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 대지진이 남긴 것들
2007년에 난생처음 유럽 땅을 밟았다. 런던, 파리, 암스테르담,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로마와 피렌체 등 유럽 주요 도시를 여행했다. 사진으로만 보던 빅벤과 타워브리지, 에펠탑과 개선문, 콜로세움과 두우모를 둘러봤다. 그 앞에 서서 실제로 보면서도 이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인지 의심이 들 만큼 행복했다.
의외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사람들의 옷차림과 라이프스타일이었다. 이른 아침 동네 카페에서 아저씨나 할아버지가 홀로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신문을 읽는다. 내게 익숙한 아저씨는 간밤에 회식에서 소주로 달리고 다음 날 콩나물국이나 해장국으로 숙취를 달래는 사람이었다. 당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문화는 여성이나 젊은이들의 전유물이었다. 적어도 아저씨나 할아버지의 문화는 아니었다. 지금은 성별에 상관없이 우리나라에서도 카페 문화를 즐기지만 말이다. 물론, 유럽은 우리와 생활양식, 식습관, 역사적인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일찍이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카페 문화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첫 유럽여행에서 영화로 보던 서양인(?)의 아침 일상을 마주하니 그렇게 신기할 수 없었다.
아줌마나 할머니의 세련된 옷차림과 잘 꾸민 모습도 낯설었다. 같은 기차를 탄 중년 여성은 멋스런 가죽 장부츠를 신었고, 할머니는 치렁치렁한 진주 목걸이 등으로 개성을 드러냈다. 화제의 할머니 유튜버인 밀라논나 장명숙 디자이너처럼 중장년층과 노인도 자신의 취향을 반영한 스타일리시한 면모를 여과없이 발산했다. 오히려 젊은이들은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수수했고, 우리나라 젊은이들처럼 잘 꾸미고 다니는 청년을 길거리에서 보진 못 했다.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 당시 나에게 익숙한 중년 여성은 드라마 속 엄마로 등장하는 김혜자 씨나 고두심 씨 모습이었다. 수더분한 현모양처이거나 억척스러운 생선 장수 또는 식당 사장님으로, 공통점은 둘 다 자식 걱정에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당시 여행 중 파리에서 어쩌다가 몽파르나스 묘지 Cimetière du Montparnasse에 들어갔다. 시인 샤를 보들레르 Charles Pierre Baudelaire, 소설가 기 드 모파상 Guy de Maupassant,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 Samuel Beckett, 작곡가 세자르 프랑크 César Franck, 두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 Jean-Paul Sartre와 시몬 드 보부아르 Simone de Beauvoir 부부, 드레퓌스 사건의 주인공 알프레드 드레퓌스 Alfred Dreyfus 등 저명인사들이 묻혀 있었다.
길을 잘못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별 감흥 없이 각양각색 비석을 슬렁슬렁 보면서 지나가고 있었다. 때마침 곱게 단장한 프랑스인 할머니 한 분을 마주쳤는데 프랑스어로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셨다. 아마도 저쪽 어딘가에 가면 유명한 누군가의 무덤이 있다는 말씀인 것 같았다. 다만 나는 전혀 불어를 하지 못해서 정확한 말씀을 이해할 순 없었다. 내 표정을 보시고는 스페인어, 또 다른 언어로 바꿔가면서 말씀을 하셨지만 역시나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우와~ 할머니께서 무려 삼 개 국어를 구사하시네’라는 존경하는 마음이 담아 할머니를 바라보았는데, 정작 할머니는 가슴을 치는 행동으로 말이 통하지 않는 답답한 심경을 전하고 계셨다. 대화를 더 진전하지 못한 채 결국, 어쩔 수 없이 할머니는 할머니의 길을, 나는 나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계획한 여행지도 아니었고, 이십 대 초반에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거의 없어서 이날 나는 그 누구의 무덤도 찾아보지 않고 대충 둘러보고 말았다. 그런데 나에게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알려주고 싶어 했던 프랑스 할머니가 희한하게 잔상으로 오래도록 남았다. 세월이 흐르고 인생 경험치가 더 쌓이자 볼품없는 묘지일지라도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깨달았다. 아마도 할머니는 나에게 그런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 예전에는 볼거리가 없어 지루하다고 생각했던 여행지들이 있다. 언젠가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여행지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뼈대만 남은 리스본 카르무 수도원 Convento do Carmo도 그런 곳이었다.
