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마일펄 Jun 20. 2023

부모의 괴롭힘,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치유 과정)

바꿀 수 없는 것을 인정하고, 바꿀 수 있는 것에 몰두하기

책 작업은 즐겁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단점이라기보다는 ‘난감함’이 더 정확한 표현일 테다. 현재의 나는 더 이상 원고를 썼을 때의 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3개월 전까지는 그래도 괜찮은데, 6개월 전에 쓴 글만 하더라도 나의 지식수준과 생각은 그때보다 한층 성장하고 성숙해져 있다. 그 괴리를 메꾸려면 원고를 추가하거나 수정하면서 대대적으로 손봐야 하는데, 이 과정은 결국 원고를 다시 쓰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품이 들어간다.


이렇게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마침내 탈고를 했다고 끝이 아니다. 열 번 가까이 퇴고를 거치는 동안 시간은 또 흐르고 그럼 나는 더 성장해 있고, 원고의 미숙한 부분이 점점 눈에 띈다. 하지만 이때는 원고를 대대적으로 손볼 단계는 아니므로 마치 연기자가 배역에 몰두하듯이 현재의 나보다 미숙했던 몇 개월 전의 나로 돌아간다. 그때의 부족한 내 한계를 받아들인 채 더 정확한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매끄럽게 다듬는 마무리 작업에 몰두한다. 이처럼 적당히 다음을 기약하지 않고 완벽해지고자 한다면 아마도 평생을 가도 책을 완성하진 못할 것이다.


첫 책인 <부모님과 헤어지는 중입니다>는 아직 받아보지도 못한 최신간인데도 열흘 전 이 책을 마무리했을 때보다 지금의 나는 얼마간 성장해 있다. 오늘은 책에 담기지 않은 부모를 향한 집착에서 좀 더 자유로워진 그간의 성숙해진 생각을 풀어보려고 한다. <부모님과 헤어지는 중입니다>의 저자 후기 정도의 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작년 설 이후로 집에 가지도, 부모님을 뵙지도 않고 있다. 책에도 쓴 일화인데 이혼이라는 힘든 시기에 따뜻한 안식처가 되어줄 것이라고 믿었던 부모님은 착각과 달리 전혀 기댈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내 이야기와 하소연을 몇 시간 정도 귀 기울여 듣고, 공감과 위로를 보내며 무조건 내 편이 되어주기. 이것이 내가 부모라는 사람들에게 바란 전부인데, 자식으로서의 이 지극히 소소하고 당연한 소망은 무참히 깨져버렸다. 아버지는 나의 상황과 처지를 아랑곳하지 않고 평생 그랬듯이 자신의 술주정을 받아주기만을 바랐고, 엄마 또한 평생 그랬듯이 술주정을 이해하지 못한 나의 행동과 태도를 나무라며 내 탓을 해댔다. 나의 아픔과 고통, 절망과 비통함, 슬픔과 외로움은 철저히 외면돼 집안 어디서도 감히 드러낼 수 없었다.


알코올 중독 아빠의 행동은 사실 그리 새삼스럽지 않지만, 2차 가해를 하며 나를 또 한번 버린 엄마가 내던진 독화살은 내 심장을 후벼 파는 것만 같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20여 년 전 아빠의 술주정으로 공포 상황에서 무릎 꿇고 벌벌 떨던 16살의 나, 자신도 힘들다며 (의도하진 않았더라도) 자식을 외면하고 문을 닫고 방으로 잠적해 버린 엄마, 극한의 순간에 엄마에게 보호받지 못하고 버려진 기억이 떠올라 결국 오랫동안 덮어둔 깊고 어두운 트라우마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지난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부모님 생각을 하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는 것 같다. 대체 그분들은 왜 그랬을까? 삶이 너무 힘들어서? 자식을 소유물이라고 생각해서? 미성숙해서? 옛날 사고방식이라서?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내가 아빠의 외로운 마음을 조금만 더 헤아렸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우리 가족은 왜 이 모양일까. 내가 바란 것들이 과한 것들인가? 이 사소한 것들이 왜 우리 가족에겐 이처럼 어려울까. 대체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렇게 고통받아야 하는 걸까. 나에게 행복한 가족은 허락되지 않는 걸까. 죽어버리고 싶다. 죽여버리고 싶다. 이 혼란과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


연진이를 단 하루도 잊지 않고 복수의 칼을 간 <더 글로리>의 동은이처럼 삭일 수 없는 분노감은 강박적인 생각의 형태로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가라앉았다를 반복했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비상식적인 상황을 여전히 소화할 수 없어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알아도 강박사고는 멈추지 않았다.


미워하고 원망하고 분노하는 이 모든 감정에도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된다. 어느 순간, 미워하는 것조차 힘들어서 더는 못하겠다 싶었다. 쓸데없는 생각에 사로잡힌 나 자신이 너무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종영한 인기 드라마 <닥터 차정숙>에서 정숙이가 남편에게 정식으로 이혼을 요구하며 “이제는 당신을 미워하고 싶지도 않아. 우리 두 사람 이미 끝났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나도 눈물을 펑펑 쏟았다. 사랑하고 믿었던 만큼 미움의 크기가 너무 커서 더 이상 미워하고 싶지도 않은 다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이제야 나도 부모를 향한 오랜 익숙한 집착과 기대를 내려놓고 좀 더 자유롭고 편안해지는 길목에 접어드는 것 같았다. 강박사고들이 다 부질없게 느껴졌고, 이건 사실이기도 하다.




