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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대에 입학해도 불행한 이유

그런데 부모님은 왜 '좋은 대학에 가라'라고 할까?

by 스마일펄

두 남매를 키우는 선배에게 우연히 양육관을 묻게 되었다.


“선배는 부모이기도 하잖아요. 아이들이 어떤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어요?”

“행복한 사람.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가면 좋을 거 같아.”


첫 책인 <부모님과 헤어지는 중입니다>를 출간하고, 우리 부모님은 과연 내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랐는지, 만일 내가 부모라면 자식이 어떻게 자랐으면 좋겠는지 고민하던 시기였다. ‘행복한 사람’ - 고민 끝에 나 스스로 내린 결론을 지금 부모인 지인의 입으로 들으니 기시감이 들었다. 15년 전 첫 회사의 직장 상사였던 선배와는 한동안 연락이 끊겼다가 최근에 일 관계로 다시 연결되었는데, 가치관이 통해서 오랜 인연을 이어가는구나 싶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부모들이 여전히 아이를 좋은 대학에 입학시키고 싶은 열망이 강하잖아요. 실제로 공부가 중요하기도 하고요. 아이가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은 없으세요?”

“알다시피 내가 강남 8학군에서 성장했잖아. 부모 세대는 우리처럼 대졸자가 흔한 세대도 아닌데, 반 친구들의 부모님 대다수가 대졸자인 말도 안 되는 환경에서 학교를 다녔어. 이걸 학구열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때 극성인 부모들, 공부 압박, 성적 스트레스에 너무 시달려서 그런지 물론, 공부도 중요하지만, 우리 아이는 밝고 즐겁게,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행복하게 성장했으면 좋겠어”

“그런데 첫째는 또 공부 욕심이 있어서 반에서 1~2등은 하더라고. 집념이 좀 있는 거 같아. 목표를 세우면 이런저런 방법을 찾아서 성취를 하더라고. 이번에 우리집에 고양이를 들인 것도 첫째가 고양이를 좋아해서 반장이 되면 고양이를 키우도록 허락하기로 했거든. 약간 내향적인 편이라 반장이 돼서 리더십과 친화력을 키우면 좋을 것 같았어. 약속을 하고서는 또 어떻게 반장이 됐더라고. 머리도 좋고, 집념도 강하고, 교우관계도 좋고, 성격이든 능력이든 다 나보다 나아서 별 걱정도 안 돼. 아마도 돈도 나보다 많이 벌 거 같아서 재산도 안 물려줘도 될 거 같아. 둘째는 공부 머리는 덜한 것 같은데 친화력이 어마어마하거든. 그 능력으로 역시나 제 밥벌이를 잘하면서 잘 살 거 같아.”


선배가 원래도 좋은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아이들에게도 참 훌륭한 아버지구나 싶었다. 자기 내면의 정리되지 않은 극심한 열등감 때문에 자식인 나의 성격이나 능력을 매사 부정적인 눈으로 바라보며 깎아내리고 의욕과 열정을 짓밟던 우리 부모와 대비돼 선배의 아이들이 아주 잠깐 살짝 부러웠다. 따뜻한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면 아이들의 단점조차 장점으로 비칠 수 있는 것을. 자기 욕심에 장점조차 단점으로 왜곡해 깊은 내상을 입히고 감정 착취를 일삼다 보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믿는 존재를 영영 잃는 수가 있다.




Q. 왜 공부를 해야 할까?

A.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


Q. 그럼, 왜 좋은 대학은 가야 할까?

A. 좋은 직장에 가거나 좀 더 나은 직업을 얻기 위해서?


Q. 그럼, 왜 좋은 직업을 얻어야 할까?

A.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무시받지 않으려고? 결혼을 잘하려고?


Q. 그럼, 왜 돈을 많이 벌어야 할까?

A.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타인보다 잘나고 싶어서? 무시받지 않으려고?


Q. 결혼을 왜 잘해야 할까?

A. 행복하려고?


Q, 그럼, 왜 잘 먹고 잘 살아야 할까?

