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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이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 시대

자신만의 행복 노트를 써내려 가기를!

by 스마일펄

‘대학이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 시대’라고 한다. 행복은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인데, 과연 대학이 행복을 보장한 시대가 있었을까.


대학 졸업장이 대기업 취업을 보장하던 1980년대~1990년대 대학을 다녔던 이들이라고 과연 행복했을까. 1980년대 대학생은 민주화 운동을 하느라 데모를 하다가 잡혀가 고문받거나 옥고를 치러야 했고, 데모에 참여하지 않은 이들은 미안함과 죄책감을 떠안아야 했다. 1990년대 대학생은 취업은 수월했지만 1997년 IMF 사태 때 대량 해고 위기에 놓이거나, 실직을 감내해야 했고, 2000년대 들어서는 다 같이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진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급변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기 계발 없이 ‘라떼는’을 시전 하는 눈치 없는 외고집 꼰대로 나이들고 있다.


이들은 IMF 사태 이전까지는 급여와 은행이자로도 자산을 축적하고, 집을 장만하는 등 고성장의 수혜를 누렸으면서, 한편으로는 획일적이고 권위적인 경직된 시대를 산 세대이기도 하다. 대학 졸업하면 취업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남자는 돈 벌어오고 여자는 집안일을 하는 인생 경로가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 좋은 회사에 입사하고 좋은 직업을 얻은 것은 축복이지만, 권위주의 문화에서 상사의 불합리한 지시와 야근, 회식 등을 따르는 것은 당연했고, 가족은 뒷전이기 일쑤였다. 일자리 얻기가 손쉽고 경제적으로는 안정적인 편이지만 개성은 묵살되고 획일적으로 사는 것이 요즘 세대가 바라는 행복은 아닐 것이다.




사회에서 정해준 대로 사는 것이 당연하고, 보통의 삶에서 약간이라도 벗어나면 온갖 낙인을 찍는 권위적이고 획일적인 문화에서 ‘행복이란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이 있었을까. 행복이란 사전적 의미로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한 상태’이다. 사람마다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생활 수준, 상황과 환경은 전부 다르지 않은가. 행복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무엇을 잘하고 못하는지, 어떤 상황에서 기분이 좋고 나쁜지, 어떻게 살고 싶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등 자신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이해가 있어야 누릴 수 있다. 행복도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노력의 산물인데, 기성세대는 대다수 이런 내적 과정을 생략한 줄도 모르고 외부의 시선과 사회에 요구에 맞춰서 살아왔다.


오늘날이 대학이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 시대라면, 예전에는 대학이 행복을 보장하는지 고민조차 하지 않던 시대였다. 즉, 과거에도 대학은 행복을 보장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행복이란, 우리나라에서는 최근에 주목받기 시작한 생활태도이자 가치이다. 대학 진학을 고민하는 학생들, 취업과 진로를 고민하는 청년들, 한창 아이들을 키우는 중장년층을 비롯한 전 국민이 이제껏 고민하지 않던 행복이 무엇인지 관심을 갖는 시대로 패러다임이 변해가고 있다. 1980년대~1990년대에 청년이었고 이제는 노년에 접어든 이들도 예외는 아니다. 이제야 행복에 눈을 뜬 노년층에서도 사회적 시선, 가족에게 얽매인 삶에서 벗어나 자기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기성세대도 행복이 무엇인지 고민하거나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행복이 무엇인지 그들에게 전수받거나 배울 것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행복은 국어, 영어, 수학처럼 누군가가 가르친다고 학습할 수 있지 않고 결국 혼자서 스스로 터득해야 하기에 행복을 경험하고 누리는 과정은 어찌 보면 누구에게나 공평하다고 할 수 있다.




행복한 사람에게서 전해지는 충만한 아우라를 느껴본 적 있는가.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장한나 지휘자에게서 ‘행복한 사람은 빛이 난다’라는 말을 실감했다. 장한나의 아버지는 팝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작곡가여서 집에는 항상 음악이 흘렀다고 한다. 엄마가 음악을 평생 벗삼으라는 의미로 선물한 어린이용 작은 첼로가 첼로와의 첫 인연이었다. 만 6살에 끌어안고 연주하는 첼로의 애착인형 같은 친밀감이 좋아서 그 매력에 푹 빠졌고, 매일 들고 다니는 첼로는 정말로 항상 같이 다니는 친구 같은 존재가 되었다.


