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배경의 이면과 속사정
나의 스무 살은 왜 이리 암울하고 불안했을까. 무엇 때문에 ‘다 벗어던지고 수녀가 될까?’ 싶은 마음이 들 만큼 힘들었을까. 돌이켜보면 대학교에 갓 입학한 처음에는 자아가 이렇게까지 무너져있지는 않았다. 처음 경험하는 환경과 사람이 낯설어 조금은 경계하고 긴장도 했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설렘과 기대도 있었고, 다양한 배경을 지닌 친구들과 선배들이 신기했으며, 하나같이 뛰어나고 멋진 사람들 틈에 속했다는 자부심도 느꼈다. 가정환경이 좋고, 나보다 능력적으로 잘난 친구들에 대한 부러움은 있었지만, 열등감을 느끼진 않았던 것 같다.
“나도 B처럼 우리 학교에서 2학년 정도 마치고 미국 대학으로 편입하고 싶다.”
하루는 과 친구 A가 반 친구 B처럼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시에 나는 수시 전형으로 입학해 신문방송학과에 배정받으면서 동시에 사회과학대학 여섯 개 반 가운데 하나에 속해 있었다. 나처럼 1학년 때부터 전공이 정해진 사람도 있었지만, 우선은 사회과학대학으로 입학해서 2학년 때 5개 전공(정치외교학과, 행정학과, 사회복지학과, 사회학과, 신문방송학과)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반은 1학년 때 서로 다른 관심사를 가진 친구들끼리 어울리며 소통하고, 적응을 도우라는 의미로 만들어진 제도였다. 아무래도 비슷한 성향과 관심사를 가진 사람이 같은 전공을 선택하기 마련이라, 비록 1년 남짓이었지만 이때 반에서 얕게나마 여러 친구들과 교류한 경험이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에 대한 이해를 조금은 더 높인 계기였다. 특히, 정치외교학과 정원이 가장 많아서 이 전공을 지망하는 친구들이 눈에 더 띄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외국어에 능통한 외고를 졸업한 친구들이 정치외교학과를 지망하는 경향이 짙었던 것 같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에는 2008년 사회학과에서 문화인류학과가 분리돼 총 6개 과가 있다. 언론홍보영상학부(2006년 신문방송학과에서 명칭 변경), 문화인류학과, 사회학과, 정치외교학과, 행정학과, 사회복지학과)
“B는 부모님이 외교관이라 어렸을 때부터 외국에서 생활한 경험이 풍부할걸? ○○외고 진학 전에 ▲▲에서 몇 년 살았던 걸로 알고 있어.”
지금 생각하면 사실이긴 해도 친구 A의 입장이나 상황에 대한 배려 없이 지나치게 직설적으로 말한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런데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 정도로 집안 배경이 좋고 능력이 월등한 친구와 알고 지내면서도 그저 ‘친구 A는 그런 사람이구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곤 했다.
- 토익 점수가 있어서 1학년 필수 과목인 영어 기초를 ‘PASS’ 해도 된다는 친구를 보고는 ‘외고를 졸업해서 역시 영어를 잘하는구나’ 싶었다.
- 1학년 필수 과목인 글쓰기 수업에서 조별로 발표하는 형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우리 조에서는 내가 발표를 하기로 했는데, 너무 긴장한 나머지 발표 당일에 도저히 못할 것 같아서 다른 친구에게 발표를 넘겼다. (내 태도가 다소 무책임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친구는 당황하지 않고 그동안 우리가 조사한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발표를 잘 마쳤다. 나보다 한 살 어린 그 친구는 민사고를 졸업했는데 ‘민사고에서는 자기 생각을 정리해서 표현하는 위주로 수업을 한다더니 역시 다른 것 같다’라고 감탄하며 한편으로 내 부족함을 포용해 줘서 고마웠다.
- 아버지 사업 때문에 10대 시절 동남아 지역에 거주하며 외국인학교에 다니다가 영어 특기자 전형으로 입학한 친구가 어느 날, ‘운전기사님 은퇴를 축하하러’ 자신이 살던 곳에 다녀온다고 했다. 알고 보니 친구는 (동남아 거주라는 특수한 환경 때문인지 몰라도) 운전기사와 가사 도우미가 있는 가정환경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전혀 다른 성장 배경이라 처음에는 좀 당황했지만, 편견 없이 자기 자신이나 생각을 일관되게 솔직히 말하는 친구라서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지냈다. 한편, 이 친구는 당시에 부족한 자신의 한국어 실력을 개선하고자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 얼굴도 예쁘고 집도 부자이며 학점도 좋은데 뭐랄까…… 너무 솔직하고 털털해서 다소 푼수 같은 편안하고 귀엽기도 한 친구들도 많았다(드라마 <사랑의 이해>의 박미경 같은 사람이 널린 흔한 환경이었다).
