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고 암울했던 스무 살
연세대학교는 나에게 맞지 않는 옷만 같았다. 지하철 2호선에서 내려 신촌역 3번 출구로 나와서 걷다가 왼편의 현대백화점을 지나 건널목을 건넌다. 할리스 커피와 독수리다방, 대학약국을 지나 조금 더 걸으면 횡단보도 너머로 오른쪽 앞에는 높은 세브란스 건물이, 중앙에는 백양로를 중심으로 양옆으로 대학 건물이 펼쳐진 캠퍼스가 나타난다. 복잡한 교차로를 건너 금박으로 ‘연세대학교’라는 이름과 로고를 새긴 정문을 통과할 때마다 ‘내가 과연 이곳에 와도 될까?’, ‘내가 이 학교를 다닐 자격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수백 번도 넘게 했다. 시간표를 짜서 수업을 듣고, 여러 모임에도 참석하고, 미소 띤 얼굴로 친구들을 만났지만, 생각은 많고 감정은 요동쳐 불안한 깊고 깊은 어두운 나날이었다.
휴학을 제외한 연세대학교 4년은 사회적, 경제적, 교육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가장 상위에 있는 이들을 흔하게 접한 시기였다. 전국 각지에서 공부 잘한다는 아이들이 모였지만, 외국어고등학교나 민족사관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들이 쉽게 눈에 띄었고, 체감상 압구정, 잠원, 대치동, 서초동, 청담 등 강남과 잠실, 강동구 등 강남권에 거주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본가가 지방인 경우라도 부산이나 울산, 대구/마산/창원, 광주 등 대도시에서 부유하게 성장한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영어는 기본으로 구사하고, 외교관이나 주재원 부모님을 따라서 독일, 영국, 홍콩, 프랑스, 필리핀 등 세계 각지의 해외에서 청소년기나 유년기를 보낸 친구들도 많았다. 물론, 나처럼 수도권에 거주하며 평범한 일반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들도 많았지만, 느낌적으로 강남권이나 지방 대도시에서 성장기를 보낸 경제적으로 상위 1%에 해당하는 특목고 또는 명문고 출신 친구들이 절반에 가깝거나 그 이상이었던 것 같다. 부모님이 사업을 하셔서 국내외를 오가거나, 교수, 은행장, 군인, 고위공무원 심지어 국회의원 등 사회적 지위가 있는 경우는 수두룩했다. 나는 수시 원서 접수할 때 신촌과 연세대에 난생처음 와 봤는데, 부모님 두 분이 연대를 졸업해서 어렸을 때 종종 신촌캠퍼스에 놀러 온 친구들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고등학생 때도 부모님 직업이 의사 또는 대기업 임원이라 매우 부유하거나, 해외에서 몇 년 거주한 경험이 있어서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친구들이 없진 않았지만 반에 한두 명 될까 말까 드문 편이었는데, 여기는 그야말로 대한민국 종합 최상위 1% 집합소나 다름없었다. 머리가 좋고 공부도 잘하는데 성격도 좋고 착한 데다 외모도 출중한데 집안까지 좋고 심지어 노력까지 하는 마치 완벽한 외계인들이 모인 별천지 같았다. 당시에 가족 가운데 유일한 대학 학력 소지자이자 명문대 입학자였던 나는, 그 누구에게도 어떤 조언을 듣거나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없었다. 평생 인정받는 모범생으로 살았는데 이곳에서는 나를 둘러싼 모든 새로운 환경이 낯설고 혼란스러운 학교 부적응자에 불과했다. 표정은 멍하게 대체로 굳었고 말수는 적었으며 행동은 우왕좌왕 뭔가 정신이 없고 부자연스러웠다.
- 민사고를 조기 졸업해 나보다 한 살에서 세 살 적은 같은 학번 친구
- 이미 토익/토플 점수가 있어서 필수 과목인 영어 기초 수업을 건너뛰는 친구
- 절대 평가인 영어로 진행하는 수업을 자신 있게 수강하는 친구들
- 한국인인데 술 취하면 자연스러운 영어로 대화를 주고받는 친구들(술주정이 영어 토크)
- 특정 수능 과목 만점자는 너무 많아서 헤아릴 수 없음
- ‘너도 해외에서 살다 왔어?’라는 당황스러운 질문이 자연스러운 환경
- 당연히 강남에 살았다고 생각해 ‘그럼, 부모님 은퇴하시면서 (여유롭게 살려고) 구리로 이사한 거야?’라는 지극히 강남 중심 사고방식이 담긴 당혹스러운 물음
- 명품 가방이나 화장품, 선글라스 등을 기본으로 소유한 스타일리시한 친구들
대학 입시라는 정해진 목표와 짜인 시간표 대로 살다가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자기 주어진 무한한 자유의 썰물에 휩쓸려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 상태로 매 순간 긴장하고 불안한 감정을 애써 감춘 채 태연한 척하는 나와 달리 친구들은 하나 같이 자신만만하고 멋있어 보였다. 간절히 바란 목표를 이뤘다는 자부심이 느껴졌고, 대학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나와는 다르게 저마다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인간관계도 잘 형성해 서로 잘 어울렸으며,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학교 적응도 버거운 나와 달리 친구들은 여름 방학이 되자 언제 계획했는지 저마다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고, 시간이 좀 더 지나서는 토플 공부에 매진하더니 하나둘 미국/유럽/호주/일본 등으로 교환 학생을 다녀왔다.
나도 과 친구들, 반 친구들과 어울리며 수업도 같이 듣고, 동아리도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멋모르고 미팅도, 소개팅도 하며 대학생 행세를 했지만, 마음은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어지러웠으며, 어디에서도 안정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해서 늘 겉돌았다.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한번은 차가운 방바닥에 혼자 옆으로 누워서 등을 동그랗게 구부리고 양 손바닥으로 무릎을 감싼 태아 자세로 말없이 한동안 눈물 줄기를 쏟은 적도 있다. 오죽하면 가톨릭 신자도 아닌데 ‘다 벗어던지고 수녀가 될까?’ 싶었는데, 어떤 과정을 거쳐 수녀가 될 수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만큼 모든 것이 버겁고 힘들어 세상 무엇과도, 누구와도 얽히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소용돌이치는 마음의 혼돈을 잠재울 고요하고 평온한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했던 것 같다.
과연 나만 불안하고 겉돈다고 느꼈을까? 나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부적응자 같았을까? 인간관계의 폭은 걷잡을 수 없이 넓어지고, 겉으로는 서로 미소 짓지만 고등학생 때와 달리 속 깊은 친밀감을 형성하기에는 처음 경험하는 개인주의 짙은 환경에서 피상적인 인간관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가식적이거나 위선적이라고 나만 느꼈을까. 아마도 급변한 환경에서 막연한 외로움과 불안감, 인간에 대한 불신과 나만 뒤떨어진 것 같다는 열등감에 몸서리친 이들은 나 말고도 많았을 것이다. 내가 친구들을 대단하게 바라봤듯이 또 누군가는 분명히 나를 보면서 ‘쟤는 잘만 적응하는 것 같은데 나만 아무것도 모르는 하찮고 보잘것없는 사람’처럼 느꼈을 것이다. 다만, 서로 자존심이 세서 겉으로는 괜찮은 척 솔직한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았을 뿐. 지독한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나에게 연세에서 맞이한 스무 살은 자유롭지만 혼란스럽고, 순수하고 해맑지만 암울하고 어두운, 내 인생에서 처음 경험한 가장 불안정하고 힘겨운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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