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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 Mar 11. 2023

서울촌놈의 국내여행 뿌수기 [강원도 고성 편]

석조 대지를 여행하다

















대한민국에도 동일한 명칭의 행정구역이 있어 언제나 두 번 물어보게 되는 곳들이 있다. 먼저 경기도 광주시와 광주광역시가 있고, 두 번째로 '고성군'이 있다. 대한민국에 고성군은 경남에 하나, 강원도에 하나 있다. 경남의 고성군은 남해와 붙어 있는 남단 중 하나이고, 강원도의 고성군은 북한과 붙어 있는 북단 중 한 곳으로 어느 쪽이든 끝자락에 있다는 공통점도 공유하고 있다. (강원도 고성군의 일부는 북한령이다) 물론 한자는 다르다. 경남의 고성은 '옛 고(固)'자를 쓰며 강원도의 고성은 '높을 고(高)'를 쓴다. 강원도 고성은 옛 동예인들이 살고 있었으며 고구려 영토가 되고는 고구려가 이곳을 '달홀'이라 불렀다. 아직까지도 고성 내에선 '달홀'이란 상호명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고구려 지명에서 자주 등장하는 '홀'이란 행정구역단위의 일종이고 '달'이란 '높다'는 고구려어였다.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하고 경덕왕 대에 전국의 지명들을 순우리말에서 한역화하는 과정에서 '높은 곳'이라는 뜻의 '달홀'을 '고성'으로 변경하면서 오늘날의 고성이 유래했다. 


고성은 무엇이 높아서 고구려인들을 고성을 '높은 곳'이라고 불렀을까? 아마 금강산과 설악산을 모두 끼고 있어서 붙어진 이름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분단된 한반도의 현실에서 고성은 위도상 높은 곳에 있기도 하다. 이처럼 고성은 품고 있는 사연과 이색경관들이 많은 곳이다. 한국은 어딜가나 비슷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렇다면 고성을 한 번 방문해보라고 권유하곤 한다. 물론 고성도 한국적인 분위기를 지니지만 동시에 고유의 정서와 아무데서나 볼 수 없는 멋진 명승지들이 가득하다.




원초적인 바위의 아름다움, 바우지움조각미술관

강원도 고성은 여행하기 편한 것이 대부분 해안가에 인접해 있기 덕분에 그저 해안가 따라 드라이브하면서 다소 쉬운 동선으로 이동할 수 있다. 그저 북쪽에서 내려올 것인지 남쪽에서 올라갈 것인지만 결정하면 되는데 대개는 남쪽에서부터 올라가는 편이다. 강원도 고성의 최남단에는 바우지움조각미술관이 있다. 근래에 바우지움조각미술관이 강원도 고성의 핫한 전시관으로 부상하고 있다. 바우지움미술관은 2015년 조각가 김명숙 작가가 세운 사립미술관으로 홈페이지에는 "아름다운 자연과 건축, 예술이 어우러진 바우지움에서 마음이 정화되는 특별한 경험을 하시기 바랍니다."라고 소개되어 있다. 바우지움조각미술관은 총 3개의 전시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전시관은 미술관의 설립자이자 관장이신 김명숙 조각가의 작품을 전시한 '김명숙조형관'이다. 그렇게 크지는 않은 조각품들인데 마치 여성의 신체를 연상시키는 초현실적이고 표현주의적인 조형성이 돋보인다. 작품의 양감을 물씬 뽐내면서도 유려한 곡선의 아름다움으로 우아함을 잃지 않는다. 강력한 동적인 자세에서는 운동감과 생동감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두 번째 전시관은 근현대조각관으로 김영중, 김경승, 박병욱, 김혜원, 조성묵, 이운식, 문신 등 현대한국조각계의 터전을 일구신 분들의 작품들을 관람할 수 있다. 우호 김영중, 문신, 권진규, 김종영, 김정숙, 김복진 등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주로 일본에서 유학한 뒤 귀국하여 해방 후 한국의 조각미술계를 탄생시킨 한국조각미술의 1세대로 손꼽힌다. 이들은 거장이 되어 서울대 혹은 홍대에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해 한국조각미술의 뿌리를 내리게 해주었다.



바우지움조각미술관은 작품 전시도 전시지만 미술관 건축과 부지에도 눈이 갈 수밖에 없다. 미물관 바깥은 야외전시장과도 같다. 미술관은 김인철 건축가의 작품으로 강원도 고성의 땅과 최대한 잘 어울릴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고 한다. 미술관이 있는 동네 이름은 원암리. '바위가 으뜸인 마을' 정도로 해석해볼 수 있는데 이곳엔 다양한 형태의 바위들이 깔려 있다. 바우지움의 '바우' 역시 '바위'의 강원도 사투리라고 한다. 하얗고 회백색의 돌들이 듬성듬성 아무렇게나 널부려져 있음이 자연이 선사한 추상설치예술 같고 그 미학의 원리는 경복궁과 창덕궁의 정전 앞에 깔린 박석과 동일하다. 땅과 바위의 원초성이 극대화된 곳으로 거칠고 푸석한 자연의 살갗을 보는 느낌이 드는 보기 드문 정원공간이다. 



출구로 나가면 세 번째 전시공간이 기획전시실 아트스페이스가 있고 그 옆으로 카페와 기념품 샵도 있다. 아트스페이스는 비교적 젊은 작가들의 전시를 구경하는 곳이라 더 감각적인 작품을 구경할 수도 있고 기념품 구경의 재미도 빠뜨릴 수 없다. 매번 비슷한 형태의 미술관이나 전시에 피로를 느낀다면 고성의 바우지움조각미술관은 한국에서 아주 독보적이고 매력에 강한 인상을 받고 오기를 적극 추천한다.




