울었지유."

-순국선열 안진순의 부인 전동례


학살지 출토품


일본인들에 의해 자행된 끔찍한 사건이 일본인들에 의해 수면 위로 올라왔다는 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물론 제암리 학살 사건의 진상이 공개되는 과정에서 일본인 목사와 선교단의 일조만 있었던 건 아니다. 무엇보다 당대 현장의 참혹한 진상을 공개하려던 윌리엄 스코필드 선교사의 용기와 활약에도 큰 박수를 보내야 한다. 제암리 학살 사건은 우리가 분노해야 하는 정확한 타게트가 무엇인지 시사한다. 우리에게 그 끔찍한 짓을 했던 건 일본인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제국주의였다. 그리고 피해를 기리고 진상을 밝히는 힘은 평화와 사랑을 좇는 반제국주의의 사상이었다. 제암리 학살 사건의 피해자들과 유가족분들을 생각했을 때 절대 제국주의적 입장을 같은 제국주의적 논리로 대응해서는 안 된다. 스코필드 선교사, 일본인 목사, 생존자이신 전동례 할머니의 증언에서 제국주의를 이길 수 있는 건 솔직하고 정직하고 당당한 반제국주의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가 이 작은 기록을 엮어서 펴는 뜻은 우리 조상이 겪은 슬픔을 오늘에 되새기려는 것도 아니요. 일본의 잔인무도한 비행을 인류 앞에 폭로하려는 것도 아니요. 동포의 의분심을 자아내서 시원하게 복수를 꾀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약자에 대해서는 분발 정진하지 않으면 이런 설움이 또 찾아올 수도 있다는 교훈을 주려 함이요, 강자에 대해서는 과거를 거울삼아 뉘우칠 기회를 주려 함이다."

- <순국제암29선열과 그 현충기념사업> 중에서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과 스코필드 동상



마리오 보타가 기리는 남양성모성지

제암리에서 제부도 가는 중간에 남양읍이 있는데,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무명 종교인들을 위한 남양성모성지가 많은 화성의 주요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다. 병인박해란 흥선대원군의 섭정 시절,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접촉하려던 프랑스가 느닷 약속을 어기고 흥선대원군에게 등을 돌리자 흥선대원군이 보복성으로 일으켰던 천주교 박해 사건으로, 조선 후기 5대 천주교 박해 사건 중 가장 박해 강도가 강했던 사건이었다. 이전까지는 약 300여 명이 순교했던 1801년(순조 1년)에 일어났던 신유박해가 가장 큰 박해 사건이었건만, 1866년 흥선대원군이 일으킨 병인박해 때는 무려 8000여 명이 순교했다. 병인박해는 전국적으로 행해졌는데, 유독 충청도 부근에 천주교 신자들이 많아 순교자들의 희생은 주로 충청도에 집중되어 있었다. 비록 경기도 화성의 남양은 충청도는 아니지만 충청도와 인접해있는 만큼 역시 천주교가 두루 퍼져 있던 곳이었다. 더군다나 당항성이라는 옛 화성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중국의 동해안과 왕래가 잦은 화성이기에 중국에서 출발한 서양의 선교사들이 배를 타고 가장 많이 도착하는 곳이 화성이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병인박해 당시 남양에서 희생된 순교자들의 수가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필시 그 수가 적지 않았을 텐데 겨우 4명의 순교자만 전해진다고 한다. 1983년부터 누구인지 또 몇 명이었는지 전해지지 않은 순교자들을 기리는 마음만은 표현하고자 남양성모성지를 성역화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남양성모성지는 산책하기에도 좋은 코스로 구성되어 있지만 남양성모성지가 화성의 트렌디한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는 건 스위스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남양성모성지의 대성당 덕분이다. 마리오 보타는 나름 한국과 인연이 많다. 2020년 완공된 남양성모성지의 대성당뿐 아니라 2009년에는 삼성의 리움미술관을, 2003년에는 강남의 교보타워를 설계하였다. 교보타워, 리움미술관, 그리고 남양성모성지의 대성당까지 공통점을 찾는 게 어렵지 않다. 보자마자 눈에 각인되는 붉은색 벽돌이다. 대번에 붉은색 벽돌이 마리오 보타의 시그니처 인장이란 걸 누구나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의 국내 작품들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마리오 보타는 벽돌을 자주 애용한다. 마리오 보타는 벽돌로 건물을 쌓아올렸을 때 낱개의 벽돌들끼리 만들어내는 선의 기하학적 무늬와 벽돌의 질감을 좋아한다고 한다. 또한 직선과 곡선을 교차시켜 다채로운 기하학적 무늬를 살리기 위해 사각형의 건물과 원통형 건물을 병립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무엇보다 마리오 보타는 흙으로 구운 벽돌이야말로 대지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건축재료라고 주장한다. 다만 마리오 보타의 모든 작품들이 붉은색 벽돌을 쓰진 않는다. 벽돌은 그저 마리오 보타가 스스로 생각하는 건축의 철학을 드러내는 수단일 뿐이다.


