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다운과 바텀업이 혼재하는 세상
텔레비전 뉴스나 신문을 보면 정부가 어떤 분야에 대대적으로 투자를 집중하여 무언가를 육성하겠다는 거창한 계획을 발표할 때가 있다. 때로는 그 발표의 자리에 대통령이 참석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자리에는 의례 몇 년간 몇천억 원 내지는 몇조 원을 투입하여 특정분야를 집중 육성하고 일자리를 몇만 개 창출하여 수출목표 몇억 불을 달성하는 등 세계 시장을 선도하겠다는 거창한 마스터플랜이 등장한다. 그 동향을 잘 모르는 일반 시민도 뉴스나 기사를 통해 익숙하게 접해왔을 내용이다.
이러한 거창한 계획은 어떻게 수립되고 발표되는지를 알아보자. 정부가 발표하는 계획들은 대부분 법에 계획 수립의 근거가 있다. 대부분의 기본계획은 5년 단위로 발표되며 그에 따라 매년 시행계획이 수립된다. 이를테면 산업통상자원부는 산업융합촉진법, 산업기술혁신촉진법 등에 따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과학기술기본법, 정보통신진흥 및 융합촉진법 등에 따라, 중소벤처기업부는 중소기업기본법, 중소기업창업지원법 등에 따라 각각의 5년 단위 기본계획을 수립한다. 이와 같이 무수히 많은 기본계획 또는 종합계획이 정부에 의해 발표된다.
특별법에 의해 추진되는 기본계획 외에도 수시로 경제, 산업, 사회 관련하여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에 대응하기 위한 다양한 종합대책 등이 수립되어 발표된다. 이를테면 몇년 전 일본이 우리나라를 상대로 소재부품장비 관련 수출규제를 했을 때 정부가 이에 대응하기 위해 발표한 일명 '소,부,장 대책'이 대표적이다. 정부가 발표하는 보도자료를 유심히 살펴보면 그런 계획이나 대책의 숫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 다양한 계획 및 대책들 사이에도 또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앞서 얘기한 나와바리법이 필요한 이유다. 이러한 계획을 수립하는 곳은 각 부처의 정책담당부서다. 언론보도를 통해 발표되는 내용을 보면 정부가 뭔가 새로운 정책을 기획해서 대대적으로 무언가를 추진하는 거 같지만, 보도자료를 액면 그대로 믿으면 곤란하다.
정부가 하는 일은 그렇게 새롭지 않다. 기존에 추진하던 정책을 교묘하게 조합하고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발표할 뿐이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발표되는 100대 국정과제니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무늬가 바뀌었을 뿐 없던 게 새로 등장하는 경우는 잘 없다. 물론 큰 틀에서 정책방향이 바뀌기는 한다. 그건 정부의 국정철학 내지는 국정운영 기조에 맞게 기존에 추진하던 정책이나 사업(주로 재정이 수반되는 정책을 사업이라 이해하면 된다)을 변경하는 경우다. 선택과 집중의 우선순위가 다소 바뀌는 수준이다. 박근혜정부의 '창조경제'나 문재인정부의 '4차 산업혁명 대응' 정책을 들여다보면 그 나물에 그 반찬이라는 걸 금세 눈치챌 수 있다.
정부는 이런 기본계획이나 중장기 대책을 수립하기 위해 통상 작업반(Working Group)을 구성한다. 보통 담당부서별로 똑똑한 서기관, 사무관들이 차출되고 외부 전문가 풀(Pool)이 가동된다. 외부 전문가들은 대부분 대학 교수나 국책연구원 박사 또는 산업계 등 현장의 전문가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들을 총괄하는 건 잘 나가는 국장급 고위공무원이다. 세부 분야별로 분과를 구성하기도 하며, 이들 분과는 소위 엘리트(?)라고 공인된 과장급 공무원들이 맡는다. 이렇게 한시적인 워킹그룹이 조직되면 먼저 거창한 출범식을 거행한다. 이 자리에서는 온갖 덕담이 오가며 앞으로 이들이 해야 할 노고를 미리 치하하고 격려한다. 저녁의 만찬은 덤이다.
워킹그룹에 참여한 공무원은 기존의 업무를 내려놓고 최종안이 확정되어 발표될 때까지 TF(Task Force) 팀 사무실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한다. 밤새는 건 기본이고 며칠씩 집에 들어가지 못하기도 한다. 호텔을 잡아놓고 낮에는 회의장에서 토론하고 기획하며 밤에는 숙소에서 마무리 작업을 하기도 한다. 이 워킹그룹에 참여한 것으로도 그들은 경력에 화려한 한 줄이 추가되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열심히 일한다. 이런 TF팀에 참여하지 못하고 본연의 업무를 수행하는 부처 공무원들은 이들을 선망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이들 TF팀에서 하는 일이란 사실은 담당부서로부터 올라오는 자료들을 분류하고 정리하고 취사선택하는 일이다. 이것이 이들이 하는 일의 실체다.