소노펠리체 델피노 더엠브로시아와 동루골막국수


바우지움미술조각관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최근 SNS에서 가장 핫한 카페 중 한 곳인 더엠브로시아를 찾았다. 더엠브로시아는 설악산 기슭의 리조트 '소노펠리체 델피노'에서 운영하는 카페로 East Tower의 10층에 위치하고 있으며 굳이 숙박을 하지 않더라도 편하게 방문이 가능하다. 하지만 워낙에 큰 인기 때문에 자리 선점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사람이 붐비다보니 그만큼 사람이 빨리 빠지기도 하지만 인기 많은 자리는 처음부터 노리지 않는 편이 낫다. 다행히 창가 쪽 바에 자리가 나서 무사히 앉을 수는 있었다. 더엠브로시아가 유명해진 건 설악산의 울산바위를 가장 가까이서 입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이른바 '설악산뷰'로 이름을 알렸기 때문이다. 때마침 하늘은 청명하고 설악산이 눈으로 치장을 해서 더욱 맑은 설악산의 울산바위를 감상할 수 있었다. 사진으로 몇 번이고 봤다지만 실물로 맞닥뜨리는 감동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역시 대한민국은 참 잘생긴 절벽들이 많다. 주문한 커피는 더엠브로시아의 시그니처 메뉴인 '솔방울 라떼'였다. 솔방울 모양으로 얼린 에스프레소와 따뜻한 우유를 별도로 나와 내가 직접 솔방울 에스프레소에 우유를 부어 먹는다. 따뜻한 음료도 아니고 차가운 음료도 아니고 애매하겠거니 싶었지만 에스프레소가 서서히 녹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밍밍해지지 않고 더 커피맛이 사는 독특하고 참신한 커피였다. SNS에서 이름을 알린 카페들은 외화내빈인 경우도 많은데 이곳은 근래 들어 방문한 카페 중 가장 좋았고, 그 덕은 역시 저 잘생긴 울산바위 때문이었다.



카페에서 나오니 점심시간이 지난 시간이 밥부터 먹고자 '동루골막국수'로 향했다. 강원도 고성에서부터 속초, 양양에 이르기까지 미식가들 사이에서 자주 오르내리는 막국수집들이 즐비해있다. 동루골막국수 또한 그 중 한 곳이다. 고성-속초-양양에 이르기까지 막국수가 유명한 건 맛도 맛이지만 먹는 방식이 매력적인 이유도 있다. 아무래도 높은 태백산맥이 가르는 서쪽과 동쪽은 여러 면에서 문화가 다르다. 막국수라는 음식 자체는 강원도 산골에서 탄생했지만 동해를 접하는 바다도시들에서는 특이하게도 막국수에 동치미를 넣어먹는다. 함경도 쪽 사람들이 막국수에 동치미를 넣어먹었던 문화가 강원도에 정착한 실향민들에 의해 정착되었다는 설이 있다. 막국수 동치미는 처음 먹어봤는데 일반 육수보다는 동치미로 국물을 내는 막국수가 훨씬 청량감과 달콤함이 살아 있었다. 동해안 지역의 막국수집은 그러니까 막국수는 물론이고 동치미도 잘 담가야 한다. 사장님 추천에 따라 막국수에 들기름을 왕창 넣어보니 면발의 탄력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바다를 접하고 있다보니 명태식해를 고명으로 올리기도 하며 동치미막국수를 잘하는 식당은 수육도 무조건 잘 하는 법이니 여러 일행과 함께 여행한다면 수육도 추천해본다. 강원도 고성의 유명 막국수집으로는 동루골막국수 외에도 백촌막국수, 산북막국수 등이 있다. 



관동팔경 - 청간정

조선시대 어떤 민족보다 풍류와 유람을 즐겼던 우리 선조들은 관동지역, 즉 강원도를 여행하면서 최고의 명승지 8곳을 선정해 관동팔경으로 꼽았다. 송강 정철도 한국의 대표적인 가사작품인 <관동별곡>에서도 관동팔경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8군데 중 두 군데는 북한에 있어 발길을 향할 수 없지만 2가지보다는 많으 6군데가 대한민국 영토에 있으니 참으로 다행이라 해야겠다. 남은 6군데 가운데 한 가지는 양양 편에서 소개한 낙산사이다. 그리고 강원도 고성에는 청간정이 있다. '푸른 산골의 물'이란 뜻의 청간정은 정확히 언제 창건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조선 후기 1631년(인조 5년) 간성현감이었던 이식은 '본래 청간역의 정자로 만경대 남쪽 2리에 있었다. 간수에 임해 있는 까닭으로 그렇게 불렀다. 만경루가 허물어지자 역의 정자를 대 곁으로 옮겨옴에 드디어 승지가 되었다. 정자가 바닷물과 떨어진 것이 겨우 5~6보이나 만경대 모퉁이를 삼고 물속의 험준한 섬이 들러 막아 먼저 물결과 싸우는 까닭에 예부터 수해를 입지 않는다'며 본디 이 지역에 '청간역'이라는 역참이 있었고 그 인근에 있던 정자로 보인다. 조선 중기 명종 15년에 최천이 중수했다는 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이어 이식은 '정자 위에 앉으면 물과 바위가 서로 부딪혀 산이 무너지고 눈을 뿜어내는 듯한 형상이나 갈매기 천백 마리가 아래위로 떠돌아다니는 것을 마음껏 볼 수 있다. 그 사이에서 일출과 월출을 바라보는 것이 더욱 좋은데, 밤에 헌방에 누워 바람과 파도소리를 들으면 창문을 뒤흔들어 마치 배속에서 물 잠자는 듯하다.'고 평했다. 이후 현종 대에 몇 차례 중수했으나 철종 대에 화재로 전소되었고 일제강점기였던 1928년 복원했다. 해방 후 특히 청간정을 좋아했던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보수 지시를 내렸고 최규하 대통령 역시 청간정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드러냈다. 청간정의 편액은 우암 송시열의 친필이라 하며, 내부에 있는 행서체의 편액은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그리고 내부 편액에는 최규하 대통령 친필의 시가 걸려 있다.



관동팔경이라는 명성답게 많은 문인들이 청간정을 찾아 저마다의 소회를 시로 남겼다. 명승지를 찾을 때마다 나중에 선조문인들의 시를 찾아보곤 하는데 예술가들의 감수성으로 빚은 작품들이 표현력이 떨어지는 내 마음을 너무나도 잘 대변해주기 덕분이다.


청간정 옥처럼 맑은 소리

소리마다 객의 마음 씻어주고

가을 하늘 저무는 줄도 몰랐더니

산에 든 달이 단풍 숲을 비추네

-휴정 <청간정>


금강산 담무갈 보살이 그대라면

대궐의 뛰어난 신하는 나 아니겠나?

그대와의 만남이 한참 늦었으나

서로의 처지 잊고 절로 친해졌네.