얼마 전 마리오 보타의 다큐멘터리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영화의 부제가 '영혼을 위한 건축'이었다. 마리오 보타의 해외 작품들을 살펴보면 중국의 이슬람 모스크 사원, 이스라엘 텔 아비브의 유대교 회당, 스위스 산 지오반니의 바티스타 교회 등 주로 종교시설을 지으며, 이때 종교적 경계를 짓지 않는다. 어떤 이름을 취하고 어떤 교리를 갖은 종교이든 종교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인간과 자연의 영혼을 설명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마리오 보타는 인간의 영혼을 대지로 표현하는 건축가다. 마리오 보타는 언제나 대지의 중요성을 역설하는데, 마리오 보타의 작품들을 보노라면 인간과 자연의 신성성이 물화되어 있다는 경건함을 받는다. 설령 종교시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마리오 보타는 언제나 건축물이 놓이는 대지의 형상을 표현하려고 한다.



천주교 희생자들을 기리는 남양성모성지의 대성당은 거대한 원통형 기둥이 대칭으로 중심을 잡고 있고, 그 뒤로 사각형 건물이 있고 지붕은 다시 둥근 아치형으로 덮고 있다. 둔중한 두 원통형 건물이 우뚝 서 있는 성당의 파사드에 시선을 뺏겨 파사드만 보고 돌아가는 일이 없어야 한다. 남양성모성지 대성당의 건축적 디테일은 뒤를 돌아가 사각형 건물을 면밀히 살펴볼 때 더한 감동을 받을 수 있다. 마치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극장처럼 생긴 공원을 안고 있는 사각형 건물은 정교한 문과 벽들이 골목과 길을 만들어주고 있고, 그 사이로 차분하고 조용한 빛들이 포근하게 들어오고 있는 광경이 장엄하고 예술적이다.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대성당뿐 아니라 그 성지 전체를 걷는 것만으로 곳곳에 순교자들과 종교인들을 위한 작은 상징들이 장식되어 있어서 비종교인이라 할지라도 그 상징의 정성에 감동을 느껴갈 수 있다.









전곡항과 제부도

화성을 대변할 수 있는 딱 하나의 이미지를 볼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나는 자신 있게 전곡항이라고 대답한다. 전근대시대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선진문물을 주도하던 시절 중국과 쉽게 왕래할 수 있던 화성은 지리적으로 중요도가 굉장히 높았고, 저 오래 전부터 화성은 포구도시로서 성장해왔다. 그 전통과 정신을 가장 잘 계승하고 있는 곳이 화성의 전곡항이다. 전곡항은 한국 최초로 레저어항 시범지역으로 선정된 곳이기도 하며 매해 뱃놀이 축제가 개최된다. 



