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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의 최대 '권력', 학교 성적

공부를 왜 열심히 했을까

by 스마일펄

친한 출판사 대표님이 검토를 요청한 원고를 읽기 전, 저자 이력을 확인하고 SNS에 들어가 봤다. 인스타그램 닉네임에 이어 ‘서울대 경제학부 재학 중’이라는 굵은 글씨가 가장 눈에 띄었고, ‘메가스터디 멘토 활동 중’이라는 짤막한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원고는 수능 공부와 시험 준비 노하우를 담고 있었고, 저자는 최근에 수능을 보고 서울대에 입학한 대학생이었으며, 자신이 도움을 받은 메가스터디의 멘토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학력을 최우선으로 내세운 SNS 프로필은 적어도 나에게는 낯설기 그지없었다. 학력을 굳이 감출 필요는 없지만, 출신 대학 같은 사회적 조건으로 규정되거나 편견을 갖고 싶지도 않았기에, 적나라하게 내세우고 싶지도, 그럴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어차피 내 인맥은 좁고 깊은 편이라 학력을 강조하지 않아도 SNS 친구들은 대부분 내 학력을 알고 있거나, 같은 학교 출신이 많아서 내세우기 부끄럽기도 했다.


뒤늦게 ‘명문대생’이라는 점을 강조해 누군가에게 자신을 더욱 매력적이고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도록 적극 ‘활용’할 수 있다고 알게 되었다. 자신을 소개할 때 학교를 가장 내세우고 싶을 만큼 누군가에게는 명문대 입학이 간절한 인생 최대의 목표였으며, 성취한 목표를 여기저기 자랑할 정도로 높은 가치를 지녔다고도 알게 되었다. 어쩌면 나는 세상이 부여한 학력 자본의 진정한 가치를 제대로 고민해 본 적이 없어서, 지나치게 과소평가 평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는 내가 가고 싶은 대학과 전공 1순위였다. 수시 전형으로 합격해 1학년 때부터 과도 정해졌기에 고등학생 가운데 원하는 꿈을 이룬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우리나라 고등학생 가운데 자신이 원하는 대학의 원하는 과에 합격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더라도 과가 마음에 안 들 수도 있고, 1순위가 아닌 2순위, 2순위가 아닌 3순위, 3순위가 아닌 4순위, …… 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고민의 시간을 보내며, 좌절감과 실망감을 딛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고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는 사람은 부지기수일 것이다. 결과를 수긍하지 못하고 간절한 목표를 이루고자 반수나 재수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고, 좀 더 나은 대학으로 편입하고 싶은 욕구를 가진 이들도 많을 것이다.


당시에 사회과학대학에는 신문방송학과 외에 정치외교학과, 행정학과, 사회복지학과, 사회학과까지 총 5개 과가 속해 있었고, 나처럼 수시 전형으로 입학해 전공이 정해진 사람은 일부였다. 1학년 때는 주로 정치학 개론, 경제학 개론, 심리학 개론, 통계학 개론 등 사회과학대학 필수 공통 과목을 수강하고, 2학년 때 전공을 정하는 경우도 많아서 원하는 과에 들어가려면 학점 관리를 어느 정도는 해야 했는데, 나는 이 압박에서도 자유로웠다. 한마디로 입시 과정은 다른 고3처럼 힘겨운 시간이었지만, 입시 이후 대학 입학에는 별다른 고민과 갈등, 압박과 좌절이 없는 행복한 스무 살이기도 했다. 대학과 전공에 아무런 결핍 없이 처음부터 만족했기에 어쩌면 나는 어느 순간 이를 당연하게 여겨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심지어 연세대에 입학한 같은 학번 친구들도) 내가 속한 대학과 전공을 갈망하는지 그 가치를 외면했는지도 모르겠다.




신경증 환자는 이기적일 때가 많아서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폐쇄적이고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과도한 불안에 사로잡힌다. 이런 경향이 이상할 것이 없는 이유는 신경증이란 강한 자아의 형성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지 못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상적이라고 해서 마무리가 잘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대다수의 잘 적응한 사람들의 경우도 정상이란 그저 어린 나이에 자아를 잃어버리고 사회가 제공한 사회적 자아로 완전히 대체되었다는 뜻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신경증의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아가 사라짐에 따라 자아와 외부 세계의 불화도 사라졌으니 말이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장혜경 옮김, 김영사, 2022.02)>, 121쪽 중에서




고등학생 때 고민했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만큼 한 오 분이나 십 분 정도? ‘대학을 왜 가야 할까?’ 아주 잠깐, 매우 짧게 의문이 든 적이 있다. 그때가 아마도 수능을 약 1년 앞둔 고2 겨울방학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 누군가와 상의 한 번 없이 혼자 내린 결론은 놀랄 만큼 단순했다.


