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실은 연일 바빴다. 그냥 오면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져서 예약은 필수가 되었다. 이날도 며칠 전에 예약한 손님이 미용실에 왔다. 예약한 손님은 연신 나오는 기침을 손으로 가리면서 말했다.
“내가 이 모양이라서 예약을 취소해야 하는데 중요한 모임이 있어서 꼭 참석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어서 왔어요. 한 달 전에 파마한 머리를 다듬고 드라이하려고 하는데 미안해서 어떻게 해요!”
“별말씀을요. 파마는 이쁘게 잘 나왔네요. 머리를 다듬고 드라이해 드리겠습니다.”
소화가 머리를 하는 중에도 그 손님은 끊임없이 기침했다. 옆에서 보조하던 숙희가 따뜻한 보리차 물을 그 손님에게 가져다주었다. 따뜻한 물을 마시고 나니 손님의 기침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문제는 그 손님이 머리를 하고 돌아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소화도 기침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이 기침이 나와서 병원에 가야만 했다. 이 상태로는 손님의 머리를 할 수 없으니 병원 가서 주사 맞고 쉬라는 원장님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소화는 미장원을 나와서 맞은편에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횡단보도를 건너면 다방 옆에 있는 ‘전수호 내과’ 병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병원 안으로 들어가니 간호사가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이 앞에 있는 미용사 선생님 아니세요?”
“안녕하세요. 저희 미장원에 자주 오시는 손님이네요.”
“이렇게 뵈니깐 반가워요. 그런데 어디가 아파서 오신 거예요?”
“목도 아프고 기침도 심하게 해서 왔어요.”
간호사는 소화의 체온을 재고 나서 의사 선생님에게 안내했다. 차트를 확인한 다음 의사 선생님은 소화가 들어오는 것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간호사가 안내해 주는 의자에 앉고 나서 의사 선생님을 본 소화는 깜짝 놀랐다. 그 의사 선생님은 소화의 단골인 그 남자 손님이었다. 소화의 얼굴을 본 의사는 아주 즐거운 듯이 말을 했다.
“우리 미용사 선생님께서 어디가 아프셔서 오셨나요?”
“손님이 이 병원 의사셨어요?”
“놀라셨나요?”
“네.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그러실 수 있어요. 목소리가 많이 잠긴 것을 보니 목감기가 흠뻑 들은 것 같은데요.”
“맞아요. 무엇보다 기침이 너무 나서 왔어요.”
“그럼 어쩌나! 입 한번 벌려 보세요.”
소화가 입을 벌리자 의사 선생님은 세밀하게 관찰하더니 소화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목이 생각보다 많이 부었네요. 이 정도면 물을 삼키는데도 힘들었을 것 같은데요. 열도 생각보다 높습니다. 주사를 한 대 맞아야 할 것 같아요. 약도 처방해 드릴 테니 시간에 맞추어서 잘 드셔야 합니다. 이번 감기는 아주 독해요. 그리고 따뜻한 물을 수시로 마시는 것도 좋아요.”
소화가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잠자코 듣고만 있자 의사 선생님이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간호사는 주사를 안 아프게 잘 놓아요.”
생각지 않은 말을 듣고 소화가 웃자, 의사 선생님도 따라서 웃었다.
“소화씨가 웃으니깐 보기 좋네요. 약은 2일 치만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2일 후에 꼭 진료받으러 오셔야 합니다. 오늘 진료비는 그때 받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집에 일찍 들어가셔서 쉬어야 합니다.”
소화는 주사를 맞고 의사 선생님이 처방해 준 약을 갖고 일찍 귀가했다. 오다가 사 온 설렁탕을 먹고 나서 약을 먹었다. 주사를 맞아서인지 감기약 때문인지 소화는 참으로 오랜만에 잠을 푹 잤다. 그래서인지 다음날부터 거뜬하게 잠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소화가 생각해도 몸이 회복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병원에 안 가도 될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이 가야만 했다. 바로 진료비를 안 냈기 때문이다.
소화는 출근하면서 병원부터 들렀다. 병원에는 그 간호사가 있어서 바로 의사한테 안내해 줬다. 그 의사는 소화를 보더니 저번보다 더 환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간호사한테 부탁한 것 준비해 달라고 말하자 간호사는 웃으면서 나갔다. 소화가 의자에 앉자마자 의사는 소화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음. 열도 없네요. 목은 어떠세요? 지금도 아프세요?”
“아뇨. 이젠 괜찮아요. 따뜻한 물을 많이 마셨더니 한결 좋아졌어요.”
“그것 참 다행이네요. 이젠 병원에 안 오셔도 됩니다. 약은 1일 치만 더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어요.”
소화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소화씨! 저한테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어떤 기회요?”
“저는 어떠세요? 제가 싫지 않다면 저랑 만나보실래요? 데이트요. 남녀 간의 이성 교제 말고 우선은 편한 친구로 만나보면 어때요? 미용실이 쉬는 날에 만나면 좋을 것 같아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당연히 그렇겠죠. 그러나 부담 가질 것 없어요. 처음엔 그냥 친구로서 만나보는 거예요. 그러다가 맘에 들면 사귀면 되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친구로 지내면 되는 거예요. 그러고 보니 제일 중요한 것을 안 물어봤네요.”
“그게 뭔데요?”
“남자 친구 있나요? 물론 저는 여자 친구가 없습니다.”
“저도 남자 친구는 없어요. 그럴 정신도 없고요.”
“그것 참 또 다행이네요. 그럼 이번 달부터 만나는 겁니다. 소화씨 미용실이 매달 말일에 쉬니깐 그때 미용실 앞에서 10시에 만나는 것으로 합시다.”
소화는 ‘아니요’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정작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의사는 간호사가 들고 온 것을 건네면서 말했다.
“이것은 종합 영양제이니깐 잘 챙겨서 먹어요. 그래야 아프지 않고 미용 일을 할 수 있는 거예요.”
소화는 얼떨결에 고맙다고 인사하고 진료비를 계산하고 병원을 나섰다. 소화는 지금까지 남자 친구를 사귄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매일매일 치열하게 살아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