전곡항에 가면 저마다의 개성을 뽐낸 요트들이 즐비하고 있는데,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요트체험도 해볼 수 있다. 전곡항에서 요트를 타면 오른편의 안산 대부도를 지나고, 왼편의 화성 제부도까지 지나치고 여러 섬들 사이의 바다를 누빈다. 왼편의 제부도를 너머에는 황해 바다가 평택과 아산 사이로 유입되는 아산만이 흐르고 있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명성황후의 구원요청을 받은 청나라가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러 청나라 병력을 주둔시키기 위해 이동했던 루트다. 여러모로 바닷길을 이용해 중국과 한반도를 오갈 때는 산둥반도에서 직선 루트에 있는 곳이 이 부근의 해역이다. 그리고 요트에서 전면으로 지근거리에 풍도라는 섬이 보인다.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러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동시에 한반도로 들어왔는데, 처음부터 일본은 동학농민운동보다는 한양 점령과 청나라군과의 싸움이 목적이었고, 일본군은 청나라군과 전쟁을 벌이기 위해 이 해역에서 오고 가던 청나라 해군을 저 풍도 앞바다에 숨어 있다가 기습공격을 가하면서 1894년 청일전쟁이 벌어졌다. 요트의 뒷편을 보면 완만하게 솟아있는 산자락이 눈에 띈다. 저 산자락엔 당성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데 당성이 바로 삼국시대 신라가 당나라와 교역하던 당항성이다. 화성의 원명칭이었던 당항성의 이름 자체가 '당나라와 배로 왕래할 수 있던 항구'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저 예전 신라인들은 저 산 위의 당항성에서 당나라로 출항하던, 혹은 당나라에서 입항하던 배들을 굽어봤을 것이다. 저 산에서 바다 위에서 배를 타고 있는 나를 신라인이 보고 있다고 상상해보면 무언가 고대 신라인들과 연결된 기분이 든다. 요트에서 풍경의 상상에 취해 있는데 선장님이 돌연 나에게 운전해보지 않겠냐고 권하신다. 차 운전한 것과 다르지 않다고 어렵지 않다며 망설이는 나의 용기를 돋우시길래 요트의 운전대를 잡아봤다. 간단한 작동법만 알려주시니 과연 그렇게 어렵진 않았다. 선장님은 시종 잘 한다고 칭찬을 해주시니 괜시리 일행에게도 어깨가 으쓱하더라. 재미적 요소로나 인문적 요소로나 화성을 여행하면 전곡항의 이미지를 꼭 눈에 담아야 하고, 전곡항에 오면 꼭 요트체험을 해봐야 한다.



전곡항 옆으로는 제부도가 있고, 화성 뿐 아니라 경기도 서해안의 유명한 관광섬인 제부도를 또 빠뜨릴 수가 없다. 제부도는 육계도를 말할 때 항상 거론되는 섬이다. 육계도란 육계사주로 연결된 섬을 뜻하고, 육계사주는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사주를 뜻한다. 다시 사주란 파랑의 퇴적작용으로 형성된 일종의 길이다. 영어로는 'sand bar'라고 부르며 모래와 자갈들이 모여져 만들어진 길이다. 육계사주는 우리나라의 서해안처럼 조수간만의 차가 클 경우 상시 오픈되어 있지 않고 밀물일 때는 그 길이 바닷물에 잠긴다. 따라서 육계도의 대표적인 사례인 제부도로 차를 이용해 들어간다고 하면 썰물일 때만 제부도로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제부도는 한때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는 섬'이라는 별명을 갖기도 했고, 제부도의 이름부터가 제부도로 가기 위해선 어린 아이는 없고 노인을 부축해야 한다는 '제약부경'에서 따왔다. 전곡항에는 서해랑 제부도해상케이블카가 놓여 있어 굳이 차를 이용하지 않더라도 케이블카를 이용해서도 제부도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짐들을 다 가지고 케이블카를 타자니 여간 번거롭지 않으니, 케이블카는 오직 관광용을 즐기는 편이 낫다. 서해랑 제부도해상케이블카를 타면 제부도와 전곡항은 당연하고, 저 멀리 안산의 대부도와 안산 탄도항의 풍차가 만들어주는 장관을 관람할 수 있다. 요트를 타면서 누볐던 바다와 바다 위의 섬들도 다시 한번 하늘에서 굽어볼 수도 있다. 어느 서해안 경치가 그렇듯 낙조 시간대를 잘 맞추어 케이블카를 타면 우리나라 서해안의 멋을 제대로 감상할 수도 있다. 



하늘에서 본 제부도 길

케이블카는 운송수단이기보단 관광용이기 때문에 왕복으로 티켓을 끊고 다시 전곡항으로 돌아와 주차해두었던 차를 타고 다시 제부도로 들어갔다. 이런 코스라면 제부도와 제부도로 들어가는 육계사주를 바다, 하늘, 육지에서 모두 보는 것이 된다. 각 장소에서 바라보는 제부도와 제부도의 육계사주는 어떤 모습인지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차로 제부도로 들어가기 위해선 전술했다시피 썰물 시간대에 들어가야 하는데, 다행히 제부도의 육계사주가 밀물에 잠겨 있는 시간은 24시간 중 그리 길지 않아서 시간대에 맞추어야 한다고 그렇게까지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다만 육계사주는 하루에 몇 시간은 꼭 바닷물에 잠겨 있다보니 길이 거칠고 험하고 폭도 넓지 않아 반대편에서 오는 차량을 만나면 서행하며 길을 터주어야 한다. 


