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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Apr 20. 2024

조급하고 인색한 사람

느긋하고 너그러워지기

사람을 만나는 일에 쉬이 피로감을 느끼는 건 내향적 성격을 가진 이들의 공통점이다. 편하지 않은 사람과 어색하지 않게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강박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대화가 단절되어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거나 무심코 던진 말에 상대가 불편한 기색을 보이면 내향인들은 당황한다. 그 불편하고 어색한 분위기가 지속되는 걸 참기 어려워 무슨 말이라도 던져야 한다는 의무감에 때로 수다쟁이로 오해받기도 한다.


그렇게 피로가 가중되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들은 한순간에 긴장이 풀어져 탈진한다. 이런 인간관계에서 오는 고단함을 모르는 이들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무엇이 이들을 불편하게 하였는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반응하기 일쑤다. 상대를 배려하려는 감정이 앞서는 이들,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는 걸 참기 어려워하는 이들에겐 충분히 공감 가는 일들이 그런 것에 무심한 이들에겐 생소하고 의아하게 느껴질 뿐이다.


특히 관계에서 발생하는 소모적인 에너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과 대화를 하게 될 때에는 내향인들의 피로감은 한계에 이른다. 각고의 노력으로 그들을 상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벼운 말로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무심코 내뱉는 말들에 담긴 맥락과 행간을 조금 과잉 해석(?)하면 굉장히 무례하거나 폭력적인 언어로 재조합되곤 한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는 항변을 하고 싶겠지만 그렇게 해석될 여지는 충분했다.


이렇게 관계에서 오는 피로감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불편한 관계를 정리하는 것뿐이다. 부득이하게 피할 수 없는 것을 빼고 굳이 불필요한 관계를 맺지 않는 것… 요즈음 대세가 되고 있는 혼밥, 혼술문화가 그 결과물이라고 단언할 수 없지만 나는 꽤 오래전부터 그렇게 단절을 추구해 왔다. 그리고 천성적으로 이런 성향을 타고난 덕에 사람들에게 조급하고 인색한 사람으로 비치게 되었다. 내면의 순수함과 타인에 대한 깊은 배려심은 감추어지고 타인과 맺는 관계를 극도로 줄이려는 모습만 도드라진 것이다.


나는 예의 바르지만 경계가 느껴지는 사람이었고 끈끈한 관계를 피하기 위해 꽤 선제적으로 선을 그어 버리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쉽게 말해 시간도 곁도 주지 않는 조급하고 인색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조금 예민하고 깐깐한 사람일 거라는 나의 생각은 틀렸다. 나는 쉰 즈음이 될 무렵 아주 고약한 사람이었음을 시인한다. 부끄럽지만 이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우울증과 불안장애로 벌써 세 번째 해를 넘기고 있는 내 아이를 간병하면서 이런 나의 고약한 성격이 얼마나 부족한 것이었는지 나는 절감하고 있다.


우울증을 겪는 청소년에게 상식적이고 성숙한 사고와 반응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것은 일반적인 인간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아이는 착하고 생각이 깊지만 주변을 배려할 만큼 아이의 병이 가볍지 않았다. 그런 아이를 상대하면서 내가 얼마나 조급하고 인색한 사람이었는지를 나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나는 똑똑하고 합리적인 사람이 아니었으며 우울증 간병에 그런 항목은 개나 줘버릴 만큼 쓸모가 없었다.


나는 느긋하고 너그러운 사람이어야 했다. 어릴 적 따돌림과 괴롭힘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고등학생 남자아이의 부모에게 필요한 것은 그 두 가지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공감하기 위해 공부하고 소통했지만 오랜 간병에서 내가 터득한 것은 그뿐이었다. 아이의 상황을 안타까워하는 깊은 애정이 깔려 있다면 그다음에 필요한 것은 느긋한 심성과 너그러움 뿐이었다.


1년의 간병휴직을 포함하여 온몸으로 아이를 돌보고 있는 내게 놀라움을 표현하는 이들을 종종 만나왔지만 그들이 건네는 어떤 찬사나 격려의 말도 나에겐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조급하고 인색했으며 그 덕에 나도 아이도 다른 가족도 힘들게 만들곤 했다. 나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아이 걱정을 했으며 그 심사숙고의 결과를 지체 없이 시도하며 아이를 보호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아이를 온전히 돌보기엔 부족한 게 있었다.


나이 오십을 넘기면서 느긋함과 너그러움을 갖지 못하였다면 당신에게 어떤 시련이 닥쳐도 그것은 크나 큰 재앙이 될 수밖에 없다. “오십에 읽는 주역”이란 책을 접하고야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오십에 닥치는 위기가 당신의 팔자를 꼬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쌓아온 성정과 인품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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