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영 Dec 20. 2023

서울촌놈의 국내여행 뿌수기 [청양-서천 편]

전통주를 여행하다


나는 애주가다.


술과 술이 있는 자리의 분위기를 굉장히 좋아한다. 멋몰랐을 적엔 왕창 들이붓는 게 전부였지만 이제는 혼자만의 개똥 술철학도 생기고, 좋아하는 안주와 그에 걸맞는 술을 나만의 기준으로 페어링해보기도 한다. 


애주가들은 크게 셋으로 나눠볼 수 있을 거 같다.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 술을 좋아하는 사람, 술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 나는 두 번째 단계에 속할 뿐이지만 조금씩 세 번째 단계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다.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보다 술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지만 아직도 양주, 위스키, 와인, 샴페인의 세계는 나에게 어렵기만 하다. 무슨 용어들이 그렇게 다양한지 계보조차 잘 그려지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나는 오히려 한국의 전통 술들, 우리의 전통주에 대단히 관심이 많다. 저 오랜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주들 가운데 일부 그 맥이 끊겨 사리지기도 했지만 지금까지도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주들도 존재감을 내뿜고 있다. 현대식으로 재탄생하는 전통주들도 많아 젊은 애주가들 사이에서 전통주의 인기가 점점 올라가는 추세다. 그럴수록 전통주들이 더 다양해지니 이다지도 반가울 수가 없다.


요즘에는 온라인 매장도 활성화되어 있어서 원하는 전통주들을 인터넷으로 쉽게 구매할 수는 있지만, 나는 웬만하면 전통주가 만들어진 그 지역을 방문해서 여행도 하고 직접 구매하려고 한다. 전통주를 포함해 모든 것들은 자기가 탄생하고 머무르고 있는 로컬의 인문과 배경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특정지역에서 그 지역 특산물로부터 탄생한 전통주들은 지역의 로컬리티까지 같이 거시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서울촌놈의 국내여행 뿌수기'에서는 전주의 이강주, 금산의 인삼주, 고흥의 유자주를 소개한 바 있는데 이번엔 충남 청양의 구기주와 충남 서천의 한산소곡주를 소개하고자 한다. 구기주와 한산소곡주라는 전통주가 아니면 청양과 서천을 소개할 기회가 없을 것만 같아, 서로 멀지 않은 두 지역을 묶어 모두 여행해봤다.




칠갑산장승공원, 순수하고 과장된 민중예술의 미학

청양은 대부분 바닷가나 평야지방인 충청남도에서 산으로 둘러쌓인 곳으로, 칠갑산을 진산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청양의 여행지들도 칠갑산을 두르고 분포해있다. 차를 타고 칠갑산 도립공원 중턱에 칠갑산장승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청양 칠갑산 인근의 마을들은 장승의 문화를 전수하며 아직도 매년 정월대보름이 되면 장승제를 지내고 있다. 이제는 장승을 보기 힘들어진 시대에 이렇게 장승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청양의 장승문화가 더없이 소중할 뿐이다. 실제 장승문화를 이어가고 있는 청양 칠갑산의 마을들을 한국 최고의 장승보존지역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장승문화의 기원은 선사시대와 고대시대에 수직성을 강조한 거석을 세우던 선돌문화에서 유래한다. 어느 문화권이나 우람한 돌을 땅에 박은 거석문화를 가지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시베리아 샤머니즘 전통의 맥이 전래되었다. 선돌문화와 더불어 같은 맥락에서 솟대문화도 나타났는데, 이러한 선돌문화와 솟대문화는 불교가 전래되고는 그 세력이 많이 약해지긴 했으나 민간신앙으로 불교와 결착되어 전통이 이어졌다. 장승이 언제부터 생겨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략 고려 후기~조선 초기로 추정한다. 고려시대 때까지만 해도 주로 사찰들 위주로 '장생'이란 석물들을 세워두었다. 이때 장생은 이정표로서의 기능이 더 도드라졌다. 


