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는 밤새 잠을 설쳤다. 지금까지 데이트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부담 반 설렘 반으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새벽이 밝아 오자 소화는 일어나서 창문을 활짝 열었다. 여느 날과 같은 아침이지만 소화에게는 뭔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소화는 간단하게 아침 식사하고 외출 준비하기 시작했다. 화장도 좀 더 신경을 써서 하고 나니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봄 햇살을 느끼면서 화사한 파스텔 꽃무늬 원피스를 입기로 했다. 긴 물결 웨이브 스타일을 한 소화는 거울을 통해 옷매무새를 확인하고 미장원을 향해 걸어갔다. 집에서부터 미장원까지 거리는 가까워서 금방 도착했다. 시계를 보니 10분 전 10시였다. 그때 바로 수호씨 모습이 보였다. 수호씨는 연두색 스트라이프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밤색 가죽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
“소화씨도 일찍 나왔네요.”
“언제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저도 방금 왔습니다. 그나저나 소화씨 정말 화사해요. 맨날 유니폼만 입고 있어서 몰랐는데 이렇게 입으니 정말 이쁜데요.”
“원장님도 멋지게 입었는데요.”
“하하하. 당연한 것 아닌가요! 제일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바로 소화씨잖아요. 멋지게 입는다고 입었는데 괜찮나요?”
“너무 멋지세요.”
“선남선녀가 만났으니깐 우리 좋은 시간 가져요. 오늘은 무조건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다음엔 소화씨가 원하는 것을 하면 어떨까요?”
“좋아요. 그렇게 해요.”
소화와 전수호씨는 동물원을 방문해 리프트도 타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돌아다녔다. 기린이나 공작새를 볼 때는 달콤한 솜사탕을 먹으면서 구경하기도 하고 동물 인형 모자를 머리에 쓴 채 셀카도 찍었다.
“드디어 제 핸드폰으로 사진도 찍어보네요.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이 셀카 찍는 거였는데 소화씨 덕분에 꿈이 이루어졌어요. 다음엔 우리 어디서 만날까요?”
“전 한강에서 자전거 타고 싶어요. 그리고 라면도 먹고요.”
“좋죠! 소화씨랑 자전거를 탄다고 생각하니깐 너무 기대됩니다. 그때 우리 커플로 옷을 맞춰서 입고 다닐까요?”
“어떻게요?”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으면 되고 티셔츠는 무슨 색으로 입을까요?”
“가장 무난한 흰색이 좋을 것 같은데요.”
“좋습니다. 그때도 미용실 앞에서 10시에 만나는 것으로 합시다.”
그렇게 소화와 수호씨는 첫 데이트를 했고 두 번째 데이트에서는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고 라면을 먹었다.
“소화씨! 자전거 정말 잘 타네요.”
“제가 시골에서 자랐잖아요. 대중교통이라면 버스가 유일한데 하루에 2대밖에 안 다녀서 자전거를 타고 다녔어요.”
“시골이라면 어디 인가요?”
“예산요.”
“예산이라면 사과가 유명하잖아요. 사과를 많이 먹어서 소화씨가 미인인가 봐요.”
“그런 말은 수호씨한테 처음으로 듣는데요.”
“다들 사람 보는 눈들이 없네요. 이렇게 이쁜 소화씨를 몰라보다니요.”
“그런 말 들으니깐 민망해요.”
“맘에 없는 말은 안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은 또 하는 편이라서요. 이럴 줄 알고 이것을 챙겨 왔나 봅니다.”
수호씨는 가방에서 사과 2개를 꺼냈다. 그리고 하나를 소화에게 내밀었다. 소화는 수호씨가 내민 사과를 웃으면서 쳐다만 보고 선뜻 받지 않았다.
“깨끗하게 씻어 와서 그냥 먹어도 괜찮아요. 아침에 먹어보니 맛있더라고요. 예산이 고향이면 맛있는 사과만 먹었을 텐데 이 사과도 먹을 만해요. 그러니 먹어봐요.”
