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여행하기에 좋은 이유
‘딸랑딸랑’ 어렴풋한 종소리에 이어 ‘끼이익~’ 바퀴가 철로에서 멈추는 마찰음이 들려왔다. 트램 소리다. 잠에서 깨 창밖을 내다보니 아직 어둑한 새벽이다. 가로등 불빛이 사위지 않은 적막한 알파마 언덕을 새벽 트램이 깨운다. 리스본 트램은 어제도, 그제도, 일 년, 십 년, 백 년 전에도 이 시간에 묵묵히 알파마 거리를 지났겠지. 하지만 나에게는 영화 속에 등장할 법한 처음 보는 낯선 풍경이다. 한잠 푹 자고 일어났더니 몸이 한결 가벼웠다. 주위를 휘감은 낭만적인 공기에 마음이 묘하게 달떴다.
작은 인기척과 숨소리도 숨어버린 고요한 시간. 바닥에 놓인 조약돌마저 보이는 산속 깊은 곳 얼음장 같은 투명한 샘물처럼 공기가 맑은 한겨울 이른 새벽을 좋아한다. 어둠이 잦아들고 동트기 직전 채도가 높은 푸르스름한 하늘에 마지막 별이 반짝이는 몽환적인 순간은 몇 번을 경험해도 현실이 아닌 것 같다. 행복한 일들만 벌어지는 비현실적인 마법 세상 속에 빨려 들어간 기분이다. 창문을 열고 어둠 속으로 은은하게 스민 가로등 불빛과 고요한 거리를 멍하니 바라본다. 포르투갈 가을의 이른 새벽바람은 한겨울처럼 차갑지는 않았다. 몽롱하게 잠이 덜 깨어 이국적인 풍경을 눈에 담던 이 순간이 아련한 꿈 같기도 하다.
포르투갈은 유럽 이베리아반도 스페인 서쪽에 있고 수도는 리스본. 국기는 왼쪽부터 세로로 1/3 정도는 녹색, 나머지는 붉은색 바탕이고, 색상 경계선에 고풍스러운 문양이 그려져 있다. 포르투갈은 브라질을 식민 지배했고 신항로 개척에 앞장선 한때 유럽의 강국이었다. 2002 한일 월드컵에서 우리나라와 치열한 경기를 펼쳤고, 당시 레알 마드리드 소속이던 유명한 축구 선수 루이스 피구도 포르투갈 국가 대표로 출전했다. 서쪽의 끝이라고 불리는 호카곶과 노란 트램이 유명하다. 이젠 우리나라에서 날강두로 통하는 호날두의 고향이고, 최근 UEFA 유로 2016에서 우승했다.
이름만 들어본 잘 알지 못하는 중동과 남미, 동유럽과 아프리카의 수많은 나라와 비교하면 포르투갈은 정말 잘 알고 있는 편이다. 가령, 동유럽 내륙에 있는 몰도바는 휴양지 몰디브와 헷갈리고, 유럽 발칸반도의 오랜 영토 분쟁 지역인 코소보는 자꾸 아프리카 국가 같다. 남미의 볼리비아와 유럽의 불가리아도 한국어로 표기했을 때 철자와 발음이 비슷해서 나라와 대륙을 연결 지으려면 한참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지난 십여 년간 유럽을 몇 차례나 다녀왔는데도 희한하게 포르투갈을 여행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스페인을 여행할 때 하루, 이틀 정도 잠깐 들르는 여행지로 생각했다. 그렇게 포르투갈을 거쳐온 지인에게 ‘포르투갈? 거긴 어땠어?’라며 신기하다는 투로 묻곤 했다. 다들 생각보다 무척 좋았고 좀 더 길게 머물고 싶었다고, 다음에는 포르투갈만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대답했다.
지인이 쓴 포르투갈 여행기를 읽고 지금껏 내 여행 선택지에 들지 않았던 포르투갈을 여행해보기로 했다. 지인이 묘사한 포르투갈은 별 관심 없이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매력적이었다. 옆 나라 스페인처럼 국토가 크지는 않지만, 도시마다 개성이 강하고 볼거리가 많았다. 내가 계획한 휴가 기간인 열흘가량 여기저기 둘러보기에 적당했다. 도시 간 이동 거리가 멀지 않아서 고속버스나 비행기를 타지 않고 계속 기차를 타고 이동할 수 있다. 수도인 리스본에서 포르투갈 제2의 도시인 북쪽에 있는 포르토 Porto까지 기차로 3시간가량 걸린다. 신트라, 오비두스, 아베이루, 코임브라 등 근교 도시는 리스본이나 포르토에서 대부분 기차로 1~2시간 안에 갈 수 있다.