그러나 석물을 세워두는 선돌문화는 종교집단이나 정치집단에서 권력자들의 몫이었다. 거대한 형상물에 종교적 기원을 두는 관례는 민중들에게도 퍼져갔고, 민중들은 돌보다는 구하기 쉽고 제작하기도 어렵지 않은 나무를 사용해 석물을 대체하였다. 이렇게 장승이 태어났다. 장승이 본격적으로 탄력을 받은 시점은 조선후기부터였다. 1592년~1598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 그리고 1670년~1671년에 일어난 경신대기근을 통해 조선의 민중들은 마을별로 무병장수에 대한 염원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해졌다. 재난과 화와 역병을 몰고 온다는 귀신이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막겠다는 벽사의 목적으로 장승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귀신을 막아야 하기 때문에 장승들의 얼굴은 우락부락하게 묘사되었고, 강인함을 드러내고자 남자정승에는 '천하대장군'을 여자 정승에는 '지하대장군'이란 글귀를 적었다. 따라서 정승은 정치권력집단이나 엘리트들이나 예술가들의 소산이라기보단 민중들의 염원이 담긴 민중예술인 것이다. 비록 정승들의 표정이 괴팍하고 우악스럽게 묘사되긴 했지만 섬뜩함이 느껴지기본다는 그 과장됨에 오히려 친근하다. 협성대학교 예술대학 조형회화과 이정근, 손성주 교수는 정승의 조형미의 매력을 두고 과장과 강조, 자유로운 표현, 자연미, 단순미, 해학미, 순수미 등을 꼽았다.




천장호출렁다리, 명당의 기운 얻기 

청양의 진산인 칠갑산은 일곱 장수가 나올 명당이라는 풍수지리에서 유래한 명칭이라고 한다. 칠갑산의 동쪽 아래동네에는 1979년 만들어진 천장호라는 저수지가 있다. 천장호가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 원래 이 지역에는 황룡과 호랑이가 영물이 되어 칠갑산을 수호하고 있다는 전설이 내려지고 있었다. 천장호를 건너면 곧바로 칠갑산 등산로로 이어지는데, 황룡과 호랑이 지켜주고 있는 이 지역을 통해 칠갑산에 오르면 그 영험한 기운 덕에 복이 생기고 건강한 아이를 잘 낳을 수 있다는 전설까지도 전해진다. 그런데 천장호가 생겨버리니 그 영험한 기운 얻을 수가 없게 생겨 2009년 천장호에 출렁다리를 설치하여 저수지를 건널 수 있게 하였다. 천장호의 출렁다리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긴 출렁다리다. 이 긴 출렁다리를 건너면 우리는 다시 칠갑산의 영험한 기운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천장호출렁다리에는 청양의 특산물인 고추와 구기자가 큼지막한 조형물로 그 기세를 뽐내고 있다. "청양의 특산물이 고추? 앗 그렇다면 청양고추의 그 '청양'이 혹시?!"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지만 청양고추의 '청양'은 충남 청양이 아니다. 비록 청양군에서는 청양고추의 '청양'이 충남의 청양군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 청양고추의 '청양'은 경북 청송과 영양의 글자를 하나씩 따온 것에서 유래했다.



청양의 구기자타운과 구기주

그러나 청양에는 어느 도시에게서도 뺏길 수 없고, 또 어느 도시도 감히 넘보지 못하는 유일무이의 특산물을 가지고 있으니 바로 구기자다. 구기자, 유자, 결명자, 오미자, 복분자 등 뒤에 붙은 '자(子)'는 나무에서 나는 '열매'나 '씨앗'을 뜻한다. 구기자가 나는 구기자나무의 원래 이름은 괴좆나무다. 나무 모양이 '고양이의 생식기'와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괴좆나무에서 나는 빨간 열매를 구기자라고 부르는데, 구기자가 달려 있는 가지의 모양이 헛개나무 같기도, 버드나무 같기도 해서 '헛개나무 구()'와 '버드나무 기()'자를 합쳤다고 한다. 그나저나 구기자가 나는 나무의 이름인 괴좆나무가 여간 말하기가 껄끄럽다보니 나무 이름도 구기자열매가 나는 나무라는 뜻에서 '구기자나무'라고 부르는 것으로 통용되었다.