나는 이번 책을 ‘지배적인 부모로부터 정서적으로 독립하는 과정’을 다룬 책이라고 정의했는데, 한편으로 ‘가정폭력’의 실상과 부작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싶은 게 아닐까? 싶다. 실은 책 작업을 끝낸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나는 가정폭력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여전히 부정하고 있었다. 폭력 대신 학대, 학대 대신 괴롭힘 정도로 표현을 순화하고자 했는데, 괴롭힘이나 학대가 곧 폭력이지 않은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가정폭력의 피해자라는 규정은 당사자로서 너무 두렵고 가슴 아픈 말이다. 비록 과거에 벌어진 일이더라도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은 좌절과 우울을 불러오고,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절망적인 현실은 외면하고만 싶다. 나를 낳고 키운 부모가 인간에 미달하는 저열한 이들이라는 무거운 사실은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다. 이는 폭력이나 학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겪는 일반적인 심리 과정이기도 하다. 현실을 왜곡해서라도 자기 통제감을 잃지 않고 자신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자기 통제감을 잃고 싶지 않아서 오랫동안 답이 없는 강박사고에 몰두하고 사로잡혔던 것 같다.


가정사를 알지 못하는 지인들이 이 책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두려웠는데, 오랫동안 감춰온 사실을 드러내자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고 더 당당해졌다. 부정하고 싶었던 과거에 가정폭력의 피해자였다는 사실과 내 부모의 비정상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위로와 연민, 동정의 대상이라는 것, 더욱 많은 응원과 지지가 필요하다는 것, 당시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 현재 나의 고통과 가족의 불행은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 그러니 내가 책임질 일도 없다는 것, 나아가 가정폭력의 피해자들의 심정을 헤아리고 정신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 – 오랫동안 부정한 무력감을 받아들이자 통제하고 싶은 욕구를 내려놓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좀 더 수월하게 인정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들을 더는 이해하고 싶지 않다. 아니, 그들의 말과 행동은 처음부터 이해할 수도, 이해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난폭한 술주정을 가족이 이해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는 아버지, 이러한 아버지가 안쓰러워 이해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어머니 – 폭력을 견디는 것이 어떻게 사랑인가. 폭력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은 회피를 넘어 결국 폭력을 지지하는 것 아닌가.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생각은 존중해야 하지만, 이는 정상 범주에 속했을 때이다. 가령, 차별을 옹호하고 폭력을 지지하고 혐오를 부추기는 생각과 말은 무시하거나 바로잡아야 한다. 비정상 범주에 해당하는 부모님의 말과 행동은 바로잡진 못하더라도 이해하려 애쓸 것이 아니라 애초에 무시했어야 한다. 나는 너무 오랜 시간 할 수 없는 것을 해내려고 붙들고 매달린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술주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식을 자신을 무시하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아버지. 이러한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식들이 너무 한다고 믿는 어머니. 이들은 제정신이 아니다. 아픈 사람들이다(실제로 알코올 의존증은 정신 질환으로 분류되고, 중독자의 배우자는 우울증에 걸리는 경우가 많다). –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이들에게 더는 부모로서의 역할이나 남아있던 일말의 기대조차 접어버렸다. 더 이상 이해도, 인정도, 소통도 필요치 않게 되었다.


미움도, 원망도, 복수심도 전부 사라졌다. 그들은 이미 지옥을 살고 있고, 나는 운 좋게 그곳에서 빠져나왔는데 무슨 원망과 복수가 더 필요할까.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고,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을 알지 못하고, 어려움에 처한 자식(사람)을 불쌍히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들. 앞으로도 변할 가능성이 희박한 사람들. 평생 지옥을 살고 있는 이들을 미워해서 무엇을 할까. 내가 그렇게 살지 않으면 그만이지.


자기 합리화나 정신승리일 수도 있으나, 10대 때부터 평생 깨부수고 싶었지만 번번이 실패한 그들의 공고하고도 괴이한 세계를 놓아두는 것, 다투면서 갈등과 분란을 만들며 상처를 주고받는 짓거리를 더는 하지 않는 것, 그들을 더는 흔들거나(흔든다고 흔들리지도 않지만) 그들의 세계에 균열을 내지 말고 죽을 때까지 자신들이 만든 지옥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며 끝끝내 불행하게 살도록 하는 것 – 이처럼 그들에게 더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최대의 복수이지 않을까 싶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동은은 자신의 가해자들에게 말한다. “고마워, 하나도 안 변해서. 그대로여서 정말 고마워.” 나도 이제는 평생을 변하지 않은 부모님께 감사하다. 자식 된 도리로 차마 마음 놓고 표출하지 못한 분노가 쌓여서 결국 나를 향해 죄책감으로 변해버린 올가미와도 같던 불편한 감정을 털어낼 수 있게 해 주셔서.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_’라인홀드 니부어’의 기도문


라인홀드 니부어의 명언이 마음에 들어온 것을 보면 부모를 향한 오랜 혼란스러운 감정과 불안정한 집착의 일단락이 머지않은 것 같다.



심리에세이 <부모님과 헤어지는 중입니다>는 온라인서점에서 판매하고 있습니다.

교보문고 온라인, 예스24, 알라딘, 인터파크도서에서 예약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책은 6월 22일(목) 발송 예정으로 예정일 이후 1~2일 이내 수령하실 수 있습니다.


좀 더 자세한 책 소개는 각 온라인서점을 확인해 주세요. ^^


이전 12화 <부모님과 헤어지는 중입니다> 추천 콘텐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