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대게를 여행하다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플렉스(Flex)라는 게 있다. 남들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해도 가끔은 돈 걱정없이 멋있고 쿨하게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의 소비를 할 때가 있다. 나에게 플렉스는 계절별로 조금씩 상이한데, 겨울이 올 때마다 내가 시원하게 플렉스를 하고 싶은 건 살이 오를 때로 오른 대게다. 킹크랩까지는 나의 플렉스 기준을 너무 월등히 넘어섰기에 그나마 대게는 나에게 적정선의 플렉스다.
때마침 누군가에게 맛있는 음식 대접을 해주고 싶었는데 그분이 대게를 먹고 싶다고 했다. 나도 격하게 환영했다. 그분은 서울 시내에 맛있는 대게집을 찾아보겠다고 한 것을 내가 막아섰다. 그리곤 허세 가득한 말투로 "누가 대게를 서울에서 먹나? 대게를 먹을 거면 직접 영덕에 가야지!"
그리고 영덕 여행을 바로 결정했다. 대게 하나를 위해 일을 키우고 영덕여행을 떠났다. 그해 겨울이었다...
영덕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장사상륙작전전승기념관이다. 장사리 전투는 6.25 한국전쟁 초기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한 교란전이었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은 불리한 전세를 단번에 뒤집을 수 있는 성공률 5000분의 1의 작전이었다. 그만큼 UN군과 국군은 인천상륙작전 준비에 빈틈없이 철저히 임했다. 북한 참모진과 중국공산당 측에서도 분명 UN군이 상황을 타파하고자 상륙작전을 감행할 것이라고 거의 확신에 차 있었다. 다만 어디에 상륙할지를 두고 고민을 했는데 일부 장교들은 인천을 정확하게 예측하기도 했다. 북한군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UN군은 해안가를 따라 서해안-동해안 등지에 공습을 계속 퍼붓는 동시에 적군을 교란시키고자 9월 초부터 타지역에 병력을 파병하였다.
그중 육군 제1유격대대에게 육군본부로부터 작전명령 제174호가 하달되었다.
"9월 13일 동해안 영덕지구로 상륙해 북한군 제2군단의 후방을 교란하라"
제1유격대대는 구성된지 겨우 한 달 남짓한 부대로 대부분의 병력이 학도병들이었다. 정신군인도 아닌 학도병으로 구성된 신생부대를 파견한 주력부대는 모두 인천상륙작전의 준비에 투입되었기 때문이었다. 제1유격대대의 사령관 이명흠 대위는 작전의 어려움을 피력하며 재고를 요청했지만 성공적인 인천상륙작전을 위하 필수적인 전투였다. 작전명령은 9월 10일 하달되었고 목표 작전일은 13일이었으나 여러 가지 문제들로 지연되어 14일 772명 명을 태운 해군 수송선 LST 문산호가 부산을 출발했다. 미 해군의 구축함 엔티코트호의 호송을 받으며 LST 문산호는 15일 영덕의 장사리 해안에 도착했다. 하지만 거친 파도로 인해 LST 문산호가 거의 다 와서 그만 좌초되고 말았다. 이미 LST 문산호를 발견한 북한군 제2군단은 화력세례를 퍼붓고 있었다. 문산호가 좌초되는 바람에 목표상륙지점까지 가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예상 목표상륙지점보다 훨씬 뒤에서 상륙작전을 감행했고 무려 10시간만에 상륙에 성공했다. 물론 엄청난 사상자를 담보로 말이다. 다행히 미해군 구축함 엔티코트호의 함포지원을 해준 몫도 컸다. 상륙 후 제1유격대대는 이명흠 대위의 지휘 아래 200고지와 271고지를 차례로 점령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보급로를 차단하는데 성공하였다.