바다, 하늘, 육지에서 제부도를 다 구경하느라, 그것도 하늘에서 낙조를 구경하느라 제부도로 들어가고보니 어느덧 깜깜한 저녁이었다. 저녁은 역시 서해안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조개구이다! 아쉬운 건 해가 다 지고 조개구이를 먹다 보니 바다가 어둠에 잠기는 바람에 바다를 경치 삼아 먹는 재미는 놓칠 수밖에 없었다. 제부도도 워낙 관광컨텐츠가 잘 마련되어 있으니 다음날 일정이 없다면 제부도에서 다양한 즐길거리도 체험해보고 트렌디한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권장한다. 제부도는 사전에 많은 정보를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더 풍성하게 즐길 수 있으니 여행계획을 짜기 귀찮아 하더라도 제부도만큼은 미리 어떤 콘텐츠들과 어떤 맛집들과 어떤 카페들이 있는지 정도는 알고 가는 편이 좋다. 제부도 밖에서든 제부도 안에서든 낙조가 셰도잉해주는 서해안 바다의 모습만큼은 꼭 놓치질 않길 바란다.



새로운 시선을 일깨워주는, 소다미술관 

둘째날 아침 숙소 바깥을 보니, 보이지 않고 들리기만 하던 어제의 바다 소리가 이제는 들리지도 않고 벌거벗은 갯벌을 드러놓고 있다. 날 밝을 때 꽉찬 바다를 보고 싶지만 이 바다의 살갗도 서해안의 매력이니 아쉬움을 털어버리고 제부도를 나온다. 제부도를 나오면 마치 안산의 대부도처럼 해물칼국수와 해물파전, 그리고 보리밥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해있다. 그중 '물레방아'라는 곳이 가장 유명한데 식사시간 딱 맞춰 갔다간 식사시간이 한참 지나고서야 밥을 먹을 수 있으니, 아침 먹을 생각으로 식당을 방문해야 점심을 먹을 수 있다. 


둘째날은 저 멀리 화성의 동쪽, 동탄 쪽으로 향해볼 예정이다. 동탄은 1신도시와 2신도시로 나뉘는데 두 신도시 모두 2003년에 지정된 2기 신도시다. 과거에는 일산과 분당이 신도시의 상징이었는데, 최근에는 동탄이 신도시의 대명사이자 동시에 밈으로 굳혀졌다. 신도시는 확실히 여행지라고 하긴 힘들지만 동탄은 다르다. 첫 목적지는 화성시 최초의 사립미술관 소다미술관이다. 소다미술관은 버려져 있던 찜질방 폐건물을 리모델링한 미술관이다. 전시는 기획전시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찜질방 폐건물에서 문화아트시설로 전환된 그 기원을 상징이라도 하듯 전시의 대다수는 건축과 디자인 중심이다. 소다미술관 측에서는 미술관의 건물을 하나의 '캔버스'라고 묘사한다. 건축과 디자인에 대해 잘 알지 못해도 소다미술관의 전시를 통해 감수성을 채운 뒤 그렇게 크지 않은 미술관을 둘러보면 건축의 확장성과 디자인의 추상성을 십분 느껴볼 수 있다. 역시 디자인이란 창조가 아니라 발견이 아닐까 한다. 신진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들을 전시하며 '새로운 시선'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하는 미술관이다.




융건릉 - 사도사제와 정조 부자의 무덤

현재의 화성은 그 이름의 유래인 수원 화성과 무관한 도시가 되었지만, 정조의 흔적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정조의 아버지이자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무덤은 원래 경기도 양주에 있었다. 1789년(정조 13년) 양주에 있던 사도세자의 무덤에 물이 샌다는 정보에 사도세자 무덤 이장 문제가 논의되다가 정조는 지금의 화성시 자리에 이장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사도세자 무덤을 새로 이장할 곳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있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무덤 융릉을 조성하고 대신에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주는 새로운 도시가 수원 화성이었다. 이렇게 사도세자의 무덤 융릉이 조성되었다. 1800년 정조가 죽자 정조의 유언대로 정조의 무덤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 융릉 건너편의 언덕에 만들어지니, 정조의 무덤이 건릉이다. 1816년(순조 16년) 정조의 어머니이자 사도세자의 아내였던 혜경궁 홍씨가 죽자 혜경궁 홍씨는 남편 사도세자의 융릉에 같이 묻혔으며, 1821년(순조 21년) 정조의 아내였던 효의왕후가 죽자 효의왕후는 남편 정조의 건릉에 같이 묻혔다. 따라서 오늘날 융건릉은 각각 사도사제-혜경궁 홍씨 부부와 정조-효의왕후 부부의 합장릉이다. 수원 화성은 정조가 사도세자의 무덤을 조성하면서부터 시작한 것이기에 '화성'이란 지명은 사도세자와 정조로부터 유래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융건릉은 이 지역의 이름을 정해준 분들의 무덤인 것이다.