포르투갈 9월 초 기온은 18~28도 사이로 무덥지 않고 강수 확률은 약 10%로 대체로 화창하다. 야외에서 볕을 쬐며 한껏 걸어 다닐 수 있는 여행하기 딱 좋은 날씨이다. 우리나라나 이탈리아처럼 기후가 온난하고 바다를 끼고 있으니 육지와 바다에서 나는 풍부한 식재료 덕분에 다양한 요리 문화가 발달해서, 음식이 한국인 입맛에도 맞겠거니 생각했다. 참고로 포르투갈 여행 최적기는 5~9월이다. 대서양을 인접한 해양성 또는 지중해성 기후라 여름에는 한국보다 덜 덥고 겨울에는 춥지 않다. 여름 최고 기온은 27~28도, 겨울 최저 기온은 8~10도 사이이다. 강수량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10~4월은 평균 이틀에 한 번꼴로 비가 자주 내린다. 이때는 체감온도가 낮고 비가 잦으니 여행하기에 좋은 계절은 아니다.
혼자 여행할 때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요소는 치안이다. 론리플래닛은 여성이 혼자 포르투갈을 여행하다가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했다. 먼저 여행을 다녀온 이들의 블로그를 참고하니 혼자 여행하기에도 괜찮아 보였다. 술집 등 가게가 일찍 문을 닫는 여타 유럽과 달리 밤에 광장에서 사람들이 여유롭게 시간을 즐긴다고 했다. 물론 어디를 여행하든 늘 주의를 기울이고, 인적이 드문 으슥한 골목에 가지 않는 자세는 기본이다.
포르투갈은 2019년 세계평화지수에서 아이슬란드, 뉴질랜드 다음으로 3위를 기록한 치안이 안정된 나라다. 세계평화지수는 국내 치안을 비롯해 전쟁 발발 가능성, 테러 위협 등 외부 위협도 반영한다. 포르투갈은 알면 알수록 더 흥미로웠고 우리나라와 비슷한 면모도 눈에 띄어서 금세 정이 갔다.
예상을 비껴간 한 가지는 관광객 수였다. 우리나라에는 덜 알려진 다소 낯선 나라여서 순전히 자기중심적인 사고로 방문객이 많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실상은 전 유럽인에게 손꼽히는 인기 여행지인지 너무 붐벼서 혼자 식당에서 점심 먹을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사람으로 붐볐다. 이른 아침부터 제로니무스 수도원과 벨렝탑에 끝없이 늘어선 줄을 보고 어찌나 놀랐는지 모른다. 마치 우리나라 부부동반, 동창회 모임 등에서 제주도나 일본, 중국을 단체 관광하듯이 관광버스를 대절해 단체 여행을 하는 중년 이상의 유럽인이 자주 눈에 띄었다. 포르투갈은 작은 위(胃)로 많은 음식을 소화하는 식탐이 넘치는 대식가처럼 도시 규모나 관광 자원에 비해 넘치는 관광객을 겨우 꾸역꾸역 소화하고 있었다.
실제로 유엔 세계관광기구(UNWTO)에 따르면 포르투갈 외국인 관광객 수는 2011년 741만 2,000명에서 2016년 1,142만 3,000명으로 5년 새 54.1% 증가했다. 최근에는 1,300만 명의 외국인이 관광하며 세계에서 가장 많이 방문하는 나라 20위 안에 들었다. 아름다운 자연, 좋은 기후, 저렴한 물가에 안전한 나라라는 인식이 더해진 덕분이다. 예를 들어 독일인은 해외 여행지로 터키, 이집트, 튀니지를 선호했는데 연이어 테러가 발발하자 대신 포르투갈, 스페인, 불가리아를 찾는 관광객 수가 급증했다. 더불어 저비용항공사(LCC) 이용이 확산하면서 포르투갈 인근 유럽 국가에서 방문하는 유럽인이 많아졌다.
12년 전 피렌체 유스호스텔에서 만난 베네치아에서 오는 길이라고 소개하던 호주인 소피 언니가 생각났다. 다인실 이층침대에서 나는 위, 소피는 아래를 배정받았는데, 만나자마자 그녀는 우리가 원래 알던 관계인 것처럼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오며 가족에게 선물하려고 산 베네치아의 독특한 가면을 보여줬다. 아직 그곳의 감흥에 젖어서는 베네치아는 정말 아름다우니 꼭 한번 가보라고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이후, 나는 베네치아를 언젠가 꼭 가고 싶은 꿈의 도시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리스본에서 과도한 관광객에 종일 치이고 나니, 일찍이 오버투어리즘 때문에 몸서리를 치고 있는 베네치아 여행은 아쉽게도 꿈에 그치게 될 것 같다.
▼ 이 글을 바탕으로 더 많은 사진과 보실 수 있도록 내레이션을 넣어 영상으로 제작했습니다. 관심있는 분은 아래 영상을 살펴봐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