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
옛날에 미국에서 본드에 중독된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일종의 약물중독인데요. 이 아이가 집 앞에서 본드에 취해서 헬렐레하고 있으면 경찰이 잡아서 정신병원에 보내 치료를 받도록 했지만, 한두 달 입원 치료를 아무리 반복해도 아이는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고심 끝에 경찰이 이 아이를 밀턴 에릭슨이라는 대가인 정신과 의사에게 데려갔습니다. “너 본드 끊고 싶니?” 의사가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지금껏 본드는 해롭고 잘못이니 무조건 끊으라고 한 어른은 많았지만, 본드를 끊고 싶은 지 아이의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에릭슨 박사가 처음이었습니다. “아니요.” 아이는 본드를 끊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네가 원하는 건 뭐니?” 다시 의사가 묻자 “경찰에 잡히기 싫어요. 경찰에 잡히면 또 정신과에 입원해야 하고 힘들거든요.”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의사는 아이에게 기가 막힌 처방전을 내렸습니다. “그럼, 집 뒤에서 본드를 해라. 집 앞에서 본드를 하고 누구나 다 보도록 헬렐레하고 있으니까 경찰이 잡으러 오는 거 아니겠니.” 이처럼 절대로 경찰에 잡히지 않는 비법을 알려줬습니다. 의사는 또 물었습니다. “너 종일 본드하니?” “아닌데요.” “그럼, 본드 안 할 때는 뭐 할래?” 아이는 집 뒤에서 본드를 하고, 대신 본드를 하지 않을 때는 집 앞에서 맨정신에 나와서 놀기로 의사와 약속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이제는 집 뒤에서 본드를 하고, 대신 의사와 약속한 대로 본드를 안 할 때는 맨정신에 집 앞에서 놀았습니다. 하루는 경찰이 지나가다 으레 이 아이가 또 본드에 취해 있겠지 생각하고 잡으러 왔는데, 뜻밖에 아이는 멀쩡했습니다. “너 본드 안 했니?” 경찰이 묻자 아이는 “안 했는데요.” 대답했고, 경찰과 가벼운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경찰에게 처음으로 잡히지 않자 신이 난 아이는 이제는 경찰이 지나갈 때면 일부러 골라서 맨정신에 집 앞에 나와서 놀았습니다. 아이에게는 경찰에게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기분 좋은 일이었습니다.
아이는 점점 집 앞에 나와서 노는 시간이 늘어났고, 혼자 노는 시간이 길어지자 ‘친구들이 있는 농구장에나 한번 가볼까?’라며 이제는 농구장에 가서 친구들과 어울렸습니다. 의사가 ‘본드 하지 말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친구들과 어울리고 집 앞에서 노는 시간이 늘어나자 아이가 집 뒤에서 머무는 시간은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_<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신영철 교수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
(자녀의 게임중독, 다루는 법은?│정신의학신문│2022.1.21)
이 일화는 유능한 정신과 의사로서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원칙과 절차에 따라 중독 치료를 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어느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던 아이의 분명한 의사와 생각을 처음으로 묻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거나 주입하기보다 소통을 주고받으며 해법을 찾으려 했다는 점에서 진정한 사랑의 방식과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사랑이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옳은 방향이고 좋은 가치관이더라도 상대의 의사나 감정 상태 등을 무시하고 혼자 앞서서 강요하고 통제하려는 마음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이는 달리 말하면 진정한 사랑이란 ‘상대방의 드러나지 않은, 숨겨진 감정을 알아채는 것’, ‘상대방의 욕구(속마음)를 정확히 읽어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그 욕구(또는 결핍)를 정확하게 읽어내는 사람이 연애도, 사랑도 잘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사람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영화 <타이타닉(1997)>의 주인공 잭 도슨(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扮)은 뛰어난 연애 고수이다.
잭은 예정된 초호화 결혼과 상류층의 억압적인 삶을 비관해 바다에 몸을 던져 죽으려고 한 귀족 아가씨 로즈를 구해준다. 다음날 감정이 진정된 로즈는 잭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함께 처음으로 진지한 대화를 나눈다.
- 로즈: 잭, 이런 생각을 하시겠죠. 순진하고 부유한 아가씨가 인생의 역경(또는 절망)을 알기나 하겠어?
- 잭: 아뇨, 다른 생각을 했어요. 제가 궁금한 건 어쩌다 당신은 인생이 끝났다고(탈출구가 없다고) 생각했냐는 거죠.