구기자는 손가락 한마디 정도 크기의 작고 검붉은 열매로 8~9월 가장 붉게 익었을 때 건조시켜 다려 먹는다. 하수오, 인삼과 함께 대한민국의 3대 명약이라고 한다. 효능으로는 지방간 억제, 피로 회복, 혈압조절에 좋다고 한다. 청양군 시내에서 칠갑산 가는 도로목에 위치하고 있는 구기자타운에서는 구기자를 포함해 청양군의 여러 농산물들을 판매하고 있다. 단언 구기자들을 사가서 여행 후 가족과 지인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하나 같이 평이 좋았다. 명약이라지만 향이 강하지 않고 적당히 고소하여 맛도 일품이라고 칭찬이 자자했다. 충남의 청양에서 차지하는 구기자 생산 비율이 국내 60~70%이다.


그리고 우리네 전통주들은 지역별 명물로 소문난 약재들을 가만두지 않는다. 몸에 좋다는 약재와 열매들은 어떻게든 술로 승화시켜본다. 그렇게 탄생한 청양의 대표 전통주가 구기자로 만든 구기주다. 왜 구기자주가 아니라 구기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후기의 두 실학자 홍만선의 <산림경제>와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서 '구기주'라고 언급되어 있다. 조선시대 구기주는 건강에도 큰 효험이 있어 '약주'로 분류되었다. 구기주는 청양의 하동 정씨 종가 집안에서 무려 150년간이나 내려오던 내력 깊은 전통주다. 현재는 임영순 명인이 10대째 이어져내려오며 구기주를 빚고 계신다. 구기자차와 달리 구기주의 향은 강하다. 확실히 약재 향이 강하지만 식사를 할 때 한잔씩 곁들이면 우리의 한식과 이렇게도 어울리는 술이 또 없을 정도다. 



매미의 날개, 한산 모시

둘째날은 서천 여행이다. 서천 여행의 핵심지역은 한산이다. 본디 한산군과 서천군은 독립된 별도의 행정구역이었으나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 서천군으로 통폐합되었다. 서천군이 더 큰 행정단위였던 듯 싶으나 한산군은 전통적으로 두 가지 특산물로 확고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으니, 바로 모시와 소곡주이다. 

이제는 '한산모시'라는 개념이 고유명사가 되어버린 듯한데 한산은 한국 최상품의 모시를 생산하던 지명이다. 고려 말 문익점이 목화씨를 도입해오기 전 우리 선조들의 옷감은 모시 혹은 삼베였다. 문익점의 목화가 보편화된 이후로도 모시와 삼베의 전통은 계속 이어졌다. 모시와 삼베 중 모시(한자로 저마. 모시는 순우리말이다)는 모시풀의 껍질을 섬유조직으로 삼아 짜낸 옷감으로, 얇고 통풍이 잘 되어 여름철에 특화되어 있는 옷감이었다. 정확히 어느 시점부터 모시풀로 옷감을 만들었는지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에 언급되는 기록이 있고, 또 <삼국사기>에는 통일신라가 당나라에 모시를 비롯한 옷감 30종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으니 한국은 저 오랜 전부터 옷 만드는데 제법 재능이 있었나보다. 모시가 본격적으로 개발된 건 고려시대부터다. 고려는 모시에 다양한 색감과 문양까지 입히며 여러 종류로 구분하였고, 모시가 워낙 곱고 섬세하다보니 고려인들은 모시옷을 '메미의 날개'에 비유했다. 모시옷은 워낙 귀티가 나면서 쉽게 구할 수 있다 보니 귀족들은 귀족대로, 평민들들은 평민대로 사랑할 수밖에 없던 옷이었다. 고려의 원 간섭기 때는 몽골인 왕후들이 특히 고려의 모시옷을 좋아했다. <고려사>를 보면 고려 25대왕 충렬왕의 아내였던 제국대장공주가 모시옷을 짤 수 있는 여종을 승려에서 데려올 정도로 유독 고려의 모시옷에 관심을 보였다. 조선시대에도 모시의 종류가 훨씬 다양해졌으며 명나라가 조선의 모시를 진상품으로 요구하였다. 조선시대 가장 큰 시장이었던 종로 육의전의 6가지 상품 중 하나가 모시였고, 모시를 파는 상점을 '저포전'이라 하였다.