융건릉 가는 길


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에게 죽임을 당한 사건 '임오화변'은 조선 왕실의 대표적인 비극사로 거론된다. 그렇다면 대체 영조는 왜 자신의 아들을 직접 죽인 것일까? 그것도 뒤주에 가두는 엽기적인 방식으로? 


1724년 정조의 할아버지 영조가 조선의 21대왕으로 즉위했다. 영조는 강력한 왕권을 누린 왕으로 평가받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영조 재위 초반 조선은 노론과 소론 두 붕당 간의 당쟁이 절정을 치닫고 있었다. 영조 즉위 전 선왕 경종(영조의 이복형)은 사망 전까지 본인의 지지붕당이었던 소론과 함께 노론을 숙청하고 탄압했다. 그러나 경종이 급작스럽게 죽고 영조가 즉위하면서 영조의 지지붕당이었던 노론이 소론에게 보복할 기회가 왔다. 1725년 영조는 경종 재위 시 역모죄로 희생된 노론 사람들을 복권해주었으며 조정의 요직 또한 노론 사람들로 대체했다. 다만 소론을 향한 복수의 강도는 그다지 크지 않았으며 소수를 처벌하는 데 그쳤다. 어느 집단이나 그렇듯 노론과 소론 양 붕당 모두 전투적 기질이 충만한 강경파와 상대적으로 유순한 온건파로 나뉘어 있었다. 영조는 노론이든 소론이든 강경파를 멀리하고 온건파를 등용하려 했다. 1728년 소론 극단파들이 모여 영호남지방에서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다. 결국 진압은 됐지만 한창 반란군이 득세할 때는 충청도와 경기 남부까지 진출할 정도로 규모가 결코 작지 않았다.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영조는 소론 강경파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는 동시에 노론의 강경파들도 멀리하며 극단적 붕당정치의 폐해를 없애고자 노력했다. 탕평책을 쓴 것이다. ‘탕평’이란 유교 경전 『시경』에 등장하는 용어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영조는 당쟁을 막기 위해 탕평책으로 당파간의 정치세력에 균형을 꾀하려 했다. 당파색을 크게 따지지 않고 극단적 강경파만 멀리하며 중도 성향의 인재들을 등용하는 영조의 탕평책을 후일 정조의 탕평책과 구분하기 위해 ‘완론 탕평’이라고 부른다.     


영조가 이렇듯 어렵게 구축해놓은 평화롭고 안정적인 조정이 그의 재위 후반 흔들리게 되는데, 바로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에 의해서였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나이 41세에 후궁 영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늦둥이였다. 영조에겐 첫째 아들 효장세자가 있었으나 10살 무렵 요절해 슬픔을 안겨준 만큼 사도세자의 출생은 왕실과 조정에 반가운 소식이었다. 후계 문제가 왕권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만큼 영조에게 사도세자는 각별했다. 사도세자는 겨우 2살일 때 세자로 책봉되었고 영조는 사도세자를 완벽한 후계로 키우기 위해 엄격하게 교육하는 등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영조는 엄하고 깐깐하고 무서운 아버지였다. 사도세자가 아무리 노력해도 영조의 높은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사도세자는 학문보다 창술, 검술, 활쏘기 등 무예에 남다른 능력을 보였다. 덩치까지 좋았던 사도세자는 직접 무예 교과서를 집필하기도 했을 정도였고 그림에도 소질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사도세자를 영조는 탐탁지 않아 했다. 영조는 아버지 숙종 대와 형 경종 대에 신하들의 정치적 압박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왕실 종친들이 쉽게 목숨을 잃는지 보았고, 언제 자신이 제거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기에 평생을 완벽주의로 살아야만 했다. 심지어 어머니가 무수리 즉 천민 출신이라는 출신 콤플렉스까지 겹쳐 작은 빈틈 하나 보여선 안 된다는 강박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영조는 예민한 완벽주의자가 되었고 아들 사도세자에게도 그런 모습과 행동을 기대했다. 자신의 기대와 달리 자유분방하고 학문보다 무예와 예술을 좋아하는 사도세자를 보며 영조는 답답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적이 있었다. 당시 사도세자는 아버지로부터 왕의 자격을 테스트 당하는 것 같아 매일매일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작은 실수에도 영조는 사도세자를 호되게 꾸짖었다. 가뭄이 들거나 폭우가 쏟아지기만 해도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네가 부도덕하고 무능력해서 벌어진 일”이라며 힐책했다. 아버지에 대한 사도세자의 두려움은 급기야 건강악화로 번졌다. 기록에는 사도세자가 가슴이 뛰는 증상이 너무 심해 작은 소음에도 흉통을 호소했다고 한다. 건강악화로 인해 휴식을 취하며 아버지와 업무 압박에서 벗어나게 된 사도세자는 이후로 여러 차례 꾀병을 부렸는데, 영조가 이를 눈치채면서 사도세자에게 크게 실망한다. 영조에게는 정성왕후라는 왕비가 있었다. 둘 사이에는 자식도 없었고 부부의 금슬 또한 최악이었다. 정성왕후는 친아들도 아닌 사도세자를 어여삐 여겼다. 사도세자는 엄한 아버지와 달리 따뜻하게 품어주는 정성왕후에게 많이 의지했다. 그러다 정성왕후가 세상을 뜨자 의지할 곳이 없어진 사도세자는 무너져버렸고 급기야 기행으로까지 번지고 말았다.     


