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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Mar 22. 2021

남미에서 왜 브라질만 포르투갈어를 사용할까?

포르투갈 발견 기념비와 벨렝탑

제로니무스 수도원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면 발길은 자연스레 발견 기념비 Padrão dos Descobrimentos와 벨렝탑 Torre de Belém으로 향한다. 어지간한 한강 어디서든지 보이는 123층 높이를 자랑하는 마천루 롯데월드타워처럼 테주강변에 자리한 이 거대한 건축물들은 멀리서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제로니무스 수도원, 발견 기념비, 벨렝탑은 포르투갈이 가장 번영했던 영광의 시대를 간직해서인지 지어진 시기나 사용 목적은 달라도 꼭 서로 닮은 세쌍둥이 같다.


회백색 외벽에 화려한 마누엘 양식으로 성벽 상단이 장식된 벨렝탑은 제로니무스 수도원의 일부분을 떼어다 만든 것 같다는 착각이 들 만큼 아름답다. 전략적 요충지에 적의 침입을 감시하고 리스본을 방어하고자 지어졌을 텐데 전쟁, 침략과는 관련이 없을 만한 ‘테주강의 귀부인’이라는 우아한 별명이 잘 어울린다. 지하 감옥에는 정치범을 수용했는데 만조 때는 썰물에 감옥이 잠겼기에 잔인하게도 수감자들은 숨을 쉬고자 필사적이었다.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난 19세기에 들어서는 본래 용도를 잃고 세관, 우체국, 전신국, 등대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되었는데, 바다 위 관청이라니 꽤 낭만적으로 들린다.


벨렝탑. 썰물 때라 물은 빠져 있었다. 기다리는 관광객 줄이 끝이 없었다.




사진으로 익숙한 발견 기념비는 상상보다 더 웅장했다. 높이 52m, 길이 46m인 발견 기념비는 1960년에 항해 왕자 엔히크 Infante Dom Henrique, o Navegador의 사후 500주년을 기념해 세워졌다. 주인공 엔히크는 뱃머리에서 카라벨선을 들고 신항로 개척시대의 주역들을 이끌고 있다. 엔히크는 포르투갈 아비스 왕조의 시조인 주앙 1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프리카 서쪽으로 많은 원정대를 보내 바닷길을 개척한다. 엔히크가 항해가와 지도제작자를 후원했기에 포르투갈 항해술은 크게 발전했고,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희망봉 발견과 인도항로 개척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이어졌다. 엔히크의 왼쪽 어깨너머로 다음, 다음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인물이 좀 전에 산타 마리아 성당에서 석관을 마주했던 바스쿠 다가마다. 그와 같이 잠들어 있던 루이스 바즈 드 카몽이스는 시인답게 이 기념비에서는 긴 문서를 들고 있어서 찾기 쉽다.


맨 앞이 엔히크 왕자, 문서를 든 인물이 카몽이스이다.


카몽이스는 왜 포르투갈 국민시인으로 불리며 여전히 존경받고 있을까. 카몽이스의 대서사시 <우스 루지아다스 Os Lusíadas>가 어떤 작품인지 알면 단번에 이해가 간다. 루지아다스는 포르투갈인이라는 의미이다. 현재 포르투갈 영토는 차례로 로마인, 서고트족(게르만), 무어인(이슬람) 등의 지배를 받아왔다. 고대의 루지타니아인은 로마 지배 이전에 스페인 서쪽 일부 지역을 포함해 지금의 포르투갈 영토와 비슷한 지역에 살았다. 포르투갈인은 루지타니아인을 가리키는 ‘루지아다스’를 포르투갈의 민족의 시조로 보고 있다.