작전을 마쳤기에 이제 다시 부산으로 돌아와야 했다. 부산에서는 16일 구조용 예인선을 보냈지만 기상악화로 장사리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 사이 전열을 재정비한 북한군이 반격하여 장사리에서 제1유격대대를 포위하였다. 제1유격대대의 탄약과 식량은 고갈되어 매우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육군본부에서는 정작 장사리에서 고립된 제1유격대대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해군본부에서 독단적으로 LST 조치원호를 장사리로 파견했다. 9월 19일 오전 6시 LST 조치원호가 도착해 640여 명의 부대원들을 무사히 철수시켰다. 미처 LST 조치원호에 탑승하지 못한 30여 명은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다. 장사리 전투에서는 약 120명이 전사했으며 100여 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장사리 전투가 한창 진행되던 9월 15일 UN군과 국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켰다. 훗날 맥아더 사령관은 "인천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귀하의 동지들이 수행한 전투는 혁혁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최고의 찬사를 받을 만한 것이었습니다. 제1유격대대의 동지들이 보여준 용맹과 희생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영원히 빛나는 귀감이 될 것입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장사상륙작전의 공은 누가 뭐래도 어린 학도병들에게 있다. 학도병들은 정식 군인이 아니라 이 당시 전사한 분들의 이름을 알아내는 것도 어렵다고 한다. 6.25 한국전쟁에는 남기지 못한 순국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현재 장사리에는 작전에 투입했던 LST 문산호를 장사상륙작전전승기념관으로 조성해두고 있다. 내가 무수히 많이 다녀본 기념관들 중 톱에 해당하는 기념관 중 하나이며, 내 추천을 받고 다녀온 누구든 후회하지 않고 이런 곳을 알려줘서 고맙다는 말까지 들었다. 들어가기 전에는 마냥 맑고 화사하기만 하던 바다의 파도, 모래사변, 해송들이 기념관을 구경하고 나오면 엄숙해 보인다. 그래도 이런 기념관이 만들어지고 그들을 기억하는 우리가 있기에 그들의 전투와 희생은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다.
영덕 근처를 운전하다 보면 버스정류장과 길가의 벤치들마저 대게 모양으로 만들어놓았다. 이런 작은 재치 덕에 피식거리는 웃음이야말로 여행의 즐거움이다. 영덕에서 가장 사진찍기 좋은 곳 한 곳을 추천할까 한다. 차가 많이 몰리는 걸로 봐선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은 아니지 싶다. 영덕에서 동해안 바다를 전망할 수 있는 창포말등대다. 차를 타고 꽤 높은 지대까지 올라가야 하는 만큼 시원시원한 경치를 만끽할 수 있다. 창포말등대도 대게의 큼지막한 다리가 잡고 지탱하는 모양이다. 뭐 하나에 꽂히면 끝을 보고야 마는 그 진심이 왜 그렇게 귀여운지 모르겠다. 창포말등대 옆에는 간단하게 요기할 수 있는 간이매점이 하나 있다. 간이매점에서 뭘 줏어먹어도 좋고 따뜻한 음료 하나로 몸 데우면서 잔잔한 동해바다를 감상해도 좋다.
창포말등대에서 걸어서 조금만 내려가보면 영덕해맞이공원이 있다. 비탈길에 조성된 해맞이공원은 의외로 인적이 드문 곳이지만 아주 동화적이고 낭만적이다. 마치 동화 속 사람들 사이에 숨겨져 있는 작은 요정들이 노니는 곳 같다. 뒤에 언뜻 보이는 바다를 배경으로 영덕해맞이공원이 영덕에서 가장 사진이 잘 나오는 곳인듯 했다. 나중에 사진으로 다시 봐도 정말이지 영덕해맞이공원에서는 작은 요정들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영덕해맞이공원에서 더 바다 쪽으로 내려가면 분명 멀리서 잔잔하게 보이던 바다가 가까이 가면 매섭게 하얀 포말을 튀기면서 절벽에 부딪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절벽에 부딪히고 하얀 포말을 파괴하는 고유의 파도소리도 맑기 그지 없다. 장사상륙작전전승기념관에선 마음이 무거웠는데 이곳에선 한없이 마음이 편안해진다. 몸을 긴장시키는 곳보다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장소가 최고의 포토존이 아닐까.
