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 없는 컴플레인은 무용할 뿐
억울하거나 잘못된 일, 딱한 사정을 호소하는 것을 '하소연'이라고 한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답답하거나 내 의지와 관계없이 주변의 부당한 방해나 장애로 인해 일이 꼬여버렸을 때 우리는 그 억울함, 분함, 서운함 등을 풀기 위해 하소연할 곳을 찾는다. 이 단어가 유독 자주 떠올랐던 이유는 내가 최근에 그런 곳을 간절히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만을 길게 늘어놓으며 하소연하는 말을 '넋두리'라고 한다. 어감으로도 하소연에 비해 강하고 자극적이라는 느낌이 있었는데 뜻을 들여다보니 역시나 '불만'에 방점이 찍혀있는 단어였다. 즉, 하소연은 긍정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단어였지만 넋두리는 처음부터 부정적인 관점을 내포하고 있는 표현이었다. 그래서 나는 넋두리 대신에 하소연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을 것이다. 내 입장을 넋두리라고 말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내 상태가 하소연을 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넋두리를 하려는 것일까 좀 더 객관적으로 판단해 볼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하소연할 곳을 찾는 이유는 억울하거나 딱한 사정을 호소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의 호소가 잘하면 문제를 해결하는 단초가 될 수 있거나 최소한 답답한 마음이라도 풀어볼 수 있을 때 우리는 하소연을 한다. 정말 괴로울 때는 내 이야기를 누군가 들어만 주어도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내게 위로가 필요했던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내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줄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 조금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내 딱한 사정을 진득하게 들어줄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정신적으로 혹은 물질적으로 모두 그랬다. 그들은 내가 어떤 하소연을 하든 간에 자기식대로 해석하고 온갖 충고의 말을 늘어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하소연에는 조언이 아니라 공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망각한다.
그 진실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나의 호소는 모두 넋두리로 들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50년 넘는 세월을 살면서 내 하소연에 공감과 위로를 전할 사람 한 명 얻지 못했다면 분명 실패한 인생이다. 하소연을 하고 싶다면 이미 무엇엔가 쓰디쓴 실패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뜻인데 그 하소연을 들어줄 사람조차 없으니 나의 실패에는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다.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아봐야 공허하다. 내 불평과 불만의 원인은 나로부터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나는 컴플레인을 제기할 자격이 없었다. 내 인생이 이 모양 이 꼴인 이유는 나로 인한 것이다. 우리가 명상을 하고 기도를 하고 종교를 갖거나 주문을 외우는 이유가 다 여기에 있었다.
옴 마 니 파드 메 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