“경모궁(사도세자)께서 옷을 입지 못하던 병이 심하셨으니 그 어쩐 일인가! 이 병환이야 더욱 표현할 수 없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병이었다. 무릇 의복을 한 가지나 입으려 하시면 10벌이나 20~30벌 정도를 갖다 놓는데 귀신인지 무엇인지를 위하여 놓고 태우기도 하셨다. 그 중에 한 벌이라도 순하게 갈아입으시면 천만다행이었다.”     


“소조(사도세자)께서 병환이 나타나시면 사람을 상하게 하시니, 그 의대시중을 현주 어미가 들었는데 병환이 점점 더하셔서 그녀를 총애하시던 것도 잊으셨다. 소조께서 신사년 정월에 미행하시려고 옷을 갈아입으시다가 그 병(의대증)이 발작하셔서 현주 어미를 칼로 쳐서 죽이고 나가셨다.”     


“소조께서는 내수사의 일을 더디게 시행한 일로 인해 (내수사를 맡은) 서정달을 죽이셨다. 또한 출입을 담당한 당번 내관도 여러 명 상하게 하시고 선희궁의 내인 하나도 죽이시어 점점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소조께서 신사년(1761년)의 미행 때 여승 하나와, 평안도 미행 때 기생 하나를 데려와 궁중에 두시고, 잔치를 하신다 할 때는 궁중의 천한 계집들과 기생들이 들어와 잡스럽게 섞였으니 세상에 그런 모습이 어디 있으리오.”     


“소조께서 거처하는 곳 모두가 어찌 산 사람이 거처하는 곳 같으리오. 죽은 사람의 빈소 같기도 하고 다홍색으로 죽은 이의 성명을 쓴 조기(弔旗) 같은 것을 해서 세우고, 영침(靈寢. 시신을 두는 관)하는 형상처럼 해놓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주무시고 잔치를 하시다가 밤이 깊어 모두 지쳐 잠이 들었다.”     


“소조께서는 장님들도 불러서 점을 치게 하시다가 그것들이 말을 잘못하면 죽이기도 하고, 의관이며 역관이며 궁중에서 부리는 자들도 여러 명이 죽고 병신이 된 것들도 있었다.”     


- 『한중록』 


사도세자는 노골적으로 노론 신하들을 멀리하고 소론 신하들과 교류했다. 나중에 사도세자가 왕이 되면 노론을 박해할 게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노론 신하들은 사도세자를 흠잡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노론은 영조에게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며 사도세자를 모함했다. 사도세자가 평안도 인근 외진 곳에서 병정놀이를 한 것이 빌미가 되었다. 사도세자가 역모죄로 죽으면 연좌제로 사도세자의 아들인 영조의 손자까지 화를 당하게 된다. 고민에 빠진 영조에게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가 찾아와 사도세자의 자결을 제안했다. 사도세자가 역모죄로 죽으면 그 후폭풍이 어떠할지 짐작하고 있던 영빈 이씨가 어미로서의 끔찍한 고통을 감내하며 생각한 고육지책이었다. 영조도 알고 있었다. 사도세자가 자결하면 모든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될 수 있음을.      


1762년 영조 재위 어느덧 38년째. 뜨거운 여름 영조는 사도세자를 불렀다.     


