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은율 Jun 25. 2024

[시] 반구대 암각화

반구대 암각화




길 따라 남겨진 흔적들

그곳에 나의 발자국을 새겨 넣는다

갈라진 틈새 사이로

가라앉은 지나간 이들의 기억이

반구대 암각화를 찾는 내게 머물러 있다

고목 등줄기에 파고든 철사줄을 생살이 덮었다

철사줄을 한몸으로 껴안은 고목에게서

날카로운 연장으로 제 몸에 문신하는

암각화의 눈매를 떠올렸다

빛이 들지 않는 강가엔 회색빛 그늘

잔잔한 수면은 암각화를 향해 흘러들어간다

해와 달이 있고 그 곁에서

흰 긴 수염고래와 범고래, 귀신고래, 향유고래가

처음부터 함께 숨 쉬던 곳

물속에 잠긴 바위에서 되살아나

이리저리 헤엄치는 한 떼의 고래들

그 물결 속에 나 누웠다

서늘한 바람과 암각화를 지키는 한 사내와

길을 잃은 듯 나를 쫓아오던 개 한마리와

거뭇한 산그림자가 쓸쓸해지던 해질 무렵

오래 기다려왔던 것이 녹아 흐트러져

내 몸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스물 둘, 스물 셋? 아마 그 사이에 쓴 시일 거에요.

이 시로 2005년에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수상한 곳은 지금은 퇴직한 아버지의 회사 문예사진 공모전이었어요.


유년 시절부터 저의 화두는 '기다림'이었습니다. 기다림은 평생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그 기다림엔 끝이 없을 지도 모르겠다고. 그래서 늘 슬픔이 차올랐습니다.


하지만, 기다림은 끝이 있었고, 이제 더 이상 슬프지 않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 자화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