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공부 잘하는 아이에게 갖는 어른들의 흔한 착각

공부 잘하는 아이를 망치는 지름길

by 스마일펄

우리 부모님은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길 바랐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부모님이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길 바라기를 바랐을까. 행복한 사람, 부모님이 ‘내가 행복한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랐다면 좋았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다. 달리 말하면, 나는, 우리 부모님이 내가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느끼지 못하고 성장했다는 의미이다. 그럼,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무엇을 바랐을까. 언제 부모님의 사랑을 느꼈을까. ‘공부 잘하는 아이’ – 이 답변이 전광석화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오랜 세월 부정했지만 내 무의식은 부모님의 조건부 자식 사랑을 눈치채고, 그에 맞게 적응하고 행동해서 그분들의 의도대로 잘(?) 성장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남자친구를 사귀었다. 사귀었다고 하기에도 민망할 만큼 이십일 남짓 정도 되었을까. 같은 반이었던 그 친구는 지금 생각하면 참 괜찮은 아이라 그 짧은 기간에도 기억에 남은 추억거리가 많다. 나는 방송반에서 점심시간마다 학우들의 사연과 신청곡을 소개하는 아나운서로 활동 중이었는데, 여자친구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다며 조규찬의 ‘해빙’을 신청한 사연이 들어왔다. 어딘가 익숙한 사연은 그 아이가 보낸 것이었고, 지금도 우연히 이 노래를 들을 때면 가슴이 몽글몽글해진다.


한번은 내가 생 당근을 좋아한다고 하자 그 친구는 오이무침을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오이무침을, 그 친구는 생 당근을 준비해서 서로 교환해 먹기로 한 특이한 추억도 있다. 이날 그 아이가 앞에 서서 발표를 했는데, 우리 관계를 아는 한 짓궂은 친구가 생뚱맞게 ‘좋아하는 반찬이 뭐냐’ 질문을 했다. 잠시 망설이던 그 아이는 반 전체 친구들 앞에서 ‘오이무침’이라고 대답해 야유를 받았고, 나는 난감하면서도 설레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엄마에게도 남자친구의 존재를 알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주말에 엄마와 같이 마을버스를 타고 어딘가를 가게 되었다. 우리는 각자 버스 손잡이를 잡고 약간 떨어진 위치에 서 있었고, 이때가 기회다 싶어서 엄마에게 넌지시 물었다. “엄마, 내가 남자친구가 있으면 어떨 거 같아?” 엄마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엄마는 대학에 가서 남자친구를 사귀는 게 좋다고 생각해” 이 한마디가 전부였고, 불편한 침묵만이 정적을 메웠다. 내가 엄마였다면 우리 딸이 남자친구가 생겼는지, 관심 있거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지 무척 궁금했을 법도 한데, 우리 엄마는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극보수적(성인 자식의 흡연조차 문제적 행동이라고 여겨 용납 못할 만큼)이고 학력 결핍이 짙은 엄마는 자식들의 학업 성적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 확고한 자기 기준에서 어긋나거나 부정적이라고 생각하는 자식들의 골칫거리인 면모(우리 엄마 입장에서 고등학생이 남자친구를 사귀는 건 고등학생이 해서는 ‘안 되고’, 공부에 방해되는 ‘부적절’한 일이었다)는 모조리 보지 않고 외면하려 한 까막눈인 사람이었다. 사실 우리나라 많은 부모님들이 이처럼 중고등학생 자식의 학업 성적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하고, 일단은 공부’만’ 잘하면 다른 건 아무래도 괜찮다는 매우 위험하고, ‘부적절한’ 태도를 취하고는 한다.


결국, 나는 며칠 뒤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당시에 그 친구에게 어떤 해명도 하지 않았지만, 좋아하는 마음보다는 이성친구를 사귄다는 호기심이 더 컸고, 중고등학생 시절을 통틀어서 처음으로 전교 등수 10위권 밖으로 밀려나자 선생님 등 어른들은 염려와 우려를 가장한 변한 눈빛으로 내 인생에 간섭하려 들었는데 이러한 참견을 견딜 수 없었으며, 엄마의 조언 아닌 조언도 당시에는 결정타로 작용했다. 사랑보다 성적을 선택하고, 주변 시선을 의식해 사회적 성취를 더 중시한, 나는 그야말로 나쁜 여자였다. 결과적으로는 연세대와 맞바꾼 연애의 추억이니 매정하지만 현명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부모님은 ‘공부는 상관없으니 건강하게만 자라면 된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완전한 진심은 아니었다. ‘공부는 상관없다’라는 말은 큰딸은 전교 1~2등을 다투고, 작은딸은 만년 전교 1등이라 할 수 있는 일종의 빈말이었다. 만일 내가 공부를 잘하지 않았다면 부모님께 얼마나 무시와 상처, 갈굼을 받았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누나들에 ‘비해서’ 공부를 못한 남동생에게 ‘공부하라’고 얼마나 잔소리를 퍼붓고, 자기들 말을 안 듣는다고 얼마나 안달복달 불안, 초조해하던지…… 우리 부모도 여느 한국 부모와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특히, 아빠는 남동생에게 아들이라고 말을 더 함부로 했는데, 한심하다는 투로 깊은 한숨을 내쉬거나 집안 식구가 다 들릴 정도로 “저 새끼, 혼자서 방에서 게임이나 처 하고 뭐가 될는지 모르겠다 또는 걱정이다’라는 힐난은 일상이었다. 혹시라도 남동생의 억울한 감정이 누나인 나에게 미움으로 향하면 어쩌나 염려했는데, 속 깊고 똑똑한 아이라 다행히 그럭저럭 한 사이로 지내고 있다. 아빠는 걱정을 핑계로 상대적 약자인 만만한 남동생에게 학력 콤플렉스 분풀이를 해댔는데, ‘공부’를 무기로 자신의 학력 열등감을 자식에게 전가해 정서적 학대를 자행하는 가정이 우리집만은 아닐 것이다.




