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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Mar 03. 2021

포르투갈에서 마지막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루 동안 거닌 포르투 거리 풍경들

어느덧 여행의 마지막 밤이 다가왔다. 다음 날이면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귀국행 비행기에 올라야 한다. 힘겹게 오르던 언덕길도, 낭만적인 히베이라 풍경도, 미소가 아름다운 포르투갈인도, 홀로 식사하는 날들도 ‘부디 안녕히’였다. 기약 없는 다음 여행을 약속하며 포르투갈에서 별스럽지 않은 마지막 날을 보냈다.


테일러 와인 하우스 관람을 마친 뒤 히베이라 광장 Praça da Ribeira에서 스트리트 마켓을 한참 동안 구경했다. 체력이 떨어질 즈음 때마침 케이블카를 발견했는데, 외국인 중년 부부와 동승을 했다. 낯선 이들이 한 평도 되지 않는 좁은 공간에서 마주 보고 앉았으니 서로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그들과 나 모두 이내 창밖 풍경에 사로잡혀 어색한 공기는 차츰 공중으로 흩어졌다.


저 멀리 짙푸른 가을 하늘을 닮은 도루강 위로 에펠탑의 사촌 같은 모습을 한 동 루이스 1세 다리 Ponte de Dom Luís I가 보인다. 실제로 동 루이스 1세 다리는 구스타브 에펠 Gustave Eiffel의 제자 테오필 세이리그 Teófilo Seyrig가 설계했고, 다리가 완성된 1886년 당시에는 파격적인 건축 양식으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아래로는 광장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너무 작아서 꼭 타이쿤 게임 속 관람객처럼 보인다. 강가를 따라 길게 늘어선 오크통을 실은 하벨루스 ravelos(포트 와인을 실어 나르던 작은 화물선)도 장관이다. 모후 공원이나 동 루이스 1세 다리 위에서 바라볼 때와는 다른 히베이라가 느껴진다.


인간의 기억은 유한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두 눈과 마음속에 고스란히 간직하고 싶었다. 비행기를 타고 국가를 이동하는 동안은 아무 시간에 속하지 않다고 느끼듯이, 케이블카에서 신(god)처럼 전체를 조망하는 전지적 시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동안은 잠깐이나마 내가 꼭 다른 시공간에 속한 기분이었다. 착륙이 가까워지면서 사람과 사물이 점점 커지고, 시야 반경에 들어오는 만큼만 인지할 수 있는 평범한 인간의 일인칭 시점으로 되돌아오는 순간을 얼마나 미루고 싶던지.


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본 히베이라 광장. 케이블카 창문 너머 풍경을 찍어서 유리창이 비춰 보인다.




케이블카는 빌라 노바 드 가이아에서 다시 포르토 지역으로 건너갈 수 있는 동 루이스 1세 다리 부근에 도착했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 모후 공원에서 한 번 더 도루강이 가로지르는 포르토 풍경을 둘러본 뒤 그 모습을 사진에 담으며 내일이면 떠난다는 아쉬움을 달랬다. 적당히 활기차고 다소간 여유로운 녹음이 우거진 주말의 초록빛 모후 공원을 벗어나 야외 플랫폼에서 전철을 기다린다. 따로 역사(驛舍)나 개찰구 없이 전철 승하차장에 설치된 판매기에서 승차권을 산 뒤 전철이 도착했을 때 승차 전 외부에 설치된 세로로 긴 직사각형 기계에 표를 읽히는 일도 이젠 적응했다.


모로 공원에서 찍은 포르투 풍경


전철을 타고 다리를 건너 포르토로 돌아와 숙소로 가는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한다. 상벤투역을 지나 익숙한 천주교 성당 앞에서 2시 방향 길로 접어들었다. 대형 호텔, 고급 음식점과 각종 상점을 지나 사거리에서 우회전한 뒤 계속 걷는다. 잠시 뒤 왼쪽 정면에 문을 굳게 닫은 마제스틱 카페가 나타나니 일요일이란 실감이 든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이제 더는 카페 앞을 지날 때마다 들를까, 말까 망설이지 않아도 된다. 내일 오전 비행기를 타려면 마제스틱 카페가 문을 열 즈음에 나는 이미 공항에 도착했을 것이다. 이젠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이라고 정해지고 나니 고민 하나가 줄어들어 오히려 마음이 편안하다.


