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에서 바라본 리스본 풍경
드디어 꿈에 그리던 포르투갈에 발을 디뎠다. 리스본 포르텔라국제공항 출입문을 나서자 푸르른 하늘과 따뜻한 햇볕이 반겨준다. 상쾌하게 화창하다. 마음껏 걸어 다니며 여행하기에 딱 좋은 날씨이다. 스히폴공항에서 이륙이 지연된 이유였던 짙은 안개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곧바로 숙소까지 이동할 택시를 잡는다. 포르투갈어 ‘올라 Olá’에 이어 영어 ‘헬로 Hello’로 인사를 건네는 택시기사님을 만나니 ‘내가 정말 포르투갈에 왔구나’라는 현실감이 들었다.
공항에서 시내까지는 약 7km로 가깝다. 지하철로 리스본 중심부인 호시우 Rossio역까지는 25분 정도 걸린다. 공항버스도 중심부에 있는 카이스 두 소드레 Cais do Sodre에 정차하고 표는 편도 3.5유로, 왕복 5.5유로이다. 택시는 15분가량 걸리고 요금은 20유로 정도이다. 다른 이동 수단과 비교하면 택시 비용이 싸지는 않다. 하지만 숙소가 있는 알파마 Alfama의 돌로 포장된 고르지 않은 언덕길을 캐리어를 끌고 낑낑대며 올라갈 수는 없었다. 아직 리스본 지리에 익숙하지 않기에 한 번에 제대로 찾아간다는 보장도 없다. 게다가 고된 비행 여정으로 나는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포르투갈은 유럽에서 상대적으로 물가가 낮은 나라이다. 관광지는 현지인 생활 지역보다 물가가 높을 텐데 한국과 비교했을 때 포르투갈 물가가 높다는 인상은 전혀 받지 못했다. 품목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서울과 비슷하거나 약간 더 싸다고 느꼈다. 참고로 2018년 빅맥 지수는 한국 4.1달러(20위), 포르투갈 3.9달러(24위로)로 비슷하다. 포르투갈이 속해 있는 유로존은 4.8달러(17위)로 포르투갈보다 0.9달러 높았다.
포르투갈 관광지의 외식비가 한국의 일반 식당보다 약간 높은 수준이니, 아마도 현지인이 이용하는 일반 식당은 한국과 비슷하거나 더 저렴할 것 같다. 디저트와 커피, 차(tea)는 확실히 포르투갈이 더 쌌다. 가로수길이나 연트럴파크 유명 카페에 있을 법한 조각 케이크가 한화로 5,000~6,000원가량인데 맛이 기가 막혔다. 달콤한 포르투갈 디저트 덕분에 여행은 더욱 행복했다. 잊을 수 없는 포르투갈 디저트를 맛보러 꼭 다시 한번 이 나라를 방문하고 싶어졌다.
공항을 조금 벗어나자 강이라기엔 너무 넓은 테주강 Rio Tajo이 나타났다. 짙푸른 강물 너머로 별처럼 반짝이는 햇살이 눈부시다. 조금 더 가자 고급 대형 호텔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크루즈선들이 나타난다. 여러 척이 나란히 정박하고 있어서 처음에는 배 모양 초호화 호텔인가? 싶었다. 타이타닉호가 영국 사우샘프턴 Southampton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사람들은 이처럼 놀랐을까. 말로만 듣던 크루즈선 실물은 객실이 몇 개인지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위용을 뽐냈다. 나도 언젠가 저 유람선을 타고 북대서양과 지중해, 오호츠크해 등을 누비는 상상을 했다. 유람선 선착장 맞은편에 있는 산타아폴로니아역 Santa Apolonia Station을 잘 기억해 두었다. 리스본에서 포르토로 가는 기차가 이곳에서 출발한다.
택시는 곧이어 알파마 지구에 들어선다. 처음 왔지만 단번에 이곳이 알파마라고 알아챘다. 택시가 언덕길을 따라 조성된 트램 레일이 깔린 좁은 일 차선 골목길로 진입했기 때문이다. ‘대체 이 좁은 길을 어떻게 운전하지?’ 놀라울 따름이다. 대관령에 터널이 개통되기 전 어렸을 때 아빠가 운전하시는 차를 타고 굽이굽이 대관령을 넘던 기억이 떠오른다. 운전하기에 알파마 골목길은 험한 대관령보다도 폭이 좁아 보였다. 조금만 핸들 각도가 틀어지면 차 옆면이 긁히거나 건물에 박을 것 같은 아슬아슬한 상황이 연출된다. 나 같은 초보 운전자는 차 보닛을 골목 너비에 정확하게 맞춰 자신 있게 들이미는 자체가 신기하다. 이 정도면 포르투갈인은 모두 운전 천재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포르투갈 운전면허 시험 난이도가 궁금해졌다.
마침내 숙소에 도착했다. 드디어! 잠시 뒤면 암스테르담 스히폴공항부터 그토록 바랐던 푹신한 침대에 몸을 파묻고 편안하게 누워서 쉴 수 있다. 하지만 낯선 여행지에서 모든 일이 쉽게 풀릴 리 없었다. 야속하게도 숙소는 잠겨 있었다. 당연히 프런트 데스크에서 예약을 확인하고 방을 안내받으리라 기대했는데, 그런 시스템이 아닌 모양이었다.