“감사합니다.”
소화는 받아 든 사과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멋쩍게 웃었다. 그런 소화를 보면서 수호씨가 웃으면서 말했다.
“사과에 독이라도 들었을까 봐 안 먹는 거예요. 그럼 제가 먼저 먹어보겠습니다.”
수호씨가 사과를 한입 크게 물자 아삭한 소리와 함께 상큼한 사과 향이 났다. 그래도 소화가 먹지 않고 사과를 만지작거리자 수호씨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사과와 관련하여 제가 모르는 게 있나요? 있다면 솔직하게 말해 줘요.”
“사실은 집을 떠나온 뒤로 사과를 먹어본 적이 없어요. 사과를 봐도 먹을 마음이 생기지 않아서요.”
“그럼 집을 떠나오기 전에는 사과를 먹었었나요?”
“당연하죠.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 사과예요. 집이 과수원을 하고 있기도 하고요.”
“더구나 과수원을 한다면 사과도 많이 먹었겠네요.”
“물론이죠. 과수원에는 제 사과나무도 있어요. 다른 사과나무보다 키가 작아서 이름을 ‘난쟁이들의 사과나무’라고 지었어요.”
“소화씨! 난쟁이들과 뗄 수 없는 존재가 누군지 알아요?”
“백설공주요?”
“맞아요. 그래서 소화씨가 백설공주예요. 그래야 내가 왕자가 될 수 있거든요.”
“호호호. 그렇게 되는 건가요?”
“그럼요. 그런데 왜 집을 떠나온 뒤로 사과를 안 먹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물어봐도 돼요?”
“단어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 것 같아요. 돌. 물 등 단순하게 단어 자체로 의미가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사랑. 행복 등 사람에 따라서 의미를 부여하는 기준이 다른 단어도 있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사과는 먹는 사과일 뿐인데 저한테는 의미가 다르게 와닿는 것 같아요. 그래서 좋아했던 사과를 지금은 못 먹고 있는 것 같아요.”
소화는 사과를 안 먹게 된 경위에 대하여 간략하게 말했다. 소화의 말이 끝날 때까지 진지하게 듣고 있었던 수호씨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소외되고 방치된 마음이 사과로 투사된 것 같아요. 그래서 사과를 보면 맘이 불편해서 먹을 수가 없는 것 같아요. 무엇보다 어머니와의 관계가 먼저 해결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고 소화씨 자신에게 시간을 좀 더 주고 기다려 봐요. 그러다 보면 차츰 소화씨 마음이 열릴 때가 올 겁니다. 그때 어머님을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소화씨의 마음도 풀릴 것 같아요. 그럼 예전처럼 사과를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거예요. 하루속히 소화씨가 사과를 이쁘게 깎아서 먹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제가 깎아 주는 사과를 맛있게 먹던가요. 저도 사과를 잘 깎을 수 있답니다. 아! 지금처럼 사과를 껍질째 먹어도 좋겠지만요. 그러니 앞으로 제가 도와줄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말해줘요.”
“고마워요. 제 말 듣고 실망하지는 않았어요?”
“실망이라니요? 소화씨가 대견한데요. 그런 환경 속에서도 이렇게 잘 컸잖아요. 이제부터는 제가 소화씨의 든든한 왕자가 될 겁니다. 백설공주도 사과로 인해서 어려움에 빠졌는데 왕자로 인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잖아요. 그러니 소화씨도 저를 믿고 의지하시면 됩니다.”
이날 한강에서의 데이트는 소화와 수호씨가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둘은 스티커 사진도 찍으면서 즐겁게 둘만의 시간을 보냈다. 한 달에 한 번 만나서 데이트하고 나면 중간쯤 수호씨가 미장원에 와서 머리를 하고 갔다. 미장원 사람들은 모르게 둘만의 은근한 만남이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