1755년 11월 1일 토요일 오전 9시 40분, 대지진으로 리스본 전체가 무너졌다. 그 여파로 지진 해일이 몰려와 채 무너지지 않은 것들을 대서양으로 휩쓸어갔다. 그다음에는 큰불이 나서 물이 앗아가지 않은 것들을 전부 집어삼켰다. 리스본에 처참한 지진이 일어난 날은 하필 가톨릭교회의 대축일인 만성절, ‘성인의 날 Saint’s Day’이었다. 모든 성인을 흠모하고 찬미하기 위해 교회에 켜 둔 초들은 엄청난 화재를 불러왔다. 당시 리스본 시민의 3분의 1이 죽었다. 그 잔해가 영국과 아프리카 해안까지 떠밀려올 정도였다. 당시 리스본은 브라질에서 금이 들어오고 상인 계급이 번성했으며 웅장한 마누엘 양식이 꽃피었다. 번영하던 리스본은 하루아침에 초토화되었다. 이 일은 유럽 전체를 혼란에 빠뜨렸다. ‘공평하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마저 뒤흔들었다. 유럽은 이미 계몽주의 시대를 맞고 있었다. _알렉산드라 클로보우크, 『첫, 리스본(김진아 옮김, 안그라픽스, 2018)』중에서
산타 주스타 엘리베이터 Elevador de Santa Justa를 지나자 크지 않은 공터가 나타났고 오른편에 카르무 수도원 입구가 보였다. 입장한 뒤 계단에 한참을 앉아서 눈앞에 펼쳐진 폐허를 바라봤다. 약 300년 전 대지진은 아름다운 성당의 지붕과 벽체 등을 앗아갔다. 하얀빛 성당은 세월의 풍파를 겪으며 오래된 사진처럼 누렇게 바랬다. 산들바람을 느끼며 헐벗은 기둥과 아치를 바라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한때 아비규환이었을 비극이 벌어진 폐허에서 묘한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꼈다. 현재 나는 안전하다는 안도감일까. 상처는 결국 치유되어 회복된다는 믿음 때문일까. 거대한 재앙 앞에서 얼마나 무력했을까. 갑자기 닥쳐온 죽음 앞에서 무력감을 느낄 새는 있었을까.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일컫지만 생각만큼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은지도 모른다.
전시실에서 수도원이 하얀 벽에 다홍빛 지붕을 갖춘 온전했을 때 모형을 보니 갑자기 서글픈 감정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마음의 상처는…… 세월의 더께로 점차 희석될 수는 있어도 완전히 치유될 수는 없는 것 같다. 벽체를 잃고 앙상한 뼈대로 남아 있는 수도원처럼 한번 무너져 내린 마음이 다시 붙는 것 같지는 않다. 언제 다시 불거질지 모를 상처는 그대로인데 모질게도 살아야 하니까, 잊고 살아갈 뿐이다. 이젠 상처 입은 사람에게 ‘괜찮아질 거라고’, ‘시간이 약일 거라고’,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선뜻 말을 건네기가 주저된다. 섣부른 위로는 독이 될 테니까. 타인의 공허한 주문으로는 결코 쉽게 괜찮아지지 않을 테니까. 당사자 스스로 괜찮다고,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는 생각이 들기 전까지는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말없이 옆에 나란히 서서 결코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당신이 마음의 준비가 된다면 혹은 내가 필요하다면 언제든 달려가 든든하게 곁을 지키겠노라고 마음을 전하는 것뿐. 이렇게 치유되지 않는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 위 내용을 바탕으로 더 많은 사진과 보실 수 있도록 내레이션을 넣어 영상으로 제작했습니다. 관심있는 분은 아래 영상을 살펴봐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