영덕대게로 첫째날을 마무리하기 위해 강구항을 찾았다. 강구항에는 영덕대게타운이 조성되어 있고 주말이 되면 식사 시간 훨씬 전부터 차량이 몰리기 때문에 가급적 택시를 이용해 인근에서 내릴 것을 추천한다. 강구항이 대게로 유명해진 것은 영덕대게의 위판장을 운영되며 대게잡이 어선들이 강구항에 모이기 때문이다. 강구항 대게타운에는 워낙 많은 대형 대게집들이 즐비해있기 때문에 또 차가 지나칠 때마다 숱한 호객행위로 어느 집을 찾아야할지 우왕좌왕할 수 있다. 따라서 미리 어느 집을 찾아갈 것인지 정해두고 가는 편이 낫다. 나는 특산해산물을 먹으러 갈 때면 무조건 수산시장을 찾는다. 대형가게에 비해 쯔끼다시가 화려하진 않지만 오히려 꼭 필요한 쯔끼다시만 나오기에 메인요리에 더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격도 큰 차이는 나지 않더라도 더 싼 편이고 시장이 더 정감간다. 강구항의 수산시장은 '강구풍물지하어시장'이라고 부르고 그중 73호집인 '대구횟집'이 유명하다고 하여 이곳을 찾았다. 대게 단품으로도 먹을 수 있지만 영덕까지 온 김에, 그리고 플렉스를 다짐한 김에 코스로, 그것도 러시아산이 아닌 국산으로 주문했다. 물회, 회, 관자, 튀김 등 간단하지만 실망스럽지 않은 쯔끼다시가 나오고 대게를 활용한 다양한 요리들이 코스로 제공된다.
1. 대게 회
2. 대게 찜
3. 대게 치즈버터구이
4. 대게 라면
5. 대게 내장비빔밥
코스 요리들이 다 똑같은 대게를 사용한 요리들임에도 어떻게 다 다른 맛이 나는지 참으로 묘했다. 대게 회에서는 상큼한 시원함이, 대게 찜에서는 쫀득하고 촉촉한 조직감이, 대게 치즈버터구이에서는 달달한 풍미가, 대게 라면에서는 얼큰한 매콤함, 내장비빔밥에는 고소한 볼륨감이. 다채로운 구성에 걸맞는 다양한 맛들이었다.
대게는 일반적으로 먹는 작은 꽃게나 참게보다는 훨씬 크고, 킹크랩보다는 살짝 작은 크기의 게다. 킹크랩은 크기도 크지만 스파이크들이 박혀 있어서 더 장군감이라는 인상이 있다. 이때 대게의 '대'는 '큰 대(大)'가 아닌 '대나무 대(竹)'다. 다리모양이 대나무 나뭇가지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게는 동해와 일본으로부터 러시아와 알랙스카까지 이어진 한류 바다에 주로 서식하고 있다. 따라서 국내에는 국내산과 러시아산 그리고 알래스카산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국내산이 더 맛있다는 이미지가 있는데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기보단 멀리서 오는 게일수록 수율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러시아에서 대게를 먹는다면 러시아산이 국내산보다 더 속이 꽉 차 있는 것이고, 한국에선 국내산이 더 맛있을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는 영덕은 물론 삼척-울진-영덕-포항 연안에서 대게잡이가 이루어지고 있다. 영덕이 대게로 유명해진 것은 태조 왕건이 영덕에서 대게를 먹고 감탄했다는 기록이 권근의 <양촌집>에 나와있다는 전설과 1997년 한 드라마 덕분이라고 한다. 현재 대게 남획이 무분별하게 이루어지고 있어서 개체수가 크게 감소했으며 어부들은 더 먼 바다로 나아가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겨울바다의 찬바람이 건들거리게 부는 둘째날 아침. 아주 찬 바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남실거리는 겨울 바다바람은 몸을 덜덜 떨게 한다. 간밤에 대게와 짝꿍을 이루어준 과음에 속도 허하다. 아침으로 몸을 따끈하게 데워줄 수 있는 간단한 요기거리를 찾아왔다. '번영커피앤스프'라고 커피와 스프를 같이 파는 독특한 카페이다. 흡사 캠핑오두막집의 번영커피앤스프에서는 자연송이로 만든 스프를 팔고 있다. 자연송이 스프라.. 그저 건강만 할 거 같은 느낌이었지만 정작 먹어보니 속이 그렇게도 편해질 수가 없었다. 맛도 고소하여 하루를 시작하기 완벽한 브런치였다. 나는 입가심도 하고 잠과 술기운을 깰 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지만 내 일행은 스프를 먹어보더니 자연송이 맛에 푹 빠져 자연송이라떼를 주문했다. 자연송이라떼만큼은 떫거나 쓰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으나 한 모금 뺏어먹어보니 전혀 비린 맛이 없고 달짝지근해서 겨울아침에 딱인 음료였다. 자연송이라떼를 시켰어야 했나 순간 후회했지만 운전을 해야 하니 이걸 먹으면 몸이 완전히 퍼질 거 같아 차라리 다행이라 여겼다.