<우스 루지아다스>는 바스쿠 다가마의 인도 원정을 바탕으로 한 극적인 줄거리를 부각해 포르투갈 역사와 신화 요소를 엮어 상상력을 발휘해 쓴 작품이다. 자신들의 민족적 기원을 배경으로 포르투갈인의 용기와 항로 개척 시대의 영광을 찬양하고 있다. 새로운 항로 개척과 해외 영토 확장에 성공해 최고로 찬란한 시기를 누렸던 16세기 포르투갈의 민족적 자긍심과 자신감을 표출하고 있다. 카몽이스가 바스쿠 다가마와 함께 산타 마리아 성당에 잠들어 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르네상스 시대 걸작으로도 손색이 없는 이 불후의 작품은 4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사랑을 받으며 포르투갈인의 정신적 성경으로 불린다.


다시 발견 기념비로 돌아가서,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발견한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Bartolomeu Dias는 엔히크의 왼쪽 어깨 뒤편 끄트머리에서 십자가 기둥을 붙잡고 있다.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1488년 희망봉을 발견했기에 10년 뒤 1498년 바스쿠 다가마는 인도 항로를 개척할 수 있었다. 당시 바르톨로메우 디아스의 희망봉 발견은 지중해 중심의 문화를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세 개 대륙을 바닷길로 연결하는 문화의 계기가 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발견 기념비에는 이후 포르투갈이 식민지로 삼은 브라질을 발견한 탐험가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 Pedro Álvares Cabral과 1522년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탐험가 페르디난드 마젤란 Fernão de Magalhães도 새겨져 있다.


발견 기념비. 멀리 4월 25일 다리가 보인다.


▼ 위 내용을 바탕으로 더 많은 사진과 보실 수 있도록 내레이션을 넣어 영상으로 제작했습니다. 관심있는 분은 아래 영상을 살펴봐주세요. ^^




포르투갈은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해양 세력이었으며 수 세기 동안 세계 곳곳에 방대한 영토를 소유한다. 심지어 다양성을 존중하는 태도를 당연하다고 여기는 현대인의 사고방식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도 벌어졌다. 1494년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둘이서 세계를 나눠 갖기로 한다. 스페인 토르데시야스에서 맺은 토르데시야스 조약 Tratado de Tordesilhas이다. 이 조약에서 선 하나로 지구를 양분해 동쪽은 포르투갈이, 서쪽 아메리카 지역은 스페인이 차지하기로 했다. 인도 고아 Goa, 중국 마카오 Macau, 거대한 땅 브라질 그리고 아프리카 기니비사우 Guiné-Bissau, 앙골라 Angola, 모잠비크 Moçambique, 카보베드레 Cabo Verde 등 많은 나라가 동쪽 지역에 해당한다.


보라색 실선이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정한 경계선이다


포르투갈은 식민지에서 실어 온 향신료, 금, 노예 등을 유럽에 팔아 큰돈을 벌었다. 전에 없던 번영을 맞이했고 왕실과 귀족, 부르주아 계층은 부를 축적한다. 마데이라 Madeira를 비롯한 대서양의 여러 섬과 브라질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해 설탕 산업으로 큰 소득을 올렸다. 유럽은 그들의 전리품에 열광했고 포르투갈은 점점 더 부강해졌다.


고등학교 세계 지리 수업에서 남아메리카에서 나머지는 전부 스페인이 지배했는데 왜 유일하게 브라질은 포르투갈이 지배했는지 의문이었다. 생각이 더 깊어지진 못하고 ‘시험으로 출제되기 좋은 문제네’라는 생각에 기계적으로 외우고 넘어갔다. 어느 날 갑자기 더 힘이 세지고 싶은 욕심과 과대망상으로 가득 찬 낯선 나라의 침략을 받아 자신들의 전통과 문화가 파괴되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을 사람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깨달음이 내 인생을 얼마나 변화시킬까도 싶지만,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다.


▼ 위 내용을 바탕으로 더 많은 사진과 보실 수 있도록 내레이션을 넣어 영상으로 제작했습니다. 관심있는 분은 아래 영상을 살펴봐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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