잭은 로즈의 충동적인 행동을 미국에서 가장 큰 철강회사의 재벌 2세와 결혼을 앞둔, 세상에 부족한 것도, 남부러울 것도 없는 상류층 명문가 아가씨의 행복에 겨운 사치스러운 투정이나 일탈로 넘겨짚지 않고, 로즈라는 한 인간이 죽음을 단행할 만큼의 절박한 심정과 고통스러운 마음은 무엇인지 공감하고, 질문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이것이 로즈가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귀한 56캐럿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바치며 ‘그대의 마음을 자신에게 준다면 당신에게 무엇이든 줄 수 있다’는 조건부 사랑을 내걸며 자신감을 내비치는 약혼자 칼이 아니라, 마땅한 정착지도 없지만 숨 쉴 공기와 그림 그릴 종이까지 필요한 건 전부 가졌다며, 인생은 축복이니 낭비하면 안 되고, ‘순간을 소중히 해야 한다(To make each day count)’는 신념과 행동이 일치하는 잭을 선택한 이유이다.
인간과 사물, 세상을 왜곡하거나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잭의 진솔하고 따뜻한 면모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설명할 때도 드러난다.
- 로즈: 이 여자를 좋아했군요. 여러 번 그렸잖아요.
- 잭: 손이 정말 아름답죠?
- 로즈: 이 여자를 사랑했군요.
- 잭: 아뇨, 손만 사랑했죠. 이 여자는 외다리 창녀였어요. 보이죠?
- 로즈: (당황스러움을 애써 감추려는 표정을 지으며)
- 잭: 유머 감각은 있었죠.
- (다시) 잭: (다른 그림을 보여주며) 이 여성은 매일 밤 술집에 왔고 가진 보석을 전부 매달고 잃어버린 사랑을 기다리고 있죠. ‘보석 부인’이라고 불렀어요. 옷은 다 낡았죠.
- 로즈: 재능이 있네요, 잭. 정말이에요. 사람을 보잖아요. (You have gift, Jack. You, doo. You see people.)
잭은 어느 여인이 외다리 창녀로 불린다고 아는 현실 감각은 있으면서도, 그 여성이 손이 아름답고 유머 감각이 있다는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하고 수용할 줄 알았다. 낡은 옷을 입고 보석을 치장한 채 매일 밤 술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여성의 사무치는 외로움을 볼 줄 알았다. 사람을 겉모습으로 섣불리 판단하기보다 균형 잡힌 시선으로 인간의 내면을 살필 줄 아는 잭처럼, 로즈도 잭이라는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 볼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잭처럼 능력 있는 화가를 믿고 오로지 고귀한 다이아몬드 목걸이 하나만을 걸친 자신을 그림 속 외다리 창녀처럼 그려달라고 부탁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랑이란 자신이 옳다고 믿는 사랑이 아니라 상대방이 원하는 사랑을 정확하게, 알맞은 시점에 ‘적절히’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출 때’에만 비로소 성립한다.
삶을 사랑하건, 다른 사람이나 동물, 꽃을 사랑하건 모든 종류의 사랑에 적용되는 기본 원칙이 있다. 내 사랑이 적절하고 상대의 욕망과 본성에 맞을 때만 나는 사랑할 수 있다. 적은 물을 필요로 하는 식물이라면 그 식물에 대한 사랑은 필요한 만큼만 물을 주는 것으로 표현된다. ‘식물에 무엇이 좋은지’에 관련된 선입견이 있다면, 가령 최대한 물을 많이 주는 것이 모든 식물에 좋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식물을 해칠 것이고 죽일 것이다. 나에게는 식물이 사랑받아야 할 방식대로 식물을 사랑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사랑만 하는 것으로는, 다른 생명체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식물이, 동물이, 아이가, 남편이, 아내가 뭘 필요로 하는지 모르고 무엇이 상대에게 최선인지 정한 내 선입견과 상대를 통제하려는 욕망을 버릴 수 없다면 내 사랑은 파괴적이다. 내 사랑은 죽음의 키스인 것이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장혜경 옮김, 김영사, 2022.02.)> 28쪽 중에서
*밀턴 에릭슨(Milton H. Erickson, 1901년 12월 5일~1980년 3월 25일)은 의료 최면과 가족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미국의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이다.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신영철 교수의 인터뷰, <자녀의 게임중독, 다루는 법은?> (정신의학신문│2022.1.21)은 아래 영상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