엄마는 나의 이혼과 여동생의 양극성 장애를 ‘엄마 자신이 우리가 10대일 때 너무 행복해서 지금 벌 받는 모양이라’고 말해서 아연실색했다. 덧붙여 ‘그때 너희가 기대보다 공부를 잘해서 학교에서도 인정받고 주변 엄마들과 이웃에게 부러운 시선을 한몸에 받아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라고 했다. 그런데 엄마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다던 그때, 아버지의 술주정이 극에 달했을 때라 나와 동생들은 벗어날 수 없는 잦은 불안과 공포 속에서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불안정한 시기를 보냈다. 여동생은 양극성 장애의 징후가 나타나 공부나 학교보다도 절대적인 정신적 안정과 적절한 정신과 치료가 절실하게 필요한 때였다. 우리는 권위적이고 강압적이며 심지어 폭력적인 가정환경 속에서 거의 무표정하고 긴장해서 얼었으며, 예민하게 날이 섰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하고 각자 속으로 몹시 곪아가고 있었다.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가정주부인 엄마가 자식들의 안 좋은 표정이나 힘겨워하는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나는 자주 체해서 한밤중에 응급실을 들락거리거나, 여기저기 검사를 해도 신체적 이상은 없다는 진단을 받기 일쑤였다. 영리한 여동생은 20여 년 전 정신질환에 대한 인식이 낮고 편견이 높던 시절인데도, 엄마에게 요청해 정신과 진료를 받았는데 그뿐이었다. 엄마는 동생의 건강 상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아서 적극적인 치료를 시도하지 않았고, 동생은 결국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병을 키우고 말았다. 엄마는 이때 (자기 욕심에) 동생의 병을 가볍게 여기고 제대로 치료하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며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이 시기 나는 아버지의 술주정을 견디기 너무 괴로워서 미성년 자녀인데도 엄마에게 아버지와의 이혼을 종용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엄마는 이 모든 고통을 외면하고도 남을 만큼, 자식들의 학업 성적이 좋으면 모든 것이 괜찮고, 자기 자신이 행복한 사람이었다. 자식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지금의 모든 고통과 불안, 갈등 등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맹신하며, 공부 잘하는 자식은 그 자체로 별 문제가 없으며, 문제가 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믿는 공부만능주의자이자 자녀 양육에서 공부가 최우선인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의도치는 않았지만) 공부 외에는 자식에게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자식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무엇을 잘하고 못하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지, 요즘의 고민과 관심사, 힘든 일은 무엇인지 아예 모르지는 않았지만, 제대로 알려고 한 적도 없었다.




사실, 아이가 공부를 잘하면 모든 것이 부모 자기 뜻대로 되고 있으며, 공부 잘한다고 칭송받는 의젓하고 듬직한 우리 아이는 아무 문제없다고 착각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하다. 드라마 <SKY 캐슬>에서 아들이 서울대 의대에 합격해 이웃의 부러움을 받으며 완벽한 것처럼 보인 영재 네 가족은 결국 철저히 파멸하고 만다. 자식의 성공을 보장하는 길이라고 믿은 서울대 의대에 일단, 입학만 하면 (사랑하는) 자식의 모든 문제가 사라지리라고 착각한 부모의 방종과 오만이 빚은 비극이다. 드라마는 현실을 보다 극적으로 그렸겠지만(어쩌면 현실이 더 비극일지도), 아이가 공부를 잘한다는 사실에 부모 자신이 도취된 나머지 실제로는 자식에게 무관심으로 일관해 자식을 방치해서 망치고, 비극으로 내달리는 경우는 의외로 많지 않을까 싶다.



꼭 같이 읽었으면 하는 글


keyword
이전 05화고등학생의 최대 '권력', 학교 성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