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낙산우공 Jul 21. 2024

그지 같은 vs. 거지 같은

(2012.12.04)

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단어 '그지'는 '거지'와 확연히 다른 의미를 내포한다. 거지는 '물질적으로 가진 게 없어 남에게 빌어먹는 자'를 뜻한다. 다시 말해 '거지'의 요건은 무일푼일 것과 남에게 빈대 붙는 생활습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지'는 '거지'라는 말에서 파생된 불량한 비속어이긴 하지만 좀 다르다.

 

그지는 용례가 넓다. 사람에게도 사물에게도 그리고 상황에 대한 비유에서도 공히 사용된다. 이를 테면 그지 같은 놈, 그지 같은 물건, 그지 같은 회사, 그지 같은 일, 그지 같은 상황 등등 모든 비정상적이고 몰상식한 경우에 폭넓게 쓰인다. 참 쓰임이 많은 이유도 있겠으나 유난히 요즘 자주 들린다. 개그콘서트에 나오는 자칭 '꽃거지'에게 정상인(?)으로 보이는 여자는 주로 '아, 그지 같아', '뭐 이런 그지 같은 게~' 라며 '그지'를 입에 달고 산다.

 

거지 앞에서 '그지' 운운하는 상황이 웃음을 일으키지만, 정말 그지 같은 것은 상대가 거지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던지는 말 같지 않은 말, 뻔뻔한 행동, 억지스러운 주장이 상대로 하여금 짜증과 분노를 일으킨 탓이다.

 

그지라는 말이 사용되는 경우는 분명히 '거지'는 아닌데 '거지'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상황에서 튀어나온다.  '거지'는 아닌데 '거지'같은 것은 무엇일까? 앞서 말했듯이 '거지'는 무일푼인데 빌붙는 자다. '그지'는 무일푼이 아닌데 빌붙는 거다. 거지가 빌붙으면 다소 뻔뻔하고 몰상식해도 양해할 수 있다. 불쌍한 처지가 그들의 과격하고 무식한 행동에서 오는 불쾌감을 상쇄한다.

 

안타깝게도 '그지'는 '거지'가 아니기 때문에, 불쌍한 형편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상대보다 더 여유롭고 풍족하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은 이해의 수준을 벗어나는 것이다. '있는 놈이 더하는 세상'이 바로 '그지'같은 것이다. 더 우월한 지위에 있는 자가 열등한 자를 등쳐먹고 빌어먹고 쪽쪽 빨아먹는 일. 그것이 '그지'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세상이 거지 같아서도 안되지만, '그지'같아서는 정말로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장폐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