모시 의존도가 높았던 저 예전에는 곳곳에서 모시를 짰지만, 모시풀의 질이 가장 우수했던 지역들은 충남 지역에 몰려 있었고 그중에서도 서천이 으뜸이었다. 조선시대에는 한산의 공납품이 모시였던지라 한산의 사람들은 모시를 세금으로 바쳤다. 오늘날 한산이 속해있는 서천은 차령산맥 이남, 그리고 금강이 흐르고 있는 지역으로 적당한 해발고도 덕에 습도가 적정하고 통풍이 잘 되어 모시풀이 잘 자라난다고 한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서천 지역의 토양과 기후가 모시풀을 재배하기에 적합하다고 기록해두었다. 한산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에는 한산의 어느 노인이 약초를 캐러 건지산에 올랐다가 모시풀을 발견하였고 이를 가져와 재배하면서 모시짜기가 시작했다고 한다. 모시풀은 주로 5~6월 수확하여 6월부터 모시짜기에 들어가는데, 오늘날 매년 6월 한산모시관을 중심으로 그 일대에서 한산모시축제가 개최된다. 일대에 모시풀을 먹인 각종 음식들도 판매하고 있다.




한산 소곡주의 향

서천에서 소개할 전통주는 한산의 소곡주다. 한산모시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한산소곡주갤러리'가 있어 한산소곡주에 대한 간단한 정보를 제공받고, 한산 지역에서 소곡주를 제조하는 양조장들의 모든 소곡주들을 모아 판매하는 곳이다. 다른 전통주와는 달리 한산 소곡주는 특정 명인 한 명만 있지 않고 다양한 양조장에서 소곡주를 만들고 있어서 양조장별로 맛의 차이가 존재한다. 서천의 한산 지역에만 무려 500곳이 넘는다고 한다. 소곡주가 처음이라 어떤 맛이 내 취향에 맞을지 몰라도 상관없다. 갤러리에 계신 직원분께 추천을 받고 싶다고 말하면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시고, 거기에 맞는 소곡주를 구매할 수 있다.


