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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 Feb 15. 2023

서울촌놈의 국내여행 뿌수기 [순천 편]

한국의 정원을 여행하다


















한국의 땅과 지형은 정겹기 그지 없다. 해외의 여러 멋있는 나라들과 비교해서 그렇다기보단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반가운 익숙함이 탑재되어 있어서다. 익숙함에 익숙해지면 감흥이 줄어들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집을 비우다 집에 도착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렇게도 반가울 수가 없는 것처럼 한반도의 대지가 품은 살갗과 피부는 언제나 편안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다. 한반도가 하나의 집이라고 생각했을 때 나에게 순천은 마치 한국의 정원과도 같은 곳이다. 정원이 있는 대저택에서 머물고 한가로이 정원을 거니는 낭만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처럼 순천에선 그러한 낭만을 만끽할 수가 있다. 볼거리, 둘러다닐 곳이 참으로 많아서 순천여행을 하면 지치긴 하지만 육체적으로 지칠지언정 심적으로는 여러 잡념을 버리고 또 역설적으로 새로운 잡념들을 생각해보는, 평소의 긴장감을 완화해주는 곳이다.





적군의 시선으로, 순천왜성

순천역에 내려서 우선 가장 가까운 순천왜성을 찾았다. 7년간의 임진왜란이 벌어지던 당시 전쟁이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며 명나라 측과 일본 측이 휴전 협상을 시도하고 있을 때, 일본군은 한반도의 남해안에 집결하고 있었다. 휴전이 결렬되고 일본군은 북상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으로 보급이 완전이 중단된 일본군은 다시 남해안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이 남해안에 정박하면서 그들의 거주 목적으로 군데군데 왜성을 쌓았고 그 중 몇 개의 성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사천 편'에서 소개한 선진리성, 울산의 서생포왜성 그리고 순천의 '순천왜성'이 대표적이다. 순천왜성은 세 성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편에 속하며 일본군 제1군의 사령관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주둔하였던 곳이다. 왜성은 조선의 읍성이나 산성과는 형태만 매우 이질적이라 전후 굳이 조선 정부에서 재사용할 이유가 없어서 관리를 하지 않았다. 순천왜성, 선진리성, 서생포왜성 모두 보존이 잘 되어 있다고 하지만 목조건축물은 다 소실되고 석축과 성벽만 남아 있다. 그마저도 전부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순천왜성은 외성 3첩에 내성 3첩의 거대한 규모였다고 하나 현재는 내성 3첩만 남아 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순천왜성을 왜교성 혹은 예교성이라고 불렀는데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가 왜교성 전투이다. 왜교성 전투의 배경은 이렇다. 휴전이 결렬되고 일본군은 재침을 하기 전 이순신과 조선 조정을 이간질하여 조선 조정이 직접 이순신을 파직하기에 이른다. 이순신이 없는 조선은 전혀 두렵지 않았던 일본군은 곧바로 '정유재란'이라는 두 번째 임진왜란을 일으켰고 이순신 대신 조선 수군을 이끌었던 원균은 칠천량에서 대파당하였다. 조선 수군이 그 자체로 궤멸되고 말았다. 덕분에 일본 육군은 일본 수군의 보급을 지원받으며 조선의 국토를 유린했다. 하지만 이순신이 복직되었고 이순신은 칠천량 해전에서 도망쳐 온 12척의 배로 명량해전에서 일본 수군의 진격을 차단하는데 성공했다. 일본수군의 보급이 차단되어버리자 일본육군은 더 이상 진군할 수 없이 전부 남해안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리고 조명연합군의 반격이 시작되는데 그 중 하나가 울산에서 제2군 사령관 가토 기요마사가 농성한 울산성 전투이고, 다른 한 전투가 제1군 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가 농성한 왜교성 전투였다. 앞선 울산성 전투에선 조명연합군이 패배하여 울산성 함락에 실패하였다. 조명연합본부는 울산성 함락의 실패요인으로 수군의 부재를 꼽았고 왜교성 전투에선 이순신 장군의 수군까지 합세한 육군과 수군의 합동작전을 기획했다. 육군에서는 명나라 제독 유정과 조선군 도원수 권율이 지휘하며 왜교성에 대한 공세를 먼저 진행했다. 1598년 음력 9월 20일 명나라 제독 진린과 조선수군 이순신 장군의 조명연합수군이 순천왜성 앞바다에 도착하여 화포세례를 퍼부었다. 


아침에 진군하여 활을 쏘기도 하고 화포를 놓기도 하며 종일 서로 맞붙어 싸웠으나 조수가 매우 얕아서 접근하여 싸울 수가 없었다. -<난중일기> 1598년 9월 21일



고니시 유키나가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나보다. 전쟁은 늘어지다가 9월 30일 명나라 군함 100여 척이 지원되었다. 10월부터 격렬한 난전이 벌어졌고 이순신은 상륙작전도 감행해보았지만 피해만 늘릴 뿐이었다. 육군 쪽에서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고 오히려 더 과감해진 일본군이 성을 나와 유정과 권율의 육군을 기습할 정도였다. 계속된 전쟁이 전개되었고 명나라 군함 23척이 격침되고 일본군 진영에선 고니시 유키나가의 막사가 포에 날아가버리기도 하였다. 육군 쪽의 유정 제독은 점점 소극적으로 변하고 있었고, 육군의 그렇다할 지원이 없으니 이순신도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러더니 유정은 돌연 잠시 전열을 가다듬는다며 군대를 철수시켜버렸다. 벙쩌버린 이순신과 진린은 그들도 별수 없이 철수하여야만 했다. 왜교성 전투는 비록 이순신이 단독으로 지휘한 전투가 아니었지만 유일하게 승리하지 못한 전투였다. 그리고 몇 달 후 본국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전일본군 귀국 명령이 떨어지자 고니시 유키나가는 여기 순천왜성(왜교성)을 나오려 하지만 이순신이 모든 병력을 이끌고 바다에서 퇴로를 차단하며 마지막 전투를 벌이니, 바로 노량해전이었다.


왜교성 전투가 이순신의 패전이라고 표현하긴 어렵지만 그렇다고 왜교성을 함락시키지 못했으니 성공한 작전은 아니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순신의 공격을 막아낼 만큼 왜교성, 즉 순천왜성은 견고했다. 순천왜성에 도착해 넓은 공터에 주차를 해놓고 걷다보면 예상했던 것보다 듬성듬성 퍼져있는 순천왜성의 성벽에 실망할 수 있다. 그곳은 순천왜성의 입구이며 길을 따라 더 올라가야 한다. 2~3분 정도 올라가 더 올라가면 숨이 차오를 것만 같을 때 웅장한 순천왜성의 모습이 떡하니 나타난다. 성벽 높이도 사천의 선진리성보다 더 높은 듯하고 기분 탓일지 모르겠지만 돌들마저 더 우람해보인다. 성의 견고함이 성벽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지금은 나무들이 시야를 차단하고 있지만 천수각 터에 오르면 남해바다로 퍼져갈 수 있는 시야가 트인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곳에서 이순신 수군의 맹공을 직접 받았을 것이고, 본국으로 귀국하여야 하는데 저 바다에서 이순신이 퇴로를 차단하고 있는 광경을 보며 엄청난 공포심을 느꼈을 것이다. 이순신 해전지 답사를 갈 때면 항상 우리 조선군의 입장이 되어보지만 이렇게 순천왜성에 올라 적군의 시선으로 그때를 상상해보니 역사가 한층 더 입체로워진다. 



