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서쪽 끝, 호카 곶(카보 다 호카)
유라시아 대륙의 최서단이자 포르투갈 서쪽의 끝, 카보 다 호카 Cabo da Roca(호카곶)에 언젠가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포르투갈이라는 나라는 모르면서 신기하게 호카곶은 들어본 어린 시절부터 품어온 소망이다. ‘이곳에서 육지가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 AQUI ONDE A TERRA SE ACABA E O MAR COMEÇA’라고 새겨진 기념비 앞에서 나도 사진을 한 장 남기고 싶었다. 왜 하필 이곳이었을까.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을 논리적인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다면, 아마도 나조차 이해할 수 없는 아둔한 행동을 하며 살아가진 않을 것이다. 아무튼, 이 문장은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시인 루이스 바즈 드 카몽이스 Luís Vaz de Camões가 남긴 대서사시 <우스 루지아다스 Os Lusíadas>에 들어 있는 대목이다.
아침 일찍 숙소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403번 버스에 올라 호카곶으로 향했다. 굽이굽이 난 좁은 시골길을 30~40분 정도 달리다가 사람들이 우르르 내릴 때 나도 따라 내렸다. 유명한 관광지를 갈 때는 긴장을 내려놓고 지도를 보지 않아도 되어서 좋다. 생각을 멈추고 다수가 하는 행동을 쫓아가는 건 참 편한 일이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나를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겠지. 잘 모르는 서로가 서로를 믿으며 결국 바라는 목적을 달성하다니 신기한 일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가 벌어질 때도 있다. 다 같이 잘못된 버스에 오르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안심하다가 틀린 목적지에 도착하는 어리석은 상황에 부닥치기도 한다. 다행히 이번에는 목적지에 제대로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우선 정류장에 부착된 버스 시간표를 확인했다.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사랑하지만, 자주 오지 않는 버스를 놓쳐서 원치 않게 발이 묶이고 싶지는 않다. 바다 쪽으로 점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걸어갔다. 호카곶은 제주도 섭지코지와 비슷하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섭지코지에 가본 적은 없지만, 푸르른 들판 끝에 깎아지른 절벽 너머로 드넓게 펼쳐진 수평선이 보이는 사진을 봐서 어떤 풍경인지 알고 있었다. 제주 방언 ‘코지’는 ‘곶’이라는 뜻이니 호카곶과 섭지코지는 비슷할 만했는데 정말 닮은 모습이었다. 이곳에는 척박한 토양 위에 생명력이 강해 보이는 작은 풀부터 무릎 높이까지 자란 식물들, 제주도 유채꽃은 아닐 테지만 노오란 들꽃도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몇 발자국 걷기가 무섭게 강한 바람의 저항을 받는다. 바다로 향할수록 더욱 몰아치는 강풍에 허허벌판은 더 황량해지고, 자욱한 안개는 스산하기 그지없다. 짙은 안개를 뚫고 그 속으로 들어가자니 기꺼이 죽음을 무릅쓰고 절대반지를 파괴하고자 원정을 떠나는 <반지의 제왕> 주인공이 된 기분이다. 층층이 쌓인 안개 때문에 정작 육지의 끝자락인 서쪽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경계선이 희미해 어디까지가 육지이고 어디서부터 바다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앞은 분명히 육지와 바다의 경계인 낭떠러지이다. 만일 내가 앞쪽으로 열 발자국을 쭉 걷는다면 허공에 마지막 발자국을 내딛는 순간 무자비한 중력의 법칙을 따르게 될 터였다.
덜컥 겁이 났다. 세이렌의 고혹적인 노랫소리에 홀려 휘몰아치는 소용돌이로 사라진 뱃사람들처럼 혹여나 귓전으로 유혹의 목소리가 들려올까 싶어서 두려웠다. 검푸른 바다로 추락하는 아찔한 낭떠러지를 켜켜이 감춘 새하얀 안개는 검은 속내를 숨기고, ‘이곳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으니 유유히 걸어 들어오라’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목숨이 위태로울 만큼 위험천만한데도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은 별로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갈 미지의 안개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우둔한 호기심이 일렁거렸다.
판도라는 열지 말라는 상자를 열어 고통스럽게도 희망만을 남긴 채 인류에게 질병, 가난, 증오 등 불행을 가져왔다. 오르페우스는 하데스와 한 약속을 어기고 뒤를 돌아봐서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영영 잃었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쩌면 벌어질 좋지 않은 결과를 예감하면서도 결국, 호기심과 상상력 때문에 어리석게도 불행을 자초하고 말았다. 우리는 호기심과 상상력을 강조하는 세상에 살아가지만, 상황과 사람에 따라서는 이것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다시금 세상을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얼마나 위험한지 교훈을 얻는다.
나는 상상력이 그리 풍부한 사람은 아니라서 다행히(?) 세이렌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멀찍이 서서 까치발을 들고 고개를 쭉 빼 들어 안개 틈새로 보이는 절벽 끝 대서양 한 조각을 눈에 담는 데 만족했다. 그리곤 마침내 카몽이스의 명문(名文)이 새겨진 십자가 돌탑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버킷리스트를 이루었다. 안개와 강풍 때문에 공포 영화 <사이코>나 <디 아더스>의 한 장면처럼 비록 사진 속 돌탑은 희미하고 내 머리칼은 마구 뒤엉켜 있지만. 인생이란 예상에서 늘 빗나가기 마련이니까 상관없다. 날씨가 춥고 스산해서 해안 절벽을 따라 산책하진 못했다. 버스정류장을 향해 절벽을 조금 벗어나자 안개는 사라져 맑은 풍경이 펼쳐진다. 무슨 시간 탐험인 듯 대여섯 발자국을 걸어 들어가니 다시 자욱한 안개가 휘감는다. 기묘한 호카곶에 간다면 모쪼록 경계심을 늦추길 마시길. 세이렌이 유혹하는 목소리를 보낼지도 모르니까.
P.S.
호카곶의 안개를 경험한 뒤 포르투갈 리스본 공항에 낀 안개 때문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공항에서 왜 계속 비행기가 출발하지 못한 채 하염없이 이륙이 지연되었는지 완전히 이해했다.
▼ 이 내용을 바탕으로 더 많은 사진과 보실 수 있도록 내레이션을 넣어 영상으로 제작했습니다. 관심있는 분은 아래 영상을 살펴봐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