한산 소곡주는 백제인들이 만들었다는, 우리나라의 전통주들 중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 편에는 "무왕 37년(636년) 조정 신하들과 부여 백마강 고란사 부근에서 소곡주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어 소곡주의 깊은 내력을 증명하고 있다. 소곡주의 '소곡'은 누룩을 적게 쓴다는 뜻이다. 누룩이란 평범한 액체를 술로 만들어주는 원료다. 누룩은 일종의 곰팡이다. 밀, 쌀, 녹두, 보리, 찐 콩 등 전분질의 곡류를 빻고 찧고 반죽으로 만든 뒤 '띄우기' 과정을 거치면 자연스레 누룩곰팡이가 퍼진다. 전분질의 곡류로 만든 반죽을 볏짚과 종이로 씌우고 기다리는 과정을 '띄운다'라고 표현한다. 이 누룩곰팡이 효소가 퍼지면 그 곡물은 발효가 되며 그 과정에서 당이 생산된다. 그 누룩과 물을 적절히 잘 섞어 삭히기만 하면 막걸리가 되고, 다른 첨가물을 넣음에 따라 각각의 전통주들이 탄생한다. 소곡주의 경우 통밀로 누룩을 만든다. 통밀로 만든 누룩은 물과 더불어 맵쌀로 만든 떡, 찹쌀로 지은 고두밥, 생강, 메주콩, 말린 민들레, 엿기름 등을 첨가해 약 100일간 삭힌 술이다. 따라서 누룩의 효소가 알코올과 당을 생산해주는 우리 전통 술의 핵심인데, '전분류의 발효'로 알코올을 만들다보니 경우에 따라 역한 냄새가 날 수 있다. 막걸리에서 나는 고유의 쿱쿱한 그 향이다. 소곡주는 이런 누룩의 양을 줄여서 잡내를 최소화하고 향을 살린 전통주다. 즉 소곡주의 핵심은 '향'이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전설이 내려온다. 어느 한 지방의 선비가 서울에 과거시험을 치르러 상경하던 중 서천의 한산에 이르렀는데 목도 축일 겸 우연히 소곡주를 먹었단다. 어찌나 그 향이 곱던지 도저히 술이라곤 믿을 수가 없던 선비는 도수가 약한 술이라고 방심하고 한 잔이 두 잔 되고, 두 잔이 세 잔이 되었다. 여전히 향이 고아 취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채 일어나는 순간 그대로 고꾸라졌다고 한다. 결국 서울까지 가지 못해 과거시험을 치르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네 전통주들 중 가장 향이 고운 소곡주는 꽤나 위험한 술이다. 이 고사가 그저 소곡주가 어떤 술인지 묘사하는 수사학적인 고사 정도로 생각했다. 우리 전통주는 발효를 몇 차례를 하느냐에 따라 격이 달라졌다. 가장 초보적으로는 1번만 걸러냈지만 일반적으로는 2번을 걸러내는 이양주가 보편적이다. 우리나라 전통주 중에서도 3번이나 걸러내는 삼양주들이 종종 있는데, 당연하게도 3번이나 걸러내면 손과 품이 많이 들어가기에 빚는 난이도가 상당하다. 단 그렇게 3번에 걸쳐 태어난 술은 과일 등의 감미료가 전혀 없이도 과일향과 단맛이 난다고 하는데, 소곡주가 바로 3번을 빚은 삼양주에 속한다. 소곡주의 단맛이 탄생한 배경엔 이런 재조의 비밀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한산소곡주갤러리에서 소곡주를 사고 며칠후 회사에 기념으로 가져가 다들 한 잔 씩 마셔봤는데, 유독 한 동료가 소곡주의 향과 맛이 전혀 술 같지 않다고 반해버려서 딱 한 잔만 더 하겠다고 2잔을 마셨다. 그러더니 정말로 취해버렸다. 소곡주의 전설은 결코 과장 섞인 전설이 아님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말았다.



장항스카이워크에서 기벌포 해전 전망

마지막 코스는 서천의 장항항으로 이동한다. 장항항은 충남 최남단에 위치한 항구로 군산과 맞붙어 있다. 일제강점기 전라도의 곡식들을 일본으로 반출할 때 주로 군산항과 목포항을 사용하였는데, 반출되는 곡량이 어찌나 많던지 군산항과 함께 군산과 붙어 있는 서천의 장항항을 만들어 같이 운영하였다. 오늘날에도 장항항은 서해로 나가는 주요 항구로 기능하고 있다. 비록 일제강점기 때 수탈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항구이지만 오늘날에도 유용하게 쓰인다는 점은 해운로에서 장항의 지리적 중요성이 크다는 뜻이다. 지리적 중요성이 큰 곳들은 언제나 격전지가 되는 마련이다. 장항항이 있는 이 포구의 옛 이름은 '기벌포'로, 기벌포는 삼국통일전쟁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격전지다.


백제의 마지막 왕은 폭군으로 널리 알려진 의자왕. 그는 마지막 충신이었던 흥수, 성충의 간곡한 충언을 무시하여 흥수를 유배보내고 성충을 하옥시켜 의자왕은 충신의 말을 듣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성충은 옥중에서 옥사하였는데 죽기 직전 끝까지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며 의자왕에게 백제를 구할 수 있는 유언을 남겼다. 흔히 알려지기론 성충의 유서에는 의자왕의 음란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경계하라는 내용이 있다고 하지만, 실제 성충의 유서에는 의자왕의 개인적 사생활을 문제시 삼는 내용은 단 한 줄도 없다. 