사람의 떼가 타서 인문적인, 낙안읍성

순천왜성에서 다시 순천역 쪽으로 향하다 보면 순천에서 유명한 노포치킨집 '풍미통닭'이 있다. 마늘치킨과 닭똥집, 새싹주먹밥이 유명하다길래 세트로 시켜 먹고는 근처 하나로마트에서 저녁에 먹을 장을 본다. 아직 저녁까지 이르긴 하지만 배가 부른 상태에서 장을 봐야 과소비를 멈출 수 있다. 장을 마치곤 낙안읍성으로 향했다. 낙안읍성까지는 차로 약 30분 거리다. 숙소를 낙안읍성 안에 잡았기 때문에 장에서 봐온 것들을 숙소 냉장고에 고이 모셔두고 저녁시간 때까지 낙안읍성을 구경하기로 한다. 


낙안읍성은 조선시대 이래 지금까지 쭉 내려오고 있는 전통마을이다. 읍성이란 평지에 쌓은 행정구역인데 행정상의 기능도 있지만 고려말에서 조선초 왜구의 침입에 방어하고자 쌓은 국방의 목적도 지니고 있다. 태조 이성계 때 처음 낙안읍에 성을 쌓았던 것을 세종대에 크게 번창시켰지만 왜구의 침입을 견디지 못하고 임진왜란 당시 순천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마을을 파괴했다. 조선 후기였던 인조 대에 다시 오늘날의 모습으로 복구했다고 한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대표적인 읍성으로는 서산의 해미읍성과 순천의 낙안읍성이 있다. 하지만 두 읍성은 큰 차이가 존재한다. 서산의 해미읍성은 대부분이 파괴되어 옛 흔적들을 복원해둔 것이 전부이지만 순천의 낙안읍성은 아직까지도 옛 마을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며 사람들이 살고 있다. 안동의 하회마을, 경주의 양동마을, 영주의 무섬마을처럼 양반가 중심의 집성촌이 아닌 민가가 함께 살아가는 조선시대의 행정구역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 매우 희소한 마을이다. 하여 낙안읍성의 공적인 공간에서는 신나게 소리지르며 뛰어다녀도 되지만 마을 내부 사람들이 사는 사적인 공간에서는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 공적인 공간이라 함은 낙안읍성의 누각, 내각, 동헌, 객사 등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동사무소 내지 구청 건물들이 있던 곳을 말한다. 조선시대 행정관청의 건물 앞에는 언제나 대문 기능의 누각이 있었다. 낙안읍성에는 '백성들을 즐겁게 한다'는 뜻의 낙민루가 넓직한 공터에 당당하게 위치하고 있다. 낙민루의 편액이 귀여운 전서체로 쓰여 '낙안'의 의미처럼 편안하고 즐거운 낙천적 느낌을 물신 내준다. 낙민루 뒤로는 내아와 동헌이 있는데 낙안으로 발령받는 낙안군수가 일을 보던, 말하자면 행정업무의 중심지였던 곳들이다. 동헌의 지붕 가운데로는 금전산이 병풍처럼 솟아있는 덕분에 수령이 존재하는 곳의 권위를 살려준다. 역시 조선시대에는 건물을 배치할 때 자연의 풍수를 적극 활용할 줄 알았다. 낙민루와 내아 옆으로 가면 간단하게 민속놀이를 할 수 있는 놀거리들이 우리 동선을 방해한다. 이런 놀거리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일행들과 각종 내기를 하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 그 옆의 객사를 구경한다. 객사란 일종의 호텔로 외국의 사신이나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고위직 관료들이 낙안읍성을 방문하면 묵는 곳이었다. 낙안까지 외국의 사신이 올 일은 별로 없고 주로 왕이나 조정에서 파견한 관료들이 사용했다. 


낙민루-동헌-객사


동문 쪽으로 향하며 호떡 같은 군것질도 먹고 시원한 전통음료도 마시며 갈증을 해소한다. 이외에도 전통식사거리에 전통주까지 팔고 있었으나 우린 나중의 식사가 준비되어 있어서 당장의 충동은 참아보기로 한다. 동문쪽으로 향하다보면 임경업장군비각이 있다. 임경업 장군과 이 마을이 무슨 인연이 있나?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면 병자호란 때는 임경업 장군이 있었다고 할 정도로 임경업 장군은 병자호란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임경업 장군의 역량이 빛을 발하지 못하고 패전했으니 굳이 따지자면 임경업 장군은 병자호란의 영웅일 수 있었다. 임경업 장군이 병자호란 직전 의주목사로 임명되어 전시태세를 잘 구축해두어 병자호란의 화를 어느정도 축소시킬 수 있었다. 의주목사로 발령받기 전 임경업 장군은 이곳 낙안읍성의 낙안군수로 부임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을 쑥대밭이 된 낙안읍성을 복구한 장본인이 바로 임경업 장군이었다. 임경업에 대한 감사함을 표현하고 공을 기리고자 당시의 낙안 백성들이 임경업장군의 공덕비를 만들어주었다. 유능한 군지휘관은 훌륭한 목민관이 될 역량도 겸비하는 법인가 보다. 재미있는 건 해미읍성과 낙안읍성을 자주 비교하곤 하는데 이순신 장군이 해미읍성에 부임했던 적이 있고 임경업 장군은 또 낙안읍성에 부임했던 적이 있다는 것이다. 여러모로 재미있는 역사의 비교다.


동문에서 남문 쪽으로 성벽을 따라 이동하며 이곳저곳을 구경한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인적이 드물어지고 훨씬 사람 사는 한적함과 고요함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중간중간 마을의 큰 연못인 연지와 마을의 죄수들을 하옥해두던 옥사를 구경한다. 전통마을의 재현된 옥사는 오로지 재미만을 위해서 비현실적인 경우가 흔한데 낙안읍성의 옥사는 아무래도 조선시대부터 이어져내려온 실제 감옥인지라 옥사의 회랑까지 갖추는 등 사실감이 생생하다. 낙안읍성 한곳한곳을 지도를 봐가며 일일이 찾아가기보단 정처없이 배회하다보면 아담한 돌담과 길에 취하고 마을의 여러 부속시설들을 구경한다. 몇몇 마을주민분들이 헤진 지붕의 짚을 다 함께 이는 모습을 보는 것 또한 재미가 쏠쏠하다. 빼곡하게 집들이 모여져 있으니 현장감만으로 봤을 때 한국의 그 어떤 전통마을이나 읍성보다 낙안읍성이 제일이다. 그렇게 다시 성벽을 따라 걸어올라가다보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전망대가 있다. 이곳에서 낙안읍성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데 저 멀리 산이 안아주는 것 같이 포근한 느낌이 '낙안'이란 이름과 딱 맞아떨어진다.