‘대학을 왜 가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지금까지 전교 등수 1, 2위를 오가며 좋은 성적을 유지한 내신이 아깝기도 하니, 1년만 꾹 참고 대학 입학을 목표로 하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보자. 지금 딱히 하고 싶은 게 있지도 않고, 어른들은 대학은 꼭 가야 한다고 말하니, 그냥 한번 해보자’


이처럼 별다른 내적 갈등 없이 대학을 진학해야 하는 명확한 이유도 모른 채 진학하고 싶은 뚜렷한 내부 동기도 없이, ‘일단은’ 되도록 좋은 대학 입학을 목표로 설정하고, 목표 성취를 위한 계획과 실행에 몰두하는 입시 공부 기계의 삶을 1년간 살아 보기로 했다. 요즘의 중고등학생은 여기저기서 듣는 정보가 많아서 현실적이고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 있다고 바라보는 시각도 있지만, 과거의 나처럼 대학에 왜 진학해야 하는지, 공부는 왜 해야 하는지 마음속으로 자기만의 근거를 세운 경우는 드물 것이다.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한 어른은 드물어서 주변 어른에게 물어도 실질적으로 도움 되는 제대로 된 답을 얻는 경우는 드물 테니까. 아마 나도 고2 겨울방학 때 부모님께 묻는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대학에 가라’, ‘대학에 가 보면 안다’ 같은 하나마나 한 답변이나, ‘우리 사회에서는 학력은 여전히 중요하다’, ‘좋은 학교에 가면 인생의 선택지가 넓어진다’처럼 당장은 피부에 와닿지 않는 당위적인 설명을 들으리라 잘 알고 있어서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18살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똑똑하고 현실적인 사람이었는지도.




그럼, 나는 중고등학생 때 왜 이리 학교 공부에 매진하고, 학업 성적에 집착했을까. 수도권의 일반계 고등학교이지만 3년 내내 전교 등수 1~2위를 유지하고, 명실상부 우리나라 명문대로 손꼽히는 연세대학교의 인기학과인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한 것은 분명 큰 성취이지 않은가. 나는 나름 영리하고 현실적인 학생이라 우리나라 중고등학생에게 학교 성적은 곧 ‘권력’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학생에게 권력이란 선생님, 부모님, 다른 어른들에게 간섭받지 않을 권리(전혀 쓸데없는 염려와 잔소리 포함해서)인데, 내 경험상 이는 전교 3등 안에는 들어야 비로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학교 성적은 적어도 나에게는 부모님, 선생님의 인정을 받고(칭찬받고) 그들을 만족시키고(기쁘게 하고), 친구들보다 뛰어나다는 우월감을 누리거나, 학벌을 지렛대 삼아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싶은 욕구보다는,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라면 역량껏 노력해서 최선의 결과를 얻고 싶은 개인적인 성취욕을 충족하고, 어른들(혹은 친구들)의 간섭, 무시에서 나 자신을 보호하고 자유를 누리려는 몸부림의 의미가 더 컸다.


그런데 내 논리는 큰 모순점을 안고 있었다. 고등학생 때 누리고자 한 자유는 결국, 부모님과 선생님 등이 학생으로서 바람직한 태도와 행동이라고 설정한 좋은 성적 유지라는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주어지는 것이었다. 즉, 나 자신을 위해서 공부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누구보다도 어른과 사회가 정한 기성세대의 잣대에 순응하고 말 잘 듣는 착한 학생에 불과하기도 했다. 좋은 성적으로 최대한 어른들의 간섭을 줄이고 자유를 누리고 싶은 나의 욕구, 좋은 성적은 좋은 대학에 입학해 유리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는 어른들의 신념, 이 두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서 나는 청소년기에 내적 갈등이나 어른과의 불화도 거의 겪지 않았다.


에리히 프롬을 인용하자면 어린 나이에 자아를 잃어버리고 사회가 제공한 사회적 자아로 완전히 대체돼 사회(학교 포함), 세상에 잘 적응한 정상인의 범주에 속했다고 할 수 있는데, 한마디로 나는 10대 때 정서적 사춘기를 겪지 않아 자아정체성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우리나라처럼 학업 압박과 경쟁이 극심한 환경에서 초중고 학생이 공부가 적성에 맞아 좋은 학업 성적을 얻는 것은 엄청난 강점이고 여러 측면에서 분명히 유리하다. 하지만 이는 자칫 부모님, 선생님, 학생 당사자까지 학업 성적에만 지나친 가치를 부여한 나머지 무의식 중에 살아가는 데 필요한 다른 중요한 가치를 외면하거나 희생할 소지도 크다. 흔하게는 아이가 공부를 아주 잘하면 어른들은 아이에게 별 고민이나 문제가 없다고 착각해 의도치 않게 아이에게 무관심하거나 방치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또래 친구들과 달리 나는 청소년기에 극심한 정서적 혼란이나 불안을 경험하지 않고, 정체성을 상실한 채 이십 대를 맞이했다. 이십 대 초반은 물론이고 삼십 대 중반인 현재까지 사춘기를 겪지 않은 강력한 후폭풍과 후유증을 경험하고, 뒤늦게 정체성을 탐색하고 확립하며, 인생사 새옹지마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만일 내가 중고등학생 때 학교 공부 외에 책과 영화, 여행과 연애, 창작과 운동처럼 세상에 온통 재밌고 즐거운 일들로 가득하다고 알았다면 과연 대학 입시에 그토록 몰두할 수 있었을까. 아침 7시에는 일어나서 오전 8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점심, 저녁 시간 등을 제외한 하루 11~12시간 수업 듣고 공부하고 기계적인 문제 풀이에 집중하는 지루하고 힘겨운 시간을 감내하고, 집에 돌아와 밤 12시에 자고 다시 아침 7시에 일어나서 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생활을 견딜 수 있었을까. 고민도 갈등도 없이 단순하게 살아가는, 인간성을 상실한 비인간적인 생활에 늘 젖었기에 멋모르고 그 시기를 지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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