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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Dec 15. 2020

포르투갈 여행 첫째 날, 오후 6시에 잠들다

마침내 호스트를 만나다

다시 상점에 도착하자 주인아저씨께서 한 번 더 호스트에게 연락을 넣어 주셨다. 곧이어 청바지에 체크무늬 남방을 입은 유쾌한 젊은 여성이 가게로 들어왔다. 호스트 앨리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뒤 마침내 숙소 건물에 입성했다. 어두운 복도를 몇 걸음 걷자 바로 계단이 나타났다. ‘휴~ 육중한 캐리어를 들고 저 계단을 올라야 하는구나.’ 싶어서 속으로 한숨이 지어졌다. 웬걸! 앨리가 계단 맞은편에 옷장처럼 생긴 여닫이문 두 개를 열자 깜짝 선물처럼 엘리베이터가 나타났다. 텔레비전이 귀하던 시절에 자개장 속에 TV를 넣고 자물쇠로 잠가서 보관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안방마님인 할머니가 자물쇠를 풀고 자개장을 개방해야 비로소 온 가족이 신기한 상자 속 움직이는 영상을 볼 수 있었다고. 의외의 장소에서 등장한 엘리베이터는 꼭 자개장 속 티브이처럼 귀한 보물 같았다.


숙소는 사진을 보고 예상한 것보다 더 넓고 쾌적했다. 원룸인 줄 알았는데 거실과 방이 분리돼 있었다. 언제 밟아봤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나무 바닥이 내는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정겨웠다. 창이 커서 빛이 잘 들고, 앞이 탁 트여서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와 알파마 일대가 내려다보인다.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하릴없이 창가에서 온종일 멍하니 앉아 있어도 괜찮겠다 싶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알아듣지 못하는 그들의 말소리를 배경음 삼아 듣고 있자면 생채기 난 마음에 새살이 돋을 것 같았다.


리스본에서 머물렀던 숙소 거실


리스본에서 머물렀던 숙소 침실




앨리는 친구와 함께 숙소 두 개를 운영 중이라고 했다. 한국에서 포르투갈까지 환승을 포함한 비행 여정을 들은 그녀는 길고 긴 비행시간에 놀랐다. 리스본이 마음에 들 거라면서 와인 한 병을 주었는데, 뜻밖의 선물에 고마웠다. 자신과 친구의 연락처를 알려주고는 무슨 일이 생기면 꼭 문자를 남기되 급하면 전화를 하라고 했다. 자신에게 연락이 닿지 않으면 친구에게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다행히 리스본에서 지내는 동안 별일은 없어서 앨리의 동업자를 만날 기회는 없었다.


또래보다 약간 늦게 11살 때 처음 A, B, C, D 알파벳을 배웠다. 영어는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초등학교 3학년부터 순차적으로 정규과목으로 도입되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6년간 정규 교육 과정에서 영어는 중요한 과목이었다. 대학에서는 영어 교재를 사용하거나 아예 영어를 구사해 수업하기도 했다. 많은 기업은 정해진 토익 점수와 오픽 레벨을 지원 자격으로 요구한다. 실제로 업무를 할 때 영어를 사용할 일이 거의 없더라도 영어는 기본 중 기본 스펙이다. 그러고 보면 영어를 떼려야 뗄 수 없는 환경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앨리와 그녀의 모국어인 포르투갈어도, 나의 모국어인 한국어도 아닌 영어로 소통하느라 평소와 달리 한 자 한 자 또렷하게 발음을 하고 있자니 기분이 묘하게 이상했다.


영국 어학원에서 한 친구가 영국인 선생님께 ‘영어가 서툰 우리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듣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선생님은 자신과 직접 대화를 할 때는 상대방에게 모호한 표현을 되물어볼 수 있어서 거의 다 알아듣는다고 했다. 가끔 학생들끼리 영어로 대화할 때, 원어민인 자신은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오히려 학생들은 서로 잘 알아듣고 대화가 통해서 신기할 때가 있다고 했다. 앨리는 어떤 과정으로 영어를 익혔을까. 그녀가 다닌 학교에서도 영어가 필수 과목이었을까. 우리는 불완전한 타국의 언어로 제대로 서로 소통하고 있을까.




떠나기 전 앨리가 도시세 3유로를 요구했다. 도시세? 그게 뭐지? 적은 금액이지만 내 사전 정보에는 없던 말이라 티가 날 만큼 당황했다. 대략 리스본의 환경 보전과 관광 발전을 목적으로 모든 관광객에게 징수하는 세금이라고 이해했다. 꽤 많은 유럽 도시를 여행했고, 직전 해에는 런던과 에든버러, 파리를 다녀왔는데 숙소에서 직원에게 직접 현금으로 세금을 지불한 적은 없었다. 내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머뭇거리자 앨리는 자신이 갖는 돈이 아니라 자신은 전달자라면서 증명서 같은 걸 보여줬다. 그녀의 상세하고 설득력 있는 설명에 작은 가방에서 주섬주섬 3유로를 찾아 건넸다. 앨리는 고맙다며 리스본에서 머무는 동안 즐겁게 지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마침내 완전히 혼자였다. 그런데 홀로 남겨지자 간신히 참았던 두통과 체기가 더 심해졌다. 현지 시각으로 여섯 시가 되지 않아 밖은 여전히 환한 늦은 오후였다. 오랜 여정에 먼지와 땀으로 범벅일 텐데 짐 정리는커녕 고양이 세수도 못 한 채 침대에 그대로 뻗어버렸다. 여행지에 도착하자마자 대낮처럼 밝은 시간에 잠들기는 처음이다. 모든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치자 방안에 어둠이 찾아왔다. 나는 바깥과 완전히 차단된 고요한 공간에서 주체할 수 없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참고로 도시세(City Tax)는 유명 관광지에서 해당 지역의 인프라를 형성하고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관광객에게 부과하는 일종의 여행자 체류세이다. 숙박세(Bed Tax), 여행자세(Tourist Tax), 호텔세(Hotel Occupancy Tax, Hotel Room Tax, Transient Accommodations Tax) 등으로 불린다. 숙박업소를 이용할 때 숙박한 기간에 인원수를 곱해서 의무적으로 지불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금액은 여행 지역, 숙소의 등급, 여행 시즌 등에 따라 다르다. 보통은 숙박 후 체크아웃 때 지불한다. 그러고 보니 숙소 예약 바우처에서 ‘불포함 사항: 1박 1인 기준, 도시세 Euro 0(숫자로 표기한 금액)’이라는 내용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나는 2018년 여행에서 포르투갈 각 도시의 도시세로 리스본은 1박에 1유로, 포르토는 1박에 2유로를 냈고, 신트라는 지불하지 않았다.


도시세는 관광객 수가 급증해 환경 문제, 소음 문제 등 오버투어리즘 문제가 불거지자 마련한 정책이다. 우리나라에서 매년 제주도 여행객 수가 증가하면서 관광세 또는 입도세를 도입하는 정책을 추진한다는 방안도 같은 맥락이다. 제주도도 환경 파괴, 생활폐기물 처리 비용 부담 등의 문제를 해소한다는 명목인데 찬반 논란이 뜨겁다.며칠 리스본 거리를 거닐고 보니 도시세를 징수하는 이유를 납득했다. 포르투갈 유명 관광지는 그야말로 오버투어리즘의 표본이었다. 9월의 포르투갈은 나와 같은 관광객으로 거리 전체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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