세상에 매인 몸이니 잠깐 떨어졌다가

늙은 뒤에 호젓하게 다시 만나세.

높다란 정자에서 낮잠을 깨고 보니

일만 봉우리 하늘 끝에 푸르구나.

-허균 <청간정에서 낮잠을 자다>


하늘의 조화로 바다엔 밀물과 썰물이 없는데

방주같은 정자 하나 물가에 서있네

붉은 해 솟기 전에 아침 노을 창을 비추고

푸른 물결 일렁임에 옷자락이 나부끼네

어린아이 탄 배 순풍에 간다 해도

서왕모의 복숭아 익는 시기 아직이여라

선인의 자취 접하지 못하는 아쉬움에

난간에 기대서 백구 나르는 하늘을 보네

-이식 <청간정>


설악과 동해가 상조하는 고루에 오르니

과연 이곳이 관동의 빼어난 승경이로구나

-최규하



청간정의 누각과 그곳에서 보이는 동해바다의 경치도 다 좋지만 또 하나 애착이 가는 것이 청간정을 떠받치는 화강암 돌기둥이다. 경복궁의 경회루, 진주의 촉석루, 남원의 광한루 등 화강암 돌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우리나라의 정자건축들이 더러 있다. 그중에서 고성의 청간정의 돌기둥은 우람하진 않지만 어딘가 아주 독특하다. 돌기둥인 건 맞지만 팔각형인 듯하기도 하고 원형인 듯하기도 하다. 이는 기술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최대한 자연 그대로의 돌모습을 살리기 위함이다. 정제되지 않고 정형화되지 않은 인간의 손이 최대한 덜 탄 자연의 아름다움을 배우고 느낄 수 있는 속기 하나 없는 돌기둥들이다. 그저 보고만 있어도 마음에 안정감을 주니 청간정의 돌기둥은 누각뿐 아니라 감상자의 마음까지 받쳐주는 기특한 녀석들이다.



청간정에서 좌측에 접하고 있는 해변이 아야진해수욕장이다. 동해의 해수욕장이라 하면 비단결 같이 고은 모래들이 펼쳐진 모래해수욕장을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아야진해수욕장은 아주 독특한 비주얼에 많은 관광개들을 끌어모은다. 아야진해수욕장은 모래사장보다 갯바위들이 더 돋보인다. 세상에 해수욕장에서도 바위가 메인이라니! 울멍진 바위 사이사이에 푸른 이끼들이 껴있고 바닷물이 바위 틈의 폭에 따라 여울거린다. 아야진이란 어감조차 정겨워 순우리말인 줄 알았는데 한자어였다. 인근의 산 모양이 한자 '야(也)'를 닮았다고 하여 이 글자에 '우리'를 뜻하는 '아(我)'를 붙여 '아야'라는 이름이 탄생했다고 한다. 'ㅇ'의 발음이 주는 어감과 'ㅏ', 'ㅑ'의 양성모음이 주는 어감이 서로 묘하게 잘 어울리고 입에 달라붙는다.




북방 한옥마을의 왕곡마을

영화 <동주>의 촬영지로 이름을 알리 강원도 고성의 왕곡마을은 강원도를 대표하는 북방민속마을이다. 왕곡마을은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의 고향으로 나오는데 윤동주의 고향은 간도의 용정이란 곳이다. 실제로 간도로 가서 촬영할 수가 없어서 왕곡마을로 대체하였는데 왕곡마을에서 촬영한 이유는 왕곡마을은 우리나라의 민속마을들 가운데 유일한 북방식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한옥은 지역별로 상이한 형태를 띤다. 무더위를 피해야 하는 남부지방에서는 통풍이 되도록 'ㅡ'자형 구조이고, 중부지방에서는 'ㄱ'자형 혹은 'ㄴ'자형 구조, 추위를 막아야 하는 북방에서는 동선을 최소화하고 열을 모으기 위해 모든 방들이 붙어 있는 겹집형 구조로 되어 있다. 외양간마저도 집 내부에 있으며 창문도 작은 것이 특징이다. 이는 함경도 또한 마찬가지라 함경도와 강원도를 통틀어 '관북형 한옥구조'라고도 한다.


더불어 왕곡마을을 포함한 북방식 한옥 구조에서는 대청마루와 툇마루가 없다. 마루가 있으면 바람이 쉽게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엌이 한쪽으로 치우친 타지역의 구조와 달리 북방식 한옥에서는 부엌이 한가운데에 있다. 부엌에서는 음식 조리 등의 이유로 불을 때는데 이 불로 온돌까지 지피는데 부엌이 가운데에 있어야 열이 골고루 퍼질 수 있다. 심지어 방과 부엌 사이 벽도 없는데, 북방식 한옥의 부엌에는 '정주간'이라고 부엌과 붙어있는 방을 말한다. 집에서 가장 먼저 예열되는 곳이기에 주로 정주간이 마루 역할을 대신한다. 겨울철에 왕곡마을을 둘러보면 집집마다 뗄감들을 가득 쌓아놓은 풍경도 쉽게 볼 수 있다. 가끔 'ㄱ'자형처럼 돌출된 부분이 있는데 이는 태양열을 많이 받고 바닷바람을 막기 위함이라고 한다.



왕곡마을은 양근 함씨와 강릉 최씨의 집성촌으로 시작하였으며 조선 초 관직등용을 거부한 채 고려에 대한 충정을 보였던 두문 72현 중 함부열의 손자 함영근이 처음으로 일군 마을이 왕곡마을이었다. 양근 함씨가 먼저 정착하고 뒤이어 강릉 최씨가 들어왔기에 양근 함씨 집들이 더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왕곡마을에 남아있는 집은 139채이며 이중 49채가 주거시설이다. 기와집은 44동, 초가집은 98동이다. 집집마다 검박한 작은 마당이 있고 그 사이사이로 민속마을 특유의 수수하고 아늑한 길들이 나 있어 편안한 마음으로 산책하기 좋은 마을이다.



왕곡마을에서 더 올라간 대진항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 대진항은 동해안 최북단에 있는 마지막 항구다. 대진항은 고성의 도루묵 이름을 널리 알린 곳이기도 하다. 겨울철 별미로 손꼽히는 도루묵은 구이로 해먹어도 찌개로 끓여먹어도 풍미가 일품이다. 하루 여정의 노곤함을 끝내는 음식으로 도루묵찌개만한 것이 없으니 고성에 놀러왔으면 도루묵을 빠뜨리지 말자.