괴시리전통마을을 나와 점심식사를 하러 가는 길. 그저 아무생각 없이 운전을 하는데 도로에 따라 저마다 다른 멋진 풍경들이 펼쳐진다. 어제 갔던 창포말등대 인근에 수놓인 풍차들이 저 멀찍이 굽어 보이고, 푸른 수평선을 펼친 잔잔한 겨울바다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비춰지고, 여타 관광지들처럼 화려하고 복작스럽지 않고 작은 어촌 마을의 집중들이 마음을 녹이는 광경들. 나와 일행은 연일 감탄사만 내뱉었다. 나중에 찾아 보니 이 길이 영덕의 블루로드라고 하여 대게공원에서 고래불해수욕장까지 이르는 약 64km의 해안길이라고 하며 영덕군에서도 자랑스럽게 홍보하는 길이라고 한다. 나만의 최고 드라이브 코스 리스트에 영덕 블루로드도 추가하였다.
둘째날 여행지는 영덕의 괴시리전통마을이다. 괴시리전통마을은 고려시대부터 거주해온 유서 깊은 마을로 괴시리마을의 한옥은 'ㅁ'자형을 취하고 있다. 'ㅁ'자형은 재력이 많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한옥에서 취하는 구조다. 종종 중부지방에서 보이는 'ㄱ'자형, 'ㄴ'자형 한옥구조도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함창 김씨의, 조선후기부터는 영양 남씨의 집성촌이 되었다고 한다. 영덕의 괴시리전통마을이 이름을 알린 건 고려 말 대학자 목은 이색의 탄생지이기 때문이다. 목은 이색의 외가가 함창 김씨 집안이었다. 목은 이색은 경북지역을 성리학의 메카로 만드는데 일조한 대학자이기도 하다. 한국 최초로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이 경북 영주 출신이고, 목은 이색이 또 경북의 영덕 출신이 아닌가. 그의 출신만으로 경북지역을 성리학의 중심지로 만들 만큼 목은 이색은 고려 말 지성계에서 입지가 대단했다. 목은 이색은 젊은 시절 원나라로 유학을 가서 성리학을 공부했다. 원나라에서 관직생활까지 맡은 경험이 있는, 흔히 말하는 유학파 출신의 목은 이색은 고려 귀국 후 고려의 개혁군주였던 공민왕에게 발탁되었다. 공민왕은 목은 이색을 중용하였는데, 목은 이색을 오늘날의 서울대학교 총장격인 성균관대사성에 임명하여 후진 양성에 힘쓰도록 했다. 공민왕은 젊은 세대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새로운 세대야말로 고려의 미래라며 성균관을 개혁하고 목은 이색에게 향후 세대를 길러내라는 막중한 임무를 주었다. 그래서 목은 이색은 본인의 학업적 성취도보다는 기라성 같은 신진사대부들의 스승이라는 이미지가 더 강하다. 온건, 급진을 떠나 당대 성리학을 공부하던 젊은 신진사대부들 예컨대 정몽주, 정도전, 하륜, 이숭인, 권근 등이 모두 그의 제자였다. 하지만 목은 이색은 스스로 키워놓은 제자들을 다소 부담스러워했다. 신진사대부들은 개혁에 목말라하며 패기롭게도 기득권을 쥐고 있던 권문세족과 다투기 일쑤였다.
