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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왜 가야 할까?

명문대를 졸업하면 행복할까?

by 스마일펄

명문대를 졸업하면 행복할까? 알 수 없다. 교육 수준이 행복과 별 상관이 없다는 사실은 학문적으로도 증명된 내용이다. 아주 소수였지만 연세대를 다니면서 서울대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반수를 해서 서울대에 입학하거나, 2학년 정도까지 마치고 아예 해외 대학으로 편입하는 출중한 능력자도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부모님과 가족 구성원의 학벌이 매우 좋았는데, 행복이란 워낙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라 만일 이들이 계속 연세대에 재학했다면 만족하지 못해서 급기야 불행하다고 느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명문대가 사회적 성공을 보장할까? 그렇지 않다. 좋은 회사에 입사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데 약간은 유리한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경제는 호황인데 고학력자는 부족해 선망 받는 기업에서 대학 졸업자라고 모셔가던 호랑이 담배 피던 시대는 지나간지 오래다. 어느 때보다도 ‘공정성’이라는 가치관이 중요한 화두이기 때문에 시험이나 면접 등에서 명문대 졸업자라고 혜택을 부여하지도 않는다. 다수가 원하는 전문직에 종사하거나 좋은 회사에 들어가려면 명문대생도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하는 시대이다.


명문대 졸업장이 많은 돈을 보장할까? 절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업이나 투자에 성공하거나 인지도와 유명세를 잘 활용해야 부자가 될 수 있다. 단순히 공부를 잘하거나 명문대 졸업장 같은 종이 쪼가리는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는다. 다만, 금전적 압박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중산층의 삶을 유지할 확률은 높은 편인 것 같다.


인생의 행복, 사회적 성공, 경제적 이득 등 어느 것도 담보하지 않는 대학을 왜 가야 할까? 우선, 이런 시각은 물질주의에 경도돼 대학을 지나치게 도구적 수단으로 취급하는 얕은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의 의대 쏠림 현상과 이에 대비되는 필수 의료 인력 부족 문제(물론, 필수 진료과의 근무 환경과 처우 개선이 우선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다)가 단적인 예이다. 인생은 불확실해서 어떤 사회적 조건도 행복이나 성공을 확실하게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대학도 마찬가지인데, 우리 사회에서는 대학을 유난히 사회적/경제적 성공과 그 발판의 도구로 바라보는 시각이 지배적인 것 같다.




내가 경험은 대학은 일종의 인큐베이터라고 정의할 수 있다. 대학은 교수님, 친구들, 선후배들과 교류하며 학문을 배우고,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며 미성숙한 생각을 가다듬고,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장(場)이다.


<대학(大學)>의 사전적 의미

[명사] 고등 교육을 베푸는 교육 기관. 국가와 인류 사회 발전에 필요한 학술 이론과 응용 방법을 교수하고 연구하며, 지도적 인격을 도야한다. 고등학교 졸업자 또는 이와 동등한 학력이 있다고 인정된 사람이 입학하며 수업 연한은 2년에서 6년까지이다.




일을 할 때 사람은 자신의 도구적(기능적) 가치를 발휘해서 노동력을 돈으로 치환해야 한다. 일은 끊임없이 타인의 욕구와 기대를 충족시켜야 하고, 되도록 실수도 하지 말고, 잘 해야 하고, 때로는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한다. 일에서만 얻을 수 있는 분명한 보람과 성취감이 존재하지만, 갑과 을의 권력관계에서 서러운 현실을 감내하며, 상처받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반면, 대학에서의 공부는 실수와 실패를 얼마든지 수용 받는 과정이다. 머릿속 상상과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고, 실수와 실패를 부추기고 오히려 장려하기도 한다. 나의 도구적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일과 달리 대학 생활은 오로지 나 자신으로 존재하고, 이해 받을 수 있는 시기이다. 무엇보다 대학생 신분은 국내외를 망라해서 사회적 지위 고하 등을 막론하고 세상의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경험하기에 매우 유리하다. 나 자신도 세상과 사람에게 열려 있지만, 다른 사람과 세상도 젊은이 특히, 대학생에게는 따뜻한 시선을 보내며 우호적으로 열려 있다.