화진포의 김일성과 이승만

최근 아주 다양한 관광지들이 부상하면서 과거의 대표적인 관광지들이 그 명성을 잃어가는 경우가 더러 있다. 강원도 고성의 화진포가 그 중 하나다. 지금도 화진포를 찾는 사람들이 있지만 옛 화진포의 명성에 대해선 익히 들었다. 화진포의 화진호는 동해안을 대표하는 대형 석호 중 하나이다. 전설에 따르면 원래 화진포에는 호수가 없고 이화진이라는 어느 한 갑부의 저택이 있었다고 한다. 어느날 한 스님이 저택에 들러 시주를 부탁했지만 이화진은 시주 대신 똥물을 퍼부었단다. 마음에 걸렸던 이 집 안주인이 남편 모르게 쌀을 몇 움큼 주어 돌려보내자 스님은 나가면서 이곳은 위험하니 자신을 따라오라고 하는 게 아닌가. 영문도 모른 채 안주인은 스님을 따라가다가 고개를 돌려보니 저택이 있어야 할 자리에 큰 호수가 생겨버렸다. 살았다는 안도감보다는 절망감에 사무친 안주인은 죽고 마을의 서낭신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호수를 이화진의 이름에서 따와 '화진호'라고 불렀고 인근 동네를 화진포라고 불렀던 것이다. 화진호는 사계절 내내 계절마다의 뛰어난 경관을 자랑한다고 하지만 겨울철의 눈 덮힌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마침 내가 방문했을 때 눈이 덮혀 있어 흡사 설원인 줄 착각할 정도였다. 거기다가 겨울철엔 천연기념물로 조성된 백조도 드나든다니 생태계에 이바지하는 역할도 한다. 조선 말 금강산을 유람가던 김삿갓이 이곳에 머무르며 화진포의 매력에 푹 빠져 화진포의 아름다움을 8가지로 정리해 '화진팔경'을 노래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여기 화진포의 매력에 푹 빠진 두 사람이 또 있으니 바로 김일성과 이승만이다. 대한민국 영토인 화진포에 어떻게 김일성이 자주 놀러왔는지 의아해할 수도 있다. 강원도 고성은 위도가 38도선 이북이라 미국과 소련이 그은 삼팔선 너머에 있는 북한 땅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휴전선을 새로 그을 때 대한민국 영토로 들어왔다. 강원도 고성이 북한 땅이었을 땐 김일성이 화진포를 자주 찾았고 화진호 한 켠의 언덕 위에 별장을 만들 정도였다. 현재도 김일성 별장이 남아있어 관람도 가능하다. 김일성별장은 1938년 독일인 건축가 베버가 설계한 2층 벽돌건축으로 마치 유럽의 성과 비슷해 '화진포의 성'이라고도 불렸다. 이 집은 선교사 셔우드 홀 부부의 집이었는데 해방 후 부부가 귀국하고는 주인없는 이 집을 김일성이 사들였다. 1948년~1950년 그러니까 해방되고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김일성은 가족들과 언제 하계휴양지로 화진포를 방문해 이 별장에 머물렀다고 한다. 특히 1948년 찍은 김일성의 단체가족사진이 남아 있어 김일성 별장에 걸려 있는데 당시 6살의 나이였던 김정일까지 있다. 고성이 휴전선 이남에 속하면서 김일성은 다시는 별장을 찾을 수 없었다. 별장은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컸는데 1964년 육군이 인수해 재건축한 뒤로는 군사시설이었다가 1995년 보수하였고 현재는 누구나 방문할 수 있도록 개방되었다. 3층 전망대까지 올라가면 탁트인 화진포해수욕장의 시원스러움을 감상할 수 있다.


 

별볼일 없던 김일성이 북한의 독재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야비하기 그지없었다. 일제강점기 말에서 해방 직후 공산주의 독립운동 계열에는 크게 5가지 계파들이 있었다. 먼저 러시아에서 직접 유학도 하고 정치활동도 하는 소련파이다. 소련파는 공산주의의 최고사령인 소련의 직접적인 지시를 받는 계파라 본인들이 정통이라는 자부심이 굉장히 컸다. 두 번째는 중국에서 활동했던 연안파로 중국 관내에서는 김구의 임시정부 우익 측과 공산주의 좌익 측이 양방면에서 독립군을 조직해 일본과 싸우는 주축이었다. 연안파들은 중국 내에서 중국공산당과 연합작전을 펼치며 독립전쟁을 하던 중국공산당과 인연을 맺고 있는 계열이었다. 그 다음은 소련도, 중국도 어디에도 영향을 받지 않은 국내에서 직접 조직한 굳이 따지면 ‘국내파’라고 부를 수 있는 계열이었다.국내파의 당수는 박헌영. 박헌영은 이미 일제강점기에 ‘조선공산당’을 조직해 국내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 당대 공산주의 계파 중 가장 세력이 크고 영향력도 막강한 공산주의 단체였다. 소련파, 연안파, 국내파 3가지 계열이 제일 핵심이 되는 공산주의의 계파였다. 남은 두 계파는 세력이 너무 미미해서 껴주기 곤란할 정도인데, 하나는 한반도 북부 특히 함경도에서 활동하던 크진 않은 ‘갑산파’라고 공산주의 조직과 만주를 근거지로 하는 ‘만주파’가 있었다. 만주파는 만주‘파’라고 하기도 민망한 것이 조직이라기보다는 그저 만주에서 중국군 소속으로 일본군과 싸우는 일개 개인들에 불과했다. 김일성은 ‘만주파’의 한 사람으로 쉽게 말하자면 당대 공산주의 계열에서 가장 존재감이 미미했다. 


