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 근교 세련된 휴양지 '카스카이스'
호카곶에서 다시 403번 버스를 타고 해안 도시인 카스카이스 Cascais로 향했다. 버스로 불과 20분 만에 나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떨어졌다. 카스카이스 버스 터미널에 내리자 짭조름한 바다 내음과 바닷가 특유의 습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늘진 터미널을 벗어나자 작열하는 포르투갈 9월의 뜨거운 태양 빛에 살은 적당히 그을리는 정도를 넘어서 빨갛게 익어간다. 강풍에 추위가 스미고 자욱한 안개 속에서 헤매던 방금 호카곶에 머물렀던 시간이 마치 꿈만 같다. 과연 같은 포르투갈이 맞나 싶다.
회전 교차로와 삼거리, 사거리 등을 헤매다가 큰 도로를 하나 건너 겨우 해변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 뻥 뚫린 4차로와 8차로 도로를 따라 쌩쌩 달리는 자동차들을 보니 카스카이스는 영락없는 도시이다. 식당과 상점이 즐비한 골목에 들어서자 흰색과 푸른색 조약돌로 물결무늬가 수놓아진 아름다운 바닥이 눈에 들어온다. 아줄레주와 함께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칼사다 포르투게사 Calçada portuguesa이다. 칼사다 포르투게사는 포르투갈 특유의 바닥 장식으로 두 가지 색의 조약돌로 모자이크나 패턴을 만든다. 리스본의 여러 광장도 칼사다 포르투게사로 장식했는데, 좁은 골목길을 따라 길게 깔린 무늬는 더욱 강렬하다. 심심한 길바닥은 예술로 승화한 조약돌 덕분에 걷고 싶은 흥미로운 거리로 바뀌었다.
푸른 바닷빛이 보이길래 무작정 걸었는데 카스카이스에 있는 여러 해변 중 제일 넓다는 페스카도리스 해변 Praia dos Pescadores에 도착했다. 마침내 코앞에 바다가 펼쳐졌다. 리스본에서 신트라로, 신트라에서 호카곶으로 대서양과 점점 거리를 좁혔는데, 이젠 멀리서 눈으로 담는 데 그치지 않고 바닷물에 발을 적실 만큼 가까워졌다. 넓다지만 우리나라 경포나 해운대 해수욕장처럼 백사장이 끝없이 펼쳐져 있진 않다. 적막하지도 그렇다고 붐비지도 않고, 사람들이 적당히 있어서 좋았다. 파라솔이 빽빽하게 들어선 우리나라 유명 해수욕장 풍경에 익숙한데 이곳은 한산하면서도 북적거린다.
대서양과 맞닿은 카스카이스의 해변은 완벽한 휴양지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 바람이 살포시 부는 해변은 파아란 하늘을 지붕 삼아, 따뜻한 모래사장을 바닥 삼아 일광욕하기에 최적의 조건이다. 햇볕을 쬐다 더우면 바다 욕조에 몸을 풍덩 담갔다가 자연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물기를 말리면 그만이었다. 모래사장에는 2인 비치 의자와 그늘을 만드는 대형 가림막이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 있다. 파라솔 아래 돗자리를 깔고 쉬다가 성큼성큼 몇 발자국을 내디디면 바로 시원한 바닷물을 느낄 수 있다. 나도 한 자리 차지하고 햇빛 소독을 받고 모처럼 만에 비타민D도 섭취하며 누워서 한잠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카스카이스가 아담하고 여유로운 휴양 도시인 줄 진작 알았다면 시폰 원피스 안에 수영복을 갖춰 입고 가방에는 작은 수건이라도 하나 넣어 왔을 텐데. 호카곶에서 버스로 20분 걸린다길래 그냥 부담 없이 휙 둘러보려는 가벼운 마음으로 들른 곳이라 물놀이 채비는 전혀 하지 못했다. 비키니와 수영 팬츠 차림을 한 휴양객 사이에서 발목까지 오는 시폰 원피스를 입고 뒤로는 배낭을, 옆으로는 보조 가방을 멘 사람은 내가 유일해 보였다. 신발을 벗어 한 손에 들고 대서양에 발이라도 한 번 담그면서 바닷가에 온 기분을 내보지만, 10분 정도 바다를 걷다가 이조차도 뻘쭘해서 황급히 해변으로 올라왔다. 이곳에서 마음껏 일광욕을 즐기고 맛있는 해산물로 식도락을 즐기고 싶었지만, 이미 다음 숙소 예약을 다 마친 상황이라 애써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기약 없는 다음을 기약했다.
버스터미널로 돌아갈 때는 아까는 보이지 않던 풍경이 눈에 띄었다. 샤넬, 구찌, 에르메스, 루이비통, 롤렉스 등 카스카이스 거리에는 명품 매장이 즐비했다. 흔한 편의점처럼 이곳에는 명품숍이 평범한 가게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다. 카스카이스는 작은 도시이지만 도로가 잘 닦여 있고, 전반적으로 산뜻하고 쾌적한 휴양지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아마도 이 도시민의 생활 수준은 내 예상보다 높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카스카이스는 유럽인들이 살고 싶어 하는 휴양 도시로 포르투갈 최고 부자들이 살고, 유럽 재력가들은 별장을 많이 지었다. 이곳은 1년 중 260일이 날씨가 맑은 만큼 아주 날씨가 좋다. 게다가 수도 리스본에서 약 30km 떨어져 있어 교통도 편리하다. 일찍이 포르투갈 왕족이 카스카이스의 매력을 알아보고, 9세기 아멜리아 여왕은 아담하고 호젓한 이곳을 전용 해변으로 삼았다. 카스카이스의 대표 해변인 하이냐 해변 Praia de Rainha은 그렇게 ‘여왕의 해변’이라는 이름을 얻는다(포르투갈어 Rainha(하이냐)가 여왕이란 의미). 포르투갈 마지막 왕인 카를로스 1세도 이곳에 여름 궁전을 두었다. 자연스레 고급 휴양지로 자리 잡은 카스카이스에는 미술관과 박물관도 많다. 대표적으로 콘데스 지 카스트로 기마랑이스 박물관 Museu Condes de Castro Guimarães은 본래 마누엘 지 카스트로 기마랑이스 공작의 저택이었는데, 그의 유언에 따라 미술관으로 개관했다.
호카곶을 들러서인지 따사로운 햇볕에 몸이 노곤해서 멀리 해안 절벽 사이로 난 동굴, 지옥의 입 Boca do Inferno까지 산책은 포기했다. 다시 403번 버스에 올라 좁고 굽은 산길을 달려 호카곶을 지나 1시간 만에 신트라로 돌아왔다. 일산에서 강남까지 차로 35km 내외이니 리스본에서 30km는 가까운 거리이다. 다시 리스본에 가게 된다면, 리스본 카이스 두 소드레 역에서 기차로 40분을 타고 곧장 카스카이스로 달려갈 것이다. 그때는 꼭 좋아하는 수영복을 입고 대서양에 풍덩 뛰어들어 온몸을 적시고 말 테다.
▼ 이 내용을 바탕으로 더 많은 사진과 보실 수 있도록 내레이션을 넣어 영상으로 제작했습니다. 관심있는 분은 아래 영상을 살펴봐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