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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Dec 18. 2020

낭만적인 리스본에 산다면 행복할까?

여행자와 생활인의 간극이란

리스본은 막상 머물 때보다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좋았다’라고 기억이 남는 도시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을 곱씹을수록 추억은 원래보다 미화되었는데, 별다르지 않은 짧은 여행이 무척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포르투갈인에게 뼛속 깊이 새겨진 정서, 사우다드가 나 같은 외국인에게도 전해졌는지, 언젠가 꼭 다시 포르투갈에 가겠다는 염원을 품고 살아가게 되었다.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그리워하는 포르투갈인처럼 나는 때때로 포르투갈을 그리워한다.


고즈넉한 옛 거리를 간직하고 있는 알파마는 낭만 그 자체였다. 언덕 곳곳 다홍빛 지붕으로 덮인 집들 사이를 노란 트램이 유유히 지나간다. 미로처럼 구불구불한 골목 어디에 카메라를 들이대도 아련한 아날로그 감성이 묻어난다. 약간 바래고 훼손된 건물과 낙서는 오히려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집 너머 테주강의 수평선이 보이는 전망대에서는 자유로운 영혼들이 버스킹을 펼치며 흥겨운 음악을 들려준다. 이젠 완전한 관광지로 변모한 알파마에서 과거 빈민촌과 홍등가가 자리 잡았던 위험 지역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리스본 알파마 골목




예전에는 유럽의 잘 보존된 낡고 오래된 건물을 마냥 멋지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리스본 숙소에서 족히 50살은 훌쩍 넘었을 창밖 건물들을 바라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행자가 아닌 생활인으로 이곳에서 과연 살 수 있을까?’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아마도 그건 어려울걸?’이라고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낮은 수압, 벌레, 외풍, 난방비, 층간 소음 문제 등 오래된 건물에서 겪을 만한 불편한 상황이 훤히 그려졌다. 게다가 전 세계에서 방문한 관광객이 온종일 집앞을 오가고 사진을 찍는다고? 상상만해도 각종 소음과 쓰레기, 사생활 침해 때문에 괴로웠다. 더군다나 교통은 또 어찌나 불편한지. 좁은 언덕길을 트램에 의지해 언덕길을 오르내릴 생각을 하니 까마득하다. 알파마에서 트램을 타지 않고 호시우역이나 산타아폴로니아역까지 걸어가려면 15분~20분은 걸린다. 언덕과 계단을 걷노라면 따로 시간을 내 운동을 하지 않아도 체력은 좋아지겠으나, 외출이 매번 달가울 것 같진 않다.


리스본 집들과 유명한 28번 트램


사실 어제 호시우 광장 근처에서 트램을 타고 알파마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비슷한 생각을 했다. 한참을 기다려 간신히 탄 트램이 리스본 대성당을 지나고선 기계작동에 문제가 생겼는지 갑자기 멈춰버렸다. 왕복 2차선 도로에서 뒤이어 오던 자동차들은 대형 장애물로 전락한 트램에 가로 막혀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였다. 자동차 운전자들은 이런 상황에 익숙한 지 경적을 울리지 않고, 하릴없이 차안에서 기다렸다. 하긴, 경적을 울려봤자 누가 보더라도 시끄럽기만 하지, 멈춘 트램이 움직일 리는 없었다. 차를 몰고 언제 집에 도착할지 주도권은 자동차 운전자가 아니라 명백히 트램이 쥐고 있었다.


여행자는 마음이 너그럽다. 언제든 돌발 상황에 맞닥뜨릴 준비를 하고 있기에, 잘 가던 트램이 갑자기 멈췄을 때 ‘이번 여행에서는 이런 일도 경험하는구나’라며 웃어넘긴다. 하지만 이것이 평소에 빈번하게 발생하는 예삿일이라면? 썩 달가운 일은 아닐 것이다. 여행자가 아닌 생활인으로서 이런 비효율을 견딜 만큼 나는 결코 여유로운 사람이 아니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빨리빨리 유전자가 꿈틀대는 것 같다.




옛것을 보존하는 일은 미덕일까? 처음 마주한 유럽은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져 있는 풍경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아마도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다는 매력 때문에 많은 이들이 나처럼 유럽을 꿈꾸고 여행을 떠나지 않을까. 효율성을 극대화한 네모반듯한 아파트와 비슷비슷한 건물이 즐비한 회색빛 서울을 벗어나, 고풍스러운 옛 건물과 각양각색 현대식 건물이 공존하는 유럽 도시가 눈에 들어왔을 때 그 풍경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젠 낭만 속에 감춰진 불편한 진실도 함께 눈에 들어온다.