기획업무에는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존재한다. 하향식(Top-down)과 상향식(Bottom-up)이 그것이다. 가장 높은 자리의 의사결정자들이 목표와 방향을 설정해 주면 그에 따라 세부계획을 수립하는 방식이 바로 탑다운이다. 우리말로 하향식이라고 한다. 그 반대로 아래서부터 올라온 세부적인 계획들을 취합 정리하여 상위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바텀업이다. 상향식이라고도 한다. 물론 어떤 기획업무 건 일방향으로 흐를 수 없다. 양자를 적당히 조율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구체적인 세부계획 없이 목표와 방향이 수립되면 결국 action plan이 허술해진다. 반대로 큰 방향성 없이 세부계획을 먼저 수립하면 목표와 방향이 무엇인지 모르게 된다.
정부의 기획은 실질은 바텀업이지만 형식은 탑다운이다. 여기에 맹점이 있다. 이미 추진되고 있는 기존 정책을 죄다 모아놓고 이를 범주화하고 유형화해서 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한 뒤 그럴듯한 포장을 하는 것, 그것이 기획이다. 이때 외부 전문가들 중 주니어급은 원고 작성에 참여하지만 대외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중량급 전문가들은 완벽하게 들러리를 선다. 공무원들이 만들어 놓은 기획안을 추인해주는 거수기에 불과하다. 물론 이 자리에서조차 소신 발언을 하는 전문가들이 간혹 있지만, 대부분은 정부부처의 자문위원이란 타이틀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이들도 공생관계다. 딴죽을 걸 리 없다.
이런 중장기 계획 수립과 발표에 있어서 18개 행정 각부 중 가장 우월한 실력을 발휘하는 곳이 기획재정부와 산업통상자원부다. 예전에 이중 한 부처의 모 과장이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공무원이 절대 하지 않는 일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과거에 발표했던 기획안을 들춰보는 거란다. 모든 기획안은 발표와 함께 수명이 다한다는 얘기다. 나에겐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거창한 기획안을 만들어서 장관이나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더 거창한 행사를 개최하면서 그 내용을 발표한다.(이때 촌스럽게 꼭 "~~보고대회"라는 표현을 쓴다) 그러면 모든 언론사들은 이를 보도하기에 바쁘고, 담당 부서장들은 인터뷰하기에 바쁘다. 그게 끝이라는 것이다. 기획은 실행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만, 중앙부처의 공무원들에게 기획이란, 발표하여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위해 존재한다는 뜻이다. 묵묵히 자기가 담당하는 정책(사업)을 집행하는 성실한 공무원은 무능한 공무원 취급을 받는다. 과장이건 국장이건 인사이동에 따라 새로운 부서에 부임하는 순간, 제일 먼저 찾는 일이란 명분 있고 폼나는 기획 거리다. 그래야 위에 보고를 하고 인정을 받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공무원으로 임용되었을 때 장관의 관심 과제 1번이 배당되었던 적이 있다. 인력도 권한도 없었던 나는 오자마자 거창한 기획안을 만들어야 하는 중책을 떠맡았다. 1년 넘게 온갖 우여곡절 끝에 업무를 완수하였지만 그때 나의 기억은 참담하다. "내가 이러려고 공무원이 되었나"라는 자조 섞인 한숨이 나왔다. 그 대단한 과제가 어떻게 신임 사무관인 나에게 떨어졌는지를 나중에야 알았다. 그때는 정권 말이었다. 이때 모든 공무원은 소위 '복지부동'이라는 것을 한다. 정권 말에 발표되는 어떤 정책도 주목받지 못한다. 따라서 아무도 그 일을 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1년 넘게 그 일로 골머리를 썩혔지만 결과를 발표하고 6개월이 안되어 정부가 바뀌었다.
정부가 발표하는 계획들의 실체를 언론이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히 그 내용을 보도하는 것은 언론의 생리 인지도 모른다. 부처 출입기자에게는 그만한 기사거리가 없는 것이다. 정부에서는 수많은 기본계획과 시행계획, 종합대책, 중장기 발전방안 등 온갖 기획안이 난무하지만 이것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 나는 지금도 의문이다. 모든 정부 계획의 마지막에는 향후 추진일정이 나온다. 이 계획이 어떻게 실행되는지 모니터링하겠다는 계획표다. 그런데 난 이것이 제대로 지켜지는 걸 본 적이 없다. 물론 매년 시행계획을 수립하면서 전년도 추진실적을 조사하지만 지극히 형식적이다. 결국 내가 수립한 계획은 6개월 만에 폐기되었다.
당시에 내가 담당하게 된 정책과제는 약 3년 전에 이미 타 부처에서 수립했던 것과 유사했다. 그런데 그 계획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장관이 새롭게 다시 수립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나는 해당 부처의 담당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돌려 당시 발표했던 계획의 세부과제별로 현재 추진상태를 물어보았다. 그들의 답은 한결 같았다.
"요즘 누가 그걸 챙겨요...."
난 이상한 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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