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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Dec 17. 2020

아침 일찍 줄을 선 건 신의 한 수였다

마누엘 양식을 대표하는 '제로니무스 수도원'


제로니무스 수도원 Mosteiro dos Jerónimos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파스테이스 지 벨렝에서 바로 보였으니까. 막상 건물 앞에 도착해서는 잠시 주춤했는데, 수도원은 상상한 것 이상으로 웅장했기 때문이다. 거대한 규모에 압도돼 일순간 두뇌 회로가 멈춰서 렉 걸린 게임 캐릭터처럼 괜히 왔다 갔다 건물 입구를 서성였다. 한때 세계를 주름잡던 가장 잘나가던 시절, 포르투갈이 어느 정도 위상이었는지 실감이 났다. 이토록 큰 규모로 화려한 건물을 짓자면 얼마나 많은 자본과 인력이 동원되었을까. 세계 최고 해상 강국이라고 주변 국가에 얼마나 과시하고 싶었을까. 아무런 설명을 듣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외벽은 흰색빛인데 이른 오전이라 햇빛에 반사돼 노란빛으로 보인다


입장 시간은 오전 10시였는데, 9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도 이미 줄을 선 사람들이 있었다. 나타를 먹어서 배도 부르고, 수도원 주변을 대강 둘러본 뒤 딱히 할 일도 없어서 나도 그냥 뒤이어 줄을 섰다. 내가 30~50번째로 줄을 서기 무섭게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은 분 단위로 늘어났다. 대기 인원은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빠르게 증가하더니, 10시에 입장할 즈음에는 관람을 기다리는 줄이 건물을 둘러서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남는다며 괜히 여기저기 더 서성이지 않고 바로 줄을 서길 천만다행이었다. 




수도원은 이층으로 된 회랑이 뻥 뚫린 중앙을 네모 모양으로 감싸는 구조이다. 안에서 바라본 회장도 웅장하지만 위압적으로 커 보이지는 않는다. 회랑을 따라 1층을 걷다가 계단이 나타나자 올라가서 2층을 걸었다. 한참을 걷다가 뒤돌아서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을 다시 걸었다. ‘이 거대한 건물이 왜 아늑하게 느껴지지? 바깥에서 봤을 때보다 왜 작아 보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수도원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화려한 조각 장식 때문인 것 같다.


제로니무스 수도원 내부


수도원의 기둥을 넝쿨 식물이 타고 올라가고, 반원 창살에는 레이스가 달려있으며, 천장 지지대가 교차하는 지점에는 꽃이 활짝 피었다. 이처럼 자연을 묘사한 화려한 조각 장식이 시선을 분산시키고, 자칫 위압적일 수 있는 수도원의 분위기를 상쇄시키는 듯했다. 사람이 안경을 쓰거나 패턴이 강렬한 옷, 화려한 장신구를 착용했을 때, 강조한 패션에 이목이 쏠려 시선이 분산되는 효과와 비슷해 보였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대표적인 마누엘 양식 Manuelino 건물인데, 마누엘 1세의 이름을 딴 이 양식은 동물과 식물, 밧줄, 산호, 조개 등 자연에서 영감을 얻었다. 전 유럽에 고딕 양식이 유행하던 시절에 차별화한 자신들만의 건축 양식을 창안한 당시 포르투갈인의 자부심과 고집이 느껴진다.


제로니무스 수도원 회랑




유럽인 최초로 대서양과 아프리카 남해안을 거쳐 인도에 발을 디딘 탐험가는? 이 퀴즈 단골 질문의 답은 바스쿠 다가마 Vasco da Gama이다. 1498년 바스쿠 다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은 항해 왕자 엔히크가 대서양 탐사를 시작한 지 80년 만에 이룬 결실이었다. 마누엘 1세 Manuel I는 이 역사적인 사건을 널리 알리고자 수도원 건설을 명령한다. 비용은 인도에서 리스본으로 들여오는 향신료의 세금 5%로 충당한다. 1502년 건설을 시작한 수도원은 거의 한 세기가 지나서야 완성된다. 이곳에는 4세기에 걸쳐 선원의 안녕을 빌고 왕을 위해 기도한 성 제롬(히에로니무스) 수도회 소속 수도사가 거주했다.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항해 왕자 엔히크가 지은 산타 마리아 성당 옆에 지어졌다. 성당 입구 양쪽에는 포르투갈 위인 두 명이 잠든 석관이 있다. 왼쪽에 십자가와 선박, 혼천의가 새겨진 석관은 바스쿠 다가마, 오른쪽에 월계관, 악기, 펜이 새겨진 것은 지금까지도 존경받는 16세기 시인 루이스 바즈 드 카몽이스 Luís Vaz de Camões의 무덤이다. 바스쿠 다가마는 식민지 시대를 불러온 인물이지만 제로니무스 수도원에 묻힐 만큼 포르투갈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바스쿠 다가마가 인도를 발견한 이후 포르투갈은 무역으로 부를 축적해 세계 강대국 대열에 진입했으니 말이다.




나는 이 게임을 해본 적은 없지만 대항해시대 게임이 리스본에서 시작한다고. 이 게임 덕분에 포르투갈을 몰라도 리스본은 들어봤다는 사람을 여럿 봤다. 역시 게임 설계에는 다 이유가 있는 모양이다.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수도원 앞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방탄소년단 같은 슈퍼스타가 출현했을 때 사람들이 이렇게 몰려들겠지? 포르투갈 9월 한낮의 뜨거운 볕을 피하고자 새벽 일찍부터 움직인 건 가히 신의 한 수였다. 때로는 일찍 일어나는 새가 정말로 벌레를 잡기도 한다.



▼ 이 내용을 바탕으로 더 많은 사진과 보실 수 있도록 내레이션을 넣어 영상으로 제작했습니다. 관심있는 분은 아래 영상을 살펴봐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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