세상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잠시 런던에서 거주할 때 높은 물가 때문에 유독 긴 런던의 겨울을 전기난로 하나에 의지해 보내야 했다. 파리에서 유학 중인 친구가 느리고 불친절한 프랑스의 각종 행정 처리에 관한 불만을 토로할 때면 내가 다 진절머리가 났다. 인생은 결국, 49대 51의 연속 힘겨루기 같다. 51이 눈에 띄는 승리를 거두면, 감춰진 나머지 49는 어쨌든 최종 선택한 51를 믿고 따르며 감내하는 셈이다. 의외로 어떤 선택을 하든지 장단점은 도토리 키 재기 마냥 별반 차이가 없다. 이리재고 저리재서 더 낫다고 선택한 결과를 훗날 돌이켜보면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싶을 때도 있다. 어차피 인생사 새옹지마 아닌가.




눈이 내리는 날을 좋아한다. 새하얀 솜사탕을 흩뿌리듯이 눈이 흩날리는 풍경도, 눈이 그친 뒤 온통 흰옷으로 갈아입은 몽환적인 세상도 좋아한다. 예전에는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이 오면 털장갑에 털모자, 두툼한 외투에 털신을 신고 밖으로 놀러 나갔다. 신이 나서 한껏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눈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서 눈 뭉치를 만들었다. 꼭 크고 작은 눈사람 한 쌍을 완성한 뒤 친구들과 저돌적인 눈싸움으로 마무리했다. 더 어렸을 때는 돋보기를 들고 나가서 여기저기 확대하며 어여쁜 눈 결정에 감탄도 했다.


캐럴 제목처럼 매년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다리지만, 생각보다 우리나라에서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드물다. 하지만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듣고서도, ‘기상청이 늘 맞지는 않잖아’라면서 눈이 내리지 않을지 내심 기대한다. 크리스마스 아침에는 간밤에 세상이 하얗게 변했는지 일어나자마자 창밖을 먼저 확인한다. 일기예보로 눈이 오지 않으리라 알고 있으면서도 매년 기대하고 매년 아쉬워한다. 간혹 예상과 달리 창밖에 소복이 눈이 쌓여있으면 별 이유도 없이 마냥 행복했다.


나에게는 유럽이 꿈의 도시였고, 부모님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국이 소망하는 여행지이다. 인도네시아인은 한국을 언젠가 꼭 한 번은 가보고 싶은 나라로 꼽는데, K-Pop, K-Drama, K-Beauty 등 한국 문화의 인기가 높기 때문이란다. 특이하게 그들은 우리나라를 여행하기 좋은 봄, 가을이 아니라 겨울에 여행을 하고 싶어 한다고. 이유는 ‘눈을 보고 싶어서’. 왜 굳이 추위는 매섭고 길은 미끄러운 겨울에 낯선 나라에 놀러 와서 사서 고생을 하나 싶지만, 일 년 내내 더운 날씨가 이어지는 나라에 살아서 어쩌면 평생 직접 눈을 볼 일이 없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꿈꿀 수 있는 소망이다. 내가 아름다운 유럽 배경 영화를 보며 유럽에 환상을 가졌듯 인도네시아인은 한국 드라마에 나온 눈이 내린 새하얗고 눈부신 겨울 풍경에 매료된 모양이다.


사실 난 이젠 막상 눈이 오면 설레기보다는 걱정이 앞서곤 한다. 어느새 현실이 낭만을 앞질러버렸나 보다. 눈이 오면, 어이쿠, 눈이 오네. 길이 얼면 난감한데. 빙판길은 위험하단 말이야. 출퇴근 길은 어쩌나. 조금 오다 말아야 할 텐데. 눈이 쌓이기라도 하면 큰일이라고. 이거, 미세먼지 눈인 건가. 무조건 우산을 챙겨야겠는걸’이라고 멋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온통 차지한다. 더는 눈사람도 만들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언제, 누구와 눈싸움을 했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는다. 무미건조한 어른이 된 기분이다.




한때 낭만으로 다가왔던 공간과 시간이 밥벌이하는 생활인의 시공간으로 바뀌면 더는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다. 어른이 되고 여행 경험이 쌓이면서 내가 꿈꾸는 여행지 모습은 수많은 일상적인 요소가 차단된 환상에 불과하다고 깨달았다. 하지만 이내 실망할지라도 가끔은 기꺼이 환상 속으로 빠져들고 싶다. 가짜라고 하더라도 덧없지만은 않으니까. 그렇게 나는 여전히 포르투갈이라는 꿈을 좇고 있는 것 같다. 허망할지라도 일상을 지탱하고 여유를 불어넣는 깨고 싶지 않은 예쁜 꿈을 꾸기에 살아간다.


멀리서 바라 본 상 조르제 성과 리스본 언덕 위 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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