- 이때까지 외모가 출중하면 주변을 의식해서 예쁜 척하고 소극적인 성격일 것이라는 편견이 있었는데, ‘질문 있느냐’는 교수님의 물음에 아무도 손들지 않는 상황에서 번쩍 손을 들고 적극적으로 질문하는 외모가 예쁜, 가깝게 알고 지내던 친구 덕분에 외모에 대한 편협한 시각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세상에는 자신의 예쁜 외모를 의식하지 않고서 적극적으로 자기 의견을 제시하고, 타인에게 휘둘리기보다 자기 인생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며, 사회에 참여하는 활발한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도 많다고 알게 되었다.
(외모가 독보적이면 쉽게 주목받기 때문에 시기, 질투를 받거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가십 대상이 되기 일쑤이다. 그래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말을 아끼거나 행동거지를 조심하거나, 오히려 자신의 외모를 사람들의 호감을 얻는데 이용하는 경우도 많은데, 대학교에서 만난 외모가 출중한 친구들은 이 둘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수업 열심히 듣고, 하고 싶은 말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며, 멋지고 자유롭게 사는 법을 아는 이들이었다.)
- 아버지가 사업체를 운영하셔서 경제적으로 넉넉한 가정환경인데도 통학을 원칙으로 하는 부모님을 설득하지 못해서 학교 근처에서 자기 형편에 맞는 고시원에서 거주하는 친구도 있었다.
- 유년기를 프랑스에서 보냈는데 정작 자신은 프랑스어를 한마디도 못한다는 자격지심 때문에 과거의 프랑스 거주 사실을 감추고 싶어 하는 친구도 있었다.
-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을 외국에서 보내 영어를 잘하는 친구들 가운데 어린 시절 생김새 다른 이방인으로 편견과 놀림을 받았고,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획일적이고 경쟁적인 한국의 교육 시스템에 적응이 힘들었으며, 다소 어눌한 한국어 발음이 콤플렉스라서 어찌 보면 10대 시절 내내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이방인의 삶을 살아온 이들도 있다고 알게 되었다.
- 부모님이 농부인 친구가 말하길 농부는 1년 내내 고되고 순박하다는 편견이 있지만, 농사철에만 일하고 보통 겨울에는 쉬기 때문에 1년에 4개월 정도는 해외여행을 가는 등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여유롭다고 말해줬다.
- 뒤늦게 알았지만 (등록금까지는 아니더라도) 자기 생활비를 벌기 위한 과외 아르바이트조차 안 해도 될 만큼 부유해서 공부든, 연애든, 여행이든 자유롭게 오로지 자신이 하고 싶은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는 친구들이 부럽긴 했다. 그런데 한편으로 결핍이 너무 적어서 자신이 무엇인가를 이뤄야 한다는 성취동기가 부족한 탓인지 졸업 뒤 일이나 공부, 사회참여 등 자아실현을 위한 활동을 꿋꿋이 이어가는 친구들은 일부이고(소수이고?), 1~2년 회사 다니다가 그만두거나 전문직 경력을 이어가지 않고 결혼 상대로 적합한 조건 좋은 사람과 '일찍' 결혼해서 아이 양육에 전념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꽤 많다. 이 친구들은 현재 우리 세대보다 사고방식이나 생활양식이 상당히 보수적이고, 또래보다 오히려 부모님 세대와 더 유사한 경향이 있다.
돌아보면 성장 배경이 많이 다르고, 여러 능력이 월등한 친구들과도 솔직하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만큼, 초기의 적응기를 지난 뒤에는 전반적으로 사람들과 이질감 없이 제법 잘 어울리는 대학생활을 보낸 것 같다.
(그런데도 왜 무의식에서는 연세대를 맞지 않는 옷이라고 생각할 만큼, 자존감이 오랫동안 무척 낮았는지 그 이유는 아래 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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