당황해서 숙소 건물 1층의 상점 주인에게 ‘이곳이 Alfama Riverview Hideout이 맞나요?’라고 물었다. 호스트가 미리 공유했는지, 다행히 상점 주인은 누군가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맞아요. 앨리는 기다리다가 다른 숙소에 갔어요. 두 시간 정도 이따가 다시 올 거예요. 제가 연락해 놓을게요’ 상점 주인은 친절하게 답변했다. 바로 숙소에 들어갈 수 없다, 또 기다려야 한다.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데, 간신히 참고 여기까지 왔는데. 눈앞이 아득했다. 리스본 오후의 따뜻한 햇볕 때문에 속이 더 울렁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햇살 기운을 받아 몸 상태가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더는 나도 내 상태를 알 수 없는 지경이었다.
“저…… 가방을 좀 맡아 주실 수 있을까요?”
상점 주인아저씨는 흔쾌히 캐리어를 맡아 주셨다. 호스트가 올 다섯 시에 가방을 찾아가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착오로 또다시 약속이 어그러질까 싶어서 시차와 서머타임을 고려한 현재 시각을 재차 확인했다. 급기야는 아저씨 손목시계와 내 스마트폰을 나란히 놓고 시간이 일치한다고 확인한 뒤에야 상점을 나설 수 있었다. 알고 보니 포르투갈에서는 에이비앤비처럼 운영하는 여행자 임대아파트가 성행인 듯했다. 앨리처럼 여러 개 건물을 관리하는 경우도 있기에, 사전에 공유한 체크인 시간을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뒤늦게 알게 됐다.
얼떨결에 리스본에 오자마자 짐도 풀기 전에 알파마 일대를 거닐게 되었다. ‘포르투갈’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다홍빛 붉은 지붕 집들 뒤로 짙푸른 테주강이 펼쳐지는 광경을 볼 수 있는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 Miradouro das Portas do Sol는 숙소에서 지척이었다. 이 풍경을 보고 싶어서 포르투갈에 왔는데, 어쩌다가 오자마자 여행을 온 목적을 달성했다. 포르타스 두 솔은 태양의 문이라는 의미인데, 내리쬐는 햇살을 머금어 총천연색 선명한 풍경이 펼쳐지는 전망대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알파마에는 여러 전망대가 있지만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는 사진이나 여행 책자에서 본 익숙한 풍경을 만날 수 있고, 알파마 중심지에 있어서 인기 있는 관광지이다. 우리나라 예능 프로그램 <비긴어게인 2>에서 김윤아, 윤건, 수현, 헨리 등이 버스킹을 선보인 장소이기도 하다. 네 시가 지난 늦은 오후여선지 관광객으로 붐비지 않는 전망대에서 탁 트인 전경을 바라보며 맑은 공기를 마시니 두통도 좀 가라앉는 듯했다.
메슥거리는 속을 달랠 겸 전망대가 내려다보이는 카페에서 콜라를 한 잔 주문했다. 테라스에 종이 인형처럼 축 처진 채로 앉아 시간을 때우다가 약속 시각이 다 되어 계산을 하러 갔다. 직원 중 한 사람이 ‘South Korea?’라고 묻더니 난데없이 김정은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아~ 머리야. 여기에서 그 이름이 갑자기 왜 나와. 멀어지던 두통이 유턴해서 되돌아오는지 참고 있던 피로감이 폭풍우처럼 몰려왔다. 내가 다짜고짜 ‘너희는 살라자르를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묻는다면? 말해 뭐해. 그는 민간인의 무고한 희생을 초래한 권력욕에 눈먼 독재자지. 이걸 굳이 말로 해야겠니? 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António de Oliveira Salazar는 포르투갈 총리였다. 그는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약 40년간 포르투갈 독재 정치를 이끌었다. 1936년 스페인 내전 때 프랑코 세력을 지원했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중립을 지키면서 연합군을 지원했다. 그러나 몰래 나치를 원조하며 유대인 수용소를 짓기도 한다. 무엇보다 1960년대 많은 나라가 아프리카 식민지의 독립을 인정할 때 계속 식민지 정책을 유지해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또한 국민이 정치에 무관심하도록 3F인 음악 Fado, 축구 Futebol, 신앙 Fatima를 유행시킨다. 안토니우 살라자르의 3F는 우리나라 제5공화국의 3S(스포츠 Sports, 섹스 Sex, 스크린 Screen)의 원조였다. 살라자르가 건강 이상으로 총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포르투갈 정부는 독재 정권을 유지하고 식민지 전쟁을 계속 벌인다. 이에 반발해 결국 1974년 4월 25일 좌파 청년 장교들이 주도하고 시민들이 지지한 카네이션 혁명 Revolução dos Cravos이 일어난다.
낯선 한국에 관심을 표시하고 싶은 포르투갈인의 마음이라 여기고 음료값을 계산한 뒤 숙소가 있는 상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제는 제발 혼자만의 공간에서 누워서 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 이 내용을 바탕으로 더 많은 사진과 보실 수 있도록 내레이션을 넣어 영상으로 제작했습니다. 관심있는 분은 아래 영상을 살펴봐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