전통건물부터 전통마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전통' 혹은 '유산'이라 하면 절대 건드리지 않고 그저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선입견이 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전통과 유산은 우리가 이어받아 현대의 실정에 맞게 계속 사용해갈 때 의미와 가치가 극대화된다.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고 그저 감상만 하는 전통과 유산은 죽은 것이다. 사람의 떼가 타야 살아서 다음 세대에게도 전해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낙안읍성은 우리나라에서 한없이 소중하고 가치 있는 마을이다. 물론 일부 건물들은 복원되었다고 하지만 사람들이 조선시대부터 계속 살아왔다는 연속성 자체가 낙안읍성을 생동적인 공간으로 만들어준다.


낙안읍성 투어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 각자 씻고 편안한 복장으로 곧바로 저녁준비에 들어간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저녁이다. 우리는 전통초가집의 툇마루에 앉아 가스버너에 판을 올리고 적당한 양의 야채와 푸짐한 고기를 굽는다. 요근래 추웠는데 하필 오늘의 날은 마침 딱 좋다. 빗소리처럼 불판 위에 고기가 지글지글 구워지는 소리에 맞추어 감성적인 노래를 틀어놓는다. 소주에 고기에 쌈에 분위기에 밝은 달에 선선한 바람에 이 순간을 같이 즐겨주는 친구들에. 모든 박자가 완벽하다. 나를 취하게 하는 환경에 둘러싸여 식사를 마친 뒤 적당한 취기에 하늘을 올려다보니 감나무 사이로 둥근 달이 밤의 빛을 내뿜고 있다. 나는 월하취인이다. 달빛이 유난히도 반가운 밤이었다. 



















다음날 오전 눈을 뜨고. 낙안읍성을 떠나 다음 여행지로 가기 전 숙소 앞에서 기념촬영으로 시간을 추억을 봉인해준다.




삼보사찰 -송광사

대한민국에는 내력 깊은 사찰들이 정말 많다. 어디 내놓아도 자랑하고 싶은 사찰들을 나열하자면 끝도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여행지로서 사찰을 추천해달라 하면 여간 곤란한 게 아니다. 그나마 몇 가지 소개한다면 가장 먼저 영주의 부석사를 이야기하고 그 다음 이야기하는 곳은 삼보사찰이다. 삼보사찰이란 불도의 보물 세 가지를 간직하고 있는 3대 사찰을 말한다. 3가지 보물은 불보·법보·승보를 말하며 각각 양산의 통도사, 합천의 해인사, 순천의 송광사를 가리킨다. 이중 불보사찰과 법보사찰은 구체적인 특정한 보물을 간직하고 있지만 승보사찰인 순천의 송광사에서는 특정한 보물을 지니고 있다기보단 고승들이 많이 배출되어 승보사찰로 간주되고 있다. 불보사찰이 보관 중인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와 법보사찰이 보관 중인 팔만대장경에 필적할 정도의 고승들이 송광사에서 배출되었다. 더불어 순천의 송광사는 한국의 모든 사찰들 가운데 가장 많은 국보들을 보유하고 있는 절로도 유명하다. 


송광사의 창건주는 고려시대 의천대사와 더불어 고려의 양대 승려로 손꼽히는 보조국가 지눌대사이다. 본디 이 자리에는 신라 말에 작은 절이 창건되었으나 고려 중기 지눌대사가 자리를 잡고 이름을 수선사로 바꾸었다. 이곳에 지눌대사는 오늘날 한국불교계 제일 분파인 조계종을 만들면서 수선사가 자리하고 있던 송광산의 이름이 조계산으로 바뀌었고, 사찰의 명칭도 수선사에서 산의 원래 이름을 따와 송광사로 바뀌었다. 송광사는 한국불교사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띠는 곳이다. 고려는 신라와 후백제라는 후삼국을 재통일하면서 시작하였다. 고려의 건국을 포함해 고려의 전신국이었던 궁예의 태봉(후고구려), 견훤의 후백제 등 통일신라 말에는 불교의 한 종파였던 선종이 크게 유행하였다. 통일신라의 기존 봉건적 체제를 해체시킨 사회적 요인 중 하나가 엘리트종교보다는 민중적 성격이 짙었던 선종의 유행이었다. 고려 역시 송악(개성)을 중심으로 한 지방호족과 지방선종이 결탁하며 그 토대 위에서 건국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려가 한반도를 재통일하면서부터는 입장을 달리 할 수밖에 없었다. 이젠 고려 정부도 선종보다는 지배이념을 사상적으로 지지해줄 수 있는 교종을 내세워야 했다. 고려 전기에는 고려 왕실도 고려의 건국세력이 선종계열을 어느 정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지만 고려의 체제가 정립되어가던 고려 중기에는 본격적인 교종 중심의 선종 통합정책이 시도되었다. 그 일선에 있던 대승이 고려 왕실 출신의 대각국사 의천이었다. 의천은 천태종이라는 종파를 만들어 교종을 내세우며 강압적으로 선종을 흡수해갔지만 의천 사후에는 의천의 강압적 종파통합운동에 반대하며 선종이 다시 튕겨져 나갔다. 그러던 선종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12세기 중반에서 13세기 초 고려에서는 무신정변이 일어나 무신정권이 들어서고 고려 왕실의 권위가 추락해버렸다. 고려 왕실 위에 군림하려는 무신정권의 역대 지도자들은 보란듯이 선종을 지지하며 고려 왕실의 후원종파였던 교종의 위세가 확연하게 축소되었다. 무신정권 가운데 최씨정권을 수립한 최충헌이 등용한 국사가 바로 보조국사 지눌이었다. 


보조국사 지눌은 최충헌에게 등용되기 이전부터 이미 고려 불교계 통합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때마침 최충헌은 보조국가 지눌을 발탁했고 최충헌이 좌지우지하던 고려의 21대왕 희종은 지눌을 순천의 절로 보내 마침내 지눌은 이후 송광사의 이름을 갖게 되는 수선사를 중창하였다. 불교계 개혁운동을 '결사(結社)' 라고 하여 무신정권기 지눌의 결사운동을 '수선사 결사' 혹은 '정혜결사'라고 한다.


