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성장하며 윈-윈 하는 관계
“나는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나. 그런데 너는 눈먼 나보다도 앞을 못 보는구나. 산다는 건 영화와는 달라. 인생은…… 훨씬 힘들지. 여기를 떠나라. 로마로 가! 넌 젊어, 세상을 거머쥘 수도 있어. 난 늙었다. 이렇게 너와 수다 떨기 싫어. 멀리서 네 명성만 듣고 싶다.”
어린 시절 영화가 세상의 전부였던 토토와 낡은 극장의 영사 기사 알프레도의 아름다운 우정을 그린 영화 <시네마 천국(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 여자친구 부모님의 반대로 사랑에 좌절한 청년 토토에게 알프레도는 시칠리아를 떠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라고 강권한다. 누구보다 토토를 아끼고 아들처럼 사랑하며 2차 세계대전에서 아버지가 전사한 토토의 든든한 의지처가 되어 준 알프레도. 그런데 토토에게 시칠리아로 절대 돌아오지 말라고, 생각도 하지 말고, 편지도 쓰지 말고, 만일 돌아오더라도 절대 자신을 찾지 말라고 매정하게 말한다. 멀어지는 기차 안에서 알프레도와 가족을 향해 돌아보는 토토의 시선, 눈물을 훔치다 뒤돌아서는 흐릿한 알프레도가 점점 작아진다.
“마지막에 무엇을 하든 그걸 꼭 사랑하고, 철부지 시절을 기억하렴. 영사기를 만지던 꼬마 토토처럼!”
영사기를 만지던 꼬마 토토는 세계적인 영화감독이 돼 알프레도의 장례식에 참석하고자 시칠리아로 돌아온다.
우리는 곁에 붙들어두려는 소유욕을 사랑이라고 착각하지만, 이는 구속이고 속박이다.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미명으로 외로움과 공허함, 불안감 등을 달래고자 (의도하거나 의식하지 않고) 엄밀하게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상대를 ‘이용’하려는 행동이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사랑이란 ‘자신의 세계를 사랑하는 상대에게 확장해서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다. 상대방이 내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다.
동생과 스위스 여행을 간 적이 있다. 나는 ‘같이’ 갔다고 생각하는데, 여행 경비를 내가 거의 다 부담해서 동생은 언니가 자신을 스위스에 ‘데려갔다’고 표현하는 여행이다. 나는 런던에서 몇 개월간 거주한 적도 있고 유럽 여행을 여러 번 했지만, 동생은 처음 방문하는 유럽이었다. 나도 스위스는 처음이었지만 유럽이 익숙한 나에 비해서 동생은 모든 낯선 것에 감탄하고 즐거워했다. 감수성이 풍부하며, 예민하고 섬세한 동생은 스위스에서 마주치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 – 자연, 건축물, 거리, 사람들, 음식, 풍경 등 – 을 있는 그대로 온몸과 마음으로 느끼며 충분히 즐기고 있었다.
유럽의 정상이라 불리는 융프라우에 올라 9월인데도 한겨울처럼 산등성이를 따라 만들어진 드넓은 눈 벌판의 설경을 마주하고 연신 ‘우와’, ‘우와’ 감탄사를 내뱉는다. 만년설이 펼쳐진 황홀한 광경에서 몇 분 동안 눈을 떼지 못하고 넋 놓고 바라보다 가방에서 주섬주섬 작은 손수건을 꺼내 든다. 메모를 남긴 손수건을 잘 접어 형형색색의 자물쇠들 사이에 걸어두는 것으로 자신이 온 흔적을 남긴다. 구름 한 점 없고 바람이 솔솔 부는 더없이 맑고 아름다운 가을날, 피르스트에서 난생처음 패러글라이딩을 하며 하늘을 나는 감동을 주체하지 못하고 감격의 눈물을 왈칵 쏟는다. 스위스의 이탈리아라고 불리는 루가노의 그림 같은 호수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 가던 길을 멈추고 노트를 꺼내 그 순간을 스케치로 간직한다. 취리히 미술관에서 마티스의 작품을 한 점 한 점 뚫어지게 감상하고 메모하고 스케치한다. 가만히 두면 미술관에서 밤을 지새울 기세로 예술을 온전히 즐기고 음미한다.