조금 더 걷자 한 글자씩 크게 세로로 ‘COLISEU’라고 쓴 건물이 나타난다. 정식 명칭은 ‘Coliseu do Porto’로 고대 로마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 경기를 관람하던 콜로세움(Colosseum)과 철자가 비슷하고, 건물 외관과 분위기를 고려했을 때 문화예술 공연장이나 극장인 듯했다. 나에게는 숙소를 찾아가는 랜드마크 같은 곳이라 이 건물이 눈에 들어오자 ‘내가 길을 잘 찾아왔구나’ 싶어서 비로소 안도했다.


왼쪽 뒤에 Coliseu do Porto가 보인다. 자세히 보면 1층 입구는 공연장(극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알록달록한 천막이 달려있다.


작은 광장 너머로 오른쪽에 자리 잡은 카페 산티아고 Cafe Santiago da Praça도 오늘은 쉬는 날인지 조용하다. 카페 산티아고는 포르토를 대표하는 음식인 프란세지냐 francesinha를 먹으려는 사람들로 평소에는 인산인해를 이룬다. 간판을 읽을 수 없을 만큼 먼 거리에 있지만, 입장을 기다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포르토에 온 첫째 날부터 ‘왜 저렇게 사람들이 몰려있지?’라는 궁금증을 유발하며 눈길을 사로잡았다. 프란세지냐는 식빵 사이에 소시지, 햄, 링구이사(포르투갈 소시지의 한 종류), 구운 쇠고기나 돼지고기 등을 겹겹이 넣고, 치즈를 빵 위에 얹어 녹인 뒤 그 위에 토마토가 베이스인 소스를 끼얹어 만든다. 재료와 요리법만 들어도 왜 여행자들이 이 음식을 ‘내장 파괴 버거’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다. 점심에 프란세지냐를 하나 먹으면 저녁과 다음 날 아침은 저절로 건너뛸 것 같다. 


프란세지냐. '프랑스의 작은 소녀'라는 뜻이다. 프랑스 식 샌드위치인 크로크무슈를 포르투갈 식으로 변형해 만든 음식이다.




마침내 주택가 좁은 골목으로 들어선다. 숙소에 도착해서 테일러 와인 하우스와 스트리트 마켓에서 산 기념품을 잔뜩 내려놓는다. 물 한 모금을 마신 뒤 침대에 대자로 뻗어서 한껏 널브러져 있다가 서서히 정신을 차린다. 열흘 동안 업무를 대신해준 은인이나 다름없는 회사 동료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할 선물을 아직 사지 않았다. 그는 휴가 동안 내게 어떤 연락도 하지 않았는데, 덕분에 업무 걱정을 단 0.001초도 하지 않고 자유로운 휴가를 만끽할 수 있었다. 사실, 휴가에 연락 하지 않는 행동은 당연히 지켜야 할 기본 매너이지만, 한국 직장의 정서를 고려하면 동료에게 정말 고맙지 않을 수 없다. 포근한 이불에서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고 선물을 사러 다시 밖으로 나왔다. 발길은 자연스레 마제스틱 카페도 있는 번화한 산타 카타리나 거리 Rua de Santa Catarina로 향했다. 이리저리 둘러봤지만 포르투갈에서 와인만 한 선물이 없다는 결론을 내고, 테일러 와인 하우스에서 구매한 와인 두 병 중 한 병을 동료에게 선물하기로 했다.




다음은 여행 전부터 가고 싶었던 숙소 근처 볼량시장 Mercado do Bolhão에 들르기로 했다. 볼량시장은 19세기 중반 세워져 오랜 전통을 간직한 데다 채소, 생선, 육류, 과일, 꽃 등을 판매해 현지인도 많이 이용한다고 했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볼량시장은 그해(2018년) 5월부터 2년간 개보수 공사 중이라 폐쇄한 상황이었다. 5분 거리 쇼핑몰 지하에 임시로 시장을 열고 있다는데 썩 내키지 않았다.


오래전 네덜란드 반 고흐 미술관에서 허탈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미술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고흐의 <해바라기>는 한 번쯤 들어보지 않았을까. 반 고흐 미술관에 가면 드디어 책으로만 보던 그 유명한 <해바라기>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한껏 들떴다. 전시를 쭉 둘러보다가 빈 액자를 하나 발견했는데 안내문이 그림을 대신하고 있었다.


‘반 고흐의 <해바라기>는 서울에서 열리는 전시에 대여 중입니다.’