지금의 불교계를 보면 아침저녁으로 행하는 일들이 비록 부처의 법에 의지하였다고 하나 자신을 내세우고 이익을 구하는데 열중하며 세속의 일에 골몰한다. 도덕을 닦지 않고 옷과 밥만 허비하니 비록 출가하였다고 하나 무슨 덕이 있겠는가? 하루는 같이 공부하는 사람 10여 인과 약속하였다. 마땅히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산림에 은둔하여 같은 모임을 맺자. 항상 선을 익히고 지혜를 고르는데 힘쓰고, 예불하고 경전을 읽으며 힘들여 일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각자 맡은 바 임무에 따라 경영한다. 인연에 따라 성품을 수양하고 평생을 호방하게 고귀한 이들의 드높은 행동을 좇아 따른다면 어찌 통쾌하지 않은가? - <권수정혜결사문>


지눌의 '정혜결사'는 그의 사상교리였던 '정혜쌍수'에서 유래했다. 정혜쌍수란 불도를 닦는 것에 있어 '정'과 '혜'가 동시에 필요하다는 내용인데 '정'은 정신수양을 뜻하며 '혜'는 불교교리에 대한 지혜를 뜻한다. 즉 정은 민중적인 선종을 지칭하며 혜는 엘리트적인 교종을 지칭한다. 언뜻 보기엔 선종과 교종의 동시성을 강조하는 듯하지만 '혜정'이 아닌 '정혜'인 이유는 선종이 교종을 선행한다는 뜻이다. 지눌이 주장했던 '돈오점수'라는 사상도 같은 맥락이다. '돈오'는 문득 깨닫는다는 선종을 뜻하며 '점수'는 점점 갈고 닦는다는 교종을 말한다. 돈오가 점수를 선행하는 건 선종을 더 강조한단 뜻이다. 


정은 본체이고, 혜는 작용이다. 작용은 본체를 바탕으로 해서 있게 되므로 혜가 정을 떠나지 않고, 본체는 작용을 가져오게 하므로 정은 혜를 떠나지 않는다. 정은 곧 혜인 까닭에 허공처럼 텅 비어 고요하면서도 항상 거울처럼 맑아 영묘하게 알고, 혜는 곧 정이므로 영묘하게 알면서도 허공처럼 고요하다. -<보조국사 법어>


이렇게 지눌은 수선사에서 조계종을 창건했다. 그리고 고려 국왕 희종은 직접 수선사의 이름을 송광사로 바꾸어주었고 송광산의 이름은 조계산으로 개칭했다. 비록 지눌의 조계종 결사운동은 최충헌과 무신정권이라는 정치적 내막도 분명 있었지만 지눌 개인의 신앙심 깊은 결사 운동으로 부패했던 고려 불교계가 한동안 정화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삼보사찰 중 승보사찰인 송광사는 어느 한 위대한 고승 지눌국사로 시작했다. 


송광사의 영광은 지눌국사로 끝이 아니었다. 지눌의 뒤를 이어 송광사를 맡게 된 송광사의 2세 주지 진각국사 혜심 또한 한국불교사에서 괄목한 업적을 남기었다. 보조국사 지눌의 제자이기도 했던 혜심은 파격적으로 유교와 불교의 일원화를 주장했다. 혜심의 유불일치설에 따르면 유교나 불교나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크게 다르지 않다. 혜심이 봤을 땐 유교와 불교 모두 개개인 심성의 도야를 강조한다며 유교와 불교를 따지지 않고 각자 자신의 심성, 역량, 의식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수많은 제자들이 혜심의 제자가 되기 위해 송광사에 모여들었으며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가 없어서 고려의 22대왕 강종은 친히 송광사의 중창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혜심의 유불일치설 덕분에 고려 말 사회적으로 성리학을 수용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할 수 있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두 성인을 중국에 보내 교화를 펴리라. 한 사람은 노자로, 그는 가섭보살이요, 또 한 사람은 공자로, 그는 유동 보살이다." - <기세계경>


지눌과 혜심 이후로도 송광사에선 저명한 고승들이 배출되었다. 고승들 가운데 국왕이 직접 대고승에게 내리는 최고 지위의 법계를 '국사'라 일컬었다. 국사는 국왕의 스승이 되기도 하고 자문을 하기도 하며 종교계의 가장 큰 어른으로 군림했다. 지눌과 혜심이 모두 국사를 지냈으며 송광사에서는 무려 16명의 국사를 배출했다. 한국의 모든 사찰을 통틀어서 가장 많은 수의 국사를 배출해냈기에 송광사야말로 유수의 승려들이 모인다는 승보사찰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일제시대 송광사는 의병들을 지원해주며 일제에게 탄압을 받았고 한국전쟁 전후로 하여 큰 피해를 본 후 몇 차례에 걸쳐 보수복원 작업을 통해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송광사는 비주얼적으로도 참으로 아름다운 사찰이다. 내가 영주 부석사를 다녀오기 전까지만 해도 내 마음 속 최고의 사찰은 단언 송광사였다. 주차장에서 내려 10분 정도 걸으면 성보박물관을 지나쳐 송광사를 마주한다. 송광사에는 거대한 입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 송광사를 방문한다면 어디로 먼저 진입해야할지 당황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고민도 잠시. 전방 시야에 들어오는 어느 돌다리가 관광객을 마치 사이렌처럼 유혹한다. 언뜻언뜻 비추는 돌다리의 풀샷이 궁금하여 더 다가가다 보면 송광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 나타난다. 바로 삼청교와 우화각이다. 작지만 튼실한 홍예교 위에 설치된 아담하지만 기품 넘치는 우화각은 귀족적인 체면과 함께 지극히 우아하다. 송광사에서도 삼청교 다리와 그 위의 우화각 모습을 찍은 사진을 송광사의 대표 사진으로 홍보한다. 삼청교와 우화각을 보면 이곳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이곳이야말로 송광사의 참된 입구다. 삼청교와 우화각은 물론이고 그 옆의 필로티 건축처럼 툭 튀어나온 누각 임경당까지 신선의 분위기가 물씬 가득하다. 임경당까지 가서 사진을 찍고 싶지만 임경당은 출입이 불가하고 삼청교와 우화각에서 만족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송광사에서 사진이 가장 잘 나오는 곳이다. 송광사에서 가장 빼어난 경관을 송광사 투어 제일 먼저 구경하는 독특한 시퀀스의 사찰이다. 



삼청교와 우화각을 지나 본격적으로 송광사에 진입하며 그 웅장함에 어디부터 가야할지 헤맬 수 있다. 송광사에는 무려 50여 동의 건물들이 있고 다른 사찰과는 달리 서향을 하고 있어 길을 헤매기 십상이다. 길 잃을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큰 건축물부터 하나하나 차근차근 구경하며 송광사의 장중하고 거대한 호젓함을 만끽하고 오면 충분하다. 


