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을 졸업하고 큰 꿈을 꾸고 있었다. 방송국 PD가 되자. 그런데 필기시험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채널 A 필기 시험에서 트랜스젠더와 함께 하는 예능 프로그램 기획안을 제출했으니 될 리가 있나. 하지만 서른이란 나이 때문에 나의 도전이 무작정 아름다울 수만은 없었다.
지도 교수가 나한테 괜찮은 자리가 있는데 일해보지 않겠냐면서 권유했다. 형식적으로는 포럼이었지만 대통령 후보 R의 선거 캠프였다. R이 당선되면 공기업 등 취업이 보장된다고 했다. 그러기까지 딱, 1년이 필요했다. 어차피 내 능력으로는 글렀으니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R 선거 캠프에 나가기로 했다.
내가 맡은 일은 각 분야 전문가들의 정책 연구 보조였다. (말이 연구 보조이지, 식당 예약, 엑셀 작업, 명찰 만들기 등) 하지만 출근을 하면 할수록 여성인 R을 떠받들고는 있으나 정작 여성을 위한 선거 캠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여’직원들은 나를 포함해 총 네 명이었다. 우리는 사무실 청소와 손님 응대, 문서 작성,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각각 부동산학 박사, 디자인학 석사, 문예창작학 석사, IVY리그 중 하나인 콜롬비아 대학을 졸업했지만 전문 분야의 지식이나 관련 경력 따위는 필요 없었다. 맥심 커피를 얼마나 맛있게 타는지, 식사가 끝나면 계산을 얼마나 빨리 하는지, 꼰대들이 거슬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얼마나 예쁘게 하고 다니는 지가 중요했다. 치마 길이가 무릎 위를 올라오면 안 됐다. 구두를 신고 복도를 뿐사뿐 걸어야 했다. 행여나 구두 굽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나면 생각이 부족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나는 컴퓨터 작업을 오래 해서 한번은 안경을 쓰고 출근을 했다. 그런데 상임이사가 단번에 내 안경을 지적했다. “안경 쓰고 다니지 마라.” 나는 ‘여’팀장에게 상임이사의 말을 전하며 투덜거렸다. ‘여’팀장은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큰마음 먹고 갈색으로 염색했는데 상임이사가 당장 검정색으로 바꾸라는 거야. 어쩌겠어. 검정색으로 바로 염색했지.”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캠프는 무척 바빠졌다. 낯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럴싸한 직책을 맡아서 나처럼 선거가 끝나면 한 자리 받으려는 속셈들이었다. 책상과 책상 사이를 책상이 비집고 들어왔다. 사무실에 상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맥심 커피를 타야 했다. 50잔까지 세다가 포기한 적도 있다. 나는 양손으로 커피를 타는 기술까지 습득했다. 이름 대신 “저기요.”, “아가씨.”로 불리는 건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점심시간이었다. 사무실을 비울 수 없으니 ‘여’직원 두 명이 교대로 점심을 먹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가 집 지키는 개인가요?” 나는 Y와 함께 자유롭게 점심을 먹으러 다녔다.
그러던 중 선거 캠프 대빵인 모 의원이 격려 차 사무실을 방문했다. 직원들 모두 회의실로 모이라는 공지가 있었다. 회의실로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상임이사가 오른쪽 팔을 쭉 뻗으며 우리를 막았다. “여직원들은 안 돼!” 에라이, 이 XX야. ‘여’직원들은 도대체 왜 안 되는 거냐. 우리는 순식간에 차를 준비해서 회의실에 대령한 후 사무실 구석에 모여 있었다. 회의실에서 요란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얼마 후 모 의원이 회의실을 나와 사무실에 들어왔다. “너희는 왜 안 왔어?” 모 의원 옆에서 상임이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얘가 여직원들은 오지 말라고 했어요.” 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대통령 선거가 끝날 때까지 김밥과 빵, 떡을 부지런히 날랐다. 어느새 내 별명은 ‘떡순이’와 ‘빵순이’가 되었다. 전 국회의원 B가 나만 보면 사랑스럽게 ‘떡순이’, ‘빵순이’라고 불렀는데 정말 기분이 더러웠다. ‘여’직원 중 한 명이 버티다 못해 R선거 캠프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상임이사는 네가 떠난다니, 공단 취업을 들먹이며 만류를 했지만 ‘여’직원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여’직원을 위한 송별회가 있었다. 나는 노래방에서 술에 취한 채 서로 비비적거리는 아저씨와 아줌마를 보면서 저렇게 늙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드디어 대통령 선거를 하는 날이었다. 나는 기표소에 들어가서 다른 당 후보를 쾅, 찍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R이 당선이 되었다. 물론 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침 일곱 시 출근 밤 열 시 퇴근, 주7일 근무 등등 1년 동안 개고생했으니 이제는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세 후 135만 원의 월급으로 방세 내기도 빠듯했고. 나는 R 선거 캠프를 나왔다. 주제를 넘는 요행을 바랐던 나와, 여성은 '여성'다워야 한다고 지나치게 강요했던 비이성적이었던 그들만의 세계에 욕을 퍼부으면서.
나는 지금도 맥심 커피를 끝내주게 탄다. 나의 몇 안 되는 재능 중 하나라는 것이 웃프기만 하다.