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제는 대학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까

재미와 의미가 인생의 목적이자 과정이기를!

by 스마일펄

“전공이 어떻게 되세요?”


서로 다른 대학교를 다니는 사람끼리 어울릴 때면 가장 먼저 이름을, 그다음에 전공을 묻고, 학교는 묻지 않는 문화가 퍽 이상했다. 대학교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자는 분위기에서 전공으로 관심사 정도만 파악하면 된다며 어느 순간 공공연히 퍼진 일종의 매너였다. 나도 군말 없이 이 문화를 따랐지만 대학 이름을 안 밝히는 것이 오히려 대학의 위계와 서열을 더 의식한다는 의미이기도 해서 뭔가 어색했다. 어느 대학교를 다니는지를 안다면 그 주변 동네의 분위기나 맛집, 그 대학을 다니고 있는 지인이나 졸업한 연예인 같은 가벼운 이야기부터 그 대학의 분위기와 특징, 장단점 등 대학에 대한 정보도 주고받으며 화젯거리가 넓어질 텐데, 대학생끼리 만나서 대학교 언급을 꺼리니 무엇인가 훅 빠져버린 기분도 들었다. 어느덧 거의 15년이 지났는데도 대학/학력/학벌/입시 등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복잡한 심경과 양가적인 감정은 별로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대학은 마치 미운털 박힌 천덕꾸러기 같다. 결국, 대학은 이렇게 해도 문제이고, 저렇게 해도 문제이다. 대학이 학문 본연의 역할에 충실히 한다면 지금 어느 세상인데(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이 안 되는 먹고살기 힘든 세상인데) 취업에는 무관심하냐고 질타를 받고, 대학을 취업 중심으로 운영한다면 (마찬가지로 지금 어느 세상인데) 창조성과 다양성이 중요한 시대인데 틀에 박힌 교육을 제공한다며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비난을 받는다. 대학 입시도 마찬가지로 이렇게 해도 문제이고, 저렇게 해도 문제라는 지적만이 난무하다. 수능 비중을 확대하면 창조성과 다양성이 중요한 시대에 학생들의 창의성을 저해하는 제도라고 지적하고, 수시 비중을 확대하면 있는 집 자식에게 유리한 불공정한 제도를 확대한다며 비난을 받는다. 대학과 입시는 이렇게 해도 밉고, 저렇게 해도 미운, 각자의 마음속 미운 아이 같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분분한 의견들이 실은 변죽만 울리고 있을 뿐, 정작 마음속 미운 아이가 정말로 미운 아이가 맞는지 즉, 대학이 정말로 현실에 맞지 않게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는지, 대학과 교육의 본질에 대한 접근이나 이야기는 거의 이뤄지지 않는 것 같다. 모두에게 질타받는 미운 아이가 사실은 미운 아이가 아니라며 감싸기는 쉽지 않기에, 대학을 졸업한 사람조차 ‘대학을 안 가도 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가급적 가는 게 좋다’, ‘대학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대학은 가라고 하고 싶다’ 같은 앞뒤가 안 맞는 애매모호한 말을 늘어놓고 있다. 사실 이 말은 ‘능력이 된다면 대학을 꼭 가라’는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다. 나는 사람들이 돈과 학벌에 좀 더 솔직한 사회가 되길 바란다. 돈이 좋으면 좋다고 말하고, 부자가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하며, 좋은 대학에 가고 싶으면 가고 싶다고 말하고, 좋은 학벌이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하며, 마음과 언행의 간극을 줄이기를 바란다. 모든 변화는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할 때 비로소 일어날 수 있으니까.