송광사 경내로 진입하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곳은 송광사에서 가장 큰 건축물이자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이다. 현란한 옥색빛으로 뒤덮힌 대웅전은 이중지붕을 취하고 있어 송광사의 위세를 과시하는 자랑거리다. 대웅전 옆의 승보전에는 승보사찰로서의 정체성을 보란듯이 선보이는 곳으로 석가모니부터 시작해 석가모니의 10대 제자, 16나한을 포함해 총 1250명의 스님을 모신 공간이다. 편액도 귀티나는 해서체로 적혀있다. 대웅보전 뒤로는 예스러움을 가득 담고 있는 관음전이 있다. 관음전은 양옆으로 트인 호방한 지붕과 나무의 질감을 그대로 내보이는 공포 그리고 돌계단의 석수들이 매우 인상적이다. 그 뒤로 계단을 더 올라가면 송광사의 검은 기와지붕들을 한 시야에 담을 수 있다. 계단에서 내려와 다시 대웅보전을 지나쳐 들어왔던 대로 돌아가면 약사전이 있는데, 송광사의 약사전은 현존하는 약사전 가운데 가장 작다는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좁지만 수직성을 살려서 엄숙한 공간임을 강조하고 있다. 


언급한 건축과 더불어 이외에도 하나하나 사적 가치가 뛰어난 건축물들이 즐비하지만 그 중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은 국사전이다. 국사전은 송광사가 배출한 16명의 국사 영정을 보관하던 곳으로 국보 56호다. 따라서 국사전은 일종의 신전이라고 할 수 있다. 1369년 고려 공민왕 대 만들어져 이후 두 차례의 보수과정을 거친 국사전은 정면 4칸 크기에 지붕은 맞배지우, 그리고 주심포 양식을 취하고 있다. 지붕의 옆으로 안정감 있게 퍼진 앉음새는 소박함과 동시에 건물을 담백한 멋을 더한다. 아뿔싸! 그런데 국사전 경내에는 일반인이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아쉬운 마음으로 저 멀찍이서 줌인으로 삐져나온 국사전의 일부를 사진으로 담아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송광사 출신 16명의 국사들은 보조국사 지눌대사부터 시작해서 진각국사 혜심, 정혜국사, 청진국사, 진명국사, 원오국사, 원감국사, 자정국사, 자각국사, 담당국사, 혜감국가, 자원국사, 혜각국사, 각진국사, 홍진국사, 고봉국사 등이다. 송광사의 국사전은 건축의 외양보다는 그 안에 모셔진 승려들의 공덕, 그들을 기리기 위한 종교적 정성이 국사전의 값어치를 높여준다. 진심과 정성으로 버무러진 마음은 국보로 감히 등급화 할 수 없는 인간의 소중한 자산이다. 다만 1995년 16분의 영정 중 무려 13점을 도난당했다고 한다. 



다시 삼청교를 나와 송광사를 빠져나가는 길에 성보박물관을 들렀다. 국보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송광사인데 성보박물관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지 않은가! 송광사의 성보박물관에는 귀중한 불교보물들이 수두룩하다. 무엇부터 소개해야할까. 일단은 국보 43호 혜심고신제서부터 소개해보겠다. 혜심고신제서는 고려 23대 왕이었던 고종이 재위 3년째가 되던 1216년 진각국사 혜심에게 대선사의 호를 하사한다는 문서다. 고려시대 국왕이 승려에게 작위를 하사하는 문서를 '제서'라고 하는데 남아있는 제서가 몇 점 없기 때문에 혜심고신제서는 불교계는 물론 문화재 중에서도 희귀한 보물로 여겨지고 있다. 가로 3.6m, 세로가 33cm로 홍색, 황색, 백색 등의 비단 7장을 이어붙인 형태이다. 



비록 국보는 아니지만 국사전에 모셨던 16분의 영정 가운데 도난당하지 않은 3점의 영정 또한 성보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3점은 1대 보조국가 지눌, 2대 진각국사 혜심, 3대 정혜국사의 영정이다. 무려 13점이나 도난당한 것은 천인공노할 일이지만 송광사의 창건주인 지눌대사의 영정은 살아남았다는 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진각국사 혜심(좌)-보조국사 지눌(중앙)-정혜국사(우)


성보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작품 가운데 가장 압도되는 작품은 단언 국보 314호인 화엄경변상도일 것이다. 화엄경변상도는 대작불화로 변상도란 불경의 내용을 알기 쉽게 그림으로 표현한 탱화(불화)를 뜻한다. 불경의 내용을 그림으로 전부 해석했기에 그림의 밀도가 압도적일 수밖에 없다. 송광사의 화엄경변상도는 석가모니가 7군데에서 9번의 설법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내게는 이 대작을 표현할 재간이 없어서 문화재청의 설명을 대신하기로 한다.


『화엄경』의 7처9회의 설법내용을 그린 변상도로, 비단 바탕에 채색하여 그린 그림이다. 이 화엄탱은 기본구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구도상 상·하단 모두 법회장면이 거의 대칭을 이루며 펼쳐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랫부분에는 제1회 ‘보리도량회’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보광명전에서 열린 제7회·제2회·제8회가 자리하였으며, 오른쪽에는 제9회 ‘서다림회’가 위치해 있다. 그리고 윗부분에는 아래로부터 위로 진행되면서 오른쪽에 제3회 ‘도리천궁회’와 제4회 ‘야마천궁회’를, 왼쪽에 제5회 ‘도솔천궁회’와 제6회 ‘타화자재천궁회’를 배치시켜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다. 계획적이고 짜임새있는 구도와 더불어 황토색 바탕에 홍색과 녹색 및 금색을 사용하고, 각 회주인 보살형 노사나불의 영락에 고분법을 활용하여 장식함으로써 화면이 밝고 화려해지는 18세기 불화의 경향을 살필 수 있다. (중략) 그림에 대한 내력을 적어 놓은 기록에 의하면, 영조 46년(1770)에 화련을 비롯한 12명의 승려화가들이 무등산 안심사에서 조성하여 송광사로 옮겨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불화는 현존하는 조선시대 화엄경변상도 중 조성시기가 가장 빠름은 물론, 『화엄경』의 7처9회 설법내용을 매우 충실하게 효과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기준작이라는데 사료적 가치가 있다.  - 문화재청