간혹, 공부를 잘 한 사람을 사회성이 부족하거나, 과거에 공부를 잘했는지는 몰라도 일머리는 부족하다는 편견을 가진 사람도 있는데, (소수 그런 사람이 존재하겠지만) 동의하지 않는다. 대학교에서 4년 내내 배우는 핵심은 ‘다름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수용’하는 태도이다. 우리나라 대학은 자유로운 토론 수업이 활발한 편은 아니지만, 많은 수업의 기본 구성은 교수의 강의+학생의 발표 수업+학생 간 토론(질문과 답변)으로 짜여 있다. 각 수업에서 교수의 강의 비중이 높은 지, 학생 간 토론을 위주로 하되 교수가 첨언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는지, 발표 수업을 중심으로 수업이 이뤄지는가에 따라서 강의의 성격이 결정되는데, 대학 수업은 기본적으로 학생을 멍한 상태로 가만두지 놔두지 않는다. 강의/리포트(에세이)/발표/조모임/토론/시험 등의 형태로 끊임없이 생각하고, 세상의 여러 시각을 접하고,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말이나 글로 표현하고, 다른 사람과 의견을 조율해서 결과물을 만드는 활동을 반복 훈련시킨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생각하는 힘(사고력), 문제를 해결하는 힘, 다양한 의견을 가진 이들과 소통하고 어울리는 법, 다른 시각을 존중하는 태도 등을 배우게 된다.

(물론 선택하기에 따라서 고등학생 때처럼 얼마든지 일방적인 강의, 퀴즈와 시험 위주의 수업만을 들을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는 세상을 바라보는 여러 ‘틀’을 이해하고, 자신의 관점과 의견을 갖는 기초를 닦는 곳이 바로 대학이다. 이러한 능력과 자질은 당장 좋은 직업을 얻거나 돈을 많이 버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지는 않지만, 마치 기계를 원활하게 작동시키는 역할을 하는 윤활류처럼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튼실한 자양분으로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 연륜이 있는 사람이라면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만의 관점(틀)을 세우거나 그 방법을 터득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이다. 이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가짜뉴스 같은 그릇된 정보에 휩쓸릴 확률을 낮추고, 인생에서 위기가 닥쳤을 때 적절한 대처 방안을 찾아서 헤쳐 나갈 확률을 높이고, 인생의 수많은 의사결정 과정에서 선택에 따른 책임을 감내하도록 한다.




무엇보다 인생에서 가장 자유롭고 순수하던, 오로지 ‘나 자신’으로서 존재하던 시절에 만나서 이러한 배움의 과정을 함께하고, 지질하고 해맑았던 추억을 공유한 사람들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의 가장 큰 자산이다. 대학교 사람들은 거의 다 과거의 인연이고, 이제는 SNS로 간간이 소식을 접하는 정도로 느슨한 관계이지만, 이십 대 초반에 자부심 넘치는 좋은 사람들과 향유한 행복한 기억은 가슴속 깊숙이 남아서 내 인생에 튼튼한 뿌리를 내렸다. 뛰어난 이들과 학점 경쟁을 하며 치열하게 공부하던 시절을 떠올리면 주저하고 싶은 순간에 용기내 도전할 자신감이 생긴다. 같이 웃고 떠들며 놀던 행복한 추억은 인생의 힘든 시기를 버틴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공부만 해서 세상물정을 잘 모른다’는 공부를 좁은 의미로 해석한 말이다. 진정한 공부는 세상과 사회를 이해하고, 개인 내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이라 넓고 깊게 소통하며 사회성을 기르는 일이기도 하다. 자유로운 대학생활이라는 인생의 인큐베이터 시기조차 자신을 공부하는 기술자 또는 기계 정도로 도구화 할지, 나 자신으로 살아가며 세상의 다양한 면모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치열하게 공부하고 토론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자기 인생의 단단한 토대를 쌓는 선택을 할지는 자신에게 달려있다. 세상에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없다. 자신이 하고자 마음먹은 일이 있을 뿐이다. 대학의 의미와 유용성도 결국은 자기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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