성충

어릴 적부터 귀족들에게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성장한 의자왕은 '귀족'이란 족속 자체를 혐오했다. 의자왕은 오로지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귀족들과 부딪혔고, 한때 자신의 왕권강화에 도움을 주었던 성충, 흥수 등의 귀족들마저 멀리 하였다. 의자왕은 주요 요직에 전부 부여씨 왕족들을 앉히고 귀족들을 내치기 시작했다. 성충, 흥수 등이 가장 문제시삼았던 의자왕의 업적은 신라에 대한 과도한 공격이었다. 초기 의자왕은 신라를 압박하며 무려 40여 개의 성을 함락시키는 기염을 통해 왕권강화를 도모했다. 처음부터 성충, 흥수가 신라 공격을 반대하지 않았지만 신라에 대한 의자왕의 압박 강도가 강해질수록 중국 당나라의 눈 밖에 난 것이다. 한번은 당나라 황제가 백제에게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언지를 주었지만, 의자왕은 그러겠노라고 답신하면서 약속을 어기고 또 신라 영토를 침공한 적도 있었다. 이후 당나라 황제는 백제 사신을 접견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신라에 대한 공격은 신라 자체보다 당나라를 자극하는 일이기에 성충, 흥수는 신라 공격을 자제하라고 간언했지만 의자왕은 왕권강화에 미친 사람처럼 신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는 일이 없었다. 백제멸망 1년 전이었던 659년까지도 의자왕은 신라를 공격했다. 끝까지 의자왕의 신라 공격을 반대하던 흥수는 유배형에 처하고, 성충은 하옥된 뒤 옥사했다. 성충의 유서에는 이런 식으로 가다간 당나라의 침공이 불가피하며, 만약 당나라가 쳐들어오면 배를 타고 들어올 것이니 기벌포의 하구를 막으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전략을 내놓았다. 660년 성충의 예상대로 나당연합군이 백제 수도를 향해 진격했다. 신라군은 육로로, 당나라군은 바다를 통해 강으로 백제의 수도 사비성으로 향했다. 기벌포라 불리던 오늘날의 장항항은 충남과 전북 사이에 흐르는 금강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금강에서 쭉 올라가다보면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지나치는 백마강까지 연결된다. 성충은 적군이 백마강까지 들어오지 못하도록 강 입구를 봉쇄해버리면 승산이 있다고 본 것이다. 실제 13만 당나라 수군이 기벌포를 통해 들어오려고 하자 기겁한 의자왕과 조정 대신들은 유배 간 흥수를 불러들여 계책을 요청했다. 흥수는 성충과 동일한 대답을 내놓았다. 기벌포 하구를 막으라고. 다만 13만 대군을 과연 강 하구에서 막아낼 수 있을지 확신이 없던 의자왕과 조정은 차라리 백마강까지 깊숙이 유인하여 매복해 공격하자는 결론을 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당나라 13만 수군을 강 안쪽으로 유인만 했지 공격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덕분에 소정방의 당나라 수군은 어떠한 저항을 받지 않고 '프리패스'로 백제의 수도 사비성까지 강을 따라 진격할 수 있었고, 660년 그렇게 사비성이 함락되었다.