서울이라고? 그러고 보니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반 고흐 특별전’을 개최한다는 기사를 읽었던 것 같다. 흐엉…… 왜 하필 서울인데. 꼭 이 그림 한 점 때문에 한국에서 지구 반 바퀴를 날아온 건 아니지만, 이곳에 오면 실제 <해바라기>를 볼 수 있을 줄 알았단 말이야. 내가 귀국할 무렵, 서울 전시는 끝날 시점이었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해바라기도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올 테지. 그 뒤로 이번 비행기 환승을 제외하면 내가 네덜란드 땅을 다시 밟을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볼량시장도, 해바라기도 나와는 인연이 아니었다.


가로막은 거대한 임시 외벽 너머로 볼량시장 건물 사방을 철근으로 감싼 모습이 드문드문 보인다. 알고 보니 볼량시장도 일요일은 휴무였다. 만일 시장이 운영 중이었더라도 일요일에는 구경할 수 없었다. 유럽의 휴일답게 근처 가게도 대부분 문을 닫아서 거리는 더 삭막하고 괜스레 날씨마저 을씨년스러웠다. 뒤늦게 사람들이 극찬하는 베이커리를 알게 되었지만 역시나 오늘은 쉬는 날이다. 마제스틱 카페처럼 아르데코풍 외관이 아름다워 눈여겨봤던 올리브 오일과 통조림 등을 판매하는 상점 불도 꺼져 있다. 아쉬운 마음에 통유리 너머로 예쁘게 진열된 상품 패키지에서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조용하고 차분한 걸 좋아하는 나처럼 심심한 사람에게도 유럽의 일요일은 너무나 심심했다.


눈여겨봐둔 식료품점 A Pérola do Bolhão.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으며 소시지, 치즈, 올리브, 견과류, 통조림, 포트와인 같은 식료품을 잔뜩 판매한다




포르토의 노을은 엊그제도 보았고 딱히 더 할 일도 없어서 일찌감치 숙소로 돌아왔다. 짐을 정리하다가 캐리어에서 종이로 만든 포도색 정사각형 CD 케이스 모양이 인상적인 얇은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일본의 문예 비평가 와카마쓰 에이스케가 쓴 <슬픔의 비의>이다. 마치 이 책의 존재를 처음 안 것처럼 ‘발견했다’라고 했지만, 여행 내내 한 번도 꺼내 보질 않아서 그렇지 집에서 고심해서 고른 끝에 챙겨 온 책이다. 3.11 대지진 이후 슬픔과 상실에 빠져 있던 일본인에게 위로를 전했다는 평을 받는 에세이 25편이 담겨있다.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진중한 주제에 책은 작고 가벼워 여행에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이대로 갖고 돌아가면 한국과 포르투갈을 소모적으로 왕복 배송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저 스스로 저질러 놓고도 억울한 심정에 이제라도 책장을 넘겨본다. 하지만 왠지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글이 눈에 잘 들어오진 않는다. 결국, 몇 장 읽다가 책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간이 주방으로 갔다. 작은 창문 너머로 낮은 집들 사이에 멀리 우뚝 솟은 클레리구스 탑 Torre dos Clérigos이 보인다. 그 뒤로 뉘엿뉘엿 해가 넘어가며 형형색색 고운 붉은 비단이 겹겹이 도시 전체를 감싸 안는다. 그렇게 포르투갈에서 머무는 마지막 저녁이 지나가고 있었다.


해질녘의 포르투 ⓒRafael Fedler


P.S.

2007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최한 <반 고흐 특별전>에 '자화상', '아이리스' 등 네덜란드 반 고흐 미술관에서 외국에 잘 대여하지 않는 유명 작품을 보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해바라기'는 포함되지 않았다고 하니 대반전이 아닐 수 없다. 나의 기억은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왜곡되었을까. 반 고흐 미술관에서 다른 작품에 적힌 대여 안내문과 착각했을까. 해바라기를 소장한 영국 등 다른 미술관을 방문했을 때 어느 나라에 대여했다는 안내문과 착각했을까. 내가 그날 해바라기 작품을 실제로 보지 않은 건 사실일까. 황당한 상황에 그때 분명히 몇 번이나 작품명과 대여 안내문을 확인한 것 같은데…… 인간의 기억은 불완전함을 다시금 절실히 깨닫는다.



A Pérola do Bolhão


운영: 월~금 09:00~19:00

        토 09:00~13:00, 일 휴무

위치: 볼량역과 마제스틱 카페 중간, 볼량시장 근처에 위치

주소: R. Formosa 279, 4000-252 Porto

전화: +351 22-200-4009

비고: 가고 싶었던 아르데코풍 식료품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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