김일성은 운좋게 만주에서 연해주로 활동지를 옮겼을 때 소련군과 함께 일본군과 싸우며 소련군 눈에 들었고 소련군 장교가 되었다. 1945년 일본의 패망 직전에 김일성은 소련군 장교 자격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위도 38도까지 내려왔다. 한국이 독립하면 당연하게도 스탈린은 한반도를 공산화시킬 생각이었고, 그 일을 맡아줄 한국인 공산주의자가 필요했다. 능력으로 보나 평판으로 보나 세력권으로 보나 국내파의 박헌영이 유일무이했으나 스탈린의 선택은 당대 좌우익 독립운동가 거물들은 들어보지도 못한 웬 김일성이란 소련의 일개 장교였다. 박헌영은 너무 유능한 나머지 박헌영 같은 사람이 한국 공산주의의 전체 리더가 되면 언젠간 소련의 영향력을 벗어나려고 할 것이고, 주체적인 판단 하에 스탈린의 지시를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반면 김일성은 소련의 충실한 체스판 말로 쓰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우선 김일성은 한반도 북부의 ‘갑산파’를 흡수했다. 해방되고 2개월 후였던 1945년 10월 10일 김일성은 박헌영한테 한반도 북쪽엔 이렇다할 조직이 없으니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비록 김일성이 소련의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한반도 내 박헌영의 입김을 무시할 수가 없어서 일단 김일성이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지부 같은 개념으로 박헌영보다 아래로 들어간다는 모양으로 시작했다. 김일성은 토지개혁이란 좋은 명분으로 지주와 자산가, 우익계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자의적이고 잔인한 숙청을 자행했다. 1946년에는 김일성은 아예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으로부터 독립하며 가장 큰 3대 세력 중 하나였던 중국연안파를 흡수했고, 김일성이 소련의 지지를 받으니 당연하게도 3대 세력 중 소련파 역시 김일성에게 협조하면서 김일성은 지금의 ‘조선로동당’을 만들어 삽시간에 엄청난 세력을 키웠다. 김일성과는 다른 공산주의 노선을 걷겠다는 박헌영도 한반도 남부에서 ‘남조선노동당’, 이른바 ‘남로당’으로 이름을 개칭합니다. 박헌영은 한반도 남쪽이 활동지였기 때문에 이승만, 김구, 김규식, 안재홍 등 우익의 거물급들과 연합하려고 했으나 입장 차를 좁히지 못했고 남쪽에선 공산주의가 힘들다고 판단한 박헌영은 북쪽으로 넘어가 김일성과 합류했다. 이렇게 김일성의 조선로동당은 5가지 세력을 모두 아우르는 유일무이의 공산당이 되었고 1948년 9월 9일 북한 정부를 수립했다. 하지만 여전히 김일성 입장에서 박헌영의 존재감이 너무 부담스러웠고, 박헌영조차도 자기 근거지가 북쪽이 아니어서 시집살이 하는 기분이었다. 김일성은 박헌영을 제치고자 그리고 박헌영은 김일성을 제치고자 적화통일을, 즉 전쟁을 준비했다. 두 사람의 동상이몽 속에서 터진 전쟁이 바로 6.25 한국전쟁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계획과는 다르게 전쟁은 장기화되었다. 1953년 전쟁이 끝날 무렵 선수를 친 건 김일성이었다. 김일성은 박헌영이 미군의 스파이였다는 누명을 씌워 체포했고 증거조작과 억지재판을 통해 1955년 박헌영을 처형시켰다. 더불어 박헌영파였던 남로당 간부들도 숙청되었다. 소련파의 굉장히 큰 거물이었던 허가이가 박헌영은 건드리지 말라고 김일성에게 말하자마자 허가이는 어느날 알 수 없는 사인으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으며, 독립군 지휘장교 출신으로 북한 군부의 핵심간부였던 중국 연안파의 김무정은 인천상륙작전의 패전의 책임을 물어 김일성에게 실각당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김무정은 전쟁 도중 요절해서 억울하게 처형당하진 않았지만 김무정 사망 이후 중국 연안파 출신의 군부들도 대거 숙청당했다.


그런데 전후 김일성의 입지가 흔들리는데 김일성을 키워준 스탈린도 일찌감치 죽었고 소련의 새로운 서기장이 된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었으며 그런 스탈린이 키운 김일성도 탐탁치않아 했다. 흐루시초프는 북한 내 소련파 일부와 중국 연안파 일부를 꼬득여 김일성을 축출하고 집단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1956년 8월 ‘종파주의자’들이라고 불리는 소련파와 연안파는 당 중앙회의 때 김일성의 1인독재체제를 비난하며 막으려 했으나 이미 당 요직 곳곳엔 김일성파였고 되려 역공을 맞아 대부분의 소련파와 연안파는 중국이나 소련으로 망명을 갔다. 이 정치갈등을 8월 종파사건이라고 한다. 중국과 소련이 압력을 넣어 김일성은 이들을 사면했으나 이내 대대적인 숙청을 진행했고 수 년 간에 걸쳐 최창익, 윤공흠, 박창옥 등 그나마 남아있던 소련파와 연안파 중간급 간부들도 사형되거나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되거나 탄핵당했다. 숙청작업은 60년대까지 계속 이어지며 심지어 한때 세력이 없던 김일성에게 세력이 되어주었던 갑산파 출신들도 모조리 사라졌다. 숙청을 마친 김일성은 1972년 ‘주체사상’이라는 종교나 다름없는 스스로에 대한 신격화 사상을 만들어냈다. 


김일성별장에서 차를 타고 아주 조금만 더 올라가면 이번엔 이승만의 별장이 있다. 김일성의 별장이 있던 자리에 이승만도 바로 별장을 두는 것을 보면 화진포의 풍광이 어지간히 유명했나보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1954년 별장을 만들어 이승만 대통령은 약 6년간 재임기에 가족들과 화진포의 별장을 찾았다고 한다. 현재에는 집무실, 응접실 등을 재현해두고 있으며 이승만의 소지품과 생애를 간략하게 살필 수 있는 전시공간도 마련해두었다. 