성보박물관에서 미처 찾지 못해 놓친 작품이 하나 있었다. 국보 42호인 송광사 목조삼존불감이다. '불감'이란 불상과 불상을 안치하는 불당을 작은 간이식 휴대용으로 만든 것으로 '목조삼존불감'은 나무로 만든 부처 세 분을 모시고 있는 불감이란 뜻이다. 불감은 주로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감을 열면 가운데 큰 방과 양쪽의 경첩에 작은 방이 하나씩 더 있는 구조다. 송광사 목조삼존불감의 경우 가운데 방에는 연꽃무늬 대좌에 본존불이 가부좌를 틀고 있다. 본존불의 옷자락 구김새라든지 본존불 뒤의 광배를 보면 조각의 필치와 섬세함이 아주 생생하다. 왼쪽 경첩에는 문수보살이, 오른쪽 경첩에는 보현보살이 조각되어 있다.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은 연꽃가지를 들고 있으며 사자가 등에 업고 있는 대좌를 깔고 있다. 자비를 상징하는 보현보살은 코끼가 등에 업고 있는 대좌를 깔고 있으면 왼발을 걸치고 있다. 금은보화라 함은 휘황찬란하게 반짝이는 재물들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국보 42호인 순천의 송광사 목조삼존불감은 '금은'으로 안 되어 있을 뿐 나무도 보물이 될 수 있구나를 새삼 깨닫게 해준다. 말그대로 송광사 목조삼존불감은 보화다. 섬세한 세공력과 종교적 신앙심이 이상적으로 버무려진 대한민국 목조공예의 최고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송광사 목조삼존불감은 지눌국사가 당나라로부터 가져온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지눌국사는 고려시대 사람이고 당나라는 신라 시대 때 중국에 존속했던 왕조이니 시간대가 맞지 않는다. 이 때문에 송광사 목조삼존불감의 제작시기는 신라 혹은 고려시대로 대강 이해할 뿐이며 불상의 표정이나 전반적인 디자인 면에서 이국적인 양식도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 제작된 것이라고 확언할 수도 없다. 그러나 어찌됐든 신라 혹은 고려시대 이후 한반도에서 한국인의 손으로 보존되어 왔고 그 유구한 세월을 머금은 습기는 한국의 그것이다. 송광사 목조삼존불감은 눈을 어디에 두어도 즐거울 만큼 조각면에서 빈틈을 주지 않는다. 나무의 재질로 지나친 화려함을 피하되 구성 면에서 품격을 높이는 방식이야말로 예술성 하나로 승부하는 방식이다. 아름다움 순도 100%의 이 보화는 그 어떤 금은보화에 못지 않게 값지고 귀중하다.


사진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송광사 투어를 마치고나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다. 송광사 초입에는 산채비빔밥을 파는 식당들이 집중되어 있다. 식당들이 워낙 많아 어딜 가야할 지 모르겠다만 전라도의 식당들은 그것도 사찰 앞의 식당들은 웬만해서는 기본 이상은 다 한다. 조계산에서 직접 채취한 재료로 나물, 도토리묵, 파전, 산채비빔밥까지 상차람이 자연적으로 호화롭다. 송광사의 법력이 뿌리내린 토양을 자양분으로 자란 조계산의 재료들로 건강과 체력까지 모두 충전 후 다음 여행지로 떠난다.




작고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능력, 선암사

송광사에서 조계산 넘어에 순천의 또 하나의 대표 사찰 선암사가 있다. 산 하나를 두고 있지만 송광사에서 걸어서 선암사를 가기 위해선 등산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래서 차를 타고 산을 우회하기로 하였다. 차를 타면 산을 빙 돌아야해서 지척거리에 있음에도 30~40분이나 걸리는 다소 비효율적인 동선이긴 하지만 순천에 왔으면 그리고 송광사를 구경했으면 꼭 같이 선암사도 둘러보기를 추천한다. 송광사와 선암사는 서로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어서 두 군데를 같이 돌아본다면 미학을 보는 안목을 키우는데 큰 도움이 된다.


송광사와 선암사는 여러 기준에서 서로 비교가 된다. 송광사는 우리나라 제1의 불교종파인 조계종이며, 선암사는 우리나라 제2의 불교종파인 태고종의 본산이다. 고려시대에 의천과 지눌 등에 의해 교종과 선종 사이를 통합하기 위한 여러 노력들이 이어졌지만 이러한 노력들이 무산하게 숭유억불의 국가 조선에 접어들면 거의 모든 종파들이 사라지고 그저 '불교' 라는 종교명만 겨우 유지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이르면 불교는 다시 지리멸렬하는데 이때 일제의 지원을 받은 친일 성향의 승려들이 '원종'이라는 종파를 창시하자 이에 반하여 민족주의적 운동의 일환으로 한용운 등이 한국불교의 쇄신을 꾀하며 새로운 한국불교의 시작을 알렸다. 이때 한용운은 '조계종'의 이름으로 오늘날의 불교조계종을 창시했다. 그러나 해방 후 불교계단은 다시 한번 요동칠 수밖에 없었다. 일제의 잔재로 인해 아직까지 승려들 가운데 '대처승'이라 하여 혼인도 가능하고 육식도 가능한 승려들이 있었다. 반면 일제강점기 때 시작한 조계종은 대처승을 엄히 금했다. 대처승의 여부뿐 아니라 조계종의 시조 문제를 결정짓는 종파 문제를 두고도 첨예하게 의견이 대립했다. 지눌 사후 고려는 대몽항쟁기와 원 간섭기를 거치며 고려 불교계의 교세가 크게 축소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던 불교계가 고려 후기 공민왕과 우왕 대에 보우 스님에 의해 조계종이 회복했었다. 조계종의 종조가 지눌이냐 보우냐를 두고는 구한말부터 계속 갑론을박을 해오다가 해방 후에 대처승 여부를 두고 기폭제가 터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을 포함해 정부 측에서는 대처승을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봤고 결국 박정희 쿠데타 이후 군정시기였던 1962년 대처승들끼리 독립한 종파가 태고종이었다. 태고종은 보우를 종조로, 조계종은 지눌을 종조로 모시고 있다. 현재 조계종의 본산은 서울의 조계사이고, 태고종의 본산은 순천의 선암사이다. 하지만 조계종에서는 과거부터 선암사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논란의 중심지에 있으며 도저히 합의를 보지 못하자 순천시에서 관리권을 가져갔다.


종파를 떠나서도 송광사와 선암사는 즐기는 방식도 다르다. 송광사는 우리나라 삼보사찰 중 하나이며 가장 많은 국보를 보유하고 있는 사찰이다. 규모도 매우 장중하며 건물 하나하나 다채로운 모습을 띠고 있는 귀족적인 사찰이다. 고급스러움이 묻어나는 사찰이다. 반면 선암사의 매력은 독특하다. 우선 입구에서부터 선암사 경내까지는 20~30분 가량을 걸어야 한다. 천천히 걷는다면 그 이상 소요될 수도 있다. 선암사까지 가는 길에 무언가 대단한 조형물이 있다거나 입 딱 벌어지는 멋진 경관이 있지도 않다.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는 야산길이다. 그런데 이 야산길이 이상하리만치 정겹다. 처음 와보지만 생소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은 아늑한 편안함을 선사해준다. 특히 겨울에는 잎도 다 떨어진 앙상한 나무들로 가득하고 길은 거칠기만한데도 말이다. 야산 끄트머리에는 승선교라는 자연암반을 그대로 이용한 돌다리들이 선암사 방문객들을 맞아준다. 그리고 그 옆의 강선루라는 누각이 이제 드디어 경건한 선암사 경내가 시작한다는 대문 역할을 해준다. 선암사로 들어오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육조고사'라고 적힌 편액이다. '육조고사'란 "중국의 남북조시대 이래 이어져내려올 정도로 오래된 절"이란 뜻인데선암사의 편액은 <사씨남정기>와 <구운몽>의 저자 김만중의 부친이었던 김익겸의 서체로 예서체 특유의 대담함이 돋보이다.