어린 시절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듣고, “엄마,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이 있다는 게 참 행복해!”라고 말한 장한나는 이후 세계적인 첼리스트로 활약했고, 2007년부터는 지휘자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베토벤의 악보 원본에서 베토벤은 ‘왜 이 음표를 썼지?’, 수많은 ‘왜’의 연속에 고뇌하다 마침에 스스로 답을 찾았을 때의 희열을 토해내는 화면 속 표정에는 두근거리는 설렘과 아이 같은 신남이 묻어났다. 그녀 자신도 당장이라도 지휘하고 싶은 욕구가 솟구치는 ‘자신의 심장과 피를 뒤흔들어 놓는 혁명적인 순간’이라고 표현했다. ‘지금도 음악이 있어서 웃고, 오늘이 의미 있다’라는 말에서 그녀가 음악을 얼마나 사랑하고 또 음악 덕분에 여전히 얼마나 행복한지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순간에 행복하다고 느끼는 감수성, (쾌락이 아닌) 행복해서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마음, 자신이 하는 일에 ‘왜’라는 질문을 끝없이 던지며 의미와 즐거움을 스스로 만들 줄 아는 능력, 그래서 하고 있는 일이 재밌고 일상이 행복한 기분 – 다양성을 추구하고 개성을 존중하며 행복에 관심이 높아진 시대에 개인이 지향해야 할 삶의 태도이다. 무엇을 했더니 엄마가 좋아하고, 사람들이 칭찬하고, 관심과 주목받는 순간적인 행복감 때문이 아니라, 시작은 외부의 긍정적인 시선 때문이었더라도 궁극적으로는 ‘평생을 함께할 친구가 생긴 거 같아서’, ‘그 속에서 나 스스로 아름다움과 행복감, 의미를 발견해서’, 더 잘하고 싶고 더 알고 싶고 더 좋아하고 싶은 마음에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인생이라는 노트에 자기만의 답을 하나씩 채워가는 것, 이러한 자기만의 내적 성찰과 성장이 필요한 시대이다. 과거에는 외적 동기로 살았던 시대였다면 지금은 (물론, 외적 동기도 필요하지만) 내적 동기가 더 중요한 시대로 변하고 있으니까.




요즘 청년들은 다양성을 존중받고 싶으면서도 권위적인 특권을 누리고 싶어 하고, 자유를 원하면서 안정을 추구하는 모순되는 가치가 혼재돼 있는 것 같다. 청년에 국한하지 않고 가치관이 변해가는 과도기인 만큼 전 세대에 걸쳐 나타나는 흐름인 것 같기도 하다. 청년들은 부모 세대와 비교하자면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인정받고 선택할 수 있는데, 자아 성찰은 부족한 채로 중구난방인 인생의 선택지들 한가운데서 갈팡질팡 휘둘리고 있는 세대 같다. 윗세대의 획일적이고 권위적인 문화는 거부하지만, 정작 자신들도 윗세대처럼 외적 동기에 치중해 겉으로 드러나는 사회적 조건을 중시한다(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무시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반면, 세상이 변해서 자신만의 행복이 무엇인지 선택이 아니라 필수로 고민해야 하는 시대에 중요한 내적 성찰에 관심을 기울이는 법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인터넷에서 온갖 정보를 접해서 무엇이든지 잘 아는 듯 보이지만, 정작 실제 경험은 부족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해 오히려 자신에게 필요한 기회들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SNS의 강력한 영향으로 해소되지 않는 사회적 박탈감을 나무 꼭대기에 열린 포도를 딸 수 없는 여우가 ‘저 포도는 분명히 신 맛일 거야’라며 포기하는 것처럼 ‘저거 해봐야 별거 없을 거야’라는 합리화로 해보지도 않고 다 안다며 포기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 같다. 청년 세대를 MZ세대라고 일컬으며 개성 강한 독특한 존재로 부각하지만, 급변하는 세상에 갈피를 못 잡고 이전 세대가 청년일 때 느낀 불안감보다 더 큰 불안감과 혼란감을 안은 채 청년기를 보내고 있는 것 같다.


다양성이 존중되는 자유로운 환경에서 끊임없이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며 자신에게 이로운 판단을 내리고, 이를 위한 적절한 정보를 모으고 그 결과는 오롯이 자신이 책임지며 주도적으로 살아가려면,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경험을 하고 내면을 통찰하며 얻은 자신만의 삶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옳든 그르든) 가치관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채로 이 모든 불확실한 과정을 감당해야 하는 현실을 맞이하다 보니, 인터넷에는 다양성과는 대척점에 있는 각종 계급론과 등급표가 난무하고, ‘저는 몇 살에 무슨 직업인데 이걸 도전해도 될까요?’, ‘저는 학점 몇 점에 토익 몇 점이고 이런 경력이 있는데 ○○ 기업에 합격 가능성이 있을까요?’, ‘저는 몇 살에 연봉은 얼마인데 이런 차를 사도 될까요?’ 같은 별 의미도 없고, 그 누구도 정답을 말해줄 수 없고, 자신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할 문제의 정답을 되물으며, 속박을 받아야 안심하는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꾀하고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대학은 어느 때도 행복을 보장한 적이 없다. 행복한 사람은 대학을 가도, 가지 않아도 행복할 것이고, 불행한 사람은 대학을 가도, 가지 않아도 불행할 것이다. 행복은 애초에 대학에 달려있지 않았다. 행복은 대학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발견하고, 재미를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 대학에서의 행복은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느끼기 전까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따라서 ‘대학이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 시대’라는 말을 대학이 불필요한 시대 또는 대학이 의미 없는 시대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대학에서 더 큰 행복을 발견할지, 소소한 행복을 만날지,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할 지는 대학생활을 하기 전까지는 물음표의 영역이다. 대학도 얼마든지 행복의 한 방편일 수 있고, 높을 확률로 그럴 것이다. 사람들이 가치 없고 의미 없다는 물건도 ‘나에게’ ‘필요하면’ 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더욱이 대학은 그 문화를 경험한 사람에게 묻는다면 아마도 대부분 ‘가치 있다’라고 답할 것이다. 대학생이라는, 신분은 보장된 한껏 자유로운 시기조차 행복하지 않다면 그건 너무 서글플 것 같다. 부디, 인생의 선택지를 줄이지 말고, 가능성을 넓게 열어 두고, 자신만의 행복 노트를 잘 써내려 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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