이승만은 고종 12년이었던 1875년 황해도 평산군에서 태어났지만 2~3살 때 한양으로 이사해 남대문 근처에서 자랐다.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16대손이라고 한다. 이승만의 집안은 일찌감치 오랫동안 벼슬을 하지 않았던 잔반(몰락 양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의 부친 이경선 역시 평생 벼슬을 하지 않은 그저 한학자였다. 이승만도 한학을 공부하며 조선시대의 마지막 과거시험에 응시했는데 낙방했다. 참고로 낙방 동기가 백범 김구였다. 이승만은 집안 분위기나 학풍과는 다르게 개화사상에 경도되어 구한말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다가 투옥된 적도 있었다. 5년간의 감옥살이를 하며 이승만은 모진 고문도 당했다고 한다. 감옥에서 이승만은 기독교에 빠졌고 엄청난 독서를 하며 선교사들을 통해 받은 책들로 감옥 내 도서관을 만들었는데 무려 250권의 책들을 모았다. 출소 후 여전히 언론집필활동을 이어가던 중 미국 워싱턴 DC로 유학을 떠났다.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수업을 받으면서 이승만은 워싱턴포스트 등의 신문사 그리고 상원의원 등의 정치인들을 만나며 미국이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나서줄 것을 호소했다. 심지어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까지 알현했다. 이후 이승만은 하버드대학교 석사, 프린스턴대학교 박사 학위를 받으며 한국 최초의 박사가 되었고 이런 학력 으로 이승만은 이후 '이승만 박사'라고 불렸던 것이다. 동시에 1909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 박용만 등과 함께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하는데 앞장 섰다.

 

1910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잠깐 식민지조선에 귀국한 후 1911년 하와이로 다시 건너갔다.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를 이끌던 이승만은 이 내부에서도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의 노선과 외교 노선 사이에 갈등이 빚었다고 하는데 이승만은 외교 노선을 주장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임시정부가 곳곳에서 창설됐다. 이승만은 그 당시 보유하기 힘든 스펙과 학력 덕에 상해임시정부의 국무총리 겸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로 추대되었고 임시정부 통합운동에 따라 이승만은 상해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승만은 해외 여러 곳의 외교노선을 굳건히 주장하며 미국 워싱턴 DC에는 일종의 임시정부 미국지부라고 할 수 있는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서양의 국가들과 외교하며 국제여론을 조성하는 것을 독립의 수단으로 삼은 모양인데 이승만이 그만 큰 우를 범해버리고 만다. 1923년 이승만이 국제연맹에 임시정부와 식민지조선에 대해 위임통치를 부탁한다며 청원을 해버린 것이다. 그것도 협의없이 독단적으로. 이는 임시정부 사람들의 엄청난 반발을 샀다.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사건은 외교를 하겠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조선이 어떻게 무너졌는데, 얼마나 열강들에게 시달리닥가 식민지로 전락했는데, 이 와중에 또 다시 열강들에게 주권을 고스란히 넘겨주겠다는 행위는 용납될 수가 없었다. 1925년 이승만은 대통령에서 탄핵되었다. 이승만은 하와이로 돌아와 미 정계인사들과 교류하며 나름의 독립운동을 펼쳤다. 1933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국제연맹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이승만이 총회를 방문해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며 한국의 독립 문제를 회의 의제로 채택해달라 호소했다. 이때 이승만이 스위스의 어느 한 호텔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던 중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를 우연히 만났다. 오스트리아 출신이지만 프란체스카는 영어통역사 일을 할 정도로 영어에 능통했고 두 사람은 이때의 인연으로 1년 후 부부의 연을 맺는다. 2차세계대전이 발발할 무렵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워싱턴 DC로 넘어갔으며 이때는 이승만에 대한 임시정부의 원한이 어느덧 사그라든 시점이었기에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주미외교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승만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을 포함해 미 정계인사들에게 끊임없이 반일감정을 고취시키고 한국의 독립문제를 거론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한국의 임시정부도 2차세계대전에 참전하라며 이승만은 임시정부와 미 전략첩보국 OSS 간의 합동훈련 및 합동작전까지 성사시켰다. 이승만은 미국을 등지고 있었고 미국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해방 일주일 전 귀국할 수 있었다. 그 덕에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까지 취임할 수 있었지만 미국에 대한 이승만의 지나친 의지가 화를 일으키기도 했다.

대한민국대통령취임식



6.25전쟁을 기록하는 DMZ박물관

강원도 고성은 육지 기준 대한민국에서 가장 북단까지 올라갈 수 있는 곳이다. 북한을 지척에 둔 곳이다.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에서 간단한 절차의 신청만 하면 민간인통제구역까지 올라가 전쟁과 분단의 간접경험을 할 수 있는 투어를 할 수 있다. (현장신청도 가능하다) 민간인통제구역으로 올라가면 가장 먼저 DMZ박물관을 지나친다. DMZ박물관은 세계에서 유일하다는 남북한 사이 비무장지대(Demilitarized Zone)에서 역사의 아픔을 기리고자 지난 2009년 개관하였다. 비무장지대란 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각각 2km에 해당하는 북방한계선과 남방한계선 사이의 구간을 의미하며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남방한계선 이남의 5~15km까지는 민간인통제구역이다. 원칙상 북한은 북방한계선을, 남한은 남방한계선을 넘을 순 없지만 북한군이 조금씩 북방한계선을 넘어오면서 대한민국 국군도 남방한계선 너머까지 경계를 서고 있다. 비무장지대는 종전 후 누구도 접근이 불가하기 때문에 사람의 발길이 닿질 않아 야생동식물과 처리되지 못한 지뢰들만 가득한 공터다. 


DMZ박물관에 주차를 하면 언덕 넘어 대북방송용 확성기가 있어 내가 있는 이곳이 안전한 지역보다 위험한 지역에 더 가까이에 있음을 실감하게 해준다. DMZ박물관은 1950~1953년 세계3차대전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은 6.25한국전쟁의 배경부터 결말까지를 전시하고 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규모이며 대략 40분~1시간 정도 소요된다. 지루할 수 있는 활자로만 전쟁을 읽다보면 실감이 덜한데 이처럼 전시 형태의 학습은 분단과 전쟁의 아픔의 현장감을 극대화해준다. 여러 전시품 가운데 정전협정서를 보면 마음이 묘하다. 일상생활을 살다보면 무뎌지는 현실. 한국전쟁은 아직 종전되지 않았다. 그저 '정전'인 상태일 뿐이다. 그렇다면 한국전쟁은 1953년 어떻게 끝맺었던 것일까?


