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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Jan 11. 2021

무어인은 왜 절벽 위에 견고한 성을 지었을까?

포르투갈 신트라 '무어 성'에 올라서

포르투갈 9월 초 한낮에는 햇살이 강렬하기 때문에 오늘도 아침 일찍 길을 나선다. 신트라역 근처 434번 버스 정류장은 사람들이 이미 줄을 서 있어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버스를 타고 아래에서 바라보던 산의 정상에 올라, 꼭 정복자가 된 듯한 우쭐한 기분에 사로잡혀 성큼성큼 성곽을 거닐었다. 성곽을 따라 무릎 높이만 한 돌계단을 오르내리니 금세 숨이 목전까지 차오른다. 평소 얼마나 운동량이 부족한지 체력은 너무 빨리 한계를 드러낸다. 자칫 실수로 발이 미끄러져 사고가 날까 싶어 바짝 긴장한다. 이른 아침부터 만 원(8유로)씩이나 내고 이역만리에서 왜 사서 고생을 하고 있는지…… 여행이 부린 마법에 걸려버렸다. 집에서 5~10분 거리에 있는 산에도 주말마다 운동 삼아 간다, 간다 말로만 가다가 1년에 겨우 한두 번 갈까 말까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재인 수원화성과 남한산성에도 아직 가보지 못했다. ‘이불 밖은 위험해’가 생활신조인 집순이가 아침 일찍 집밖을 나서고, 숨쉬기 운동이 고작인 사람이 가파른 돌계단 등산을 자처한다. 잘 조성된 길을 따라 걸어도 숨이 한가득 차는데 대체 산꼭대기에 어떻게 이처럼 견고한 성을 쌓은 거지? 먼 옛날 무어인들이 흘린 피, 땀, 눈물을 감히 헤아릴 순 없었다.


숙소에서 바라본 무어 성




‘무어인 Moor’은 누구였을까? 단어를 들어본 적은 있지만 어떤 사람들인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데 포르투갈 곳곳에는 무어성처럼 무어인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야 포르투갈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겠다. 무어인은 이베리아반도와 북아프리카에 살았던 이슬람계 사람들을 지칭한다. 이들은 포르투갈 남부를 400년 동안 지배했다. 5세기 로마인이 이베리아반도 서쪽을 떠난 후 피레네산맥 너머에서 여러 이방인 침략자들이 몰려온다. 전쟁 끝에 우위를 점한 서고트족 Visigoths에 내분이 일어나면서 그중 한 당파가 북아프리카 이슬람교도인 무어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711년 무어인은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하여 순식간에 포르투갈 남부 해안을 점령한다.


무어 성


무어인은 소규모 자작농이 땅을 계속 소유할 수 있게 했다. 농사에 새로운 관개 기술을 도입하고, 감귤류와 쌀 등 작물 재배도 장려한다. 학교를 열고 문맹률을 낮추기 위한 운동(물론 아랍어로)을 시작했으며, 수학, 지리학, 역사를 가르쳤다. 이 시기에는 의학 수준도 한층 더 발달한다. 기독교 십자군이 권력을 잡았을 때 외에는 무어인은 종교에도 상당히 관대했다. 이슬람 왕국에서는 노예 제도가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기독교도가 소유했던 노예들은 이슬람 왕국으로 도망쳐 가기도 했다. 포르투갈에서 이 시기는 이슬람교도, 기독교도, 유대교도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때로는 협동한다. 과학과 예술도 세계에서 가장 발전을 이룩한 시대로 통한다. 일부 학자는 평화와 풍요를 누린 이 시기를 황금시대로 묘사하기도 한다.


한편, 11세기 기독교도의 국토 회복 운동인 레콩키스타 Reconquista에 불이 붙는다. 이베리아반도 북부의 로마 가톨릭 왕국들은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며 마침내 이슬람 국가를 축출한다. 로마 가톨릭 왕국들은 1085년에는 스페인에 있는 무어인의 심장부인 수도 톨레도 Toledo까지 함락한다. 전쟁은 세대를 걸쳐 계속되고, 12세기 포르투갈 초대 국왕 알폰수 1세는 무어인 수중에 있던 리스본을 탈환한다. 1185년 알폰수가 세상을 떠날 때 포르투갈 국경은 테주강까지 확보되었다. 그러나 한 세기가 더 지나서야 포르투갈은 비로소 남부를 무어인에게 되찾을 수 있었다.


이베리아반도 서쪽 땅의 지배 역사는 리스본의 산꼭대기에 지어진 상조르제성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5세기 로마인들이 축성을 시작해 9세기 무렵 ‘무어인’들이 완성했고, 알폰수 1세가 리스본을 탈환한 이후 최고의 전략적 요충지로 사용되었으니 말이다. 무어인의 영향 때문에 포르투갈 수십 개의 지명에는 아랍어가 스며있다. 파티마 Fatima, 실베스 Silves, 알가르브 Algarve가 대표적인 예다. 포르투갈 여러 건축물에서는 이슬람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무어인들은 10세기에 방어를 목적으로 절벽 위에 바로 이 ‘무어성’을 지었다. 난공불락 무어성 덕분에 무어인은 레콩키스타에 대항해서 마지막까지 저항할 수 있었다.  전쟁 중에 물이 부족하지 않도록 빗물을 모아 두는 저장 탱크를 만들었고, 음식은 사일로 Silo에 보관했다. 화강암 밑에 듬성듬성 파인 구멍을 사일로라고 한다. 얼마나 절박하고 처절했을까.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니’라는 사즉생 생즉사(死卽生 生卽死)의 심정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성을 쌓았겠구나 싶었다. 어쩌면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무어 성




헉헉거리면서 필사적으로 성곽을 따라 걷다가 멈춰 서서 허리를 쭉 펴고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푸르른 나무와 풀에 둘러싸인 붉은 지붕 집들이 모여 있는 신트라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내가 아는 건물들 - 미니어처 같은 신트라역, 머무는 숙소, 점심을 먹은 레스토랑을 하나씩 짚어봤다. ‘하! 신트라의 눈부신 에덴동산, 언덕과 협곡이 만드는 미로 안에 들어서 있구나 Lo! Cintra's glorious Eden intervenes, in variegated maze of mount and glen’ 영국 시인 바이런 경이 서사시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 Childe Harold's Pilgrimage>에 남긴 신트라를 예찬한 구절이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이 차오른다. 카타르시스인가. 마음이 정화되고 치유되는 것 같다. 산들바람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데려갔다.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한 아침이었다.


무어 성에서 바라본 신트라 전경



참고 자료


론리플래닛 편집부, <론리플래닛 베스트 포르투갈>, 안그라픽스, 2018.01, p.263~264, p.284

송윤경, <포르투갈 셀프 트래블>, 상상출판, 2018.08,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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