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에 관한 불편한 진실
2005년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입학. 2010년 연세대학교 언론홍보영상학부 졸업. (변화하는 언론/방송/콘텐츠 산업 환경에 발맞춰 2006년에 과 이름이 변경되었다.) 종합출판사, 대학병원, IT 스타트업 등에서 마케팅/홍보 담당자로 근무. 최근 공식적으로 첫 책을 출간한 작가. 경기도 구리 출생. 이 짧은 이력으로는 서울 근접 수도권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좋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름 괜찮은 회사의 사무직으로 근무하다 수많은 이들이 바라는 작가의 꿈을 이룬 그럴 싸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다.
4년 여의 결혼생활 끝에 근래에 이혼. 자식도 없고 남편도 없음. 술주정을 일삼은 알코올의존증 아버지, 이를 방치하고 자식의 고통을 외면한 어머니, 부모의 정서적 학대에 따른 트라우마 치료 중. 현재 고정 수입은 월 200만 원 미만. 빌라 월세 거주. 지인들은 대부분 대기업, 언론사, 방송국에서 근무하거나 의사, 교수, 변호사, 회계사 등 전문직 종사 또는 창업에 성공한 사업가. 미국, 캐나다, 호주, 싱가포르, 유럽 등에서 거주하거나 한국을 오가며 전방위적으로 활약하는 이들도 다수이다.
(200만 원 미만으로 살아도 괜찮은 건가? 싶은 오해가 없길 바라는 마음에, 참고로 현재 직접적인 수익 활동은 7~10일 남짓하고 있으며, 시급으로 환산하자면 약 3만 원 내외이며, 나머지 시간은 글쓰기와 상담심리학 공부를 하고 있다. 아주 간혹 원래 일하던 출판업계에서 면접 제안이 올 때도 있는데, 늘 고민 끝에 정중히 거절하고 있다.)
최근까지 누군가를 만났을 때 친분이 생기더라도 내가 다닌 대학교를 먼저 언급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한국 사회에서 학력이나 학벌이 얼마나 민감한지 잘 알고 있어서 공연히 잘난 체한다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고, 누군가가 혹시 모를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까 봐 염려했다. 소위 말하는 SKY 대학(서울대, 고려대, 연세대)이라는 브랜드를 자기 자신을 돋보이거나 사회적 지위 상승의 발판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근래에 알았으니, 내가 획득한 연세대라는 학력 자본을 내세울 생각을 못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연세대 졸업했어요”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닌데도 회사 동료나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내 학력을 알고 있었다. 명문대 졸업생이라는 사실은 스쳐 지나가는 가십거리일지라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금세 소문날 만큼 우리 사회에서 특별하며, 희소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이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학력에 매우 예민하고, 좋은 학벌을 선호하며 선망한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대학교를 졸업해 비슷한 무리에서 벗어나 처음 사회에 발을 디뎌 좀 더 다양한 배경의 사람을 마주했을 때는 이러한 현상이 신기했는데, 몇 번 반복해서 겪다 보니 어느덧 익숙해졌다. 이후에는 ‘내 학력을 주변 사람들이 대부분 알고 있지 않을까?’ 싶은 다소 오만한 마음도 있어서 굳이 학력이라는 나의 강점을 내세울 필요가 없기도 했다.
문득, 평생 입 밖에 내지 않던 대학교 이야기를 뒤늦게 하고 싶어졌다. 우리나라 초중고등학생에게 공통으로 주어진 기본 과제는 좋은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이라, 20대 초중반까지는 명문대 입학을 자타공인 성공한 인생으로 치부한다. 적나라하게 대놓고 말하지 않아도 암묵적으로 연세대, 고려대보다는 서울대가, 서강대, 성균관대, 한양대, 중앙대 등 보다는 연고대가, 서울에 있는 대학이 지방에 있는 대학보다 더 낫다는 고정관념을 온 국민이 형성하고 있다. 기업은 채용할 때 출신 대학에 따른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공언하지만, 연봉이 높고 근무 환경도 좋은 회사에 입사하려면 채용에 직접적이지는 않더라도 좋은 대학 졸업자가 더 유리하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 사회에 진입할 나이까지도 학벌이 한 사람의 인생에 꽤 중요한 비중으로 영향을 미친다.
지금까지의 인생도 가짜는 아니었지만, 한 개인의 본격적인 인생은 40대에 시작되는 것 같다. 자신을 둘러싼 학교와 학력, 회사와 직급, 거주지, 부모의 재력 등의 포장지가 개인의 진정한 행복, 사회적 성취에 직접적으로 미치는 비중은 줄고, 가치관과 지향점, 남보다 (보다) 나은 재능과 ‘진짜’ 실력, 성품과 인성, 자기 자신과 타인, 세상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태도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가 한 사람의 인생, 일에서의 성취, 사람 간의 관계에서 미치는 영향이 서서히 커지는 것 같다.