1951년 6월 맥아더 후임으로 새롭게 사령관으로 부임한 매튜 리지웨이 장군은 공산군 진영에 휴전을 제의했고 7월 소련은 휴전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소련의 스탈린이 시간을 질질 끌었다. 한국 문제가 해결되면 미국이 신경과 관심을 유럽 진영에 쏟을까봐 스탈린이 경계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전쟁을 강행하기에도 무리가 있으니 휴전을 하자고 하면서 공식 휴전은 하지 않도록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은 상태로 계속 시간을 끌고 가는 게 소련 스탈린의 스탠스였다. 소련이 걸고 넘어진 안건이 포로 송환 문제였다. 양측의 포로들을 풀어줄 때 무조건 고국으로 보내줄 것이냐, 아니면 본인이 원하는 국가로 갈 수 있도록 선택권을 줄 것이냐를 두고 의견이 대립했다. 소련, 중국, 북한은 무조건 고국을 송환한다는 ‘일괄 송환’을, UN은 이른바 ‘자유 송환’이라고 포로들에게 선택권을 주려고 했다. 

     

이 와중에 이승만은 휴전 자체를 반대핸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미국 정부는 이승만을 최대한 설득하려고 했으나 이승만의 고집은 완고했다. 미국은 한편으론 이승만을 설득하고 또 한편으로 휴전을 하기 위해 소련과 회담을 이어나가며 1952년 한때 잠깐 UN군은 공식적으로 공산진영 측의 ‘일괄 포로 송환’을 받아드리기로 합니다. 소식이 전해지자 남한 내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폭동이 발발했다. 거제 포로수용소에 무려 17만 명의 포로들이 있었는데, 이중 반공사상을 가진 포로들이 상당히 많았다. 북한군이면서 왜 반공사상을 가진 포로들이 있는지 의아해할 수도 있겠다. 6.25전쟁은 이념전쟁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사상적으론 북한과 공산주의에 격렬하게 반대하지만 북한이 서울을 포함해 남한 대부분을 점령했을 때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북한인민군에 참여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혹은 공산주의 사상을 반대하지만 고향이나 살던 곳이 북한이라는 이유만으로 강제 차출된 병력도 있었다. 거제 포로수용소의 반공포로들은 북한으로 가기를 거부하며 반공포로들과 친공포로들끼리 시위, 집단싸움, 살인사건 등 폭동이 하루가 멀다하고 연이어 일어났다. 이승만도 워낙에 비협조적으로 나오니 1952년 미국 CIA에선 이승만을 암살하려는 계획까지 세운 적도 있었다. 


그러던 중 판도가 갑자기 바뀌는 사건이 있었으니, 의도적으로 휴전을 질질 끌던 스탈린이 1953년 3월 사망했다. 스탈린이 죽자 소련 정부는 휴전회담에 박차를 가하면서 일이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가장 핵심골자였던 포로 송환 문제도 고국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포로들은 먼저 고향으로 다 보내주고, 남은 포로들은 중립국으로 이송한 뒤 그곳에서 남한과 북한 중 희망하는 곳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합의를 보았다. 이제 휴전 서명만 남은 상태에서 어떻게든 휴전을 막으려던 이승만은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거제포로수용소에 있는 반공포로들을 UN군 모르게 석방해버렸다.  약 3만 명 정도의 반공포로가 수용소를 나갔는데, 미국 CIA는 정말로 이때 이승만을 암살하려고 했으며 백선엽 장군을 새로운 대통령으로 추대하려고 했다. 영국의 처칠 수상은 이 소식을 듣고 아침에 면도를 하다가 얼굴을 베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미국은 이승만을 죽여버리기보단 달래는 쪽을 선택했고 미국 국무부 차관이 한국으로 와서 이승만 대통령과 담판을 지었답니다. 이 담판만 무려 160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앞으로 한국에 무슨 일이 있으면 미국이 무조건 군사적으로 돕겠다는 한미상호방위조약과 경제 원조를 해주겠다는 약속을 해주며 겨우겨우 이승만을 설득했다. 이렇게 휴전협정문에 서명이 날인되면서 휴전, 즉 정전이 공식선언됐고 1953년 7월 27일 밤 10시부로 모든 전쟁이 중단되었다. 정전협정문에는 북한 측 김일성, 중공군 측 팽더화이 사령관, UN군 측 미국 육군대장 클라크 사령관의 싸인이 서명됐고 한국 측 이승만 대통령은 서명은 누락되어 있다. 서명을 하지 않았는지 하지 못했는지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DMZ박물관에는 한국전쟁 관련 여러 문서들이 전시되고 있는데 유독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실종사 통지서. 전시된 이 실종사 통지서는 금화지구전투에서 전사한 박인용 실종자의 통지서라고 한다. 아주 작은 종이쪼가리를 본 가족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통지서는 박인용 용사님의 단 한 장의 실종사 통지서인데 3년을 걸쳐 얼마나 많은 실종자 및 전사자 통지서가 가족들에게 전해졌을까. 가족과 소중한 사람의 상실감은 그 어떤 표현으로도 헤아려지지 않는다. 전쟁과 분단의 아픔이란 '역사의 치욕'이라는 교과서적인 개념이 아닌 수많은 개개인들이 겪어야만 했던 상실감의 총합이다.



저 멀리 금강산을 두고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은 백두산,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산은 한라산, 그리고 한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은 금강산이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여행을 한다는 우리의 선인들이라면 무조건적으로 금강산을 유람했다. 금강산은 계절에 따라 서로 다른 매력을 뽐낸다고 하여 계절별로 이름을 따로 불리기도 했다. 금강산과 관련한 글들만 모아도 도서관 하나는 거뜬히 만들 수 있다는 최남선의 말마따나 금강산은 단언 독보적인 한민족의 정기가 담긴 산이다. 신비스러운 분위기 덕에 영험한 이미지가 생겨서 법기보살이 기거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어 해외의 승려들도 금강산을 찾았다고 하며 한국전쟁 전까지는 무려 8만 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금강산의 이름도 불경 <화엄경>에 나오는 "해동에 보살이 사는 금강산이 있다"는 구절에서 따왔다. 이처럼 한민족에게 특별하고 종교적으로도 영험하고 아름다운 명산이건만 남북한 경계에 있는 금강산은 이제 출입이 불가한 금기의 산이 되어버렸다. 기구하고도 기구한 운명이다. 그나마 DMZ박물관을 지난 고성의 통일전망타워에서 먼 발치의 금강산 일부 모습을 눈에 담을 수는 있다. 고성의 통일전망타워에서는 남방한계선 너머 1만 2천 개의 금강산 봉우리 중에서 구선봉과 국지봉만 볼 수 있지만 두 개라도 볼 수 있는 게 어딘가. 