자료출처: 우리역사넷


두번째 사건은 백제 멸망 후 백제부흥운동 때 벌어진 사건이다. 백제 멸망 후 백제의 잔존세력들이 백제부흥운동을 전개했는데, 이때 일본이 백제부흥운동을 지원해주었다. 그간 일본은 백제를 통해 선진문물을 받아들였고 또 백제와는 우방국이었으며, 당나라가 한반도를 치고 나면 그 다음은 일본이라고 여겼던 야마토 조정은 당시 야마토 정권에 있던 백제 왕족이었던 부여풍을 백제로 귀국시키고 백제부흥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병력을 모았다. 야마토 조정의 섭정자였던 나카노오에 황자는 대규모 수군 병력을 백제로 파병했다. 당나라군은 일본 수군 400여 척이 오고 있다는 소식에 수군을 기벌포에 주둔시켰다. 즉 기벌포를 선점한 것이다. 663년 당나라 수군 170여 척이 기벌포에 주둔하고 있다가  일본 수군과 맞닥뜨렸다. 일본 수군은 빠른 기동력을 사용해 백병전을 주도하려고 했으나 당나라 수군은 어떻게든 백병전을 피하기 위해서 불화살을 계속 퍼붓는 화공을 활용하였다. 하필 이때 바람이 일본 수군 쪽으로 세게 불고 있어서 불은 삽시간에 일본 전함에 퍼졌고 일본 수군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당나라 군함은 크고 둔탁한 특성을 활용해 일본 군함을 들이받아 일본 수 400여 척 전부 궤멸됐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오르고 바닷물도 붉은 빛을 띠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금강을 당시에는 백강이라고 불렀기에 이 전투를 백강구 전투라고 하며, 백강구 전투에서 패배로 백제부흥운동도 종료되었다. 


기벌포에서 벌어진 세 번째 사건은 (결과적으론 우리에게 해피엔딩인) 나당전쟁의 마지막 대미를 장식한 기벌포 해전이다. 나당연합군이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는 신라마저 병합하려고 하자 신라는 초반엔 고구려부흥운동을 지원하는 형식으로 나당전쟁을 시작했다. 초기엔 선전했지만 고구려부흥세력의 내분과 당나라 육군의 맹공으로 고구려부흥운동은 종료되고 당나라 육군은 경기도 지방까지 남하해 신라를 위협했다. 이렇게 불리한 국면을 뒤집은 전쟁이 매소성 전투였다. 북한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군이 오늘날 경기도 연천으로 비정되는 매소성을 공격해 대승을 거두었다. 매소성 전투의 승리로 당나라 육군은 전원 북방으로 도주하였다. 당나라 측에선 전세를 전환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했다. 당나라 장수 설인귀는 수군으로 한반도의 중부지방을 끊어버리면 신라군의 허리를 끊을 수가 있었다. 신라의 주력군이 모여 있던 경기도 지방의 신라군과 수도 경주 사이가 단절되어버리는 것이다. 설인귀가 목표지점으로 삼은 강이 금강이었다. 정확히 한반도의 가운데를 단절시킬 수 있는 강이었다. 설인귀의 당나라 수군이 금강의 하구, 즉 기벌포로 향하자 신라 문무왕은 시득이란 장수에게 군대를 주고 기벌포를 막게 했다. 676년 신라 수군을 지휘하며 기벌포에 먼저 도착한 시득은 설인귀를 상대로 23번 싸워 첫 전투를 제외한 나머지 22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였다. 기벌포 해전의 승리로써 당나라군은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수가 없었고, 당나라 본국에선 전병력 철수지시를 내렸다. 이로써 나당전쟁은 신라의 승리로 끝이 났다.


기벌포 해전 기록화


백강구 전투나 기벌포 해전의 양상을 보면 결국 먼저 기벌포를 선점하여 기벌포를 방어하는 쪽이 승리를 거두었다. 성충의 혜안이 감탄스럽기만 하다. 장항으로 이름이 바뀐 옛 기벌포. 그 포구에는 바다를 구경하며 걸을 수 있는 장항스카이워크가 있고, 장항스카이워크 종착지에는 기벌포 해전 전망대가 있다. 내가 갔을 때는 썰물이라 그런지 갯벌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들어보니 기벌포 하구는 여느 서해안처럼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썰물-밀물 변동이 잦다고 한다. 그러고 놓고 보니 기벌포를 선점하는 자가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는 점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기벌포를 선점하면 썰물-밀물의 주기를 미리 파악할 수 있고, 그 기간에 따라 자신이 유리한 지점에서 싸울 수도 있으며, 썰물 때는 배가 마비될 수밖에 없으니 미리 와 있는 쪽에선 육지에서 공격하면 공격하는 측은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시 현장에 직접 와보면 풀리지 않은 미스테리들이 생각보다 쉽게 풀리는 경우가 있다.