이는 달리 말하면 우리 사회에서 학벌은 여전히 민감한 사안이지만, 이제는 내가 10여 년 전에 졸업한 연세대에서의 경험을 아무리 떠들어도 시기, 질투하거나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사람이 예전보다 줄었다고 할 수 있다. 20대 때와 달리 명문대를 졸업하지 않았어도 이제는 나보다 월 수입이 훨씬 많거나, 좋은 배우자와 안정적인 가정을 꾸려 예쁜 아이들과 살고 있거나, 어린 시절 무한한 사랑을 베푼 부모님과 현재 더욱 애틋한 관계를 맺고 있거나, 이미 커리어적으로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었거나, 자기 소유의 아파트에 사는 등 내가 갖지 못한 것들을 가진 이들이 많아졌으니까.
그럼에도, 지금껏 연세대라는 간판과 그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경험이 인생에 미친 영향이 결코 적지 않다. 내 인생에서 출신 대학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더 줄어들기 전에 연세대 졸업장이 나에게 남긴 개인적인 생각과 경험, 우리나라에서 대학이 차지하는 의미 등을 정리하고 싶었다.
우리나라에서 학벌, 학력, 대학은 주로 효용론을 따지는 논쟁이 많은 듯하다. 가령, 명문대 졸업의 이점, 한국 사회에서 학벌의 중요성, 학벌주의의 문제 또는 폐해, 학벌 콤플렉스, 도구적 가치에 치중한 대학 효용론에 따른 과연 어느 대학까지가 명문대인지 구분하고 선 긋기 등을 왈가왈부하는 경우가 지배적이다. 아니면 우리 사회에서 명문대 졸업은 여전히 ‘사회적’ 성공에 유리하다는 불편한 진실을 체화해 명문대에 성공적으로 입학할 수 있는 노하우를 공유하거나 수능과 수시 등 대학 입시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정보 유통이 대학에 관한 주된 화제인 것 같다.
‘그럼에도 명문대 입학은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가치가 있다’, ‘궁극적으로 대학이 인생을 결정하지 않는다’, ‘대학 졸업장이 행복과 동의어는 아니다’, ‘학벌로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기득권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학벌주의는 사라져야 한다’와 같은 원론적이거나 ‘명문대 졸업생이라고 일머리가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똑똑한 사람이 일의 효율성이 높은 편이다’, ‘대학 입시 관문을 뚫고 명문대에 입학했다는 자체가 성실성과 인내심을 담보한다’처럼 저마다 관점이 다를 수 있는 개별 사례를 고스란히 재현하는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우리나라에서 명문대라고 일컫는 연세대학교에서 내가 직접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 명문대 졸업 후의 삶과 주변인들, 대학에서 누린 낭만과 행복, 그곳에서 만난 좋은 사람들, 명문대 졸업생이 절대 대놓고 말하지 않는 학벌에 관한 불편한 진실 등 명문대 졸업생으로서 나의 경험을 하나씩 정리해 보려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누군가 ‘대학에 꼭 가야 하나요?’라고 묻는다면, ‘세상에 꼭 해야 하는 건 없지만, 굳이 대학에 가지 않을 이유도 없지 않나요?’라고 답을 할 것 같다. 누군가의 인생에 좀 더 간섭할 수 있다면 ‘자신의 능력이 되는 한 갈 수 있는 좋은 대학에 가서 눈에 보이지 않는 탄탄한 인생의 자양분을 잘 다지라’고 말하고 싶다. 이처럼 이 글은 주로 내가 대학에서 누린 긍정적인 경험을 담을 것 같다.
우리나라는 명문대를 졸업했든 아니든 모두 마음 한편에 불편한 감정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 같다. 명문대 졸업생은 10대 때 주입받은 것에 비해 명문대라는 간판이 인생의 성공이나 행복에 그리 중요하거나 결정적인 요소가 아님을 깨닫고는 일종의 수치심과 허탈함을 느끼는 듯하고, 명문대 졸업생이 아닌 사람 가운데는 무의식적으로 학력 또는 학벌 콤플렉스에 시달리며 자신의 불운이나 사회적 성취의 더딤을 학벌 탓으로 돌려 좌절감과 패배주의에 젖은 경우도 꽤 많아 보인다.
이 글의 결말에 이르러서는 명문대 졸업생은 그 자체로 자부심을, 아닌 사람은 또 아닌 대로 자기 인생에 자부심을 느끼며, 모두가 수치심과 열등감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과 자기 인생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기를 바란다. 대학 입시를 준비 중인 이들에게는 긍정적인 동기 부여가 되고, 현실적으로 대학 입시와 거리가 먼 이들에게는 명문대가 곧 성공은 아님을 깨닫고, 자신의 강점을 발견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궁극적으로는 대학과 배움, 공부와 성장이란 무엇인지 그 진정한 의미를 되돌아보는 글이 되었으면 좋겠다.
브런치북 <연세대가 내 인생에 남긴 것들> 의 프롤로그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