“임금이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冠)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한 뒤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 세자가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 (중략) 세손이 들어와 관(冠)과 포(袍)를 벗고 세자의 뒤에 엎드리니, 임금이 안아다가 시강원으로 보내고 김성응 부자(父子)에게 수위(守衛)하여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     


“소조(사도세자)께서 나가시자 즉시 대조(영조)의 노하신 음성이 들려왔다. 휘녕전이 덕성합과 멀지 않아 담 밑에 사람을 보내 보니, 벌써 용포를 벗고 엎드려 계신다 하였다. (중략) 거기에 있는 것이 부질없어 세손이 계신 곳으로 와서 서로 붙잡고 어찌할 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신시 전후 즈음에 내관이 들어와 소주방(왕실 음식을 만들던 궁궐 부서)에 쌀 담는 궤(뒤주)를 가져오라 하시니, 이는 또 무슨 말인가? 세손이 망극한 일이 있는 줄 알고 뜰 앞에 뛰어 들어가 대조(영조)께 아뢰었다. 아비를 살려주옵소서! (그러자 영조가) 나가거라! 하였다.”  - 『한중록』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사망했다. 사도세자가 죽은 날 영조는 ‘사도’라는 호를 내렸다. 영화 <사도>엔 이런 대사가 있다. “나는 자식을 죽인 아비로 기록될 것이고, 너는 미쳐서 아비를 죽이려 한 광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래야 네 아들이 산다.”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노론도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았고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영조의 손자였던 세손도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임오화변’이라 하는데, 당시 세손의 나이 10살이었다. 세손은 영조의 첫 아들이자 요절했던 효장세자의 양아들로 입적했다. 영조는 자신의 손자가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부정해버린 것이다.     


세손은 어려서부터 괴팍하고 깐깐한 영조의 모든 기준을 만족시킨 영재였다. 정신적으로 취약해 보이는 사도세자가 왕이 되는 것보다는 세손에게 바로 왕위를 승계하는 편이 나라를 위한 길이라고 영조는 굳게 믿고 있었다. 사도세자와 사이가 멀어지고 있을 때에도 세손에게는 각별한 애정을 보냈다. 사도세자가 죽고 왕으로 즉위하기까지 14년간 세손이었던 정조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을까.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데다 할아버지인 영조가 얼마나 무서운지, 또 정치판은 얼마나 냉혹한지 일찌감치 알아버린 세손은 절대로 튀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세손은 아버지의 죽음을 잊을 수 없었지만 할아버지 영조가 엄하게 단속했기에 순순히 따라야 했다. 모두가 세손이 아버지를 잊었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1776년 정조는 자신의 즉위식 연설에서 충격적인 발언을 한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는 평생을 아버지 사도사제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조의 모든 정책들도 사도세자의 죽음에서 비롯한 것들이다. 계기야 어찌됐든 정조가 괄목할만한 업적들을 남긴 것도 분명하지만 정조 재위 기간 24년 중 끝에 5~6년 말년엔 정조의 별다른 정책이 아예 없다시피하고 오로지 사도세자 추존문제에만 천착했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가장 깊이 개입했던 노론 벽파의 신하들은 사도세자 추존문제를 목숨걸고 반대에 나서 결국 정조는 끝끝내 사도세자를 추존하지 못했다. 이후로도 순조부터 몇 번이고 사도세자를 추존하려 했지만 이루어지지 못했고 정말 한참이 지난 후, 고종이 황제에 오르고 대한제국을 선포했을 때, 사도세자 증손자의 아들로 입적되었던 고종 황제는 사도세자를 장종으로 추존하였고 얼마 안 있어 장조로 묘호를 바꾸었다. 본디 '능'은 왕이나 왕비의 무덤에만 붙을 수 있는 이름이다. 왕이 되조 못했던 사도사제의 무덤명은 고종 황제가 추존하기 전까지 '현륭원'이라 불렸다. 고종 황제가 사도사제를 왕에 걸맞는 칭호로 추존한 덕에 현륭원도 왕릉의 자격을 갖추어 '융릉'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융릉(사도세자의 무덤)과 건릉(정조의 무덤)


융건릉 앞에는 용주사라는 사찰이 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장하면서 아버지의 넋을 기리고자 용주사까지 같이 건립한 것이다. 이처럼 왕실의 무덤을 지키는 용도로 지은 절을 '능침사'라고 분류한다. 용주사는 아버지를 위한 사찰이었던 만큼 정조는 용주사에 무한한 신경을 퍼부었다. 이름 '용주사'도 왕이 되지 못한 사도세자에게 왕을 상징하는 '용'을 넣어 정조가 직접 지었으며,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김홍도에게 사찰의 탱화를 제작하도록 하였다. 사도세자의 죽음으로부터 비롯한 정조의 정책들을 평가하기를 넘어서 그만큼 정조에게 아버지 사도세자의 존재가 어땠는지를 유추해보면 그 심리 자체는 대단히 감동적이다. 그래서인지 두 부자의 내외가 함께 묻힌 융건릉은 다른 조선왕릉들과 외양은 같지만 무언가 알 수 없는 비장미를 느끼게 되는 곳이다.