이제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전통주 매장들을 찾을 때마다 놀랍기만 하다. '전통'이라지만 전통이라는 특유의 고지식해보이는 디자인보다는 최근 감성에 맞는 트렌디한 디자인들로 나열되어 있어서 구매욕구를 참는데 힘을 들여야 한다. 나뿐 아니라 사람들의 발길도 와인이나 양주 진열대에 준한다. 


이것이 전통을 계승하는 방식이다. 흔히 '전통'이라 함은 원형을 그대로 보존해야 하는 의무감이 들지만 이는 제대로 전통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우리가 원형이라 여기는 것들은 실은 여러 변천을 거쳐 형성된 것이기에 완벽한 원형을 찾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전통은 사용하고 즐기고 우리 생활의 곁에 둘 때 비로소 계승되는 법이다. 그 본질과 정신과 가치만을 살린다면 시대성에 맞게끔 변용할 줄 알아야 한다.


전통주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아지길 바라며, 오늘도 전통주 한 잔에 전통문화를 향유해본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책 추천 

- 탁재형 <우리술 익스프레스>

팟캐스트에서 여행 부문 부동의 1위 프로그램을 운영 중인 일명 '탁PD'의 저서입니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분이죠. 탁PD님은 애주가로도 소문나있다고 합니다. 애주가로서 술에 대한 인문학을 풀어보는 책이랍니다. 우리는 '좋은 술'이라 하면 와인, 위스키, 사케, 빼갈 등을 떠올리는데요, 우리나라 술 역시 고품격의 술이라는 걸 모르는 분이 많습니다. 이 책은 우리 술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깨고 우리 술의 품격을 환기해주죠. 우리 술의 역사를 망라하기도 하며 주요 전통주들을 소개하는 일종의 로드무비 같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우리 술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토록 우리 술에 깊은 이야기가 숨어있는지는 전혀 몰랐습니다. 우리 술의 문제점과 앞으로의 방향성까지 제언하는 '우리 술 입문서' 같은 책입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의 <어나더 라운드>

혈중 알코올 농도 0.05%를 유지하면 사랑믄 창의적이고 활발해진다는 연구가 있다고 합니다. 극중 무기력한 장년을 보내는 고등학교 교사 친구들은 이 가설을 실험해보고자 알코올 농도 0.05%를 유지해보니 완전히 다른 생활을 살게 되죠. 그 에너지에 중독된 장년의 아저씨들은 조금씩 알코올 농도를 높여가고 그때마다 이전에는 생각도 못한 자신감과 삶의 성취를 얻어냅니다. 하지만 선을 넘어버리며 그들은 결국 실수를 해버리고 마는데요,  엄밀히 따지자면 인물들은 술 때문에 사고를 쳤다기보단 취중 상태에서 깨는 가운데 현실의 위기를 직시하게 됩니다. 과도한 취중 상태는 쾌락과 흥분을 극대치로 상기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환(幻)의 구름을 타고 현실에서 더 높이 멀어지게 할 뿐이고, 그렇다면 술에서 깨는 순간 현실이란 바닥에 추락하는 고통은 더 클 수밖에 없었죠. 이 영화는 술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는 영화는 아니다. 인생의 다음 판을 준비해야 하는, 아니 인생의 위기에 포위되어 다음 판을 준비해야만 하는 존재들에게 적당량의 불안(영화의 핸드헬드)과 적당량의 흥분(영화의 몽롱한 조명과 사운드)의 필요성을 넌지시 (마치 영화에서 자주 쓰이는 롱 쇼트 정도의 거리에서) 던져주죠. 인생을 자신 있게 살아가는데 있어서 불안과 흥분의 양이 어느 정도로 균형을 맞추어나가야 하는지를 담은 흥미로운 영화입니다.


이전 10화 서울촌놈의 국내여행 뿌수기 [화성 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