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도시 곳곳에 기억하는 리스본
알파마의 좁고 굽은 골목을 내려와 리스본 대성당 Sé de Lisboa에서 오른쪽으로 꺾었다. 15분 정도 걸어오자 주택이 밀집한 알파마와는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오른쪽으로 가면 리스본 주요 역인 바이샤/시아두 Baixa-Chiado역과 호시우역이다. 7개 언덕으로 이뤄진 리스본에서 유일한 평지인 지역으로 넓은 도로가 깔려 있다. 식당, 각종 상점과 숙소, 광장 등이 모여 있는 교통이 편리하고 왁자지껄한 시가지를 바랐다면 이 근처에서 숙소를 얻었을 것이다.
내 발길을 자연스레 멀리 아치가 보이는 왼쪽을 향했다. 잘 닦인 도보 양쪽으로 음식점이 즐비하고 야외 테이블이 마련된 유럽 대도시의 흔한 관광지를 지났다. 길 끝에 세워진 건물 5~6층은 돼 보이는 웅장한 개선문을 통과하자 탁 트인 거대한 광장과 그 너머로 짙푸른 바다가 나타났다. 대서양으로 이어져 자꾸 바다로 착각하는 드넓은 테주강과 끝이 보이지 않는 코메르시우 광장 Praça do Comércio이다. 제로니무스 수도원을 보고 규모에 압도되었던 것처럼 광장에서 나는 또 한번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떡 벌어졌다. 현재 리스본은 약 55만 명 시민이 살아가는 크지 않은 도시인데, 상상을 초월하는 옛날 건축물을 보고 있자면 포르투갈 조상들은 손이 무지하게 컸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코메르시우 광장으로 연결되는 아우구스타 거리 Rua Augusta가 콜럼버스 기념비 Mirador de Colom를 지나 바다로 연결되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람블라스 거리 Las Ramblas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타 거리는 그보다 훨씬 짧고 대신 넓었다. 테주강을 등진 채 바라본 광장과 개선문, 그 뒤로 이어진 아우구스타 거리는 드넓고 좌우대칭이라 오히려 프랑스 파리의 거대한 건축물과 닮아 있었다.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건가? 아니다. 반대로 나중에 프랑스 파리가 기하학적인 격자형 리스본 구획을 모방했다.
폼발 후작 Marquês de Pombal은 리스본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주세 1세 Jose I와 함께 1755년 대지진 이후 폐허가 된 리스본을 재정비하고 개혁을 추진한다. 광장 중앙에 있는 14m 높이 단 위에 말을 타고 있는 동상이 주세 1세이다. 뼛속까지 계몽주의자이자 실용주의자인 폼발 후작은 짓밟힌 구도심을 지진에 강한 격자 모양 대로로 새롭게 일으켜 세웠다. 이렇게 유럽 최초 내진 설계로 단순한 건물을 지은 폼발 양식(Pombaline style)이 탄생했다. 완벽하게 계획했다는 인상을 풍기는 코메르시우 광장은 그 결과물이다. 나중에 도시설계가 바론 오스만 Baron Haussmann이 실용적이고 절도 있는 폼발 양식을 모방해 프랑스 파리를 정비한다.
테주강변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어서 이래저래 자꾸 바다와 혼동한다. 저 멀리 보이는 남쪽 알마다 Almada를 연결하는 현대식 4월 25일 다리 Ponte 25 de Abril와 강 건너의 그리스도 기념비 Cristo Rei가 보이지 않았다면 아마도 바다라고 믿어버렸을 것이다. 4월 25일 다리는 엄청나게 큰 광안대교 같다고 생각했는데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Golden Gate Bridge와 꼭 닮은 다리라고. 1966년 같은 회사에서 두 다리를 건설했기 때문인데, 가까이에서 보면 붉은색인 다리는 2.27km로 길이도 금문교와 거의 비슷하다. 처음 이름은 독재자 ‘살라자르 다리 Ponte Salazar’였는데, 1974년 카네이션 혁명 이후 4월 25일 다리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현재까지 그 이름이 살아남았다.
우리나라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 독재 정권에 맞서서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쟁취하고자 희생한 역사가 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으로 가슴 아프고도 자랑스러운 현대사 궤적을 그려왔다. 그래서 우리보다 십여 년 전에 독재자에 맞서서 혁명을 성공한 포르투갈인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살라자르는 포르투갈 총리로서 1930년대부터 약 40년간 독재 정치를 펼쳤다. 특히 그는 1960년 국제연맹이 식민지 시대는 지나갔다고 선포한 상황에서도 명분 없는 아프리카 식민지 전쟁을 일으켜서 15년간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어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전횡을 보다 못한 청년 장교들이 1974년 4월 25일 쿠데타를 일으켰다. 단 하루 만에, 단 한 발의 총성도 없이 독재정권은 무너졌고 기쁨에 들뜬 리스본 사람들은 군인들에게 카네이션을 나눠주었다. 그래서 4월 25일 혁명을 ‘카네이션 혁명’이라고도 부른다. 잔인한 총구 끝에 총알 대신 피어난 카네이션 한 송이라니. 희생자의 붉은 피가 아닌 꽃 한 송이로 기억하는 혁명이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오늘날 카네이션은 자유를 뜻하는 포르투갈 상징이다.
테주강 어디에서나 보이는 그리스도 기념비도 제2차 세계대전 때 많은 희생이 따르지 않은 것을 그리스도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만들었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유명한 그리스도상을 본뜬 것으로 브라질 예수상과 포르투갈 예수상은 마주 보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리스본은 도시 곳곳에 과거를 새겨 그들의 역사를 후세에 전수하고 있었다. 문득,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많은 것들을 빚진 채 살아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현재 세대는 과거 세대와 미래 세대 모두에게 빚을 진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우리는 모두 거대한 실타래 하나로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
▼ 위 내용을 바탕으로 더 많은 사진과 보실 수 있도록 내레이션을 넣어 영상으로 제작했습니다. 관심있는 분은 아래 영상을 살펴봐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