항구는 사연이 많은 곳이라는 말이 있다. 이별하는 장소이기도 하면서 누군가와 조우하는 곳이기도 하다. 선박술과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바다로 나아간다는 거 자체가 생명을 담보로 큰 용기가 필요했고, 그렇게 소중한 사람을 잃은 일들도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또 그런 곳이면서도 항구는 어디론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다는 진취적인 이미지도 강렬하다. 그래서 바다 위에 정박해있는 배들이 약한 파도에 살짝씩 출렁이는 모습을 보면 묘한 느낌이 든다. 사도세자와 정조가 이별했다가 사후 같은 곳에 묻히며 재회한, 그리고 그것이 후대에까지 두고두고 회자되는 두 인연처럼 사람 사이의 만남은 부득이하게 이별로 이어질 수도, 그리고 우연히 어떤 방식으로든 재회할 수도 있다. 제부도에도 과한 의미부여를 해볼 수 있을 거 같다. 가끔은 육지와 이어진 사주가 물에 잠겨 육지와 이별하다가도, 다시 썰물이 되면 육지와 만난다. 인간사 모든 관계의 운명은 신조차도 어쩌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책 추천 

- 무라카미 하루키 <중국행 슬로보트>

무라카미 하루키의 첫 단편소설입니다. 소설 중 주인공이 생애 일본에서 만났던 중국인 3명과의 기억을 회고하는 내용입니다. 주인공이 만났던 중국인 셋 모두 일본이란 타지에서 중국인이란 외지인의 정체성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묘사하는데, 역시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체는 선명하고 유려하기 그지 없습니다. 문체도 문체지만 무라카미 하루키 모든 소설을 관통하는 듯한 유랑과 방랑의 정서가 '외국인'이란 캐릭터의 설정으로 잘 드러나고 있죠. 경기도 화성은 신라시대 신라인들이 중국 당나라와 직교역을 할 수 있던 유일한 항구였습니다. 말 그대로 신라인들에겐 '중국행 슬로보트'였는데요, 소설에선 주인공이 중국을 가지 않고 국내 일본에서 일본으로 온 중국인들을 만나는 과정이라 제목이 다소 아이러니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중국인 3명을 만나면서 중국에 대해, 또 중국을 넘어 타지와 이계에 대해 우리가 갖는 환상, 생경함, 괴리감, 호기심 등을 가지며 실은 꼭 그곳에 가지 않더라도 그런 생각 및 정서를 갖는 것과 정신적 방문을 일치시키고 있죠. 어쩌면 당나라라는 대국을 방문했을 신라인, 경기도 화성에 들어왔던 당나라인들도 마찬가지가 아니였을까 합니다. 나와 다른 땅과 다른 세계에 사는 이와의 교감 그리고 교류가 얼마나 특별한 경험인지를 곱씹게 되는 단편소설입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이준익 감독의 <사도>

영조가 사도사제를 뒤주에 갇혀 죽였던 임오화변을 다룬 이준익 감독의 <사도>입니다. 송강호가 영조 역할을, 유아인이 사도사제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들 중 손에 꼽히는 정극 시대물이죠. <사도>의 플롯이 인상적인데요, 영조가 사도세자를 바로 뒤주에 갇히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8일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동안 중간중간 플래시백으로 돌아가 영조와 사도세자 두 부자가 어떻게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를 추적하는 비극입니다. 역사적 배경을 면밀히 알지 못해도 그 비극의 서사를 따라가는데 큰 무리가 없습니다. 개봉당시 관객들이 영화 주조연 배우들의 연기에 감탄하며 화제가 되었습니다. 특히 영조 역할을 맡은 송강호의 쇳소리로 읊조리는 자조, 사도세자 역할을 맡은 유아인의 분노에 찬 눈빛, 세손 정조의 역할을 맡은 아역배우의 절규까지 완벽한 캐릭터라이징과 그에 적확한 연기였죠. 이 영화가 가장 비극적으로 다가오는 건 역사적 재현이 아닌 실제 역사적 사건을 가족사라는 휴머니즘적 방식으로 풀어냈다는 화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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