선암사 가는 길
육조고사


그렇게 선암사로 들어가서 무언가 거대한 가치의 건축이 있는가하면 그것도 아니다. 선암사는 여러 번의 중창 및 보수를 거쳤기에 각 시대별 양식들이 혼합되어 있다보니 구조 자체도 복잡하다. 송광사는 어딜 가도 눈을 만족시킬 수 있기에 굳이 지도를 찬찬히 볼 필요가 없었지만 선암사는 어딜 가도 마음이 편안해지기에 굳이 지도를 보지 않았다. 본다고 해도 양식화되지 않은 가람양식으로 헷갈릴 뿐이다. 그저 길이 보이는 대로 걷는다. 딱 한 가지 표현으로 규정내릴 수 없는 매력이 선암사의 미학이고, 그래서인지 선암사가 인기가 많다. 그럼에도 선암사의 매력의 근원을 찾아내려 고민하는데 지극히 주관적인 소양으로 선암사의 길과 돌담이 내 환심을 가장 크게 샀다. 그저 돌과 흙으로만 빚어진 길과 담인데도 이런 원초적이고 일상적인 길과 담을 다른 사찰에서 본 기억이 없었다. 오래된 마을 같지만 길과 담 주변으로 종교적 건물이 심심치 않게 놓여 있으니 더더욱 느낌이 남달랐다. 선암사 경내까지 오던 야산 길이 확장했다는 기분도 들고 말이다.




선암사는 무우전이 유명하다. 특히 매화꽃 필 무렵의 무우전이 예쁘기로 정평이 나 있는데 꼭 매화꽃이 없더라도 스님들의 권역인 무우전은 경건하면서도 소박하고 정갈한 멋이 있다. 다만 스님들의 권역인 만큼 일반인은 무우전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멀찍이서 스님이 한 손님과 대화하는 작고 평화로운 소리를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또 하나 선암사의 작은 재치가 있으니 '뒷간'이다. '선암사 해우소'가 공식명칭이긴 하지만 '해우소'보다는 '뒷간'이 더 말의 맛을 살려준다. 선암사의 뒷간은 무려 문화재로 지정된 화장실이다. 우리나라 사찰의 해우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화장실이다. 무슨 화장실에 이토록 화려한 이력이 있는지 웃기기만 하지만 선암사의 해우소 안으로 들어가보면 특이한 건축양식의 우수성에 감탄을 연발한다. 선암사의 뒷간은 자연적인 방식으로 분뇨를 처리하는 조상들의 슬기가 담긴 뒷간이고 우리 조상들은 어떤 식으로 화장실을 썼는지 아주 유익한 학습이 가능하다. 나름 남녀화장실 구분이 되어 있고 선암사의 스님은 물론 관광객들도 흔적을 남기고(?) 갈 수도 있다. 오죽하면 정호승 시인조차 이런 시를 남겼겠는가.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에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정호승 <선암사>


뒷간이라 해가지고 절대 가볍게 여길 수 없는 화장실이 선암사의 뒷간이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선암사를 돌아다니며 함께 여행 온 친구 두 명과 '행복의 역치'에 대해 선암사를 빠져나갈 때까지 떠들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했다. 친구 하나가 다른 친구에게 "쉽게 행복을 느끼는 거 같고 그건 큰 축복이다"라고 하자 나도 적극 동감했다. 말을 꺼낸 친구의 지인이 금융계에서 일하며 젊은 나이에 큰 돈을 벌었고 어릴 적 목표로 했던 좋은 차와 집까지 모두 장만을 했는데, 생각보다 빠른 나이에 이루고 싶은 것들을 다 이루어 이제는 뭘 해도 만족이 되지 않고 삶의 원동력이 없어져 무기력한 생활을 순천여행을 떠나오기 전날 토로했다는 것이다. 그때는 그저 듣기만 하였는데 우리 셋이 함께 여행을 하면서 삶이 무기력해지는 이유는 원하는 것을 못 얻어서가 아니라 작고 소소한 재미를 느끼지 못해서구나를 문득 깨달았다는 것이다. 나와 다른 친구는 공감하면서 우리 셋이 10년 넘게 우정을 이어갈 수 있는 건 셋 모두 별 거 아닌 데에서 행복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선암사의 뒷간만 보고도 순천여행이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선암사라는 화려하진 않으면서 아늑하고 포근한 절을 돌면서 거창한 진리나 사회이슈에 관한 담론을 펼치기보단 '행복의 역치'에 대해 우연히 이야기 나눈 이 대화가 유난히 선암사와 맞아떨어지는 대화였다. 



세계5대 연안습지, 순천만습지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석양의 조명을 비추기 시작할 무렵 우리는 마지막 여행지 순천만습지를 방문했다. 순천만습지는 각종 드라마와 영화의 촬영지이기도 했고 순천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순천의 대표여행지다. 순천만습지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습지로 이를 '연안 습지'라고 하며 순천만습지는 세계 5대 연안 습지 중 하나라고 한다. 순천만의 습지는 천연정화 기능을 가지고 있어 관광객보다 철새들이 더 즐겨찾는 곳이다. 남북직경 30km, 동서 22km에 이르는 광대무변한 공간에 끝을 모르는 갈대들이 수평선과 맞닿아 있다. 사람이 많지만 이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고도 적요하고 평화롭고 목가적인 분위기를 잃지 않을 정도의 규모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면적의 갈대군락이라고 한다. 2008년 순천만습지는 세계습지 보호조약인 람사르 협약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 세계 5대 연안습지, 람사르 협약이 보호하는 습지라는 수식어 외에도 우리나라 사진작가들이 선정한 10대 낙조, 희규 조류가 가장 많이 몰려드는 습지, 유네스코세계유산이 지정한 한국의 갯벌 중 하나, 2006년 한국관광공사 선정 최우수 경관 감상형지 등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시간과 체력만 가능하다면 용산전망대까지 올라가 순천만을 굽어보기를 추천한다. 초현실적인 순천만의 모습에 경외감까지 들 정도다. 


당연한 말이지만 순천만습지에는 조류 외에도 다양한 생태계가 조성되어 있다. 순천만습지 입구 건너에는 순천만에서 서식하는 어종을 다룬 식당들이 줄을 서 있다. 짱둥어, 꼬막, 꽃게 등 대부분 파는 메뉴는 동일하다. 그중 순천만의 대표음식은 짱둥어탕이다. 짱둥어는 갯벌에 서식하는 바닷물고기로 연안습지가 아니면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어종이다. <자산어보>에서는 '철목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다. "큰 것은 5~6치다. 생김새는 대두어와 비슷한데 색깔이 검정색이다. 눈은 볼록 튀어나왔고 물에서 헤엄을 치지 못한다. 갯벌에서 도약하여 물을 스치며 가는 것을 좋아한다."고 묘사되고 있다. 짱둥어는 특유의 구수한 맛과 향 때문에 주로 된장과 함께 짱둥어탕으로 해먹는다. 맛은 추어탕과 비슷하며 짱둥어를 으깨서 풀기 때문에 밥을 먹으면서 괴상한 비주얼을 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보양식이기에 여행을 마무리하는 저녁으로 제격인 음식이다. 이외에도 현재 대한민국에 유통되는 맛조개 90%가 순천만에서 난다고 한다.