그동안 누적된 피로 탓인지 나는 여행 첫째 날부터 앓아눕고 말았다. 동생은 숙소에서 진행하는 동네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요가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미처 몰랐던 사실인데 동생은 독학으로 기초 독일어를 할 줄 알았다. 자신은 안녕, 예, 아니요, 고마워, 미안해 정도밖에 할 줄 모른다고 겸손을 떨었지만, 독일어로 진행하는 강사님의 코칭을 뜨문뜨문 알아듣자 요가 회원인 스위스 아줌마들에게 인기가 폭발했다고, 요가에 참여한 독일어를 할 줄 아는 최초의 동양 소녀가 신기한지 아줌마들의 격의 없는 수다에 붙들렸다고 했다. ‘동생은 낯선 스위스 아줌마들에게도 사랑을 받는구나. 어디서든지 사람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일상의 소소한 온기를 나누는구나’ 싶었다. 나는 비록 아파서 죽도 못 먹고 누워있었지만, 동생이 스위스 현지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둘도 없을 소중한 이 시간을 만끽하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기뻤다.
스위스 여행은 몸과 마음을 활짝 열고 순간순간을 더할 나위 없이 즐기는 동생 덕분에 충만해졌다. 내가 알던 새로운 세계와 경험을 동생과 나누고, 진부한 표현이지만 스펀지처럼 쭉쭉 흡수하며 내적으로 성장하는 동생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인생을 피상적으로 사는 나 자신을 돌아보며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낀 행복하고 뿌듯한 시간이었다. 상대방이 성장하는 모습에서 기쁨을 발견하고, 계속 응원하고 지원하고 싶은 마음,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싶었다. 사랑이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는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정리하면 사랑이란 상대방의 성장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자신이 그 성장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 무슨 일을 할 수 있고 어떤 일은 할 수 없는지(하면 안 되는지) 고민하고 실천하며, 궁극적으로는 같이 성장하는 것이다.
- (알프레도가) 저를 보고 싶단 말씀은 안 하셨어요?
- 전혀! 한번 너희 엄마가 알프레도 한마디면 네가 (시칠리아로) 올 거라고 했다가 어찌나 역정을 내던지. ‘토토는 절대로 고향에 돌아오지 않아!’ 물론, 나쁜 의미로 말한 건 아니야. 정말 착한 사람이잖니.
알프레도라고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는 토토를 곁에 두고 싶지 않았을까. 입만 열면 토토 얘기를 했다는 알프레도는 누구보다 토토를 고향에 붙잡아두고 늘 그랬듯이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친밀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명한 알프레도는 그것은 토토를 가두는 것이며, 더 이상 사랑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알프레도는 자신이 토토에게 보여줄 수 있는 세계는 더 이상 없으며, 애정과 돌봄 이상의 서로 같이 내적으로 성장하는 단계는 한계에 이르렀음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그래서 야멸찬 말로 토토를 밀어내고 기꺼이 넓은 세상으로 나가도록 한다.
이처럼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상대방의 성장을 위해 떠나보내는 것, 이별도 때로는 사랑일 수 있다. 이는 부모-자식, 형제/자매, 연인, 친구 등 모든 사랑하는 관계에 적용된다. 처음에는 사랑이었더라도 상대가 자신을 떠날까 봐 전전긍긍 매사 질투하고, 간섭하고, 어느 순간 상대를 무조건 깎아내리고 비난하려는 마음이 든다면 이는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자기 세계를 확장하며 무섭게 성장하는 상대방이 변화하지 않고 멈춰 있는 자신을 떠날까 봐, 무시할까 봐 무의식적인 두려움과 불안감에 사로잡혀 관계의 주도권을 쥐고 싶고, 상대를 깔아뭉개서라도 갑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심경은 이해하지만, 강한 집착은 파국으로 이르는 지름길일 뿐이다. 사랑은 스승-제자 관계와는 달라서 한쪽이 일방적으로 끌어주거나 다른 한쪽이 무조건 따르고 의존하는 관계가 아니다. 출발점은 달랐어도 사랑하는 순간에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비슷한 지점을 통과하는 페이스메이커 같은 존재, 약간의 긴장감이 있지만 부담감은 크지 않은 긍정적인 경쟁 관계, 그래서 자신이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도록 변화하게 하는 것, 서로의 성장의 밑거름이 되는 윈-윈 하는 사이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의 시작은 설렘과 떨림일지라도 진정한 사랑은 좋은 오랜 우정에 가깝다.
사랑이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의 영적인 사랑을 위해 자아를 확장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_ 정신의학자 스캇 펙 M, Scott Peck, 『아직도 가야 할 길 The Road Less Traveled(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