A. 그게 행복이니까?


중고등학생 때 ‘공부 열심히 해라. 그래서 좋은 대학에 가라’는 부모의 말은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가야지 좋은 직업을 얻고 그래야 돈도 많이 벌고, 좋은 배우자를 얻을 수 있으며, 행복해질 수 있다’는 깊은 의미를 감추고 있다. 이는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맞는 말도 아니다. 무엇보다 이 신념에 따르면 행복에 이르기 위해 참고 견디며 넘어야 할 단계가 너무 많다. 어느 한 단계에서 삐끗하면 행복을 영영 만나지 못한 행복 실패자로 살아가야 할 수도 있다. 이 기준에서는 행복이라는 가치를 얻기도 어려울뿐더러 행복인(행복한 사람)이 되지 못할 위험성(Risk) 즉, 확률이 너무 높다.




아무리 염치없고 부족한 부모라도 자식이 불행하기를 바라거나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는 극히 드물 것이다. 그런데 자식은 부모의 일방적인 공부 잔소리에서 공부를 ‘강요’하고 좋은 대학에 ‘집착’하는 부모의 적나라한 극성은 보지만, 주객이 전도돼 행복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속 깊은 ‘마음’은 전혀 느낄 수 없다. ‘행복’이라는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온데간데없이, 오로지 ‘좋은 대학 입학’이라는 껍데기만 남아, 일방적으로 강요받은 목표만이 주어진다. 좋은 성적, 좋은 대학은 행복의 수단이거나 그 자체로 이미 행복일 수 있는데, 이미 손에 쥔 행복의 가치를 도외시하거나 수단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자 전부가 돼 버린다. 결국, 명문대 입학이라는 목적을 달성해도 그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


행복해질 수 있고, 잘 사는 방법이라고 해서 대학교를 왔는데 정작 행복을 생각하거나 이야기해 본 적은 한번도 없다. 사실 이는 부모도 마찬가지라 무엇이 행복인지 보여주거나 알려주지 못한다. 행복도 바이러스처럼 전염성이 강해서 진정한 행복을 경험한 사람이 가까운 주변에 있어야 행복이 무엇인지 자연스레 체득할 수 있다. 한평생 학력, 물질적(돈) 결핍과 지독한 열등감에 시달려 불만족스러운 인생을 살았고, 현재도 벗어나지 못하고 그렇게 살고 있는 부모님은 행복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어차피 그들에게 행복이나 사랑, 가족, 인생, 공부, 돈, 꿈 같은 인생의 중요한 가치에 대한 어떠한 만족스러운 답도 얻을 수 없었으리라고 뒤늦게 깨달았다.