우선, ‘대학을 가면 인생에 유리하다’는 흔히 하는 생각부터 변했으면 좋겠다. ‘유리하다’는 말이 성립하려면 비교 대상이 필요하며, 이는 우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마도 이 말은 대졸자는 비교적 취업의 기회가 더 넓고, 급여 수준도 높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정보가 경쟁력이고 지식이 주도하는 사회에서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처우가 좋은 것은 당연하며,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는 ‘식사량을 줄이고 꾸준히 운동하면 체중이 빠진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성적이 오른다’ 수준의 당위적인 생각이다. 당연한 말을 반복하기보다 그래서 살을 빼려면 무슨 운동을 할지, 점수를 높이려면 공부를 어떻게 할지처럼, 자신의 인생에 보탬이 되도록 대학을 어떻게 잘 활용할지, 한 단계 더 들어간 고민을 하면 좋겠다. 대학을 가면 (불특정 다수의 누군가)보다 유리하다가 아니라, ‘대학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고 나의 이러한 특성 때문에 필요해서 대학에 진학하고 싶다’처럼 누구인지 특정되지도 않은 타인의 삶과 비교하기보다 ‘나 중심’으로 대학의 필요성과 가치를 생각하고 판단하기를 바란다. ‘대학을 가면 인생에 유리하다’라는 피상적인 생각으로 대학을 진학하고 살아간다면, 비교는 끝이 없기에 결코 인생이 유리한 순간을 맞이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오늘날의 대학은 창의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시대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시각은 이상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획기적인 창조적 인간은 (제도권) 교육으로 탄생하지 않는다. 교육이란 기본적으로 현대 사회에 적응해 살아갈 수 있는 비슷한 수준의 지식을 제공해서 비슷한 인간을 양산하는 것이 목표이다. 창의성도 학습의 영역이라 교육으로 훈련하면 어느 수준까지 계발될 수 있지만, 차별화된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드는 수준의 창의성을 발휘하기까지는 결국, 온전히 혼자의 힘으로 성장해야 한다. 학교에서 배운 기초 지식을 바탕으로, 만일 그 지식이 자신의 창조력을 저해한다고 생각하면 그 지식을 거부할 지의 판단까지 오로지 혼자서 부딪치고 시도하고 인내하며 자기만의 스타일(개성)을 만들어가야 한다. 예를 들어, 소설을 쓴다고 하면 대학에서 소설의 기초 작법을 배우거나 자신의 작품을 여러 사람에게 품평을 받을 수 있지만, 결국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수준 높은 소설을 쓸 만큼의 기량을 갈고닦는 것은 오직 개인의 몫이다. 어차피 혼자서 터득해야 한다면 대학 교육은 불필요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이미 대학 교육의 수준을 뛰어넘은 사람에게는 불필요하다.) 교육은 정형화되어 있지만 혼자 몇 년 간의 오랜 시행착오 끝에 터득하는 매우 유용한 생각이나 사고방식, 노하우를 전수해 지름길을 알려주고, 기본 지식을 쌓고 기초 역량을 닦는 데 도움이 된다.


창의성은 오히려 어렸을 때부터 가정에서 기틀이 형성되지 않는가 싶다. 아이의 관심사에 귀 기울이고, 그 분야를 같이 찾아보며 이야기 나누고, 아이의 생각과 의사를 존중하고,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등 부모나 주양육자의 따뜻한 관심과 애정이 창의적인 사람으로 성장하는 바탕이 되지 않을까. 이후의 학교 교육은 아이의 창의성을 보완하고 확장하는 여러 요소 가운데 하나이지 않은가 싶다. 한편, 뛰어난 창의성을 발휘한 예술가 가운데는 부모와 선생님(학교)의 억압에 못 견뎌 자신의 외롭고 우울하고 불안한 감정을 예술로 승화시킨 예민한 반항아 기질인 이들도 많으니 역시 월등한 창의성과 제도권 교육은 비례하지 않는 건가 싶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대학생활이 재밌을 거 같아서’, ‘대학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 같은 재미와 호기심이야말로 대학에 진학하는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될 수 있지는 않을까. 대학을 진지하게 수단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에서 벗어나서 그 자체가 순수한 목적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각박한 세상에 이상적인 낭만주의로 들릴 수도 있지만, 대학이라는 학력자본을 꼭 어떤 식으로 이득이 되도록 활용하지 않더라도, 새로운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자체가 즐겁고,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기는 신나고, 캠퍼스의 사계절을 만끽하고…… 그 순간순간에 집중하며 충만함을 느꼈다는 자체로도 대학의 의미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수영 선수가 못 되더라도 수영을 하며 즐거워하고, 화가가 못 되더라도 그림을 그리며 즐거워하듯이 대학에도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그 경험 자체가 개인의 인생에서 의미가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배움이나 경험은 내 안에 언제나 남아있으니까. 당장 쓰이지 않더라도 언제, 어떻게 쓰일지는 미지수니까. 재미와 의미가 인생의 목적이자 과정이기를!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