목은 이색은 흔히 제자인 포은 정몽주, 정몽주의 제자인 야은 길재와 함께 고려에 마지막 충정을 다 한 '삼은'이라고 엮이기도 한다. 목은 이색은 이성계의 왕위찬탈과 역성혁명을 매우 비판적으로 막으려고 했으며 조선 개국 후 이성계의 거듭된 러브콜에도 모두 무시하고 유배의 길을 택했다. 그렇지만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가 완전히 같은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다. 물론 목은 이색은 스스로 밝히기를 자신의 제자 가운데 가장 학문적으로 뛰어나고 또 자신이 가장 총애하는 제자는 정몽주라 칭찬 일색이었지만, 적어도 이성계와 정도전이 역성혁명의 뜻을 밝히기 전까지는 정몽주와도 정치적으로 대립했다. 설령 목은 이색이 모든 신진사대부의 스승이라했던들 그는 구세대를 대표하는 한 사람이었다. 신진사대부를 탄압하고 그들이 적으로 두었던 권문세족과도 목은 이색은 서스럼없이 교류하며 지냈다. 정계에 진출한 신진사대부들이 내놓은 개혁안에 언제나 회의적이었다. 개혁에 가장 주도적이었던 정도전, 정몽주는 그런 목은 이색과 거리를 두었다. 목은 이색이 이성계의 정권 장악에 큰 장애물이기도 했고 말이다. 위화도 회군 직후 이성계가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려고 이미 설계를 다 해놓은 상황에서 이성계의 뒷통수를 치고 폐위된 우왕의 어린 아들 창왕을 일명 '날치기' 식으로 추대하였다. 이때는 정몽주도 스승 이색에게 크게 실망했다. 하지만 이성계, 정도전이 노골적으로 역성혁명의 뜻을 내비추자 정몽주도 정도전과 손절을 하고 스승 목은 이색과 힘을 합해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막았지만 실패했다. 아끼던 제자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살해당했고, 이색의 아들들까지 정도전의 희생양이 되었다. 목은 이색은 구세대를 어느 정도 변호하던 기득권이었으면서, 고려에 충절을 지키려 했던 충신인 동시에, 새시대의 희생양이었다.
괴시리전통마을은 그 유서 깊은 역사에 비해 인적이 북적이지 않아서 편안하고 안온하게 걸을 수 있는 마을이다. 전체를 다 돈다면 꽤 시간이 걸리겠지만 정갈한 한옥들 구경하고 소소한 바람소리에 집중하고 한옥의 정취에 취하다 보면 짧은 시간에 감수성을 꽉 채우고 나올 수 있는 곳이다.
점심은 허영만 화백님이 추천해준 '영덕물가자미전문점'에서 물가자미를 먹기로 하였다. 식당이름부터 저렇게 정직하고 직설적일 수 있을까. 대게만큼은 아니지만 영덕은 매년 4월 물가자미축제를 개최할 정도로 영덕은 물가자미로도 유명하다. 물가자미는 가자미 종류 중 그렇게 크지는 않은 종에 속하며 바닷바람에 말려 먹으면 그렇게 맛이 좋다고 한다. 바닷바람에 말린 물가자미는 식해, 매운탕, 구이 등 다양하게 요리가 가능하다. 바닷바람에 말리지 않는다면 회나 물회로도 많이 사랑을 받고 있다. 간혹 기름가자미와 혼동되기도 하는데 엄연히 다른 어종이라고 한단다. '영덕물가자미전문점'은 영덕에서 가장 유명한 물가자미집이다. 확실히 점심시간에 맞춰 가니 웨이팅이 있었지만 바다를 접하고 있어 하염없이 바다를 구경하다보니 금세 우리 순서가 왔다. 물가자미 요리들이 다양하게 있는데 정식을 주문하면 구이와 매운탕까지 먹을 수 있다.
기차역으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강구항에 한 번 더 들린다. 강구항 정가운데에 대게 모형이 조각되어 있는 대게공원이 있고 꽤 넓은 공원에 방파제 위로 바다와 함께 파도소리까지 시청각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다. 하지만 아직은 좀 춥다... 대게 끝장을 보고 싶어 나와 일행은 대게빵까지 포장구매한 후 두 손 든든하게 귀가했다.