바다를 접하고 있는 순천만에는 습지와 더불어 순천만습지에서 10분 정도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순천만국가정원이 있다. 무분별한 도시화로 순천만습지의 규모가 축소될 위기에 처하자 도시화를 방지하기 위해 도심과 순천만습지 사이에 조성한 천만국가정원은 2014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국가정원'이라고 지정한 1호 국가정원이다. 다양한 테마의 구역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관람객을 제대로 호강시켜주는 곳이다. 최대한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식생들로 꾸며놓았으며 전국에 있는 한국식 정원양식을 모델로 삼았다고 하니 '한국 정원의 백미' 같은 곳이다. 꽃들이 만발할 때 순천만국가정원의 랜드마크인 호수공원에 오르면 순천에서 가장 화사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물과 꽃과 나무와 동물들이 어우러지는 생태계. 이것이야말로 자연의 원초적 정원이 아니겠는가. 자연의 원초성을 감상하는 정원이야말로 한국적 정원이고 말이다. 순천만국가정원은 낮에 더 아름다움의 만월을 만끽할 수 있으니 날 밝을 때 순천만국가정원을, 해가 저물 무렵 습지를 돌아보는 것도 좋은 코스가 되겠다. 순천만습지와 순천만국가정원은 물론이고 송광사와 선암사, 그리고 낙안읍성까지 한국이라는 대지가 선사해준 한국의 정원이다. '한국의 정원' 그것이 끝이 아니라 습지나 국가정원이나 송광사나 선암사나 낙안읍성 모두 저마다의 다양한 얼굴을 갖추고 있어 아주 다채롭다. 다양한 얼굴을 지닌만큼 각기 다른 가치까지 함의하고 있어 외면과 내면이 어우러지는 곳이야말로 휴머니즘을 갖춘 정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참으로 한국적이다. 정원을 둘러본다는 느낌으로 순천을 여행하면 다른 곳에서는 맛보기 힘든 순천만의 개성어린 감회에 젖어들 수 있다.


이처럼 소담하고 순결하기만한 순천이지만 밝은 기억만 가지고 있진 않다. 순천에는 현대사의 잔혹한 비극이 깃들어 있기도 하다. 1948년 10월 일어났던 여수·순천사건이 그것이다. 남북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거의 확실시됐을 때 제주도에서는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제주 4.3사건이 터졌다. 1948년 8월 15일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이 되고는 이승만 대통령은 우선 제주 4.3사건부터 진압하기 위한 14연대를 신설하고 여수에 주둔시켰다. 그러나 14연대 내부 남로당 당원들이 제주도 출동을 거부하며 10월 19일 반란을 일으켰다. 14연대를 빠르게 장악한 남로당과 공산계열 군인들은 부대를 나와 여수경찰서를 제압했다. 다음날 20일 14연대 중 대대 2개 병력은 반란의 수괴 중 한 명이었던 김지회가 이끌며 순천으로 이동했다. 김지회는 순천에 있던 남로당 당원 홍순석의 부대와 합류했다. 20일 오후가 되면 순천도 전부 장악했다. 정부는 진압군 4연대를 파견했지만 순천에서 4연대조차 반란군에 호응했다. 21일 대대적인 진압을 위해 정부는 대전, 전주, 광주, 군산, 부산, 대구, 마산의 병력을 투입시켰고 23일경에 순천이, 27일에 여수가 진압되었다. 반란군의 패착은 여수와 순천을 점령한 후 이들은 보성과 벌교로 이동하면서 지리산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정작 여수와 순천에 남아있는 남로당 반란군 병력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반란과 진압 과정에서 죄 없는 민간인들이 너무 큰 희생을 치러야만 했고 여순사건의 피해자 규모는 추정이 불가할 정도다. 홍순석과 김지회는 지리산에서 항전을 이어가다가 이듬해 1949년 4월 사살되었다. 여수와 순천사람들은 6.25전쟁보다 당시의 사건을 더 공포를 느끼고 있다고 한다. 순천여행의 시작점이자 종착점인 순천역 부근이 끔찍한 학살들이 자행된 현장이였다. 시내로 더 들어가면 순천성동초등학교, 매산중학교 등에서도 비극의 사건들이 터졌다. 아직까지도 여순사건의 진상규명은 100%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정부와 여수시, 순천시 등에서는 그때의 비극을 기리기 위한 노력들을 이어나가고 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책 추천 

- <습지의 숨. 쉼,>

7명의 사진작가와 5명의 작가들이 몇 개월에 걸쳐 순천만을 방문한 후 순천만의 감동을 사진과 글로 기록한 책입니다. 사진첩이면서 동시에 에세이죠. 책의 서문에는 "순천만에서 느끼고 배운 삶과 힐링의 메시지를 사진과 글로 담아낸 책입니다"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역시 예술가들은 여행을 하는 법도 다르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여행을 다녀오면 여행지에 대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찾아보곤 하는데, 나는 느끼지 못한 감동을 혹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동을 예술가들은 풍부한 감수성으로 잘 표현해주어서 마치 한 번 더 여행을 하는 느낌마저 듭니다. 이 책의 사진과 글들을 읽노라면 순천만이 얼마나 인간적이고 자연적이고 따뜻한 곳인지 세삼 그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진답니다. 일상에 치이고 지칠 때마다 찾고 싶어지는 책일 정도로 예술가들의 따스어린 시선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연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깨우치게 해줍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순천여행에서는 영화 두 편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임권택 감독님의 <만다라>와 <아제아제 바라아제>입니다. 두 작품은 서로 맞물려 있는 관계라고 할 수 있기에 두 편을 동시에 소개해드립니다. <만다라>가 상대적으로 더 이론적이라면 8년 후 제작된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그 이론에 서사가 입혀진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양의 종교와 동양의 종교는 사뭇 다르다. 서양의 종교는 구원을 향한 믿음이라면 동양의 종교는 진리를 추구하는 고뇌의 한 형태다. 특히 불교에서 그리고 임권택의 영화에서 진리 추구는 '자유'에 대한 열망의 한 형태로 나타나죠. 두 영화의 주인공들 모두 성과 속 그 경계에서 방황하는 인물들입니다. 완전한 자유에 이룰 수 있는 인간은 어쩌면 없을 지 모르지만 삶을 살아가는 과정과 진리(자유)를 구하는 고행을 등치시키는 불교의 선을 '자유'라는 태제로 풀어가는 내용입니다. 현학적이고 철학적이지만 송광사와 선암사를 다녀온 후 느꼈던 가치를 한번더 곱씹어볼 수 있는 영화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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