가장 앞에 보이는 봉우리가 구선봉, 뒷편의 실루엣이 국지봉이다


금강산의 끝자락 두 개의 봉우리, 그마저도 뒷편의 봉우리 하나는 실루엣 정도로 보일 뿐이다. 저 멀리 금강산을 두고 마음이 허허롭다. 나와는 큰 인연이 없는 산이지만 눈에 보임에도 갈 수 없다는 사실이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가지 않는 것과 가지 못하는 건 심정의 차이가 크다. 구선봉 옆에는 북한군 초소가 있고 망원경으로도 북한군 초소를 볼 수 있으니 아마 저쪽에서도 우리를 보고 있을 것이다. 남한군 초소나 북한군 초소나 시야에 들어오는 거리에서 군사적 긴장감을 갖고 대치하고 있는 이 광경이, 그리고 그동안 으르렁거리며 신경전을 벌이던 이 분단의 현실이 애잔하고 불필요하다고 느껴질 뿐이다.


백천동을 옆에 두고 만폭동으로 들어가니 은빛의 무지개처럼, 옥색 용의 꼬리처험 폭포수들이 섞이고 돌며 뿜어내는 소리가 10리까지 자자하니 멀리서 들을 땐 우레 소리 같고 가까이서 바라보니 온통 하얀 눈빛으로 가득하다. 금강대 맨 꼭대기에 선학이 새끼를 치니 봄바람에 들려오는 옥피리 소리에 첫잠을 깨었던지 흰옷, 검은 치마로 단정한 학이 공중에 솟아 뜨니 서호의 옛주인과 같은 나를 반겨 넘나들며 노는 듯하네. (중략) 아아 조물주가 야단스럽기도 야단스럽구나. 날거든 뛰지 말거나 섰거든 솟지 말거나 할 것이지, 날고 뛰고 섰고 솟은 변화무쌍한 봉우리는 연꽃을 꽂아놓은 듯, 백옥을 묶어놓은 듯하다. 아름다운 산봉우리여, 동해 바다를 박차는 듯, 북극성을 괴어놓은 듯, 그렇게도 힘찬 기상의 봉우리여! (중략) 개심대에 다시 올라 중향성을 바라보며 만 이천봉을 똑똑히 헤아려 보니 봉우리마다 맺혀 있고 끝마다 서려있는 기운이 맑거든 깨끗하지 말거나 깨끗하거든 맑지나 말거나 할 것이지 맑고 깨끗함을 함께 지닌 산봉우리의 수려함이여! 


-정철 <관동별곡>

겸재 정선 <금강전도>




나에게 고성은 하나의 석조 작품 같았다. 이처럼 바위와 잘 어울리는 곳이 또 없다. 하기사 설악산과 금강산, 동해라는 치트키를 모두 갖추고 있으니! 하지만 아름다움은 언제나 질투의 대상이 되기에 기구한 운명에 놓이기 십상이다. 원초적이고 투발하고 거친 질감의 바위로도 이처럼 늠름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는 고성이건만 운명이 질투를 해서인지 고성은 분단이 되어 있으며 지뢰로 가득한 비무장지대가 가로지르고 있는 상흔의 땅이기도 하다. 그나마 긍정적인 의미부여를 해보자면 아름다움이란 숭고하기만 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픔을 간직해본 아름다움이 여러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더 보편적인 감동을 자아낼 줄도 안다. 그렇게 고성 여행에 의미를 두고 싶다.  언젠가 금강산에 오를 수 있는 날을 고대하며.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책 추천 

- 청운 이면신의 <봉래일기>

<봉래일기>는 1894년 계룡산 동학사의 스님였던 청운 스님이 충청도에서부터 서울을 지나 금강산을 유람한 내용을 일기 형식으로 적은 기행문입니다. 3월에서부터 4월까지 거의 매일매일 일기를 작성하며 당대를 살았던 한 개인의 시선에서 서울(경성)과 인천의 근대화된 모습을 묘사하고 나아가 금강산을 유람하며 느낀 감상과 소회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화자가 스님이다보니 금강산의 사찰들을 방문하며 그곳 스님들의 도움으로 금강산의 여러 봉우리에 오르고 사찰과 봉우리에 얽힌 설화 내지 관련한 시들을 소개하고도 있습니다. 때로는 직접 시를 짓기도 하죠. 가볼 수 없는 천하제일의 명산이라는 금강산을 이렇게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해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미리 금강산을 다녀온 선배들의 기문을 읽는 것일 텐데요, 책 내용의 여정과 구글지도를 번갈아가면서 함께 여행하는 마음으로 읽으면 더 몰입할 수 있습니다. '금강산 비로봉 위에 산이 없으며, 동해 바다 너머 바다는 없다'는 표현이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묘사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금강산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는데 유람을 마친 청운 스님의 마지막 자작시 역시 기억에 남습니다. '천산과 만수의 길을 모두 답사하니/지금의 아침에 이르러 옛 동산에 돌아왔네/여러 봉우리를 분명하게 가리킬 수 있으니/구름 떠있는 저곳이 내가 돌아갈 곳이네' 금강산을 다녀오면 누구나 신선의 뽕에 취하게 되나 봅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이준익 감독의 <동주>

고성 왕곡마을에서 촬영한 시인 윤동주를 다룬 이준익 감독의 흑백영화 입니다. 예산상의 문제로 흑백으로 촬영했다고 하는데 오히려 영화의 감성을 더 시적으로 감싸줍니다. 윤동주의 시만 유명할 뿐 잘 알려지지 않은 윤동주 시인의 생애를 조명하는 영화로 영화 중간중간 윤동주 역을 연기한 강하늘 배우의 목소리로 윤동주의 시들이 읊조려집니다. 윤동주 시의 주요 테마는 '반성'과 '성찰'인데요 영화 역시 윤동주의 생애를 통해 '반성'과 '성찰'의 미학을 관객들에게 질문합니다. 더불어 박정민 배우가 일약 스타덤에 오르며 연기력을 선보이는 영화로도 유명합니다. 강하늘 배우가 연기한 윤동주와 박정민 배우가 연기한 송몽규 두 사람의 상반된 생애와 사상을 통해 방황하는 청춘의 내적인 혼란을 시대상 속에서 곡진하고 정성스럽게 비추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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