영덕여행과 관련하여 소개하고 싶은 그림이 있다. 김홍도의 <해탐노화도>다. 조선시대의 화조화에서는 각각의 동식물이 상징하는 바가 있었다. 게는 집게로 잘 집는다고 하여 시험의 합격을 의미했고, 과거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에게 게 그림을 선물하는 관례가 있었다. 김홍도의 <해탐노화도> 역시 그런 의미에서 제작된 그림이다. 하지만 확실히 조선 최고의 화가답게 김홍도의 <해탐노화도>는 단순히 시험 합격을 기원하기만 하는 그림이 아니다. 좌측상단부에 김홍도는 무언가 글귀를 적어두었다. 해룡왕처야횡행(海龍王處也橫行). 바다의 용왕 앞에서도 게는 옆으로 걷는다는 뜻이다. 게가 옆으로 걷는 것은 게의 본모습이고 본질이다. 따라서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가 국가의 녹을 먹는 공무원이 된다면 처음 과거에 합격했을 때의 마음가짐과 본모습을 잊지 말고 더 나아가 권세가의 앞에서도 자기 모습을 잃지 말라는 뜻이다. 김홍도는 평범한 사물을 그림에 있어서도 인문학적 가치와 소양을 찾아내어 그림에 담아냈기에 우리 역사 최고의 화성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한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책 추천
- 백상태 <소설 신돌석>
영덕 여행을 하며 소개해드리지 못한 한 분이 있습니다. 한국 최초의 평민의병장 신돌석입니다. 때는 국권의 피탈되고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웠던 20세기. 거대한 치욕이 있을 때마다 왜적을 몰아내기 위해 전국적으로 의병이 거의했습니다. 그 첫 의병은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일어난 을미의병이었고, 두 번째 의병은 을사늑약 체결 후 일어난 을사의병이었습니다. 을사의병 당시에 큰 화제를 모은 의병장이 있었는데 바로 신돌석이었습니다. 원래 의병이라 함은 양반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임진왜란부터 시작한 의병의 문화는 양반이 의병장이 되어 여러 신분의 병사들을 모으곤 했는데 을사의병의 신돌석은 상민 출신의 의병장이었던 거죠. 오로지 상민으로만 구성된 부대도 아니었거니와 양반층도 있었습니다. 영덕 영해 출신의 신돌석은 영릉의진을 조직 후 영덕-울진-삼척 등 동해안 지역에서 활동했는데 영릉의진의 근거지가 동해안을 끼고 있던 태백준령이었던지라 신돌석의 별명이 '태백산 호랑이'였다고 합니다. 소설 신돌석의 저자 백상태 소설가도 영덕 출신이며 그의 지인 할아버지가 한때 영릉의진에 몸을 담았다고 하는데, 상민 출신인지 신돌석에 대한 전설만 난무하고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여 소설로 신돌석 장군을 담아냈다고 합니다. 비록 소설이지만 의진에 참여한 대원들은 실명을 그대로 사용했으며 전문연구자의 조언까지 받아간 역사소설이기에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브렛 파이퍼 감독의 <퀸 크랩>
B급 영화 한 편 추천드리겠습니다. 잘못된 거대화 실험의 실수로 미국 어느 한 호숫가의 민물게가 거대 게로 변해버리는데, 게가 작았을 때부터 게를 키워온 소녀 멜리사는 마을 사람들 모르게 거대해진 게를 키웁니다. 하지만 게가 새끼를 낳으면서 마을 사람들에게까지 해를 가하고, 마을 사람들은 게를 죽이기 위해 모이지만 멜리사는 게를 지키려고 하는 좌충우돌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처음 보면 다소 당황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저화질에, 촌티나는 CG, 엉성한 자막. 하지만 이런 것들이 B급 영화의 매력입니다. B급 영화 매니아들이 많은 만큼 거칠고 조악하고 날 것 그대로의 매력이 B급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일텐데요, 브렛 파이퍼 감독은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항상 B급 크리처물을 만든 감독입니다. B급 영화에 익숙하지 않으신 분들에겐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1980년대 미국영화시장을 풍미했던 그때의 그 감성을 현대에서도 100% 느낄 수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