행복이나 인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부모 자신과 자식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자식을 너무너무 사랑한다’는 미명과 ‘자식은 나처럼 (무시 받으며) 살지 않도록 보호하려’는 선한 마음으로 (자식의 성격, 성향, 관심사 등의 고려 없이) 자신의 열등감을 자식에게서 대리 충족하고자 시도하고, 자식의 감정과 생각을 억압, 통제하며 심지어 정서적 학대를 자행하는 일은 실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는 명문대 입학이라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목표를 성취해도 허탈감에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방황할 여지가 크다. 일차적으로는 나 자신이 아닌 부모의 욕구를 대리 만족시킨 대리 역할의 비중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이때 내적 갈등을 제대로 경험하고 소화하지 못하면, 또 다시 생각 없는 그러나 익숙한 고3 시절처럼 사회에서 해야 한다거나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명확하고 구체적인 ‘다음 목표’를 향해 내달린다. 다음 목적지는 보통은 좋은 직업과 직장, 좋은 배우자와의 결혼인데, 무서운 점은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이 불행으로 가는 열차인지도 모른 채 무의식적으로 벌어진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허기진 결핍 상태를 채우고자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줄도 모르고 더 잘하려고 채찍질하고 매달릴수록 결핍은 더욱 커지고 삶은 점점 공허해진다. 의외로 서울대에 입학했는데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불행하다고 느끼거나, 모두가 부러워하는 대기업의 부장까지 돼 강남에 자기 소유 아파트가 있고 좋은 아내와 착실한 자식까지 있는데도 뒤늦게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헛헛함에 또 마찬가지로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자기애가 없으면 그 누구도 건강해질 수 없다. 신경증 환자가 건강해지면 사회적 자아에 순응한다는 의미의 정상이 되지 않는다. 한번도 잃어본 적 없이 자아를 간직하기 위해 신경증 증상으로 투쟁했기에 그는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나르시시즘 이론처럼 사회의 행동 모델을 합리화하고 자기애를 비난하며 이기심과 동일시 하는 이론은 심리 치료에서 해로운 효과를 낼 수 있다. 그런 심리 치료는 내담자를 자신이 되도록, 다시 말해 (예술가의 전통적 특징인) 자유롭고 자발적이며 창의적인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려 하지 않아야만 ‘긍정적’ 결과를 얻게 된다. 그런 치료는 내담자를 자아를 찾으려는 투쟁을 포기하고 신경증으로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문화 모델에 순응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장혜경 옮김, 김영사, 2022.02)>, 122쪽 중에서


트위터에서 동네음악선생(@enie_latente)으로 활동하며, 지금은 프랑스 렌느 음악대학과 렌느 시립음악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송은혜 작가(최근 출간작: <일요일의 음악실>)는 프랑스에서 어언 16년을 거주했다고 한다. 최근 그에게 프랑스와 한국의 가장 큰 차이를 묻자 ‘프랑스는 모든 게 느리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단적으로 프랑스 학교는 6주 수업+2주 방학의 연속이라 처음에는 ‘이래서 뭘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이제는 자신도 충분한 ‘쉼(휴식)’의 가치와 필요성을 알 것 같다고 했다.


나는 한국을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심지어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으로) 비교적 잘 사는데도 외부의 잘나고 완벽하다고 믿는 타인과 보잘것없고 하찮다고 믿는 자신을 끝없이 저울질하며, 모두가 부족하다고, 그래서 불행하다고 느끼는 치명적인 ‘불행의 맹독’에 감염된 사회로 바라보고 있다. 모두가 행복하고 싶어서 내달리는데 정작 행복이 무엇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저 목적지도 불분명한 최고급 열차 티켓을 얻으려고 사력을 다해 안간힘을 쓸 뿐이다.


쉬는 것도 제대로 쉬어 본 사람만이 진정한 휴식을 누릴 수 있다. 아마도 프랑스 학생에게 주어지는 2주의 방학은 6주 동안 학교에서 배우고 익힌 것을 일상생활에서 발견하고 체화하는 시간일 것이다. 이때 얻은 통찰로 행복은 무엇인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할지 등 자기만의 인생의 가치관과 지향점을 확립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쉼(휴식)의 가치를 경험하고 체감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일단은 자기 내면의 불안을 잠재우고자 실속 없는 무한 뜀박질을 반복하며, 불행의 싹을 끊임없이 싹 틔우고 있다.


마지막으로 다시 대학 입시를 준비할 때로 돌아가 보자면, 똑같이 열심히 공부해서 같은 대학교에 입학했다고 하더라도, 좋은 대학 입학 자체가 자기 인생의 목적이자 목표인 사람과 인생의 가치관의 한 축으로 대학에 입학해서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의 대학생활과 삶의 태도는 결코 같지 않다. 물론, 일단 입학한 뒤에 여러 경험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자기 자신을 ‘제대로’ 탐색하고, 자기만의 삶의 기준을 만들어가는 것도 방법이고. 되도록 그 가치가 자신의 안위만 신경쓰는 보신주의에 그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넘어서 타인과 사회, 세상을 이롭게 하는 데 향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누구보다 내가 먼저 그런 용기 있는 좋은 어른이자 사회구성원이 되길 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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